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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어머니 모시기를 효로써 하여, 대소변 받아내는 변기와 오물이 묻은 자리를 반드시 몸소 스스로 세탁하고, 추운 계절은 자주 손을 요 밑에 넣어봐서, 차가우면 불을 더 때는데, 비록 깊은 밤 눈보라가 치더라도, 반드시 몸소 스스로 불을 때고, 땔감이 없으면 동산의 나뭇가지를 잘라 계속 넣었다. 종들을 큰 소리로 불러서 어머니가 알게 하거나, 아랫 사람의 원성을 불러오는 일은 끝내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남고 윤이서의 묘지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물론 흔치 않은 일이라 특별히 묘지명에 기록했겠지만, 양반 사대부들도 요새 말로 ‘(마누라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효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반갑다. 게다가 엄청 미남이었다고 하니, 그 잘생긴 풍모로 어머니의 변기와 자리를 씻어드리는 모습이라니, 말해 뭣하겠는가.
다산 선생과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가 (외)증조할아버지인 육촌간이다. 윤이서는 다산보다는 열 살이 많고, 정조임금과는 동갑이다.
긴 묘지명이지만, 다산 선생의 글은 요약하기가 어렵다. 있는 그대로 다 읽어서, 윤이서의 인품과 선생의 그리움을 느껴봄도 좋겠다.
남고 윤참의 묘지명(南皐尹參議墓誌銘)
옛날 정조임금 18년(1794) 9월 중순(中旬), 남고(南皐) 윤공(尹公)이 벗 5~6인을 데리고 백운대(白雲臺) 꼭대기에 올라 마음껏 읊조리고 노래하되 방약무인(傍若無人)하였는데 나도 참여하였다. 돌아와서는 내 집에서 국영(菊影)의 촛불을 베푸니(*국화의 그림자를 감상하는 것인데, 이 게시판 731번 글 참조), 모인 사람이 8~9인이었는데 남고(南皐)가 맹주였다. 술에 취하자 각각 시 수십 편을 짓되 성조(聲調)가 격렬한 것만 취하고 그 나머지는 취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둘째 형님 손암 선생(巽庵先生)ㆍ혜보 한치응(徯甫 韓致應)ㆍ이숙 채홍원(邇叔 蔡弘遠)ㆍ무구 윤지눌(无咎 尹持訥) 등 여러 사람들이 공을 추대하여 사백(詞伯, *문장에서 으뜸이란 뜻)으로 삼았다. 시 한 편을 지을 적마다 공이 흐드러진 목소리로 낭랑히 읊는데 굽이쳐 맑게 넘어가니 온 좌석이 말없이 공의 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이때에 번암 채제공 (樊巖 蔡濟恭) 옹이 정승의 자리에 있고 대릉 이정운(大陵 李鼎運)과 소릉 이가환(少陵 李家煥) 등 재상들이 숲의 나무처럼 늘어섰으며, 나이 아직 안된 이들은 또 뒤따라 모였다. 풍류(風流)가 여유로워 일컬을 만한 점이 있었으니 참으로 성대한 시대였다.
그런데 6년이 지난 1799(정조 23)에 봄에 번옹(樊翁)이 세상을 뜨고 그 이듬해 여름에 정조임금이 승하하고, 그 이듬해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가고, 나와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은 모두 억울하게 죄에 걸리고 그릇되게 함정에 빠져, 풀을 베듯 새를 사냥하듯 연좌율(連坐律)로 논죄(論罪)되니, 조금이라도 생명이 있는 무리들은 벌벌 떨며 죄망에 걸릴까 두려워하였다. 공이 이런 때에 장기(長鬐)의 유배지(流配地)로 내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내왔다.
두멧골서 산발하고 획연(劃然)히 읊조리니,
바다는 아득하여 만리나 멀구나.
맑은 눈물 하만자(河滿子*1)에 흘리지를 말게나,
희음(希音)은 다행히도 광릉금(廣陵琴*2)을 보존하네.
