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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금계
2013년 11월 10일 오후 1시, 나는 어머님이 기거하시는 광주 문흥동 용봉아파트에서 운동화 끈을 바짝 조이고 산책길에 나섰다.
100가구가 못 되는 용봉아파트 수위 아저씨는 나보다 두어 살 더 자셔 보이는데 그분이 사는 1층 아파트 앞 화단에다 소담스런 국화꽃을 피워냈다. 나는 이제 숱한 생령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세계를 정복했다고 으스대는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이나 나폴레옹보다는 국화 한 송이 옹골지게 피워낸 수위 아저씨를 훨씬 더 존경하게 되었다. 나이를 먹다 보니 마음이 그렇게 쏠리는 것이었다.
내가 늙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경계하는 말이 “늙었다고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인데 오늘은 조언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아직도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의 행적을 읽는 사람들은 자기의 사소한 일상을 되돌아보면서 수위 아저씨 같은 사람을 찾아보라고, 위인 전 말짱 헛것이라고.
위인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내가 존경하는 위인은 우라늄을 찾아내려고 손가락 손바닥이 갈기갈기 찢어진 퀴리부인이나, 새벽마다 “제 목숨은 언제나 나라를 위해 바치겠습니다.”고 길게 기도한 후 대통령 집무실로 출근한 폴란드의 바웬사나, 힘들고 버거운 사람들이라면 어느 곳이나 뛰어드는 요즘의 한비야 씨 정도다.
위인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나를 포함하여 여러분들은 위인이 안 된 것을 천만 다행으로 고맙게 여겨야 옳다. 위인이나 천재나 막론하고 얼마나 수고로움이 많은가. 인생의 자질구레한 잔재미들을 누리지 못하고 오로지 한 길로 매진하느라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 그 사람들은 어느 누추한 포장마차 탁자에 퍼질러 앉아 내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딱돔구이를 먹어보지도 못했을 터이고, 그렇고 그런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낄낄거리며 참이슬 술잔을 부딪치고
“세계 평화와 조국 통일을 위하여 건빠이”
외치는 즐거움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 씨부렁거렸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인 것이다. 자기가 보통사람이라고 판단되는 사람은 자기야말로 이 시대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자부해도 좋다.
나는 내 동생한테 배운 말을 좋아한다. 사소한 것을 중시하라. 무엇이 사소하냐고? 이 세상에 사소한 것 아닌 것이 없다.
저 풍란과 고사리에도 빛과 그림자가 뚜렷하다. 나는 우리 집 거실의 풍란과 고사리에 쏟아지는 해님의 은총에서 날마다 아주 사소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내가 수학에 조금 약한데 우연의 일치인지 우리 어머님 연세를 기억하기가 참 쉬워서 좋다. 우리 어머님은 88세, 나는 68세, 우리 둘째아들은 38세, 둘째아들의 아들은 8세. 열만 보태거나 빼면 만사형통이다. 게다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 시대의 마지막 교사 고 선생님은 열 살 위인 78세, 내가 가장 믿음직스러워하는 미술과 김 선생은 열 살 아래인 58세.
88세가 되신 우리 어머님은 7남매를 키워내시느라 수고로움이 아주 많으셨다. 이제는 거동도 불편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하셔서 힘들지만 그래도 자식들이 다달이 예금계좌로 보내오는 용돈으로 큰 불편 없이 생활하시니 그나마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는 셈이다. 우리 어머님은 자식들의 봉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분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은 거의 열흘 가까이 나주 금성산으로 땔나무를 하러 올라가셨다. 나도 가끔 따라 올라갔다. 소나무가 귀할 때인지라 나무라 해봐야 사람 키 높이로 자란 푸나무를 베어 말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게질에 서툰 아버님은 별로 많지도 않은 푸나무를 짊어지고 뒤뚱거렸다. 어머님은 목이 부러져나갈 만큼 우람한 나뭇단을 묶어 머리에 이고 뒤뚱뒤뚱 내려왔다. 누군가 산 비탈길에서 넘어지면 그 때가 모두 쉬는 시간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다리야.”
