때는 바야흐로 1605년, 페르시아가 샤 루흐의 통치를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인 나데르 샤 시절, 모스크바의 차가타이 침공에 휘말렸다가 승점 15점인 상태에서 국고의 절반을 내어주고 겨우 화평을 맺은 기억이 생생한 샤 루흐는, 모스크바와 충돌하는 대신, 티무르-카잔동맹과 카잔 뒤에 있는 오스만제국을 생각하며, 어떻게하면 오스만의 개입없이 티무르의 마지막 영토인 사마르칸드를 빼앗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샤 루흐에게 어느날 길보가 날아들었으니...
저 저주받을 크렘린의 일파가 영국과 동군연합으로 묶여버렸다는 소식.
이는 곧 그루지야와의 관계단절을 의미하며, 조부의 실패를 만회할 기회가 왔다는 이야기죠.
다음해 2월, 중앙아시아에 전개중이던 모든 부대를 그루지야국경으로 이동시킨 뒤, 샤 루흐는 그루지야에게 망할 때가 왔다고 알려줍니다.
적의 동맹은 리투아니아 하나, 아마도 리투아니아가 리더가 되어 그 동맹국들이 참전하겠지만, 모스크바만 없으면 승리는 확정적이죠.
각 부대가 그루지야로 진격, 오늘도 역시 크림한국을 가로질러 리투아니아의 원군이 왔으나, 질과 양 모두에서 페르시아군의 상대가 안 되기에, 전황은 페르시아의 유리.
하지만 이때 덴마크와 프랑스가 리투아니아의 동맹으로 참전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덴마크의 육군은 비루하고, 프랑스는 너무나 멀어서 통행권 수십장을 따지 않는 한 대군으로 오기는 힘드니 무시.
전쟁발발부터 2년 뒤, 그루지야전역이 페르시아와 그 속국(히쟈즈, 카시미르)의 지배하에 놓입니다.
이제 적의 전군이 동시에 그루지야에 나타나지 않는 한, 전황을 뒤집기는 불가능합니다.
이 사이에 스샷을 안 찍어둔 일이 벌어졌으니, 프랑스군 3천이 페르시아군의 전군이 그루지야쪽에 집결된 틈을 타서 바레인에 상륙.
정규군을 생산하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호르무즈에서 용병 5천을 뽑은 뒤 바레인으로 실어날라서 프랑스군을 괴멸시켰습니다.
그 뒤 이번에는 덴마크군 9천이 상륙하나, 사전에 기미를 알아채고(해안봉쇄가 되버리죠) 용병 2천을 추가고용, 격퇴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1년 뒤, 이번에는 프랑스가 나름 대부대를 바레인에 상륙시키나, 페르시아군의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규율과 사기에 있어 페르시아가 압도적으로 뛰어나고, 더구나 프랑스군의 편성은 기병이 많은 병맛편성.
다시 1년 뒤, 3천~1만 정도의 부대로 페르시아의 후방을 노려봐야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연합군은 그루지야에서 정면승부에 나섭니다.
리투아니아->덴마크->리투아니아의 순으로 2만 이상의 병력이 왔는데, 모두 다 격파당했고, 심지어 리투아니아 국왕 비타우타스 4세가 직접 지휘한 부대는 전멸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전멸이라고 해도 왕은 도망쳐버렸습니다만.
스샷은 덴마크와의 전투로, 병력의 질과 양에서 뒤질 뿐만 아니라, 장군의 능력도 뒤집니다.
덴마크 장군인 아돌프 하르덴베르크의 능력은 3212인데, 상대하는 페르시아의 장군, 나데르 미르자 샤히는 3423입니다.
더구나 페르시아군은 2열에 막대한 규모의 포병대를 두고 있어 덴마크군의 피해는 막심합니다.
승리! 리투아니아와 덴마크의 불나방작전 덕분에 승점이 빨리 쌓아져 조기종전이 가능했습니다.
원래는 이메레티도 할양받으려고 했으나, 그러려면 승점이 80을 넘겨야해서 체르케스의 할양, 크림한국에의 쿠반의 반환, 리투아니아와 그루지야의 관계단절선에서 마무리지었습니다.
현재 병력은 그루지야국경에 모두 배치되어있고, 이메레티에 대한 클레임도 가지고 있기에 조약기간이 끝나는 순간 그루지야는 갈려나갈 것입니다.
EU3처럼 카파와 압하지아 사이가 통행가능이었다면 그루지야의 합병 후 서양화가 가능했을텐데, EU4에서는 통행불가능이라 그게 좀 아쉽네요.
뭐 어쨌든 이리하여 페르시아는 흑해로의 출구를 마련하기 직전에 이르렀고, 이로써 서양화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오스만이 그루지야침공하면 좀 답이 없는데 과연 카프카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야망에 오스만은 어떻게 대처할까요.
첫댓글 외교관계에 여유가 있다면 독립보장 걸어두는게 좋죠.
다만 오스만과는 불구 대척의 원수이므로 어떻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