어찌 친한 벗 없으랴만 편지 오는 것 없구나,
다만 고향집 있어 꿈속에서 찾도다.
천고토록 백운대 무너지지 않으리니,
우리 옛날 노닐던 곳 길이 남아 있으리.
(巖阿散髮劃長吟 瀛海茫茫萬里深 淸淚莫垂何滿子 希音幸保廣陵琴
豈無親友無書到 秖有家鄕有夢尋 千古白雲臺不圮 長留吾輩昔曾臨)
내가 이 시를 받아보고는 깜짝 놀라 ‘공처럼 말쑥하며 여린 이가 깊고 굳셈이 이 정도인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고 고백하였다.
그 뒤 10여 년이 지나 공이 원주에서 뱃길로 두릉(斗陵)에 들러 나의 처자(妻子)를 조문하고, 서재에서 다산(茶山)에서 지은 나의 시들을 찾아서는 또 흐드러진 목소리로 낭랑하게 읊는데, 비분격절(悲憤激切)하니 듣는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1818(순조 18)년 가을에 내가 임금의 은전(恩典)을 입어 향리로 돌아왔다. 그 후 두어해 뒤에 공이 또 원주에서부터 나를 찾아와서 3일을 묵었는데, 20년 답답한 회포를 조금은 풀 수 있었다.
1821(순조 21) 가을에 공이 돌아가셨다. 그 이듬해 공의 아들 종걸(鍾杰)이 공의 시문(詩文) 등 유고(遺藁) 20여 권을 가져와 말하기를,
“돌아가신 아버님을 아는 이는 어른이시고, 아버님의 마음을 아는 이도 어른이시고, 아버님의 시와 문(文)을 아는 이도 어른이시니, 고르고 편집하고, 서문을 지어 권두(卷頭)에 붙이는 것도 오직 어른께서 할 일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였다.
“나는 죄인이니, 감히 문자로 공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 오직 땅속에 묻을 명(銘)은 깊이 있어서 멀리 미칠 수 있으니 내가 그것을 지으리라.”
공의 행장을 상고하니 다음과 같다.
공의 휘(諱)는 지범(持範)이었으나, 신유년(1801, 순조 1)에 규범(奎範)으로 고쳤고, 자는 이서(彝敍)이며, 남고(南皐)는 호이다.
윤씨(尹氏)는 대대로 해남(海南)에 살았는데, 그 근원이 매우 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진사(進士) 효정(孝貞)이 있었으니, 어촌(漁村)과 산촌(山村)에 은거하면서 후예의 으뜸이 되었다. 이분이 귤정(橘亭) 구(衢)를 낳으니 벼슬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이르렀고, 이분이 홍중(弘中)을 낳으니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으며, 자식을 두지 못하여 그의 아우 좌참찬(左參贊) 의중(毅中)의 아들 유기(唯幾)를 데려다 후사로 삼았는데, 벼슬은 강원 감사(江原監司)에 이르렀다. 감사가 또 자식이 없어 그의 형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유심(唯深)의 아들 선도(善道)를 취하여 후사로 삼았으니, 이분이 곧 우리 고산선생(孤山先生)이다.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충헌공(忠憲公) 시호를 받았다. 이분이 인미(仁美)를 낳았는데 고산(孤山)이 세상에 미움을 받은 것 때문에 벼슬은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그쳤다. 이분이 휘 이석(爾錫)을 낳으니 음사(蔭仕)로 종친부 전부(宗親簿典簿)를 지냈다.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휘 이후(爾厚)의 아들 두서(斗緖)를 후사로 삼으니 공에게 증조가 된다. 어질고 재예(才藝)가 많아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 일컬으며, 호를 공재(恭齋)라 한다. 조부의 휘는 덕현(德顯)이니, 문장과 덕행이 있었으나 스스로 숨겼으며 호를 포상로인(浦上老人)이라 하였는데, 공재(恭齋)의 9남 중 넷째이다.