늘그막에도 온 삭신이 쑤시는 것은 죄다 옛날 물불 가리지 않은 혹사의 업보에 다름 아니다.
요즘은 시대정신이 바뀌어 노인을 봉양하려고도 하지 않고 봉양 받으려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나도 말 못할 여러 가지 속사정으로 장남이지만 우리 어머님을 모시지 못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용봉아파트 들르는 것으로 불효를 땜질하고 있다. 그래도 어머니와 40년 전 50년 전 이야기를 도란도란 회상하는 시간은 나름대로 잔재미가 쏠쏠하다고나 할까.
“아야, 인자 뭔 소용 있겄냐. 맛난 것이나 사다 먹자.”
늙으면 몇 억 개나 되는 혀의 미각 세포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어머님은 틀니를 하셨다. 틀니가 입천장을 막으면 미각은 더 형편없이 떨어진다. 아무리 맛난 것을 먹고 싶지만 아무것도 맛을 모르고 맛이 없다. 그나마 요즘 맛나게 자시는 것이 우동이다. 뜨거운 우동 국물을 후루룩 마시는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부터 맛나게 들린다. 나는 점심으로 우동과 군만두를 시켜서 나누어 먹고 아파트를 나선다. 어머니는 아마도 침대에 몸을 눕히고 또 짧지 않은 낮잠을 즐기실 터였다.
나는 전남대 후문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 동네는 어느 곳도 전남대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모두 전남대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 음식점이 즐비하다.
나는 이곳에 쓰라린 추억을 갖고 있다. 스무 해쯤 되었는가. 가까운 윤 선생과 이 부근에서 술을 마신 후 나는 어머님 댁으로 걸어가고 윤 선생은 택시를 탔다. 그런데 불량배한테 ‘퍽치기’인가 ‘아리랑치기’인가를 당해 칼로 턱을 찔려 중상을 입어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났다. 그 때의 내 미안하고 참담한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전남대 곁의 북구청. 나는 벽화를 사랑한다. 그래서 다른 구청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특히나 북구청 청사 위에 그려진 멕시코풍의 벽화를 너무나 좋아한다. 북구청 벽화를 좋아하다보니 북구청도 저절로 좋아졌다.
벽화는 관공서의 딱딱하고 권위적인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학교들도 놀고 있는 벽면이 많다. 나는 학교의 벽면들도 학생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족시킬 수 있는 벽화로 가득하기를 빌어본다.
때마침 북구청 정원에서는 국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정원도 널찌막하고 국화도 정원에 어울리게 잘 배치했다.
게다가 북구청의 국화전시회가 함평이나 영암이나 곡성의 국화전시회보다 좋은 점은 시민들의 생활 현장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접근성이 좋다. 보통 사람은 함평, 영암, 곡성의 국화 축제를 구경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나는 요즘 일본말 공부를 시작했다. 오사카에 사는 손자와 어쩌면 장래에 일본말로 대화를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내가 이미 아는 단어도 몇 있다. 다마네기는 양파고, 스메끼리는 손톱깎이다. 아오끼는 靑木이라는 나무고 사시끼는 꺾꽂이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도 국화 줄기를 사시끼(꺾꽂이)해서 국화송이를 피워봤다. 때문에 국화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 천둥 번개 무서리는 그만두고라도 사람 손길이 얼마나 수고롭게 자주 가야하는지 잘 알고 있는 셈이다. 국화 축제를 구경하면 경이로움을 금할 수 없다. 구경꾼들의 눈을 즐겁게 하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 손길이 수고로웠을까.
국화 전시장을 둘러보며 그러잖아도 좋은 북구청이 더욱 좋아지기 시작했다.
제12회 북구 연합회장기 배드민턴 대회.
