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 어머니는 이내 나를 알아봤지만, 그리 반가와하는 목소리는 아니었
다. 은미에 대해 묻자,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 끝에 뭔가 결심을 한 듯이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고 은미를 바꾸어 주었다.
은미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 맞지요?
저 은미예요...
고마워요, 전화 주셔서...
선생님 무서워 죽겠어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엄마와 아빤 내말 안 믿어요...
선생님 무서워요!
이제 내 차례같아요..."
나는 은미의 얘기를 듣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통 이해할 수 조차 없었다.
"은미야, 무슨 얘기하는지 잘 모르겠거든...
좀 차근차근 얘기해주렴...
한심한 생각마저 들기시작했다.
지금 일분일초가 급한데, 말도 안되는 얘기를 듣고 시간을 낭비해야 하
다니... 그래도 좋은 일 한다는 셈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은미의 집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내가 아는 은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은미에 대한 첫인상은 예쁘고 얌전한 아이였다.
영어, 수학이 남들보다 좀 떨어졌지만, 음악에는 소질이 있어 첼로를 배
우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영,수를 짬짬히 봐주게 된 것이었다.
처음봤을 때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농담을 던졌을 때 귀밑까지 빨개
지던 모습이 생각났다. 부끄럼도 잘 탔지만, 숙제는 밤을 세면서도 할
정도로 내말은 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던 아이가 이렇게 되다니....
다른 애들은 다 죽었다는 것은 무슨 얘기며, 뭐가 무섭자는 것이며, 언
제 당할 지 모른다는 등 통 짐작할 수 없는 얘기만 지껄이고...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은미도 입시 압박감을 못견뎌 정신이 좀 이상하게 된 것일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하고, 애써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은미의 집에 도착했다.
어떻게 은미를 대할까 잠시 초인종을 누르기전에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그냥 부딛혀 보기로 하고 한숨을 쉬고 초인종을 눌렀다.
은미가 문을 열어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어머니께서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은미 어머니는 보기에도 눈에 띨 정도로 뭔가에 시달린 것 같은 심난한
표정이었다. 글자 그대로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어서와요..
요즘 바쁠텐데, 우리 은미의 말만 듣고 이렇게 와서 고마워요..
은미는 요즘 통 잠을 못자서, 제가 진정제를 놓고 좀 재웠어요.
선생님 오면 깨운다고 하고 재웠어요...
그렇지 않으려면 잠을 잘 생각을 하지 않아서요..."
은미 어머니는 나를 응접실로 안내하고 커피를 내왔다.
나는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호기심에 대해 해답을 알기 위해 얘기
를 꺼냈다.
"은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까 전화로 들으니 보통일은 아닌 것 같던데...
하지만 무슨 일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요..."
은미 어머니는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고 얘기를 꺼냈다.
방에서 자는 은미가 깰까봐 걱정인지 조용조용 얘기를 시작했다.
"요즘 걱정이예요..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에 저러고 있으니...
몸도 상할까봐도 걱정이예요..
하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니까요..
가뜩이나 한참 사춘기일 때 그런일을 당했으니...
휴....
얼마전에 신문에도 났었는데...
여고생 동반 자살이요..
2명이 손을 잡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일이 있었잖아요..
바로 그 2명이 은미와 가장 친한 애들이었어요.
그것도 큰 충격일텐데, 그 자살한 애들이 바로 은미앞에서 뛰어내렸어
요.. 은미로써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겠죠..
그런데 그 이후에 우리 은미가 좀 이상해졌어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느등.. 그 애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느등...
자기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등... 이상한 사진이 있다는등...
문득문득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병원에 가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았지만, 정상이라는 거예요.
단지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에 신경쇠약 증상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고 했고...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은미는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이였어요.
무언가에 대해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그러더니 선생님에게까지 연락을 했네요.."
그 동반 자살 사건은 나도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이제 좀 이해가
가는 듯 했다. 친한 친구들의 자살을 목격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좀 의심가는 점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은미 친구들은 왜 그 심한 일을 택했죠?
신문에는 그냥 단순한
기들 성적이나 가정 형편에 대한 비관자살이
라고 나왔는데...."
"그건 좀 이상하긴 해요..
은미와 워낙 친한 친구들이라, 저도 그 애들에 대해서 잘 아는데요..
둘다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부모님들도 훌륭하고 자상하신 분들이고...
더구나 그 애들은 공부도 잘하는 애들이었요..
모르죠, 저도 모르는 사정이 있었는지도..
어떻게 보면 자기 복에 겨워 그런 험한 일을 저질렀느지도 모르죠.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아니면 은미가 다니는 학교가 문제가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지난 달에도 3명의 여학생이 한강다리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했거든요..
휴... 그나저나 우리 은미 걱정이예요...."
그때 신경질적이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예요! 선생님!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고 얘기한 거예요!"
은미였다.
어느새 잠이 깨서 응접실로 나왔는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은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굴은 초췌해보였지만, 한층 예뻐졌다.
키도 많이 자랐고 아이티를 벗고 이제 어엿한 고등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예쁜 눈동자에는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은미야 깼니..
더 자지... 내가 어머니께 말씀드려 더 재우라고 했는데...
여하튼 오랜만이다..
몰라 보게 예뻐졌는데..."
은미는 나를 보고 인사할 생각도 않하도, 다짜고짜 내게 작은 수첩을 내
밀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얘기했다.
"선생님,
이걸보시면 선생님은 절 믿으실거예요...
도와주실거죠?
자 이것하고 이것 보세요..."
은미가 내민 것은 수첩모양의 엘범이었다.
펼쳐보니 거기에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스티커 사진 자판기에서 찍은
사진들이 수십장 붙어있었다. 나도 얼마전에 지영이 등쌀에 찍어서 삐삐
에다 붙여놓은 적이 있어서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많은 사진 중에 은미가 보라고 한 것은 두장의 사진이었다.
두 사진 모두 4명씩 찍었는데, 여고생들답게 한껏 웃으면서 사진을 찍혔
다. 그 중 한 장에는 은미의 얼굴도 보였다.
그런데 그 두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것이
느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같은 얼굴이 하나 양쪽 사진에 똑같이 찍혀있었다.
나머지 6명은 다 다른 애들이었는데, 이 아이 하나만이 양쪽사진에 다
나와있었다. 두 사진 모두 나머지 3명은 밝게 웃고 있는데, 그 애만 음
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비록 입모양은 웃고 있었지만 뭔가 비웃는 듯
한 모습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기분 나쁘고 이유모르게 겁이 나는 얼굴
이었다.
그러고 있는데 은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나는 큰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잘 보시면 알겠지만.... 선생님,
이 두 사진에는 두 개의 공통점이 있어요..
하나는 이 두 사진에 나오는 사람 중에 지금 살아있는 것은 나뿐이라
는 것이고요...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은, 이 기분나쁘게 웃고 있는 애는 우리랑 사진
을 같이 찍은 애가 아니라는 것이예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진을 찍을때는 3명이서 찍었는데, 사진이 스티
커로 나온 것을 보니 이 소름끼치는 얼굴이 찍혀 나온 것이예요..."
...나는 은미의 말에 놀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조차 없었다. 내 귀를 의심할 정도
였다.
귀신이 찍힌 사진이라니...
은미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은미를 나무랐다.
"너 또 이상한 소리하는 구나...
은미야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있니?
괜히 선생님 불러놓고 이상한 소리하면 어떡하니..."
나는 뭐라고 말하기전에 은미의 눈을 살폈다. 뭔가 겁에 질린 눈빛이었지
만, 광기나 정신이 나가있는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다시 한 번 유심히 그 문제의 사진들을 잘 살펴보았다.
은미가 귀신이라고 말한 그 사진의 주인공을 살펴보았다.
우선 첫인상에서 느낀 것 처럼 그 아이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웃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사진이 워낙
작아 그 아이의 눈빛은 볼 수 없었지만, 쾡하고 무표정한 눈빛인 것 같았
다.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이 그 미소와 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아 어색했다.
하지만 그 어색한 눈빛은 사진을 보고 있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는
것 같았다.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 아이가 정말로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사진 찍은 아이들의 모습과는 다른 섬뜩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것 같
았다. 두 사진을 비교해봐도, 그 아이의 모습은 마치 복사해 놓은 것처럼
똑같은 표정,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상한 것은 보통 3명이 사진을 찍게 되면, 세명이 삼각형을 이루
어 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들에서도 3명은 삼각형을 이루고 찍었는데, 그
아이의 얼굴은 오른쪽 윗편에 몰려 있었다. 마치 억지로 사진에 끼어져 있
는 것 같았다.