아버지의 휘는 위(愇)이니 문장과 덕행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으며 호를 범재(泛齋)라 한다. 내가 옛날 그 유고(遺稿)에 서를 썼다.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睦氏)이니 정랑(正郞) 휘 시경(時敬)의 딸이고, 병조 판서 목창명(睦昌明)의 증손이다. 1752(영조 28)년 12월 2일에 한양(漢陽) 남쪽, 청파(靑坡)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배우자 이미 독서(讀書)할 줄 알았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곡읍(哭泣)의 애통함이 성인(成人)과 같으니, 보는 이들이 감읍(感泣)하였다. 외가에 의탁하여 어머니의 교회(敎誨)를 받았다. 낮에는 밖에서 스승을 따라 글을 배우고 밤에는 돌아와 등불 밑에서 글을 읽는데 '과부의 아들이 드러남이 있지 아니하면 그와 더불어 벗하지 않는다.’ 한 데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더욱 스스로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혹 재미있게 놀다가 시간이 지나버려 어머니가 기뻐하지 않는 얼굴빛이 있으면, 공은 기미를 살펴 곧바로 고치고 부드러운 얼굴빛과 목소리로 갖가지로 위로하여 그 노한 얼굴빛이 풀어짐을 본 뒤에야 그만두었다.
10세에 이미 이름이 도성 안에 퍼져서, 판서 이지억(李之億)과 정승 채제공(蔡濟恭)이 모두 그 이마를 어루만지며 칭찬하였다.
“이 아이는 학문과 행실이 함께 진취하였으니 참으로 보물이다.”
1767(영조 43)에 조모의 상을 당하고 1768(영조 44)년에 해남(海南)으로 내려왔는데, 고향 마을이 외지고 누추하였다. 공은 더욱 정신과 생각을 가다듬어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문장과 역사를 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772(영조 48)년에 조부의 상을 당하였다.
1777(정조 1)년은 우리 정조대왕(正宗大王)이 등극한 원년이다. 증광동당시(增廣東堂試)에 공이 장원(壯元)하고, 마침내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병과(丙科)로 뽑히니 그때 나이 26세였다. 얼굴은 옥을 깎아놓은 듯하고 문사(文詞)는 아담하고 아름다우며, 게다가 일찍 과거에 올랐으니, 법으로는 조정에 벼슬하여 예원(藝苑)에 꽃다운 이름을 드날려야 마땅했다. 그런데 충헌공 윤선도(忠憲公 尹善道)의 후손이기 때문에 무리들이 함께 방해하여 쓰지 못하게 하였다. 관례에 따라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부직(付職)하고는, 12년 동안 바다 모퉁이에 묻혀서 미천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공은 개의하지 않고 태연히 날마다 시를 읊고 글을 지었다.
1789(정조 13)년 여름에 우리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수원부(水原府) 북쪽에 개장(改葬)하려 하였는데, 사람들이 길지(吉地)라고 일컬었다. 이것은 충헌공(忠憲公)이 일찍이 효종(孝宗)의 장지(葬地)로 천거한 터이다. 주상이 바야흐로 감격하여 옛날 일을 생각하므로, 주서(注書) 심규로(沈奎魯)가 공을 천거하여 가주서(假注書)로 삼았는데, 병조(兵曹)에서 또 군직(軍職)을 임명하지 않았다. 주상의 꾸짖는 유시가 매우 엄하였으니, 그날 밤으로 전관(銓官)을 불러 임명하도록 하였다. 겨울 음력 10월에 현륭원(顯隆園)에 장사를 마쳤다. 그 이듬해 1790(정조 14)년 여름에, 공이 죽포(竹圃) 심규(沈逵)의 집네 세 들었는데, 공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특별히 제수하고, 이튿날 경모궁 영(景慕宮令)으로 제수하고 또 그 이튿날 병조 좌랑에 제수하였다. 시기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이같이 해서 그치지 않으면 장차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될 것이다.” 하였다.