전남대와 딱 붙어있는 체육관에서는 때마침 배드민턴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줄잡아 천여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체육관에서 나는 삶의 잔치스러움을 실컷 즐겼다. 오메, 오메, 학교 체육관은 보통 네 개가 고작인데 여기는 코트가 열 개를 넘었다. 코트마다 흥분과 열기가 뜨거웠고 관중들의 함성이 천장을 울렸다.
칠십이 가까운데 그나마 소주 몇 잔씩이라도 즐길 수 있는 체력이 나는 운동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근무할 때 30년 가까이 테니스와 탁구와 배드민턴으로 일주일에 몇 번씩 땀을 흘렸기 때문이다.
배드민턴이 얼마나 허둥대고 아슬아슬하고 짜릿짜릿한 운동인지 안 쳐 본 사람은 말을 말더라고.
때마침 점심참이었다. 구경나온 가족들과 경기가 없는 선수들은 동아리별로 체육관 안팎에서 김밥과 이제 갓 버무린 벌건 배추김치와 삶은 돼지고기와 소주 맥주를 권커니 자커니 뻑적지근하게 먹어대고 있었다. 나도 먹을 줄 아는데. 어찌하는가 보려고 그들 가까이 서 있어도 전혀 먹어보라는 소리를 안 했다. 고연 친구들 같으니라고.
살짝 서운한 느낌을 남겨두고 체육관 후문을 빠져나오니 바로 전남대학교였다. 바야흐로 여기 단풍은 이제야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전남대학교는 호남의 명문이다. 지금도 호남을 이끌고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 출신이지 않겠는가.
지금은 전남대학교 학생이나 교수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가 따로 없다. 내가 중학생일 때에는 ‘황금마차’라고 불리는 통학차가 광주 거리를 자랑스럽게 누비고 다녔다. 버스 앞이마가 지금처럼 반듯하게 깎인 ‘코빵뺑이’가 아니라 엔진 통이 불룩하게 내민 구식 버스였다. 버스 사방을 노란색으로 칠해서 별명이 ‘황금마차’였다. 그 시절 내게는 그 버스가 학문의 상아탑으로 들어가는 성스러운 상징 같아서 얼마나 거룩해보였는지 모른다.
내가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통학을 하던 중학생 시절에 의형제를 맺었던 형님이 전남 대학생이었다. 그 형님은 나한테 편지로 함석헌의 시도 보내주고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수필집도 빌려주었다. 그 당시 중학생이던 나한테 대학생은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까마득히 높은 위쪽에 자리한 어른으로 보였다.
세월이 흐르면 눈도 달라진다. 이제 내 눈에는 대학생들이 아직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풋내기 총각 처녀들로만 비친다. 그래도 내 맘 한 귀퉁이에는 전남대학교를 뿌듯해하는 애착심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전남대학교의 명물 연 방죽. 예전에는 그저 평범한 연못이었는데 수십 년이 흐르면서 연이파리가 수면을 뒤덮고 수목을 정성스레 가꾸고 분수를 뿜어내서 꽤 멋들어진 산책로를 이루었다. 사람도 가꾸기 나름이라지만 연못도 가꾸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늦가을 오후의 휘황한 햇살을 듬뿍 받은 단풍잎이 꽃보다 예쁘다.
너른 흙 운동장 옆에는 너른 테니스장. 도대체 코트가 몇 면인지 모르겠다. 요즘 목포시내 중고등학교에서는 테니스장이 속속 사라지고 그 자리에 체육관이나 급식소가 들어서고 있다. 이제 힘이 떨어져 테니스 칠 형편도 못 되지만 나는 괜히 테니스장이 자취를 감출 때마다 섭섭함을 금할 길 없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내 경험으로는 햇살 눈부신 흙바닥에서 맑은 공기 실컷 마시며 뛰어다니는 테니스만큼 좋은 운동도 없다.