그냥 봐도 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진인데, 은미의 말을 듣고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았다.
은미의 앨범에는 각기 다른 배경의 스티커 사진들이 수십개 모아져 있었
다. 그 중에 은미가 말한 사진 두장 만이 같은 배경을 하고 있었다.
사진 귀퉁이에 붉은 장미들이 넝쿨을 이루고 있는 배경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붉은 장미들은 기분나쁠 정도로 빨간 피빛을 하고
있었고, 그 장미들도 시든 장미들이었다.
보면 볼수록 등골이 오싹해지는 사진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은미에게 물었다.
은미는 '거봐 내말이 맞지요!'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은미야...
사진만 보니 좀 이상하긴 하구나...
그런데 정말 이 아이 니 친구 아니니?
어떻게
사진을 찍지도 않은 사람이 사진에 나올 수 있니?
그것도 한 장도 아닌 두 장에..."
"선생님이 보기에도 이상하죠.
그건 정말이예요..
우리도 처음 사진을 봤을때는 무서웠지만, 그냥 사진기 고장이나
이 배경의 일부로 나오는 것으로 알았죠...
처음부터 그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었는데...
흐흑...흐흑....
너무 무서워요...
언제 제 차례가 될 지 몰라요...."
은미는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은미 어머니는 은미에게 이제 그만 방으로 들어가 쉬라고 했지만, 은미는
그 얘기를 듣자 오히려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괜찮다니까.. 엄마.
선생님은 엄마와 달라 이 얘기를 믿어 주실꺼야.
선생님 그렇죠?"
은미 어머니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은미의 얘기는 더 이상 듣기 싫다
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내게는 은미가 이상한 얘기
로 나를 붙잡고 있는 것에 대해 연신 미안해했다.
나는 은미 어머니께 괜찮다고 하면서, 은미에게 한 번 얘기를 해보라고 했
다. 한편으로는 귀찮기도 했지만,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은미의 얘기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얘기였다.
"선생님..
엄마는 절대로 제 얘기를 믿으려 하지 않아요..
단지 나를 미친 애로 취급하고 병원에나 보내려 하고 있고요..
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은 참 평범한 날이었어요.
성주가 그 스티커 사진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한달전이었어요...
쉬는 시간에 뒷자리에 앉아있는 성주가 새로운 스티커 배경이 생겼다며,
내게 보여주며 자랑했어요..
아 참, 선생님은 잘 모르죠?
요즘 애들사이에 스티커 사진 모으는 것이 유행이예요...
그것도 전부 다른 배경으로 모으는 것으로요...
이 앨범에 있는 것들도 제가 모은 것이고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딴 애들에 비하면 저도 조금 모은 것이예요...
한참 경쟁적으로 모으고 있었는데, 성주가 희귀한 배경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예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주가 그 쉽게 구할 수 없는 사진을 보여주면서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불안한 모습이었던 것이예요..
금방 끝나고, 수업시간이 되자 모두들 자리로 돌아갔어요. 나
는 아무 것도 안 가르쳐주고 사진만 보여주는 성주가 얄밉기도 했어요.
자랑할만 한 대 가만히 있는 것은 좀 이상하기도 했고요..
다음 쉬는 시간에도 성주는 자리를 옮겨가며 그 사진을 보여주며, 똑같은
배경을 가진 사진을 가지고 있냐고 애들에게 물어보았어요.
그리고는 어디서 찍었냐고 궁금해하는 애들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시무룩해져서 자리로 돌아왔어요.
자랑하고 떠들만한대 아무얘기도 않고 가만히 있는 성주를 보니 좀 이상
한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잊어먹었어요..
그날 학교 끝나고 학원 갔다가 집에 오던 길이었어요..
집으로 들어오는데, 저기 놀이터에 어떤 애가 앉아있는 것예요..
밤 10시쯤 되었는데, 가로등 불빛에 비친 모습이 좀 무섭게 보이더라고
요.. 못본 척하고, 그냥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건 아냐! 거짓말이야!
그건 아니란 말야!!!'
나는 깜짝 놀라 그 소리친 애를 자세히 바라보니, 성주였어요.
별로 친하지 않던 애였지만, 같은 반애가 한밤에 놀이터에서 그러고 있는
것을 보니 다가가 말을 건넸죠..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 성주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고개를
흔들며 아무일도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멍하고 있더니, 갑자기 내게 낮에 보여주었던 사
진을 다시 보여주면서 그 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주었어요..
'은미야, 너도 이 배경으로 찍고 싶었지?
내가 가르쳐 줄게.. 어디서 찍었는지...
저 성미 분식 옆에 짓닢보면, 마치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서 걸어왔던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것이 성주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다음날 학교 가보니 성주가 결석했어요.
오후 쯤 되니 담임 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갑자기 교실로 들어와, 성주
가 죽었다는 얘기를 해 주었어요. 자세한 얘기는 안 해 주셨지만, 결국에
퍼졌어요..
그때는 그냥 모두다 헛소리
줄만 알아죠...
휴...
그 소문도 며칠 안가 가라앉았어요..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고등학교 생활이라는 것이 수업이다, 보충수업이다,
학원이다 하는 것들의 연속이니, 딴 일들은 금방 잊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열흘전이었을 거예요..
학원에서 교재를 꺼내는데, 그 때 없어졌던 스티커 사진이 붙어있던 메모
지가 툭 떨어져 나오는 것이예요. 분명히 거기다 둔 적이 없었는데..
여하튼 나랑 제일 친한 미경이가 그것을 보더니 그 사진의 배경이 너무
예쁘다며 우리도 같이 찍으러 가자고 하는 것이예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성주가 죽기전에 한 얘기며, 그 사진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죠..
평소에도 호기심많은 정미가 그 얘기를 듣고 사진을 보더니, 그럼 더욱더
가서 사진을 찍어봐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진짜로 그 애 얼굴이 사진에
나오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면서.. 또한 그런 희귀한 배경이면 딴 애들은
절대로 구할 수 없을 것이라며, 무서워서 꺼리고 있는 나를 설득했어요..
미경이하고 정미가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저도 가서 같이 찍기로 했어요.
그날 밤 학원 끝나고....
가기 전부터 괜히 꺼림직했어요..
그 성주가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더 무서웠어요. 다들 죽은 사람의 얼굴
이라니... 더구나 한 명은 있지도 않은데 사진에 찍혀 나온 얼굴이고..
얼굴이 희미하게 나온 것으로 봐
아마 배경에 포함되어 있는 얼굴일 거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자...'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그 배경을 화면에서 찾았어요. 하지만 그 배경에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기분나쁠 정도로 빨간 장미넝쿨만 보였어, 그때 우리 좀 웃긴 것
같아요...
자기들이 원치하지 않는 사실은 외면하고, 자기들 편한대로 생각하고 그것
을 믿어버리는 것이.... 사람은 다 그런 것 같아요...
우린 속 편하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생갚 왈칵 겁이 났어요.
그래서 다시 일어나 방 불을 켜려고 했지만, 갑자기 움직일 수 없는 거예
요. 눈도 뜰 수 없고...
정말 글자 그대로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더욱 커졌어요.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어떤 여자 애가 누워있는 내게 천장으로 부터 점점 다가오는 것처럼 느꼈
어요. 무서워 미칠 것만 같았아요.
필사적으로 움직이려고 했지만, 온 몸이 무슨 쇠사슬에 뭇겨진 것 같이 꼼
작도 할 수 없었어요. 중얼거리는 소리는 점점 다가오고...
그 여자애의 중얼거림을 알아 들었을 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죽는 것이 제일 나.. 세상이 얼마나 힘든데....
이렇게 살기보단 죽는 것이 좋을 걸....
죽는 것이 나... 죽는 것이 낳다니까....'
계속해서 이런 중얼거림이 들려 오는 것이였어요.
그 소리는 점점 다가와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어요. 조금
만 더 있으면 뭔가가 나를 덮칠 것만 같았아요.
그때는 눈을 뜨기가 두려웠어요. 온 몸에 식은 땀이 났어요.
그 순간 눈이 딱 떠졌어요.
바로 내 눈앞에는 아까 사진에 나왔던 그 애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였어요.
누워있는 내 바로 위에 둥둥떠서 나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 것
이였어요. 입으로는 계속 죽어봐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못 지르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어요...
휴... 지금 생각해도...