적신(賊臣) 권유(權裕)가 상소하여 충헌공(忠憲公)을 폄하(貶下)하고 무함하였으니, 그의 의사는 영원히 그 자손의 벼슬길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 공은 즉시 병을 핑계하고 출사하지 않았는데, 주상이 오히려 체직(遞職)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감군(監軍)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공은 명패(命牌)를 받지 않았다.
주상은,
“왕역(往役)을 감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고, 정원(政院)의 사령(使令) 10인을 보내어 명패를 받도록 재촉하였다. 사령이 거리에 서로 잇달았으되 공은 그래도 동요하지 않았다. 주상이, “마땅히 군율(軍律)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하니, 정랑(正郞) 이복윤(李福潤)이 와서 주상의 하유(下諭)를 전하였다.
마침 주상이 효창묘(孝昌墓)에 거둥하였는데, 공이 길가에서 대죄(待罪) 하였더니, 주상은 좌승지 권엄(權𧟓)을 시켜 군문(軍門)으로 불러들여 하유(下諭)를 듣게 한 뒤에 보내주었다.
하계(夏季) 공적을 심사하는 자리에 공이 또 참여하지 않았다. 병조에서 고과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고과를 중(中)으로 매기니, 어필(御筆)로 고쳐 쓰기를,
“고과하는 자리에 참여하기를 어렵게 여기니 고과가 상(上)이다.” 하였다. 이때 주상이 얼굴의 부스럼으로 편치 못하였다. 공을 불러 묻기를,
“생달나무[生達樹]의 씨를 가져다가 기름을 짜면 그 기름으로 부스럼을 치료할 수 있는가?”
하였으니, 공이 옛날에 들려 드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있어서 또 임용되지 못하고 수년간 한가로이 지냈다. 채 상공(蔡相公)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기를 권하였지만, 공이 서울로 돌아오니 집이 없었다. 이시우(李是釪)가 소릉(少陵)에 우거(寓居)하여 두어 간 집이 그 때도 비어 있었다. 마침내 들어 가서 살고 스스로 호를 짓기를 기원(寄園)이라 하였다. 가난하여 괴로운 상황이 많아 내가 날마다 따라다니며 위로하였다. 승지 신광하(申光河), 이공 가환(李公家煥), 판서 이정운(李鼎運), 참판 이익운(李益運)이 모두 공과 즐겨 서로 모였는데 가는 곳마다 담소로 밤을 새웠다.
이보다 앞서 주상이 수원(水原)에 신읍(新邑)을 경영하면서 윤씨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여 충헌공(忠憲公)의 자손이 살도록 하였는데, 1795(정조 19)년 겨울에 공이 이 집으로 옮겨 살았다.
1796(정조 20)년 봄에 주상이 신읍(新邑 수원)에 거둥하여 공을 불러 입시(入侍)하게 하고, 좌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문학과 행실이 구비되었는데 여태까지 불우하였으니 세도(世道)의 잘못이다.”
하였다. 승지 채홍원(蔡弘遠)이 아뢰기를,
“윤모(尹某)가 낙남헌송(洛南軒頌)을 지었는데, 문장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하니, 주상이 좌상(左相) 채공(蔡公)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도 보았소?”
하니, 채공이 대답하기를,
“신도 보았는데 사기(詞氣)가 웅려(雄麗)하여 참으로 걸작이었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하고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시종(侍從)의 자리에 두어야 합당한데, 등과(登科)한 지 수십 년 동안 침체한 것이 애석하다.”
하고, 이어서 어가(御駕) 호종(扈從)을 명하였다. 공이 창졸간에 복장이 없어 백의(白衣)로 호종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겼다.
주상이 지지대(遲遲臺)에 이르러 어가(御駕)를 멈추고 시를 읊고는 공에게 화답하도록 명하였다. 시흥(始興)의 행궁(行宮)에 이르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나도 때로 공의 지조 있는 행실과 아름다운 문장을 자주 말하였는데, 주상은 일찍 등용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1797(정조 21) 봄에 또 정언(正言)을 제수하였는데, 마침 공이 소명(召命)을 어겨 외직으로 임천 군수(林川郡守)에 보임되었다. 하직인사를 올리자, 주상이 일렀다.