운동장 너머로 보이는 광주의 진산 무등산. 전남대에서 무등산이 저렇게 온전히 보이다니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괜찮은 셈이다.
‘무등산 아침 해같이 눈부신 우리의 기상’
문득 어느 고등학교의 교가가 떠오른다. 도시 가까이에 천 미터 넘은 산이 자리한 경우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지만 이번에 국립공원으로 승격한 무등산은 가히 광주의 상징이자 수호신이나 다름없다. 우리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학교에서 입석대나 서석대, 산장까지 걸어서 소풍을 다녔다. 지금 학생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언젠가는 저 산으로 ‘토끼몰이’를 간 적도 있었다. 토끼를 몇 마리나 잡았는지는 모른다. 쌀쌀한 늦가을 차디찬 도시락을 먹는데 학교에서는 손수레에 드럼통을 싣고 가서 돼지고기로 따끈한 국을 끓여 전교생들에게 나누어 먹였다. 돼지고기가 몇 점이나 들었던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학생들을 생각하는 선생님들의 배려가 뼈에 사무치게 고마워서 두고두고 잊히지 않았다.
무심한 듯 밋밋하게 흐르는 능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저 산을 떨리는 음성으로 노래하고 떨리는 손으로 그렸는지 모른다. 산 이름조차 등수를 따지지 않고 등수를 매기지 않는 무등산, 저 산은 아직도 삼십 년 전 깃대봉 너머로 들리던 5.18의 아련한 함성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저 산은 지금도 평등 대동 세상, 화엄의 세계를 이룩해줄 미륵불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대학교 대운동장. 예전에는 그냥 수수한 흙바닥이었는데 이제는 트랙을 설치하고 인조잔디를 깔고 말끔하게 단장했다.
너른 잔디밭과 울창한 수목이 에워싸고 있어서 학생들뿐 아니라 시민들한테까지 좋은 산책과 휴식처 구실을 하고 있다. 새벽에 나와 보면 많은 주민들이 트랙을 열심히 돌고 한쪽에서는 건강 체조를 익히고 있다.
운동장에서 뛰는 축구선수들이 부럽다. 나도 소싯적에는 축구공을 따라 달리며 숨을 할딱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몸이 말을 안 들어 엄두도 못 낸다. 일 분만 뛰어도 혓바닥이 쏙 나온다.
운동장에서 본관 건물로 올라가는 곳에 즐비하게 늘어선 히말라야시다. 전에는 흔했지만 요즘은 보기 드물어진 나무다.
나는 초등학교 교정에 늘어선 히말라야시다의 그늘 아래 모래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 연습을 하며 자랐다.
히말라야시다(신은숙)
-흰 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구름다리 건너던 갈대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드디어 대학교 본관 건물. 눈이 시리게 새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적벽돌과 흰 페인트가 잘 어울려 햇살을 듬뿍 받고 있다. 건물 전체가 참 기품 있고 조화롭고 안정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대학을 대표하는 건물이자 수십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다. 요즘 지어진 숱한 건물들을 볼 때에는 어쩐지 서먹한 기분이 드는데 본관 건물을 보면 이제 전남대학교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유 선생이랑 러시아 갔을 적에 스탈린의 지시로 지었다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30층짜리 모스크바 대학교를 구경하기도 했지만 이제 국력이 강해진 우리나라도 러시아에 뒤질 이유가 전혀 없다. 전남대학교에서도 모스크바 대학교처럼 숱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대학 본관 건물 앞마당의 조각품. 꼭대기의 멋진 공작새가 풍향에 따라 이리저리 빙빙 돈다. 대개의 조각품들이 부동의 자세를 고수하는 편인데 공작새가 빙빙 움직이도록 설치한 것은 꽤 색다른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경남 창원의 도립미술관인 ‘신나는 미술관’에 갔을 적에 옛날 명화들을 디지털화해서 그림의 부분들이 움직이도록 고안한 것을 보고 얼마나 신기했던가. 움직임은 생명의 또 다른 징표다.