다음날 엄마가 학교가라며 깨어났지만, 밤에 있었던 일이 꿈인지 정말 생
시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너무 생생해서 나는 진짜 같았어요.
학교에 가자마자, 정미와 미경이를 찾았아요.
미경이는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고, 정미는 얼굴이 새파라져 있었어요.
정미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정미 역시 전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정미 역시 나와 비슷한 경
험을 했다는 것이예요. 사진 속의 그 애가 천장에서 떠다니며 정미를 괴롭
혔다는 것이예요. 정미는 애써 그것을 악몽이라고 생각하려 했어요.
너무 그 애에 대한 무서운 상상을 많이 해서 그런 악몽을 꿨다는 것으로...
이번에는 정미의 말이 정말 믿기지 않았지만, 나 역시 꿈인지 현실인지 구
분할 수 없으니 할 말이 없었어요.
우리는 학교에 안 나온 미경이가 궁금하고 걱정도 되고 전화를 했어요.
전화를 받은 미경이 엄마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미경이가 좀 아프다고 했어
요. 그런데 몸살이 심한지 헛소리도 해서 병원에 갔다는 것이였어요.
괜히 불길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 애 얼굴이 나온 사진을 보기도 무서워, 다른 애들에게 자랑은커녕 그
사진이 붙어있는 필통이나 엘범은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았어요. 나는 그날
저녁 그 사진들을 없애버린다고 결심했어요.
학원에서 정미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하지만 정미는 아직 제대로
자랑도 못했는데 없애버리기 아쉬워하는 것 같았아요. 없애버리라고 다시
한 번 말하고 각자 집으로 들어왔어요.
나는 집에 들어오자 마자, 그 애 얼굴이 나온 사진이 붙어있는 필통과 공
책을 꺼내 사진들을 떼어내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상한 것은 아무리 긁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였어요. 엄마가
메니큐어 지울 때 쓰는 아세톤까지 이용했지만, 스티커가 어떻게 된 것인
지 떨어질 생각을 안했어요. 나는 겁이 나서 아예 칼로 긁어댔어요.
자기 얼굴이 나온 사진을 칼로 긁어대는 것은 끔찍하고 꺼림직했어요.
필통에 있는 것은 다 긁어 버리고, 공책에 붙어있는 것은 찢어버렸어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스티커 사진 모아둔 이 앨범이 없는 것이예요.
아무리 가방을 뒤져도 없는 것이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날 학교 교실에 놓고 온 것이예요. 그래서 두 장의 사
진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죠....
여하튼 집에 있는 사진을 다 없애니까 좀 마음이 놓였어요.
그래도 좀 무서워서 불을 켜놓고 잠을 청했어요.
머리 속에 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전날 처럼 악몽을 꾸울까봐 무서웠어요.
창문 밖에서 그 애 얼굴이 보일 것만 같았어요.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침대에 앉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어요.
그런 생각하다가 깜박 졸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깜박 잠이 들었다 잠이 깼어요.
방안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어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어 내 책상 쪽을 보았어요.
세상에... 내 책상에 어떤 여자애가 앉아 뭔가를 쓰고 있는 것이예요.
나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어요.
뒷모습만 보였는데, 소리를 지르거나 어떻해서 움직여 그 방을 빠져 나오
려고 했지만 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어요.
그 여자애는 쓰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렸어요.
바로 사진 속의 그 애였어요.
얼굴은 칼로 긁힌듯한 것 처럼 끔찍한 상처가 나 있었어요.
그 쾡한 눈으로 빤히 나를 보고 있었어요.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아요.
눈을 감고 차라리 안 보고 싶었지만, 눈도 내 맘대로 감을 수 없었어요.
그 애는 내게 다가와 자기가 쓰던 것을 내밀며, 그 기분나쁜 목소리로 또
중얼거렸어요.
'자... 이게 너 유서야... 이제 죽어야지....
살아서 뭐하니... 네 인생 얘기 해 줄까....
너희 아빠는 곧 회사에서 해고되고, 퇴직금은 사기당하게 되고, 술주정뱅
이가 되고... 너희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파출부로 다니다가 교통사고 당
하고... 너는 성적도 떨어지고, 가난하다고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고...
아마 밤마다 술에 취한 아빠에게 몽둥이로 얻아 맞을껄....
그런 삶을 살아 뭐하니...
죽어... 나를 따라와....'
너무 겁났어요.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 애의 말이 전부 사실처럼 들려온
것이예요. 모두 그 애 말처럼 될 것 같고, 그런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좋을 것 같았아요. 거기다 그 애는 소름끼치는 한마디 덧붙였어요.
'지금 안 죽는다고 끝날 것 같니?
나는 네가 죽을때까지 계속 따라다닐텐데....
죽는 것이 좋아...
자 가자.... 친구들도 기다리고 있어...'
밤마다 그 애를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좋을 것 같았어요.
그때는 정말 귀신에 홀린 것 같았어요..
나는 아무런 저항감없이 그 애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아파트 옥상이었어요.
정미와 미경이도 와 있었어요. 다들 손에 무슨 종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어
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 종이들은 유서였어요.
그 애는 우리를 난간으로 데리고 갔어요.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난간에 섰어요.
그때 나는 딴 사람의 일을 보는 것 같았아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무섭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단지 죽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는 생각만 들었죠.
먼저 미경이가 뛰어 내렸어요.
흐흑...
미경이가 점점 작아지더니 퍽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어요.
그런데 그전까지 아무런 소리도 안 내던 미경이었는데 떨어지면서 비명을
지른 것이 기억나요. 정미도 마찬가지였구요..
지금 생각해보니 혼이 뺏겨 있던 그 애들도 떨어질 때 제정신이 든 것 같
아요. 그래서 비명을 지른 것이죠.. 얼마나 무서웠을까..
정미까지 뛰어내리고, 이제 내 차례가 되었어요.
그 애는 옆에서 자꾸 속삭였어요. 이제 뛰어내리라고..
나도 아무런 생각없이 뛰려고 했어요.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나를 나꿔챘어요.
그러곤 기억이 없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마침 옥상을 순찰 중이던 경비아저씨가 나를 구한
것이예요. 옥상에 올라와보니, 여학생 3명이서 나란히 난간에 서서 한명씩
뛰어내렸다는 것이예요.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저만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예요. 경비아저씨 말로
는 나를 붙잡았는데 내가 엄청나게 반항하며 죽어야 한다고 소리질렀다는
거예요. 나는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
선생님 믿을 수 있으세요...
그것이 일주일 전의 일이예요.
저는 그때 이후로 밤에는 한숨도 잘 수 없었어요.
이 사진의 애가 눈만 감으면 나타나 옆에서 중얼거리는 것이예요.
'아직도 네 차례야... 빨리 죽어야지...'
미칠 것 같아요! 선생님 도와주세요..
제가 정신병자 같죠? 하지만 아니예요!
정미와 미경이가 남긴 유서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개네들은 정말 행복한
가정에서 살고 있던 애들이예요. 그런데 개네들이 쓴 유서에는 자살하는
이유가 가정불화와 가난해서 그렇다고 나와있어요. 남자 친구라고는 한명
도 없는 정미가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괴롭다는 유서를 남겼다는 것도 말도
안돼요! 내가 썼다는 유서는 어떻고요.. 성적이 떨어지고 밤마다 나를 때리
는 아빠가 밉다고 썼대요.. 선생님 저 지난번 시험에서 일등했어요. 그리고
우리 아빠는 제 털끝하나 안 건드리는 분이고요..
선생님 제발 저 좀 믿어주세요...
아무도 저를 안 믿어요!
이러다간 언제 그 애에게 이끌려 죽게 될지 몰라요..
선생님.... 제발!!!!.... "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은미의 말이 절규로 끝났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
다. 이 얘기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잡하지 않았다.
은미는 얘기를 끝마치고 흐느끼고 있었다. 사실이던 아니던 큰 고통을 느
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은미가 친구들의 죽음으로 미쳐버린 것이 확실하지
만, 은미의 얘기는 한낱 미친 소리로 치부하기엔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 두 장의 스티커 사진에 찍힌 그 애의 얼굴이 있었다.
이 세상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사진 속의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그 애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아 소름이 쫙 끼쳤다.
'죽는 것이 좋다니까.....
이제는 네 차례야........'
...나는 그 소름끼치는 사진에서 애써 눈을 떨고,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은미는 얘기를 끝마치고 무서운 듯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울고 있
었다. 은미 어머니도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은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안쓰러운 은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무책임한 대답을 했다.