“외직으로 보임한 것은 네 집안을 위해 옛정을 생각한 것이며, 또 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기 때문이다. 가서 일을 잘하여 내 귀에 좋은 소문이 들리도록 하라.”
공이 임천 군수로 부임하여서는, 음악과 기생을 물리고, 뇌물을 물리치며,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으며, 밤낮으로 잘 다스리기를 강구하였다. 임천군에 모시베가 산출되었는데 고운 것은 비단[綺羅] 같았다. 모든 잘못된 규례로 내려오는 것은 혁파해 버리니 부녀자도 모두 거친 것을 입었다. 금강(錦江) 연안의 어호(漁戶)에 해마다 홍어(薨魚) 값으로 3만 전을 거두었는데 다 혁파하였고, 유민(游民)을 등록하여 군(軍)으로 삼고, 관에서 해마다 제번전(除番錢) 8만 전을 거두었는데 다 떼내고, 군기(軍器) 및 수전(水戰)의 도구를 수리하였다. 또 흉년이 들자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휼(賑恤)하였다. 임천군에 숨기거나 누락된 전결(田結)이 있었는데, 관이 아전과 더불어 그 포탈한 세를 나누어 해마다 수천 냥을 가로챘다. 공이 이것을 찾아내어 재해를 당한 곳의 부세(賦稅)로 충당하고, 또 진전(陳田)을 조사하여 경작하는 곳을 찾아내어 부세 액수(額數)에 충당하였다. 백성이 크게 기뻐하여 치적(治積)의 명성이 사방으로 퍼졌다. 주상이 이를 염탐하여 알고 상공(相公) 및 한두 근신(近臣)에게, 임천이 과연 잘 다스려진다고 여러 번 일컬으며 얼굴에 기쁨이 넘쳤다.
임천군에 호족(豪族)이 있어 세력을 믿고 그 악을 자행하여 살인까지 하고, 또 죄인들의 은신처가 되었지만, 군수로 온 사람들은 감히 누구냐고 묻지도 못했다. 공이 그들 중에 더욱 강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몇 사람을 잡아다가 다스리니, 그 사람이 어렵사리 구멍을 뚫어 공의 지인의 편지를 얻어 상자에 채워서 청탁하려 하였다. 공이 더욱 엄하게 다스리니 그 사람이 마침내 달아났다.
은정(隱丁 호적에 누락된 장정) 1백여 명을 조사(調査)하여 군액(軍額)에 등록하였다.
강 연안의 진흙이 쌓여 밭이 된 곳을, 호가(豪家)에서 공안(公案)을 내어 마음대로 차지하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였는데, 공이 다 빼앗아 백성에게 주었다.
임천군이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사이에 끼어 있어 친척과 친구의 왕래가 매우 잦았다. 공이 모두 기꺼이 맞이하고, 선물을 후히 하고, 그 상사(喪事)와 혼인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니, 한 해 남짓하여 포흠(逋欠)이 3천여 냥이나 되었다. 주상이 채공(蔡公)에게 이르기를,
“그에게 군읍을 주어 그 재능을 시험하고 또 그의 가난함을 염려해 주었더니, 지금 포흠을 많이 졌다 한다. 이는 내 바라던 뜻이 아니다.”
하였는데, 채공이 이것을 편지로 알려 왔다.
공의 어머니가 병이 들자 온 경내의 부로(父老)들이 관문(官門) 밖에서 기다리다가 병이 나은 뒤에야 흩어졌다. 공이 그 말을 듣고 자리를 베풀어 부로들을 모아 잔치하여 그들과 함께 즐기고 쌀과 고기를 주었다.
1798(정조 22)에 재변이 있어 구언(求言)하자 공이 임금의 뜻에 부응해 상소하여 시의(時宜) 7조를 진달하였다.