대강당. 1989년 저 강당에서는 전교조 광주 전남지부 창립을 재촉하는 대회가 열렸다. 나는 후문에서 경비를 맡은 대학생들에게 입장을 저지당했다. 흰머리에 지긋한 나이라 장학사나 교감 아닌지 의심을 받았다가 동지들의 해명으로 겨우 통과했다.
강당에 운집한 수많은 동지들의 함성과 구호와 노래, 숱하게 나부끼던 거대한 깃발들, 나는 뭉클 치밀어 오르는 감동으로 그만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윤영규 위원장, 정해숙 위원장, 지선 스님. 어언 24년 전, 그 시절이 그립고 그 동지들이 그리워 새로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토치카처럼 완강해 보이는 도서관. 전남대는 5.18민주항쟁의 진원지이자 출발점이었다.
그 날 새벽 우리 동생은 전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무자비하게 들이닥친 계엄군들에게 쫓겨났다. 그 뒤로 몇 날 며칠씩 시내를 배회하며 돌멩이를 던지고 다녔다.
5.18 이후 전남대학교에는 곳곳에 초대형 걸개그림과 현수막이 걸렸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그림들과 무시무시한 구호들이 어지러웠다. 그것이 야만과 폭력의 난장판을 젊음으로 저항하는 시대정신이었다.
이제는 대학 경내의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그 살벌하고 선동적이던 걸개그림이나 현수막을 찾아볼 수 없다.
기껏해야 국악제 포스터가 고작이었다. 아아, 이제 풍년가를 부르며 배를 두드리는 태평시대가 도래했는가.
대학 중앙 공원. 분수대 가운데 화강암 조각상. 단순하게 죽죽 밀어붙인 평면들이 각도에 따라 미묘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오후의 찬연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그들도 영락없이 해님을 찬양하는 자세를 빚어낸다.
노르웨이 비겔란 조각공원에서 보았던 작품들의 대담함과 힘참과 거침없음을 연상케 하는 씩씩하고 웅혼한 기상이 느껴진다. 화강암이 견고하면서도 얼마나 깨끗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훌륭한 재질인지 잘 말해주는 작품 같다.
경영대학 건물. 나는 광주교육대학을 다니고 함께 기차통학을 하던 친구는 경영대학을 다녔다. 하루는 친구 다니는 학교가 궁금해서 광주역에서 내리자마자 친구와 함께 전남대학교 버스를 탔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였던가. 버스가 대학교에 도착하니 험상궂은 투사들이 우리를 농성장으로 인도했다. 경영대학은 구경도 못하고 시위장에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무서운 경험이었다. 그 때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시위 현장이었다.
경영대 옆의 인문대 건물. 전남대에서는 가장 고풍스런 건물이다. 예전 모습도 이와 비슷했는데 새로 단장을 한 것 같다. 나는 두부모 썰 듯이 반듯한 현대식 건물보다는 이처럼 지붕도 예쁘고 예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을 훨씬 더 좋아한다.
아마도 이 건물 부근에서 강습을 받았던 것 같다. 중등 준교사 시험에 합격해서 2급 정교사 강습, 1급 정교사 강습, 무려 두 번씩이나 이곳에서 강습을 받았다. 그것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으로 이어지는 퍽이나 지루하고 힘든 강습이었다. 그 때는 연수비도 쥐꼬리만큼 나왔다. 지금은 연수 기간도 방학 한 번으로 줄어들었고 연수비는 실비에 가깝도록 인상되었다. 살짝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시대가 그러했던 것을.
내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억울하다고 느낀 경우가 한두 가지 아니다. 예컨대 군대 제대할 무렵이 되니까 교육대 출신들은 하사관 교육만 조금 받고 병역을 면제한다는 발표였다. 또 군대 제대할 무렵부터 ‘자유 급식제도’가 시행되었다. 나는 3년 가까이 취사병이 슬쩍슬쩍 담아주는 보리밥을 먹으면서 늘 허기에 시달렸는데 제대할 때 되니까 대대 식당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궤짝에 김 모락모락 나는 밥을 가득 담아놓고 마음대로 퍼다 먹으라던 것이었다. 사람 약을 올려도 분수가 있지.