"은미야... 걱정마라...
나는 내 말을 다 믿어...
이제부터 너를 도와줄게..
그러니 마음 푹 놔... 잠도 푹 자고..."
내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은미는 죽었다 살아난 사람처럼 고개를 듣고
나를 쳐다보았다.
"선생님! 역시 선생님은 제 말을 믿고 계시죠..
거봐! 엄마! 선생님은 내 편이잖아.
선생님 저 도와주실거죠?"
은미의 그 필사적인 모습을 보니, 앞에서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은미를 도와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은미를 안심시키고, 은미 어머니에게 은미를 잘 부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미 어머니의 고마워하는 표정을 보니 더욱더 은미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은미에게 들리지 않게, 어머니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걱정마세요.. 저 아는 의사분에게 부탁히 은미좀 살펴보라고 할께요.."
그러고는 은미를 보고 작별 인사를 했다.
"은미야, 내가 그 사진에 대해서 알아보고 힘 닫는데까지 해볼게..
그리고 이런 불가사이한 사건에 대해 전문가인 선배를 소개시켜 줄테니까
그 아저씨에게 이번 사건에 대해 자세히 말해줘...
이제 무서워하거나 걱정말고, 어머니 말 잘듣고 푹 쉬어..
빨리 제자리로 돌아와야지...
다음에 보자..."
은미 어머니와 은미는 현관밖까지 나와 고마워 했다. 은미의 모습은 이제
좀 희망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마음에 찹찹했다.
솔직이 은미는 약간 미친 것 같았다.
말도 안되는 것에 대한 강박증, 환청, 죽음에 대한 공포 등.. 내 짧은 상식
으로도 제정신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친구들의 자살 모습을 보고 충
격을 받아 약간 돌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애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니 못
본채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더구나 나를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데, 도
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은미 집을 나서면서, 최선생님을 떠올렸다.
내가 재원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힘들었을 때 도와주시던 정신과 의
사 선생님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 버려진 집 사건이 갑자기 주마등처럼
머리속을 지나갔다. 그 끔찍하고 잔인했던 일들이...
최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도 아마 평생을 그 버려진 집의 악몽에
시달리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 분은 젊은 데도 불구하고, 여는 의사와는 달
리 정말 환자쪽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진심으로 환자를 이해하시는 분
이다. 거기다 환자 잠재의식 속에 담겨진 있는 공포심을 없애주는데 천부
적인 자질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불가사이한 일에 대한 공포로 정
신병이 걸리거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들에 이상할 정도로 관심
이 많으신 분이다. 자기 말로는 박사 논문 주제가 환청, 환시에 관한 실제
성 고찰이라고 해서 특별히 관심이 많다고 했다.
아마 이런 일이라면, 내 부탁이 없어도 자진해서 나설 것 같았다.
최선생님에게 전화했더니 마침 자리에 있었다. 나는 은미의 자초지정을 간
략하게 설명하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최선생님은 요즘 약간 시간이 있
다며 흔쾌히 응했다.
"일한씨, 그런 일은 오히려 내가 부탁해야 할 일이예요..
안 그래도 논문에 여러 가지 사례가 필요한데, 이번 일이 적당한 사례가
될 것 같네요. 내일 내가 찾아가 그 은미라는 학생을 만나고 얘기해 보죠.
미미하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하네요..."
나는 최선생님에게 연신 고맙다고 하며 전화를 끝었다. 그리고는 은미 어
머니께 전화 걸어 내일 중에 선생님이 찾아갈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한가지 숙제는 덜었지만, 아직 꺼럼직한 것이 남아있었다.
바로 그 기분나쁜 아이의 얼굴이 나온 두 장의 스터커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 대해 뭔가를 알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기괴한 사진에 대해 고민하다가 밤새 잠을 설쳤다...
다음날 학교로 가다가, 도저히 찜찜함을 이길 수 없어 중간에 발길을 돌렸
다. 그 사진에 대해서 뭔가 확실한 것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예전에 윤석이가 일했던 대한 심령학회를 찾아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진을 가져가 봤자 심령학회에서는 무조건 선입관을 가지고
그 사진이 유령이 찍힌 심령사진이라고 단정지을 것 같았다. 좀더 객관적
인 시각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승이 형을 찾아갈 생각을 했다.
한승이 형은 우리 영화제 준비하다가 만난 사람인데, 사진 공부하기 위해
유학까지 갔다온 사람으로 지금은 사진 작가로 일하고 있다. 작품전을 여
는등 주목받는 젊은 사진 작가였다. 한승이 형은 예술적인 사진을 잘 찍을
뿐만 아니라, 사진에 대한 기술적 지식이 전문가 이상이라고 들었다.
그 형이라면 이 사진에 대해 뭔가 확실한 결론을 내려 줄 것 같았다.
전화도 않고 사무실로 찾아갔는데, 다행히 사무실에서 사진을 현상하고 있
었다.
"어, 일한이...
오랜만이다. 내가 왠 일이냐?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고...."
"한승이 형, 놀리지 말고...
시간 있으면 나 좀 도와줘요..
이 사진들 좀 봐주시겠어요..."
나는 주머니에서 그 기괴한 두 장의 스티커 사진을 꺼내 한승이 형에게 내
밀었다. 한승이 형은 스티커 사진을 힐끗 보더니 한마디 쏘와 붙였다.
"야, 임마, 너도 이런 사진 같지 않은 사진 갖고 다니냐..
큰일이야..
단지 악세사리
고 이런 영혼이 담기지 않은 기계사진이 인기라니...."
"그게 아니예요..
이 사진들에는 진짜로 영혼이 찍혀있는 줄도 모른다니까요.."
한승이 형은 나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
다. 나는 거기에 얽힌 얘기를 설명해주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형이 이 사진 좀 분석해 봐요..
이 아이가 진짜 귀신인지 아닌지.. 아니면 누가 조작한 사진인지..."
한승이 형은 여유있는 모습은 사라지고, 좀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준 사진
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소름끼치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 사진이 그런 사진이란 말이지...
사실 나도 이런 류의 심령사진은 많이 접해왔어... 그래서 조작한 것인지
아닌지는 찾아낼 수 있어..
일한이 너는 안 믿을 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정말 불가사이한 사진이
많이 있단다.. 나도 처음보기까지는 안 믿었으니까...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교수님이 사진 하나 가져와서 학생들에게 그
사진이 진짜인지 조작인지 학기말까지 알아보라고 했어.
그 사진의 진위를 밝혀내고, 조작이라면 조작방법을 밝혀내는 학생에게는
A를 주겠다고 했지....
지금도 그 사진을 떠올리면 식은땀이 흘러...
어떤 방에서 신부님을 찍은 사진인데, 무서운 것은 뒷배경이었던 하얀 벽
에 소름끼치는 것이 찍혀 있었어...
바로 악마의 눈같은 것이 수십개 신부님 뒤에 찍혀있는 거야...
무시무시한 사진 이었지...
위로 올라간 검은 눈에 빨간 눈동자들이 무시무시하게 신부님을 노려보는
듯한 사진이었어..
학생들 모두는 이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름대로 조작
방법을 밝혀내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학기가 끝날 때까지 밝혀내는 학생은 한명도 없었어.
학교 마지막 날, 우리는 터질듯한 호기심을 가진채 교수님을 기다렸지...
웬일인지, 교수님은 성경책을 하나 들고 교실로 들어왔어.
그리고는 그 성경에 손을 올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충격적인
말을 해주었지...
'여러분, 내가 성경을 가지고 들어온 것은 지금부터 내가 여러분에게 말
하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학기동안
내게, 사진은 진실만을 찍고 거짓말을 안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진은 있지도 않는 것을 찍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것을 찍었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진은 조작한 것
들입니다.
하지만... 휴... 여러분들이 밝혀내지 못한 이 사진은 조작한 것이 아닙니
다. 절대로 조작이거나 카메라 고장이거나 빛이 새어들어가 나온 사진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진에 찍힌 것입니다.
사진에 나온 신부는 내 동생이었습니다. 하나뿐인 친동생이었죠...
2년전에 찍은 사진이죠...
이 사진을 찍은 다음날 그 방에서 자다가, 아무런 이유없이 죽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모습을 하고...
여러분은 좀 당혹스럽겠죠.. 신부의 죽음과 이 사진의 조작여부가 무슨
관계이냐고...
다시 말하지만, 이 사진은 절대로 조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 사진은 바로 성경에 손을 올려놓고 말하는
내가 찍은 것이니까요....'