1. 쌍수성(雙樹城) 군량의 곡식을 옮겨 기민(饑民)을 구휼할 것.
2. 전선(戰船)으로 삼세(三稅, *전세(田稅)ㆍ대동(大同)ㆍ호포(戶布)의 총칭)의 미곡을 조운(漕運)하여 잡된 비용을 줄일 것.
3. 군현으로 하여금 한 해 걸려 진전(陳田)에서 기전(起田)을 밝혀내어 백징(白徵)하거나 요행히 누락되는 것이 없도록 할 것.
4. 지방수령으로 하여금 백성을 모집하여 묵밭을 개간하게 하되 그 세율(稅率)을 감하고 연한을 정하여 부세를 면제하게 하며, 근태(勤怠)를 조사하여 고과를 매길 것.
5. 저수지를 증설하고 산림(山林)을 엄금하여 가뭄에 대비할 것.
6. 강 연안의 이생지(泥生地)를 토호가 입안(立案)하여 가로채는 것을 엄금할 것.
7. 창모(倉耗)의 조곡(糶穀)을 하천 연변의 고을에 치우쳐 배정하지 않음으로써 조용(刁踊, *물가 폭등)을 막을 것.
주상이 보고는 얼굴빛을 변하여 칭찬하고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그 중 전선으로 세미(稅米)를 운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륜(經綸)이 있다고 허여하여 묘당(廟堂)의 담당 신하로 하여금 자세히 확정하여 덧붙여 아뢰게 하고, 나머지도 사리가 맞다고 칭찬하고 곧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칙유(飭諭)하여 창모의 조곡을 치우쳐 배정하지 말고 금령(禁令)을 준수하라고 하였으며, 또 연읍(沿邑)과 산읍(山邑)은 모두 호수(戶數)를 비교하여 곡식을 헤아림으로써 고르지 않음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 *검토하여 안을 만들어 다시 아룀)를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주상이 꾸짖어 유시하기를,
“경들은 임금의 녹을 먹고 임금의 녹으로 입으며, 명주로 몸을 싸고 곡식으로 배를 채우는 등 영화와 총애가 한껏 구비되었는데, 조그마한 고을의 한 군수가 올린 상소에 대해 답변하는 것을 얼버무리려 하니, 경들을 종중추고(從重推考, *정해진 규정 중 무거운 쪽으로 징벌함)하여 시속을 바로잡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하고, 이어서 연신(筵臣)에게 하유하였다.
“윤모(尹某)의 소는 어찌 특이하지 않은가. 이러한 문장과 식견은 어디에 시행한들 불가하랴.”
1799(정조 23) 초봄에 대부인(大夫人) 목씨(睦氏)가 군서(郡署)에서 죽으니 관내 백성이 관례에 따라 부의(賻儀)를 보내왔으나 공은 물리쳤다. 백성들이 울며 애걸하기를,
“이러시면 수령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향중에서 한 사람을 내어 상여줄을 끌게 해주소서.”
하므로, 공이 부득이 허락하였다.
공은 슬퍼함이 절도에 넘어 눈물이 그칠 때가 없었다. 그래서 고침(藁枕)이 썩어 상(祥)이 되기 전에 세 번이나 바꾸었다.
1800(정조 24) 6월에 우리 정조대왕(正宗大王)이 승하하니, 예관(禮官)이 정순태비(貞純太妃)의 복제(服制)를 의논하여,
“적손(嫡孫)을 세워 후사를 삼았으니(正而不體) 기년복(期年服)으로 해야 한다.”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자최(齊衰) 3년은 삼조(三朝)의 성명(成命)이 있다.”
라고 논하려 하였다. 용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효묘(孝廟)의 체이부정(體而不正)은 갑은 서(庶)라 하고 을은 적(嫡)이라 하여 혹 논쟁할 수 있는 길이 있거니와 대행왕(大行王 정조를 말함)의 정이불체(正而不體)는 조(祖)는 조(祖)라 하고 손(孫)은 손(孫)이라 하니, 실로 서로 논란할 말이 없다.”
