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를 그으며
시 김명기
다녀가신 지 이천 년이 되도록 변한 게 없습니다 티브
이를 켜면 핏기 없는 건기의 누 새끼처럼 굶주린 아이들
이 뒤틀린 팔다리로 누워 있습니다 잔반통엔 버려진 음
식이 쌓일 대로 쌓이지만 아이들을 살릴 물고기와 보리
떡은 턱없이 모자랍니다 봉사가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려면 큰 병원에 전 재산을 다 밀어줘도 불가능합
니다
젖과 꿀이 흐를 거라던 가나안은 혈흔이 낭자한 채 피
를 머금은 이들이 원수가 되어 적개심을 키우며 끝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모세가 아니라 모세의 아버지가 온다
고 한들,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늪에서 노
예나 다름없이 굴종을 강요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매 맞는 여성과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구할 수 없습니다
수천수만의 성도를 끌어모은 교회는 세 치 혀로 지키
지도 않는 고린도전서를 제 것처럼 팔아 땅을 사고 부를
불려 대물림합니다 주일이면 교회 앞 도로를 주차장으로
로 만들어 버리면서도 세금조차 내길 거부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란 말 따위로 우리를 달래시
려면 그냥 이대로 끝나게 하옵소서 죄를 사하기도 전에
켜켜이 쌓이는 죄업 속에서도 부활을 믿으며 기다리다
지쳐 죽어 간 이들이 차고도 넘칩니다 믿기지 않겠으나
당신의 이름은 이곳저곳으로 팔려 다닌 지 이미 오래되
었습니다
한 번도 약속하신 곳으로 부름을 받은 적이 없는 우
리는 그곳의 안락과 평화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
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혹여 그 안락과 평화에 빠져 다시
돌아올 거란 약속을 못 지키는 것이라면 이곳이 분명 지
옥이라는 반증이겠지요
며칠째 비가 내립니다 비교적 세상을 공평하게 적시
는 비마저도 누군가의 굴욕을 빨아 내리는 게 아닌가 의
심이 들 정도입니다 불신조차 믿음의 말씀으로 둔갑한
지상의 한 귀퉁이에서 그래도 당신의 아버지의 이름으
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제기랄!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 사람 시인선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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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감상방에 올려진 시인들의 시를 읽는 독자로서 얼마 전 김명기 시인의
시가 소개되어 그 시를 읽다가 그의 시집을 사서 읽어 보았다.
우선은 그 시인의 이력이 놀라웠고 시집을 펼치면서 시를 읊조리는
편안함의 이면에 사물을 관찰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안에 놀라웠다.
시인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로구나, '시인은 실없는 짓 하는 사람이래요'
시인은 외려 시를 쓰는 행위를 실없다며 자세를 낮추어 표현하였지만
글쎄, 실없는 짓을 하는 시인이야말로 이 시대의 없어서는 안 될
바로미터는 아닐까?
시인이야말로 시대의 깨어있는 양심이 아니겠는가?
좋은 시란 의식을 고양하는 시이다. 주변인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일상에 시인의 시는 삶의 각성을 깨우쳐주는 죽비와도 같다.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 시는 주문을 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