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독을 차고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일화>
- [M부인의 추억 - 이 노래를 영랑에게 드림]. 첫 부인을 사별한 영랑은 2년 후인 18세 때 이화여전을 나와 그의 집에서 하숙하던 강진보통학교 여교사인 미모의 마재경과 열애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랑은 영랑이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서 오래 가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그는 22세 되던 해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정지용 등 문우들과 태화관 등에서 친교를 맺는 동안 최승일의 누이 동생인 숙명여학교 2학년 최승희(당시 13세, 나중에 조선 무용계의 여왕인 된 그녀는 좌파 문인인 안막과 결혼 후 월북)와 약 1년간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다. 영랑의 여동생 김순례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그는 1년 중 6개월은 서울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희와의 사랑도 양가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실을 맺지 못한다. 영랑의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의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는 이유로, 최승희의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각각 반대했다고 한다. 이때 영랑은 실연의 충격을 못 이긴 채 생가의 동백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발각되어 목숨을 건진다. 그리하여 영랑은 그 다음 해 숙부의 중매로 개성 호수돈여고를 나와 교편 생활을 하던 김귀연과 재혼한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주례로 개성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들은 이후 슬하에 7남 3녀(2남인 김현복은 생후 1년 뒤 사망)를 두게 되니 김귀연은 호적상 본부인이 된 셈이다. 그러나 강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로도 영랑은 서울의 명월관과 태화관에서 만난 여자들을 비롯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녀들의 경우도 이복이 섞인 관계로 서로 화해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그의 자녀 중 국내에 살고 있는 사람은 단국대 김현태 교수(5남)가 유일하다. <문학사적 평가> 김소월 이후 우리말 구사에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인 김영랑은 "북도에 소월, 남도에 영랑"이란 말에 어울리게 섬세하고 은은한 서정시의 극치를 이루었다. 그는 박용철과 함께 주도한 {시문학}으로 KAPF 중심의 비문학적 정치주의를 배격하고, 20년대 중반부터 확산되어 오던 순수시의 서정 세계를 열어 놓았다. 시문학파가 주장한 순수시는 일체의 이념적·사회적 관심을 배제하고 오직 섬세한 언어의 아름다움과 그윽한 서정성을 추구하는 시를 뜻한다. 시문학파는 지나치게 개인의 내면 세계에만 빠져 역사 의식을 상실한 채 시어의 조탁에만 열중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시가 언어나 형식면에서 한 차원 높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그들의 공적이라 하겠다.
<시인 김영랑> 장흥에서 강진읍으로 들어오는 <영랑 로터리>에 우리 나라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는 영랑 김윤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던 그 영롱한 서정의 극치야말로 오늘날에도 아낌없는 찬사로 회자되고 있는데, 영랑은 그의 시심이 뿌리를 내린 고향 강진 어귀에 서서, 아직도 모란이 피는 찬란한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903년 강진읍 남성리에서 태어난 영랑은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나온 후 서을로 올라와 서울 기독청년 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휘문의숙에 입학한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 만세 운동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6 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2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하나,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의 생가로 돌아온 영랑은 민족 수난의 한과 비애를 달래기 위해 대나무숲에 싸인 생가의 사랑에서 손수 북을 치면서 시를 읊었다. 마침내 영랑의 서정시가 영롱한 광채를 발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이 동인이 되어 내놓은 <시문학>에서이다. 그리고 1935년 박용철의 힘으로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이 발간된다. 그의 유명한 시<모란이피기까지>도이시집에수록되어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서정주 등이 일제에 꺾여나갈 때 영랑은 김정한처럼 붓을 놓고 지조를 지켰다. 광복을 맞은 영랑은 우익청년운동에 정열을 쏟았으며 1949년에는 한때 공보처 출판국장의 관리직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지하 생활을 하다가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포탄의 파편에 부상을 입고 이튿날 운명하였다. /네이버 발췌/ |
출처: 산다는 것의 의미... 원문보기 글쓴이: 미오
첫댓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줄 줄읊어 보지 않으신 님들 있을까요...아버지와 나란히 영랑시인 얘기하던 그때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시인 김영랑 시 잘 보고 갑니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