하였더니, 공은,
“그대의 말이 옳다.”
하고, 그만두었다.
1801(순조 1) 봄, 도당회권(都堂會圈)에 대제학 윤행임(尹行恁))이 공의 이름을 올리려 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정조임금의 유의(遺意)이다.”
하였는데, 저지하는 대신이 있어서 결국 올리지 못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조정의 상황이 일변(一變)하였다. 정조임금이 아끼고 쓰던 신하들은 죽거나 유배되고, 여파가 미치는 바에 따라 밀치고 모함하여 거의 다 없어졌다. 당인(黨人)이 공의 죄를 찾아내려 하였으나 흠을 찾지 못하여 마침내 완인(完人, 흠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2년간 조그마한 녹봉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임신년(1812, 순조 12) 봄에 이르러 정조임금의 회갑이라 하여,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임신년(영조 28, 1752)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한 자급씩 올려주니, 드디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부직(付職)되었다.
7년이 지난 1818(순조 18) 겨울에 조정에서도 또한 너무 심하였음을 스스로 깨닫고 비로소 공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서용(敍用)하였다. 1819(순조 19)년 여름에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다가 겨울에 병으로 면직되었다.
1821(순조 21) 여름에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다가 8월 25일에 병으로 세상을 마치니 향년 70세였다. 3개월이 지난 21일에 남양부(南陽府) 호련산(瑚璉山)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풍의(風儀)가 빼어나고 깨끗하여 진토(塵土)의 기름진 기미가 없었다. 만어정(晩漁亭) 권공 사언(權公師彦)은 공을 품평한 적이 있었는데 말하기를,
“윤이서(尹彝敍)는 옥으로 된 산과 숲이 하늘 바깥으로 빠져 나온 것 같다.”
하였다. 야위고 약하여 옷도 감당하지 못할 듯했지만 그 지조가 확고함에 이르러서는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도 동요시킬 수 없었다. 조정에 벼슬한 지 45년 동안에 눌리고 막히고 침체되어 끝내 불우한 채 펼치지 못하였으나,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는 말은 입에서 낸 적이 없었다.
1794(정조 18)ㆍ1795(정조 19) 사이에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갈라져서 채공(蔡公)의 문하에 벗어난 자를 매우 엄하게 공격하였다. 공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번옹(樊翁)을 위하여 적을 심는 것은 좋은 계책이 못 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뭇 비방이 집중되더라도 친구에게는 그 친구의 정을 잃지 않았다.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공이 유약해서인가 의심하였으나 공을 아는 사람은 도리어 이것을 어렵게 여겼다.
세대가 내려오고 문장이 쇠퇴하여 시경의 맥이 전해지지 않더니, 공이 거문고 하나 피리 하나(單絲孤竹)로 세속의 음악이 끝나자 아악(雅樂)을 연주하는 사람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 시는 깨끗하고 비어 있으며 담백하고, 다듬거나 꾸밈을 일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경(情景)을 모사(模寫)함에 이르러서는 문득 혼전(渾全)으로써 쇄쇄(瑣瑣)함을 능가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매번 위축되어 스스로 그만 못하다고 여겼다.
일찍이 검무편(劍舞篇)을 지었는데, 번옹(樊翁)이 감탄하기를,
“비록 한악(韓偓, *당나라의 시인)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
하였다. 또 일찍이 지은 시에,
“가을 되니 정신은 나무 끝에서 나고,
달 밝으니 살아옴이 누각 서쪽에 있도다.
(秋至精神生木末 月明消息在樓西)”
라는 구절이 있는데, 번옹이 읊고 말하였다.
“기상이 힘차고 표일하니 그 평생을 점칠 수 있다.”