또 내가 고흥 발령받았을 무렵에는 광주에서 고흥까지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들썩거리는 비포장 자갈길이었는데 내가 고흥을 나온 후 실크로드처럼 부드러운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깔리던 것이었다. 또 내가 완도 발령받았을 때에는 강진에서 완도까지 흙먼지 자욱한 신작로여서 첫아들이 멀미하다가 버스 안에 구토를 해서 난장판이 되기도 했는데 내가 완도를 나오자 역시 매끄러운 포장도로가 깔리던 것이었다.
또 내가 셋째아들을 낳자 정부에서는 주민 등록세를 물라 했다. 두 명까지만 면제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 넷 낳은 연예인이 자랑스럽게 텔레비전을 장식하고 아이들 낳으면 장려금을 준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었다.
역사의 발전이라 해도 좋고 역사의 아이러니라 해도 좋다. 아무튼 그 시대 태어난 사람은 그 시대의 율법을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나는 몸살 나게 강습을 받았던 전남대 건물 앞에서 조금쯤 억울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전남대 사범대학 건물.
# 2014년도 중등교원 임용시험 대비 특강 개최. 준비과정부터 최근 동향까지. #
그 현수막을 읽으니 시대의 변천으로 맺혔던 아까의 억울함이 일거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옛날 사범대생들은 졸업만 하면 자동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지금은 고시보다 어려운 임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중등교사가 부족하여 초등 교사를 끌어다 쓰던 내 시대와는 영 딴판이다. 시원찮은 시골 대학은 누구누구 임용고사에 합격했다고 현수막을 내걸 정도다. 역사는 쉬운 쪽으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나는 임용시험에 들지 못하고 악전고투하는 젊은이들을 여럿 알고 있다.
# 위기의 시대, 역사교육을 말하다!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40주년 기념 총동문회 #
내용을 읽어보니 어떤 교장이 혁신학교 사례를 발표하고, 어떤 교육 관료가 혁신교육의 이해를 돕고, 어떤 교수가 세계화시대와 한국사에 대하여 강의한다.
글쎄, 정말 우리의 교육은 혁신을 이루고 있을까, 정말로 세계화로 가는 교육,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있을까.
한 마디로 단정 짓기는 징허게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코펜하겐에 갔을 때 관광버스에 오른 한국 안내인 아주머니가 마이크에 자신 있게 선전하던 말이 간절하게 떠오른다.
“덴마크는 일등이 필요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일등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 나라입니다. 학생들이 협동으로 숙제를 푸는 나라입니다. 성차별을 하지 않고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고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나라, 전라도를 홍어라고 놀리고 경상도를 보리문둥이라고 놀리는 나라, 야구라면 코리언 시리즈에서 우승하는 팀만 기억하는 나라, 역사 교과서 왜곡이 제멋대로인 나라, 아직도 득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의 상당수의 뿌리가 친일파에 잇닿아 있는 나라, 전교조 전공노가 정부의 탄압에 함께 공노하는 나라, 군사독재정권에 상당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나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지라 오늘의 진보도 내일의 보수로 전락하는 판국에 모태 보수였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나라, 아이고, 우리의 역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인류의 역사는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나가지만 한 개인이 인류 역사에 끼치는 영향력은 별로 크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시대의 전반적이 추이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점진적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역사가 제대로 발전하거나 말거나 전남대 교정은 곳곳마다 오붓한 단풍 잔치를 벌이고 있다. 바람에 흩날린 낙엽들이 잔디밭을 붉게 물들이고 가문비나무를 닮은 나무는 자기도 결실을 맺었노라 괴상한 하얀 씨앗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계절이 오고 가고 해가 바뀌고 또 바뀌고 고고성을 울리던 아기는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는데 무심한 자연은 인류의 복마전처럼 어지럽게 얽히고설킨 사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철따라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기에 여념이 없다.