나는 큰 충격과 두려움을 느꼈어.
너무 무서워서 그 사진을 없애 버렸지..
내가 알고 있는 한 그 교수님은 절대로 거짓말 할 사람이 아니야.. 더구나
동생이 신부였을정도로 독실한 신자가 성경책에 손을 올리고 거짓말할리
는 없었거든...
그 이후 나는 그런 사진을 많이 봐왔지만, 거의 대부분은 조작이었어...
거의 대부분은...."
한승이 형은 그 무서운 얘기를 들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로 그 사
진을 가지고 들어갔다. 한승이 형은 그 사진을 이런 저런 기구를 이용해
조사하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이 사진은 판독하기가 힘든 사진이야..
보통 카메라로 찍힌 것도 아니고, 인화지도 특별한 것이고, 너무 작거든..
그래도 한 번 봐보자...
이 사진이 아이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진이란 말이지...
요즘은 사진 조작술이 더욱 정교해지고 있어.
하긴 컴퓨터를 이용해 위조지폐도 만들어낼 정도니, 사진 정도야...
영화 특수효과에서도 없는 것을 깜쪽같이 필름에 삽입하잖아...
시간 있지? 잠깐만 기다려봐...
아무리 어려워도 내가 이 사진의 가면을 벗겨낼테니...."
나는 초조하게 한승이형의 검사가 끝나가길 기다렸다.
머리속이 복잡했다. 이 사진들이 조작이나 가짜라고 판명이 나면 은미는
정말 미친 것이고, 만약 이 사진들이 진짜 죽은 애의 얼굴이 찍힌 것이라
면 은미는 정말 귀신을 본 것이고 다른 아이의 죽음도 은미의 말처럼 이
사진 속의 그 애가 저지른 것이 된다는 것이다.
너무 답답해서 사무실을 왔다갔다 하는데, 갑자기 차고 있던 삐삐가 울렸
다. 잘 모르는 휴대폰 번호였다.
전화해보니, 최 선생님이었다.
은미를 진찰하고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최 선생님의 어두운 목소리를 듣고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최 선생님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충격적인 예기를 들려주었다.
"일한씨...
방금 은미와 얘기를 하고 나오는 길인데요...
몇번 더 얘기를 나누어야 좀 더 정확한 결론이 나오겠지만,
확실한 것은 은미는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예요.
환청 증상도 없고 환시 증상도 없는 완전히 제 정신인 상태입니다.
그러니 은미가 보고 들은 것은 모두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진 속의 그 아이까지도....."
..나는 최선생님의 말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아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여보세요? 여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간신히 정신을 추스
린 다음에야 최선생님에게 은미의 상태에 대해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러면.. 선생님..
은미가 제정신이라면, 어떡하면 그 애의 공포심과 무서움을 없앨 수 있을
까요? 은미가 평범한 생활을 하기위한 치료법은 도대체 어떤 것이죠?"
"음....
만약에 은미가 정신질환에 걸려있다면, 약물치료나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런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은미는 온전한 정신 상태이기 때문이죠...
제가 알기론 한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바로 일한씨가 충격에서 회복했던 방법이죠. 자기가 경험하고 봤던 것을
사실로 인정하되, 그것이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위협이나 공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죠. 괜히 환시니 환청을 경험한 것이라고 은
미를 몰아부치면, 오히려 크나큰 부작용을 낳을 수가 있습니다.
은미가 경험했던 괴기한 일들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논리적인 대답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은미가 수용하고 극복하는 수 밖에 없어요...."
나는 최선생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을 수 밖에 없었다.
은미가 경험한 것이 환상이 아니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불안하게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사무실을 왔다갔다 했다.
한승이 형은 그 사진에 대해 뭘 그렇게 조사하는지 작업실에서 한참동안
꼼작도 안했다. 내 머리속은 최선생님이 해준 얘기로 점점 복잡해졌다.
작업실에서 나온 한승이형은 점심으로 짜장면이나 시켜먹자고 하고 다시
작업실로 들어갔다. 식사가 배달된 후에도, 뭐에게 홀린 듯 아무말 없이 먹
더니, 내게 좀더 기다려달라고 하고 다시 작업실로 들어갔다.
나는 한승이 형을 방해 안할 생각으로, 가방안에서 책을 꺼내 보기 시작했
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은미가 경험한 것이 과연
어떤 일이었을까하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찼다.
오후 4시가 다 되서야, 그러니까 한승이 형이 그 사진을 들고 작업실로 들
어간지 6시간이 지나서여, 무언가에 질린 표정으로 작업실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내게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한아,
이 사진들 말야.... 실수인가 해서 여러번 확인해 보았는데 말야...
내 능력으로는 이 사진들이 진짜라고밖에 할 수 없어..
그러니까, 네가 귀신이라고 말한 이 아이는 조작된 사진이 아니라
나는 최선생님의 말에 이어 한승이 형까지 믿을 수 없는 말을 하기에, 머
리에 둔기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무슨 말이예요?
조작이 아니라면... 그럼 유령이 그 사진에 찍혔다는 것이예요?
아니면, 유령이 아닌 보통 사람이 찍한 것이냐고요?"
"나도 처음에는 헷갈렸어..
한승이 형은 나를 진정시키고 작업실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한승이 형 역
시 공포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한승이형의 작업실에는 현상실과 커다란 모
니터와 스케너 그리고 컴퓨터가 있었다. 한승이 형은 20인치정도로 보이는
커다란 모니터 앞에 나를 앉히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그 사진을 가지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스케너를 이용해 사진을 디지
타이즈 해서 확대한 것이야. 그 스티커 사진들은 너무 작아서 그냥은 아
무것도 알아볼 수 없거든...
자, 봐라 이렇게 확대되었어...
속속들이 잘 보이지..
그리고는 우선 사진의 선명도를 높였지..
또렸하게 보이지..
선명한 사진을 꼼꼼히 살펴봤어.
우선 그 귀신이라는 아이 테두리의 선과 나머지 세아이의 테두리를 잘 비
교해봐... 전혀 차이가 없지..
이런 사진을 조작하려면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거든..
첫 번째는 원래 사진에 다른 사진을 정밀하게 오려붙여 다시 촬영하는 원
시적인 방법이야.. 티가 잘나기 때문에 이제는 잘 안쓰는 방법이지만, 이
런 작은 스티커 사진이라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감쪽같이 할 수
있어. 그렇지만 확대한 사진의 이 테두리를 살펴보면, 전혀 차이가 없다는
다음 방법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이야.
이것은 거의 알아볼 방법이 없는 것이야. 아무 것도 찍히지 않은 사진에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새로운 것을 덧칠하는 것이야. 주로 영화에서
자주쓰는 기법이야. 터미네이터 2에서 시작되어, 쥬라기 공원, 포레스트
검프에서 눈부시게 발전되어 타이타닉에서 까지 훌륭하게 구현되었지.
그런데 이러한 스티커 사진을 이용하게 위해 값비싼 컴퓨터 장비를 이용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한 번 테스트 했지.
사진에 찍혀 있는 것들을 3차원으로 만들어 앞에 찍힌 것부터 배열해 보
았어. 컴퓨터 조작이라면 3차원 배열이 불가능하거든... 평면으로 조작된
것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 사진의 그 아이는 명확하게 3차원으로 분리
되었어.
결국 조작된 사진은 절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어.
그렇다면, 이 아이의 사진이 사람을 찍은 것이가 아니면 걱정하는 대로
귀신이나 그 무엇을 찍은 것이가를 알아 봐야 했지.
대부분의 심령학자는 심령체는 빛을 일부 반사하고 일부 투과시킨다고 했
어. 그래서 우리가 알고있거나 봤다는 유령은 허공에 둥둥떠있고 흐릿
하게 비치는 듯한 형태를 하고 있나봐..
이 사진에서 그 아이의 코 밑과, 다른 세아이의 코 밑을 잘 봐. 내가 좀
더 확대해 볼테니까...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겠니?
이 세아이의 코 밑에는 코 때문에 생기는 그림자가 약간 보이지.
그런데 이 아이의 코 밑에는 그림자가 안보여.
두 사진에 모두 이 아이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안 보여.
아무리 정면에서 후레쉬를 터트렸다고 해도 사람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생
기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이 아이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하나도 안 졌어.
마치 색칠한 것처럼...
그리고 또 하나.
여기 이마에
커다랗지만 희미한 점 같은 것이 보이지..
이것도 확대해서 보인것이지...
