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별세
아침 수영 마치고 핸드폰을 열었다.
‘엄마! 위급함. 병원으로 오세요.’ 아내의 문자였다.
그대로 요양병원으로 갔다.
99세의 장모님이 편하게 누워 계셨다.
‘혈액 검사 들어갔어요. 좀 나아지면 X레이 촬영할 겁니다.’
인생 끝자락이 아쉬웠다.
막내 처제가 손발을 만지며 어쩔 줄 몰랐다.
위로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다.
어머니 병상 지키길 바라고 그날 요양병원 예배 준비 위해 나섰다.
위중함을 들은 자녀 손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시간 형편을 살폈다.
주사 흔적이 늘었다.
빈혈 수치가 떨어져 다음날 수혈할 계획이었다.
야간에 둘째 딸이 자리를 지키려 나섰다.
간호 실장이 위급 상황 아니라고 돌려보냈다.
비좁은 우리 집은 처남, 처제 식구로 사람 꽃이 피었다.
잠자리를 펴고 누울 때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어르신, 산소 포화도가 떨어집니다.
운명하실 것 같네요. 30분 내로 오세요.’
깜깜한 밤 별똥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서둘렀다.
장모님 호흡은 짚불처럼 꺼졌다.
가슴과 손의 온기가 부서졌다.
1시 25! 밤배처럼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딸들이 오열했다.
막내가 도착하자 큰 처남이 임종 예배를 드렸다.
‘7남매 어머니요 열일곱 손주의 잠자리 이불 당겨 준 할머니!
여러 면에서 행복한 별세였다!’
조목조목 전한 말씀이 감동이라 본받고 싶었다.
일정을 논하고 근처 장례식장으로 모셨다.
예배 집례는 담임 목사의 몫이었다.
다음 날, 입관 마치고 예배 자리에 섰다.
‘권사님이 구십구 성상(星霜) 보내며
더불어 살아도 나그네 인생길이 짧다.
베틀의 북처럼 빠르게 지난다.
잘 섬겼지만 부족함과 상실의 아픔이 크다.
초근목피 시절, 몸을 으깨 듯 일하신 어머니요,
새벽마다 자녀 손 축복하신 기도의 용사였다.
약한 치매 증상에 자식 기다리며 폰을 들고 계셨다.
믿음 생활 방학 중인 막내아들의 주일 헌금 챙기신 분,
날마다 쥐가 소금 먹듯 한자씩 짚어가며 성경을 읽으셨다.
암송한 찬송 가사도 많았다.
믿음의 못자리가 1905년 세운 신황교회’였다.
그 배경을 밝혔다.
‘복음 전달자 박희원은 1866년 고흥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형이 죽어 세 동생과 경상도로 향하였다.
도중에 진상면 곰 골을 소개받아 들어갔다.
그곳에 정착하여 아들 박동현과 딸을 낳았다.
부인이 일찍 별 되어 김 씨 여인과 재혼, 30년을 살았다.
자식을 낳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936년(70세) 아들 딸린 과부 김봉기(40세)와 혼인했다.
3년 만에 박정식 아들을 얻었다.
그가 순천제일교회 목사님으로 딸 셋 둔 통합 교단 총회장이었다.
본처 아들 박동현은 정백순과 결혼, 3남매(갑휴, 복달, 복례)를 낳았다.
박희원 손자 갑휴는 정분심과 2남 5녀의 복된 가정을 이뤘다.
큰 처남 박재열은 세 딸을 둔 목회자였다.
장모님은 목사 사위 둘을 봤다.
지난해 막내 사위 아들 배드로가 목사 안수 받았다.
그에게 5년째 자녀가 없어 어디로 흐를지 궁금할 뿐이다.’
(박희원, 박정식, 박재열, 배드로..)
그 시대 곰골 웅동에 복음이 들어간 일은 신비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살해 후 인천으로 도주한 일본인을 죽인 한태원!
수배령이 내리자 숨을 곳을 찾았다.
웅동에 낯선 자가 거주한다는 풍문이 광주까지 돌았다.
검사국 관리가 수배자 한태원 체포하려 왔지만 허사였다.
돌아가는 길에 주막에서 노름꾼 박희원, 서병용, 장기용을 만났다.
그들을 한심하게 여겨 한마디 던졌다.
난 안 믿지만 광주 양림동 가서 야소교인들을 만나 보라.
그 도를 믿으면 노름하지 않고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오웬(오기원) 선교사와 책방에서 일한 조성학을 소개했다.
그 말이 씨앗 되었다.
40세 동갑 노름꾼 셋이 짚신을 짊어지고 사흘 길을 걸었다.
오웬 선교사와 조성학을 만나 복음을 접하고 돌아왔다.
처음 노름꾼들 모아 시작한 곳이 100주년 기념관 들어선 웅동이었다.
장소가 협소하고 골이 깊어 불편하였다.
증조부가 신황리에 한옥 8칸 목조건물을 세워 예배 처소를 옮겼다.
그곳이 역사적인 신황교회다.
집터 2백 평은 선교사님이 증조부 환갑 때 선물한 자리였다.
풍광 기가 막힌다.
신황교회는 한때 각처에서 모여든 교인들이 7백 명이었다.
한 번에 120명 세례 받은 기록이 남았다.
총각 노름꾼 박노화는 늦게 예수 믿고 회개하여 장로로 섬겼다.
증조부는 순천노회 초대 장로였다.
순회 전도자로 10개 교회
(신황, 웅동, 광동, 진광, 옥곡, 사곡, 골약, 대방동..)를 개척하셨다.
그가 전한 복음 듣고 장모님이 예수 믿었다.
박 씨 가문에 시집가는 소원을 이루었다.
민들레 홀씨 흩날리듯 믿음의 바람이 일었다.’
나무와 사람의 크기는 누워 봐야 안다는 속담이 맞았다.
그 향기는 울다 간 마른 풀꽃 내음 같았다.
장모님은 믿음의 대장부였다.
8년 전 큰 딸 보내고 가슴에 묻지 않았다.
천국 소망하며 하나님 아버지가 데려가시길 기도하셨다.
빈손 들고 잠자듯 떠나길 바라는 응답이었다.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께서 속한 자들 남기심이 많았다.
문상하며 절한 자, 술 찾는 이가 없었다.
주안에서 죽는 자의 복이었다.
유골함 앞세워 고향 산천을 찾았다.
가지 끝이 숨 쉬는 산등성이에서 하관 예배를 드렸다.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만 드러냈다.
‘힘든 세상 끝이 있다. 죄로 말미암아 죽으면 끝없는 고통이다.
예수 잘 믿고 따르자! 본받고 전하자! 예수로 충만하고 승리하자!’
30여 명의 울음이 차오를 때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등골이 젖도록 절창하며 외쳤다.
2025. 2. 16.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