단풍을 감상하면서 내가 뭐 역사학자도 아니고 어려운 역사 이야기는 이쯤에서 책갈피에 접기로 한다. 하기야 크게 보면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영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 일개인의 역사, 아웅다웅하는 인류의 역사, 40억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지구의 역사쯤이야 새 발의 피 정도로 약소하고 하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40억 년쯤 살 수 있다면 지구의 종말을 보고 싶기도 한데.......
나는 허무주의자가 되어 가수 정원의 ‘허무한 마음’을 중얼거려보기로 한다.
마른 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던 지난 가을날, 사무치는 그리움만 남겨 놓고 가버린 사람, 다시 또 쓸쓸히 낙엽은 지고 찬 서리 기러기 울며 나는데.......
전남대 경내 자동차 수리소 간판이 반갑다. ‘고치미’는 ‘도우미, 돌보미’ 계열의 신조어다. 당연히 언어도 시대에 따라 변하니까 낯선 신조어를 타박할 일은 아닌 듯싶다.
기왕이면 ‘센터’도 ‘중심’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중국은 프랑스만큼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나라다. 그 나라 가보니 센터에 해당하는 간판은 어김없이 ‘중심’이라고 쓰여 있었다.
드디어 전대 산책도 끝판에 다다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플라타너스 흙길에 당도한다. 늦가을 햇살을 바겐세일로 푸짐하게 받는 잎사귀들이 황홀하게 어룽거린다. 흙길에 자빠져 누운 그림자들도 환상적이다.
요즘은 플라타너스도 히말라야시다처럼 점점 보기 어려워지는 나무다. 어릴 적에는 운동장 가에서 동그란 플라타너스 열매를 주워 동무들 대갈통 때리는 장난이 심했다. 한 대 얻어맞으면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아팠다.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길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드디어 상아탑을 빠져나오니 어지러운 사바세계다. 여기도 플라타너스가 붉게 물들어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자아낸다.
길가에 빼빼로데이라고 크게 써 붙여 놓았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바로 숫자들이 빼빼 마른 11월 11일이다.
상술 한 번 참 교묘하다. 초콜릿 주는 날, 빼빼로 주는 날, 꽃다발 주는 날, 다음에는 또 무엇을 푸짐하게 팔아먹는 날이 만들어질지 모른다.
어머니가 계신 용봉아파트가 가까워졌다. 테마형 숯불구이 전문점. ‘아, 청춘을 적신다.’ 소주, 맥주, 동동주, 각종 안주. 그러고 보니 내 청춘도 신성일, 엄앵란과 함께 늙어 갔다. 저 미남배우는 늙어서까지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닌다.
단풍구경 한 번 잘 했다. 목포 내려가면 또 딱돔구이에다 소주 한 잔, 입술을 촉촉하게 적셔봐야겄다. (끝)
첫댓글 오랜만에 보는 교정입니다. 재작년에 행사가 있어서 가보고 딱 두번의 가을이 지났네요.
조명준 님이 중학생 시절에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통학을 하셨다니 부모님 교육열이 대단하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시절 중학생 후배에게 함석헌 선생의 시를 알려준 그 멋진 동문은 지금도 나주에 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전남대총동창회 나주 홍보이사라 저희 모임 때 한번 모시고 말씀이라도 듣고 싶어서요.
참 글을 맛깔스럽게 멋지게 잘 쓰십니다. 읽는 내내 ^-------------------^ 표정이 가시지 않았답니다.
약주도 안주도 말씀도 마음도 차암 맛깔스럽고 멋지신 분이에요. 호방하시고 화통하셔서 화락하셔요. 나는 이 선생님을 바라볼 때 형님보다는 스승님으로 더 기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