혹시나 해서 2배씩 확대해 보았어.
처음 2배 확대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어..
확대한 후에 한 번씩 필터링을 걸쳐 사진을 선명하게 했어.
그런데 잘 봐라..."
그렇게 말하면서 한승이형은 모니터의 사진을 점점 확대해 나갔다. 마우스
로 클릭할 때 마다 확대되는 점같은 것을 보니 점점 긴장되었다.
그 희미했던 점이 확대되고 선명해지니, 무슨 글짜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
게 식은땀이 흘렀다. 이윽고 무슨 글짜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 글짜를 더듬거리면서 읽으면서 머리속이 혼란으로 가득차게 되었
다.
"스...티....커.....사....진
스티커 사진? 이 글짜가 왜 여기 찍혀있죠?"
"임마, 니가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니?
나도 처음에는 어떤 것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이 글자들을 자세히 보면, 기다란 직사각형 안에 쓰여져 있잖아.
그럼 대답은 한가지야..
잘 생각해봐. '스티커 사진'이라는 글짜가 사각형의 테두리 안에 쓰여있다.
바로 스티커 사진기에 쓰는 장막이야.
이 사진을 찍은 곳에 가보면, 아마 장막이 기계주위에 쳐 있을 거야.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지?
이 아이의 이마를 뚫고 뒤에 걸려진 장막에 써 있는 글짜가 찍힌거야..
다시 말하면, 이 아이는 반투명의 상태라는 거야.
그러니까 이 아이의 뒤에 걸려있는 장막이 희미하게 찍힌 거야.
글짜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어.
한 번 그 기계에 가봐.. 그 기계앞에 서면 바로 네 머리 뒤에 '스티커 사
진'이라고 쓰여진 장막이 쳐져있을 거야.
실제 사람을 찍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야.
여기서 끝난 것이 아냐.
우연치고는 좀 소름끼치는 점이 하나 발견되었어.
두 사진을 확대해 놓고, 두 사진에 찍힌 그 아이의 얼굴을 비교해보았어.
그냥보면, 똑같아 보이지.. 기분나쁜 미소하며, 비웃는 듯한 눈빛하며..
그런데, 혹시나 하고 이렇게 겹쳐보았지.."
한승이형은 모니터에 두 개의 사진을 나란히 띄어놓고, 한 사진에서 그 아
이의 얼굴만 떼어내어 다른 쪽 사진의 얼굴로 옮겨갔다.
겹쳐진 그 아이의 얼굴을 보자,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면 숨을 들어마실
수 밖에 없었다.
따로 있을 때는 여자아이의 얼굴이었는데, 겹쳐보니 끔찍한 악마의 형상을
할 수 있었다.
눈동자가 겹쳐지면서 괴기한 형태를 하고 있고, 미소를 짓고 있던 입술은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코 모양과 머리 형태 또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끔직한 모습이었다.
"우연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끔찍하지....
휴....
내가 지금 순간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명확해..
일한이 네가 가져온 사진에는 사람이 아닌 그 기괴한 무엇인가가 찍혀있
는 거야.. 사람이 아닌...."
나는 한승이형의 설명을 듣고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은미가 본 것이 정말 사실이라니....
그 귀신인지 모르지만, 뭔가 괴기스러운 기운이 찍힌 것이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한승이 형에게 그 아이의 얼굴 사진만 확대해 달라
고 했다. 한승이 형은 아무말 않고, 그 아이의 얼굴 사진을 인쇄해 주었다.
사진처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은미를 정신병자로 돌리고, 쉽게 잊을라고 한 이번 일이 이제는 생각지도
않은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나는 한승이 형에게 시간이 있으면, 그 사진을 다시한번 조사해 달라고 부
탁하고 오늘 도와준 것에 대해 너무 고맙다고하고, 그 괴기스런 아이의 확
대된 사진을 들고 나왔다. 기분나쁜 두장의 스티커 사진은 한승이형에게
맡겼다.
머리속이 어지러웠다.
밝혀진 사건의 단서들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원래는 사진만 확인하고 공부하러 학교갈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
도 아니었고, 이번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서 뭔가 알아봐야 할 것 같았
다. 나도 모르게 그 스티커 사진 자판기가 있는 곳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
다. 그 기계를 직접 보고 싶어졌다.
은미가 말한 대로 그 기계는 덩그러니 짓다만 건물옆에 있었다.
어느새 주위는 아둑어둑해져서, 빛을 발하고 있는 그 자판기가 불길하게
보였다. 마무리 작업만 남은 것 같은 그 건물은 오히려 더욱 흉해 보였다.
창문없는 창들은 휭하니 눈동자가 빠진 눈처럼 섬뜩해 보였다.
이런 짓다만 건물옆에 놓여있는 스티커 사진 자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해 보였다. 사람이 많이 지나가는 길목도 아니고, 학교가 가까운 것도 아
닌데 이런 기계를 버려진 듯이 놓여있는 것이 이상해 보였다.
갑자기 이 기계의 주인은 누구인가 궁금해졌다.
누가 이 기계를 여기에다 놓고, 관리하는지 궁금했다.
주위를 살펴보았다.
주변에는 주택만 보이고, 가게다운 가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기계가 여기 놓여 있는 것이 더욱 이상해 보였다.
저 멀리 문 연 구멍가게가 하나 보였다.
나는 우선 그 가게에 들려 이 기계의 주인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구멍가게에는 주인 아주머니가 무료한 듯이 TV를 보고 있었다.
가게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아주머니는 반색을 했지만, 내가 물건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후 실망하고 귀찮아 하는 기색이 역력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용건을 꺼냈다.
"저... 아주머니...
좀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저기 저 골목 끝에 짓다만 건물 앞에 있는 사진 찍는 기계..
혹시 아주머니가 주인이신가요?
아니면 그 기계 주인이 누군지 아세요?"
귀찮아하는 표정을 하던 그 아주머니는 나의 질문에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얘기를 들려 주었다.
"아.. 그 이상한 사진 찍는 기계요..
그거 이제 주인 없어요..
그거 주인 죽었어요.. 자살했어요...
아주 끔찍하게...
하긴 그 기계 좀 이상하더라...
주인도 없는데, 누가 계속 켜 놓기는 하던데...."
...나는 주인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고 불길한 느낌과 함께, 공포같은 것
도 느껴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졌다.
"죄송합니만, 그 얘기좀 자세히 해 주실 수 없나요?
제가 사실 무슨 일로 급하게 그 주인을 찾고 있는 중이었거든요..."
"젊은이도 그 주인에게 뭐 돈 빌려준 거 있수..
그러면, 안되었구려...
그 주인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니까..
아는 지 모르지만, 그 짓다만 건물도 그 사람꺼예요....
그 사람이 죽은 후, 돈 빌려 준 사람들이 몰려와 얼마나 난리쳤는데...
그 스키커 기계는 그 주인이 애지중지하던 딸애를 위해 사준거라우..
글세, 그 사람은 원래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던 부장이었데요.
그런데 회사가 어렵다고 갑자기 해고당했다지 뭐요..
그래서 퇴직금 탄 돈과 여기저기 돈을 꿔서 자기 집을 헐고 건물을 짓
기 시작했어요.. 주위 사람들이 부추겼다지 뭐에요.
여기다 건물지으면 값도 오른다는 말에...
그 사람 운이 다했는지 IMF가 뭔가 때문에 공사하던 회사도
부도나고 건물 지을 방법은 없게 되고, 수입이 없으니까 빗장이들의 독
촉은 시작되고... 백방으로 알아봐도, 방법이 없었나 봐요..
하긴 잘 알지도 못하는 우리집까지도 돈을 빌리려 왔으니....
결국 견디다 못한 그 사람은 그 건물에 목을 메달아 자살했어요.
그런데 끔찍한 것은 부인하고 고등학생인 딸하고 같이 목을 멨다는 거
유.. 내가 바로 그 시체들을 발견했는데,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그때 생각만하면 지금도 다리가 후들후들해요...
한 두달 전쯤 되었나...
그날도 손님이 없어 11시쯤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나섰어요.
우리 집은 그 짓다만 건물에서 좀만 걸어가면 되는데...
그 건물앞은 너무 깜깜해서, 밤에 지나가면 좀 무서워요..
그날도 그 건물앞을 지나가기가 좀 꺼려졌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거기를 지났지 뭐유....
그 옆을 지나는데, 그 건물 2층 창사이로 뭔가 희끗하며 흔들리는 것이
보였어요. 뭔지는 몰랐지만, 이유도 모르게 소름이 쫙 끼치는 거유...
그게 뭔가가 좀 궁금해지더라고요...
나도 참 주책이지... 그런 것이 뭐가 궁금하다고...
좀더 가까이 가서 창 너머로 희끗거리는 것이 뭔가 자세히 보았어요.
가까이서 보니, 천천히 흔들리는 그 것은 하나가 아니였수다...
세 개였어요..
휴...
그 것들이 뭔가 자세히 보았수....
그리고 무언가를 알아차렸을 때, 너무 무서워서 기절할뻔 했어요.
바로 그 주인과 부인과 그 딸이 나란히 목을 메 자살한 시체들이었어
요. 시체 3구가 대롱대롱 메달려 천천히 흔들리는 것이었수....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 다음에는 기억도 잘 안나요...
비명을 지르고, 사람들을 찾았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날 자살한 것이래요..
자살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좌절한 그 주인이
부인과 딸에 수면제를 먹이고 목을 메단 다음 자기도 목메달았다고도
했수다... 뜬 소문이지만 무서운 얘기지 뭐에요....
돈이 뭔지... 온 가족이 자살하게 하구......
쯧즛...."
그 얘기를 듣고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하는 생각으
로 주머니에서 확대한 그 무서운 아이의 사진을 꺼내 아주머니에게 보
여주면서 물어보았다. 제발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혹시 그 자살했다는 건물 주인의 외동딸이 이렇게 생겼나요?"
"맞아요...
이 아이가...
그런데 이 사진 언제 찍은 거죠?
시체로 발견된 날에 입고 있던 옷을 입고 찍었네....
그 스티커 사진긴가 들어오던 날 얼마나 좋아하던지...
아직도 눈에 선해요..
동네를 뛰어다니며 자랑했수다..
소문에 의하면, 그 집 주인이 그 외동딸을 끔직하게 여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퇴직금 탄 돈중에 일부를 그 애의 소원인 스티커 사진기인가
뭔가를 사는데 썼다는 거지 뭐유..
휴... 그렇게 위한던 딸애가 그런 심한 소리를 들었으니 죽고 싶었을 수
도 있을거야...
하여간 그 애는 사진기가 들어온 다음날 부터, 하루 왠 종일 그 사진기
안에 들어가 사진찍고 여기 저기 붙이고 다니고, 친구들 우르르 데리고
와서 자랑하고 난리였수다.... 쯧쯧 불쌍한 것....
그런데 애가 철이 없었던지, 지 아비가 사업이 망해 난리가 났는데도
그 사진기만 절대로 팔 수 없다고 했다지 뭐유...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다곤 하지만....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지네 아버지가 회사에 쫓겨나고 건물도 들어먹
고 빈털털이가 되니 그 딸년이 제일 난리쳤다는 거래요..
아빠 때문에 창피해서 학교 못다니겠다는 등, 당장 나가서 돈 벌어 오
라는 등, 이렇게 사는니 보다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등 보통이 아니였
데지 뭐유...
어린 것이 고생을 안 해봐서인지, 원래 성격이 고약해서인지...
아마 그 사람은 자기 딸이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괴로웠을 거예요.
그러니 그런 끔찍한 길을 택했을지도 모르지...
생긴 것은 예쁘장한데, 욕심이 많은 것인지 철이 안든 것인지...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이렇게 되다니...."
그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고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정말 2달전에 죽은 애라는 것이다. 은미가 본 것은 정
말 유령이고, 내가 지금 들고 있는 것은 유령의 사진이라는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무서웠다.
나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그 가게를 나왔다.
주위는 이제 완전히 깜깜해졌다.
주택가 골목이 다 그렇듯이 부실한 가로등 때문에 길 전체가 어두웠다.
더구나 짓다 만 건물마저 있으니 그냥 다니기가 무서울 정도로 음침했
다. 시간이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닌데,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
았다.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그 문제의 스티커 사진기로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확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 아주머니 얘기를 들어서인지, 내 눈에도 건물 2층 창사이로 뭔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천장에 대롱대롱 목 메단 3구의 시체가...
꾹 참고 장막을 제치고 그 스티커 사진기 안으로 들어갔다.
보기에는 평범한 사진기 였다.
두달동안 관리가 안 되었느지 기계 스크린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었
다. 화면이 깜박이면서, "어서오세요"라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 평범한 기계음 조차 무섭게 들렸다.
화면 여기저기 살펴보아도,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돈을 집어넣고 배경화면을 골라보았다.
하지만, 은미가 찍었다는 그 핏빛 빛깔의 장미 배경 사진은 찾을 수 없
었다. 은미가 말한 것이 생각났다. 자기도 한참을 찾다가 안나와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을 때 그 배경이 나타났다는 것이...
화면을 잘 보면서, 다른 옵션을 선택해야 나오는 것인가 자세히 봤지만
특별히 그런 것은 없었다.
한참을 화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등뒤로 희미하지만 얼굴 같은 것
이 화면에 비쳐 보였다.
온몸에 소롬이 쫙 돋는 것 같았다.
확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고 노란 장막만 보였다.
그런데 그 노란장막 한 가운데는 검은 글자로 '스티커 사진'이라고 쓰여
있었다. 바로 한승이 형이 확대해서 보여줬던 그 글씨였다.
점점 확신이 생겨갔다. 사진에 찍힌 그 아이는 사람이 아니였다는 것
이...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았다.
순간 나는 충격으로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은미가 찍었다는 그 붉은 장미의 배경이 화면에 나와있는 것이다.
그 기분나쁜 빨간색의 장미 넝쿨들 사이로 겁에 질린 나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어떻게 해야 될 줄 몰랐다.
나도 이 사진을 찍어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솔직이 좀 무서웠다. 괜히 찍어봤다가 내 사진에도 그 아이의 얼굴이 찍
히고 은미가 당한 일이 나에게도 생길 것 같았다.
눈 딱 감고 찍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촬영이라고 쓰여진 보턴에 손을 올려놨다.
어떻게 할까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호기심과 공포심이 섞인 애
매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촬영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화면에 비친 내 어께 너머로 그 아이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은미의 사진에 나왔던 그 얼굴에 그 표정이었
다. 온 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전율이 느껴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자꾸 은미의 얘기와 그 아주머니가 들려주었던 얘기가 생각나서인지 뒤
가 불안한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일인가.
"시간 초과입니다. 배경을 다시 선택해 주십시오..." 라는 기계음이 들리
며, 그 문제의 배경은 화면에서 사라졌다.
다시 찾아보았지만, 이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더 찾아볼까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불안해졌고, 사실 그
배경이 나온다 하더라도 사진 찍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무서운 곳에 더 이상 있기가 싫어졌다.
나는 도망치듯 장막을 헤치고 그 스티커 사진기를 빠져나왔다.
누군가가 내 뒷덜미를 잡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뛰게 되었다.
그 불길한 건물과 사진기로 멀어져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선선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땀으로 흠뻑졌었다.
도망치듯 나온 내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도 내쉬
게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평범한 자판기 기계인데 너무 무서워 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은미의 얘기하며, 조작이 아니라고 밝혀진 사진,
그리고 그 건물에서 자살한 일가의 얘기 등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논리
적으로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 놈의 괴기한 일을 조사하다가 허비한 것이 생각나자, 찝찝한
생각도 들었다. 내일은 이 모든 것을 잊고 학교에 나가서 공부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은미를 도와 줄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사진 속의 그 아이를 물리칠 수도 없고, 은미를 납
득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단지 최선생님이 시간나는 대로 은미를 봐주
겠다고 했으니 거기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위하고 내일 부터는 내 생활로 돌
아가기로 결심했다.
집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었지만,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그 아이의 소름끼치는 얼굴하고, 버려진 건물에 목메단 세 가족의 모습,
한승이형이 사진을 겹쳐 보여주던 그 끔찍한 얼굴들이 계속 생각났다.
그런 악몽에 시달리면서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책상 위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가 계속나서 잠에서 깨어났다.
전날 밤 잠을 제대로 못자서 그런지 피곤하고, 온몸이 개운하지 못했다.
보니 어느새 오전 11시가 다 되가고 있었다.
드르륵하는 소리는 삐삐의 진동소리였다.
아직 잠이 덜깬 상태에서 삐삐를 보았다. 5개의 메시지와 번호가 들어와
있었다. 번호를 보니 모두 최선생님의 번호였다.
그 번호를 보니 갑자기 잠이 확 깼다.
8282라고 계속 찍혀있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은미 생각이 났다. 온갖 불길한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지만, 애써 그
생각들을 지우며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하려다 먼저 직접 최선생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최선생님이 받았다.
"선생님, 저 일한인데요...
제가 자는라고 삐삐에 일찍 답신 못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일한씨도 아직 모르고 계시군요.
정말 끔찍한 일이 발생했어요..
... 제 잘못일지도 모르죠...
은미가 오늘 새벽에 자살했답니다.
자기 방에서 몸을 던졌데요.. 끔찍하게도...
오늘 오전 10시에 은미를 만나기로 해서 갔는데, 은미 집은 비어있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집앞에 모여있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은미가 자살했다는 거예요.
제기랄! 어제 만났을 때 이럴 줄 알았어야 하는데....
지금 제일병원 영안실에 있답니다.
저도 병원일 좀 매듭짓고 가 볼 생각입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일한씨 듣고 있어요? 일한씨!"
난 충격으로 최선생님의 전화를 끝까지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은미가 죽다니...
머리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그렇게 무서워서, 그렇게 살고 싶어서, 나에게 구해달라고 했는데...
결국 은미를 위해서 해 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은미에게 아무 것도 못 해준 것이다.
나는 대충 상복으로 가라입고 제일 병원 영안실로 향했다.
영안실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참담했다.
어머니는 아직 정신을 추스릴수 없으신지, 영안실에 나오시지 못하셨다.
은미 아버지만이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은미를 보니 눈물이 나왔다.
불쌍한 자식....
병원을 나오다가 은미 친적 분 같은 분이 은미가 죽던 상황에 대해 얘
기하는 것을 들었다.
"...글세, 새벽에 은미 비명소리에 다들 깼다는 거야..
그 애 방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들려, 방으로 갔데...
하지만, 방문을 꼭 잠겨있었어..
방안에서 은미가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대..
'제발이야... 나를 그만 놔둬....
.... 죽을테니 나 곁을 떠나줘....
제발....'
그리곤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은미가 자기 방에서 뛰어내렸대..
그 애 정신이 좀 이상해졌나 봐...
불쌍하지...
그런데, 그 애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은미가 남긴 유서 내용이
었대.. 엄마가 자기 말을 안 믿고 공부하라고 괴롭혀 자살한다는 내용
이었다는 거야...
은미 엄마는 쓰러질 수 밖에 없지 뭐....
쯧쯔...."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한가지 확신을 가졌다.
그 존재가 뭔지도 모르고, 그 존재 이유가 왠지도 모르겠지만, 은미 스
스로 자살한 것은 분명히 그 뭔가가 저지른 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귀신이나 유령을 믿기 싫었다.
은미는 내가 죽인 것 같은 죄책감이 느껴졌다.
애타게 도움을 청했던 아이에게 아무 것도 못해주고, 죽음을 당
하게 하다니....
좌절과 분노, 죄책감 등이 마음속에서 복잡하게 엉켜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단지 은미를 그렇게 만든 그 무엇에 대한 강한 분노와 복수심만 느껴졌
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또 어떤 불쌍한 아이가 공포에 떨다가 죽어가는지도 몰랐다.
영안실을 나서자 마자, 나는 복수의 준비를 했다.
5분만에 준비를 마치고, 한강에 가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가을 한강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많은 사람이 산책을 하고 한가로운 가을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빼어물고 은미와 관련된 일들을 생각해봤다.
내가 배워온 논리와 과학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눈
앞에서 발생했고 나는 그 비극을 막아야 할 것 같았다.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주위는 어둑어둑해졌다.
준비물을 들고 일어섰다.
지금쯤 일어나서 그곳에 도착하면 적당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곳에 다가갈수록 공포와 함께 격렬한 적개심이 느껴졌다.
한 손에는 망치를, 한 손에는 신나를 들고 문제의 스티커 사진기 앞에
섰다. 여기서부터 모든 악몽은 시작된 것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전날 밤과 다름없이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분노가 내 감정을 지배하자, 두려움은 사라졌다.
나는 장막을 젓히고 화면을 바라보고 섰다.
징그러운 괴물을 내려치는 기분으로, 망치를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 그
화면을 내려쳤다. 불꽃이 튀기며 화면이 깨졌다.
통쾌했다.
몇번을 내려쳐 스티커 사진기를 박살냈다.
파편이 튀겨 손에 상처가 나고 피가 흐리는 것에는 전혀 게의치 않았다.
어깨가 아플 때까지 내려치고, 망치를 내려놨다.
그리고 준비한 신나를 기계 주변에 뿌렸다.
사유재산 파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지만,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 신나 한통을 다 뿌린 후,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라이터를 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과 10
분전만 해도 말짱하던 라이터가 불이 붙지 않았다.
한참을 해봐도 불이 붙지 않았다.
이상했다. 뭔가가 방해하는 것 같았다.
구멍가게로 들어가 라이터를 하나 사올까 했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이
기계를 불태운 범인이요 하는 멍청한 짓 같았다.
라이터를 집어 던지고, 망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아스팔트 바닥을 내려쳤다.
순간 불꽃이 튀어 신나에 붙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 스티커 사진기
를 활활 태웠다.
어디선가 여자 아이의 비명 소리인지 불이 붙는 소리인지 구분 안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게의치 않았다. 오히려 비병소리로 생각하니 겁
이 나기는커녕 더욱 통괘해졌다.
나는 한참을 붙타는 기계를 바라 보았다.
주머니에서 그 기분나쁜 아이의 확대된 사진을 꺼내 불길속으로 던졌다.
시원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허탈해졌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 과연 무엇을 이루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지울 수 없는 찜찜함을 느끼면서 발길을 돌렸다.
모든 것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러 폭음을 했다.
술에 만취해 어떻해서 집에 들어갔는지 기억이 없었다.
다음 날, 한승이 형의 전화에 잠이 깼다.
"일한아, 들어봐..
오늘 작업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네가 맡기고 간 두장의 스티커 사진 있잖아..
아침에 와보니, 그 사진들이 둘다 하얗게 변해있었어..
어제 밤까지 선명하던 사진들이 백지처럼 변한 거야..
이상해서 그 사진을 스캔해서 보관했던 컴퓨터를 켜봤어.
그런데 컴퓨터가 켜지지 않는거야. 전원에는 이상이 없어 본채를 분해
해보니, 이게 왠일이니..
원인도 알 수 없이 새까맣게 타 있는거야.
결국 그 밝혀낼 수 없는 사진은 영원히 사라진거야...
아무도 모르게...."
은미의 자살이 있은지 한달 반쯤 지난 어느날이었다.
지영이를 만나러 가다가, 우연히 그 스티커 사진기가 있던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 동안 어느새 은미의 일들을 거의 잊었는데, 그 앞을 지나게
되니 모든 것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그 짓다만 건물은 끔직했던 사건을 지워버리기라도 하듯이, 어
느새 새 건물로 탈바꿈해 있었다. 누군가가 그 건물을 인수해 새 건물로
말끔이 단장해 놓은 것 같았다. 내가 불태워버렸던 문제의 사진기는 깨
끗이 치워져 있었다.
천천히 그 새 건물앞을 지나가는데, 화려한 간판아래로 많은 여학생들이
어느 한 가게에 바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무슨 가게인가 간판을 자세히 보다가, 놀라서 움찔했다.
<스티커 사진 - PHOTO SHOP>이라고 써있었다.
가게안을 살펴 보니 스티커 사진기를 여러대 모아둔 곳이었다.
괜히 찝찝한 생각이 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멈추었던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두 여학생들이 흥분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게에서 나왔다. 우연히 그 애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불길한 예감이 들
었다.
"얘.. 이것봐.
정말 나왔어. 소문이 맞나봐...
참 신기하다..."
"얘는 신기하다니..
난 무섭다. 얘...."
그러고는 내 앞을 지나다가 실수인지 우연인지 들고 있던 스티커 사진
을 한 장 떨어뜨렸다. 나는 몸을 구부려 사진을 집어들었다. 새로 나온
종류인지, 내가 알고 있던 스티커 사진보다는 2배는 커보였다.
무심코 그 사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앗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정도
로 충격을 받았다. 온 몸에는 식은 땀이 흘렀다.
그 사진에는 앞에서 얘기하던 두 아이가 밝은 표정으로 찍혀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아이 뒷 배경으로 희미하나마 일곱 명의 얼굴이 보였다.
바로 은미와 자살한 친구애들과 그리고 그 끔직한 아이가 기분나쁜 미
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