공은 재물과 이익에 담박하고 은혜를 즐겨 베풀었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세상에서 곳간을 지키기만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고금의 재보(財寶)를 축적하고 토지와 살림을 경영한 자를 어찌 셀 수 있으랴만, 노숙(魯肅)의 미균(米囷)과 범요부(范堯夫)의 배에 실은 보리만이 천고에 썩지 않았다. 이것은 무릇 남에게 베푼 것은 곧 나의 재물인 까닭이다.”
공은 벼슬에 담박하고 말을 삼갔다. 1806(순조 6)년 봄에 당로자(當路者)가 과감히 말하는 자를 얻어, 상대방 당인(黨人)을 배척하려 하였는데, 어떤 손이 공을 추천해 말해 주겠다는 자가 있었다. 공은 말하기를,
“그대가 나의 침체함을 생각하여 지름길을 알려 주니 참으로 고마운 뜻이다. 그러나 주장하는 바가 공정하더라도 만약 사주를 받아 발의하면 또한 사냥개나 괴뢰(傀儡)일 뿐이다.”
하였다.
일찍이 병조에 숙직할 적에 어떤 권세 있는 재상이 공에게 한번 찾아오기를 요구하자 공이 말하였다.
“평생에 발길이 귀인의 집에 이르지 않았는데, 지금 늙어 백수가 되었으니 감히 수릉(壽陵)의 옛 걸음걸이를 잊어버리지 못하겠다.”(*3)
공이 어머니 모시기를 효로써 하여, 대소변 받아내는 변기와 오물이 묻은 자리를 반드시 몸소 스스로 세탁하고, 추운 계절은 자주 손을 요 밑에 넣어봐서, 차가우면 불을 더 때는데, 비록 깊은 밤 눈보라가 치더라도, 반드시 몸소 스스로 불을 때고, 땔감이 없으면 동산의 나뭇가지를 잘라 계속 넣었다. 종들을 큰 소리로 불러서 어머니가 알게 하거나, 아랫 사람의 원성을 불러오는 일은 끝내 하지 않으려고 했다.
부인은 완산 이씨(完山李氏)인데 사인(士人) 호석(虎錫)의 딸이니 왕자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손이다.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종걸(鍾杰)이니 경의(經義)로 진사(進士)가 되었다. 딸로 맏이는 심학증(沈學曾)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정대수(丁大修)에게 출가하였는데, 다 일찍 과부가 되었다. 종걸은 3남을 두었으니 맏은 봉호(鳳浩)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두 딸은 맏이는 성달수(成達修)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이병필(李秉弼)에게 출가하였다. 심학증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영로(永老)이고, 딸은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멀고 먼 기해년(己亥年, *윤선도 당시)은, 이백 년이 되었네.
말 한마디가 거슬러, 그 화가 이어져.
칠대ㆍ팔대 먼 자손까지도, 여전히 뻗치었네.
꽃다운 나이에 급제했건만, 한결같이 나아가지 못했네.
웅대한 문장, 깨끗한 행실은, 외로이 높아 환하였고,
옥산 요림 맑은 풍채, 운천에 비치었네.
임금은 가상히 여기고, 정승은 어질다 하였으나,
뭇 사람들 억누르니, 하늘은 권한 없네.
호표(虎豹)처럼 꿋꿋이 지키고, 붕새처럼 멀리 날았었네.
시들고 떨어지니, 사람들도 슬프다 하네.
병조 참의 관함으로, 명에 쓰고 돌에 새기네.
남겨진 향기로운 것들 모으니, 시 천 편이 있도다.
遙遙己亥。垂二百年。一言觸忤。其禍緜緜。旣雲旣仍。猶曰其延。英年通籍。壹是屯邅。高文潔行。孤標皭然。玉山瑤林。照映雲天。王曰予嘉。相曰其賢。衆共抑壓。太空無權。虎豹毅守。鸞凰遐翩。旣槁旣黃。人亦曰憐。維小司馬。以銘以鐫。叢殘遺馥。有詩千篇。
*1. 하만자(河滿子) : 노래 곡조 이름. 하만(何滿)은 사람 이름인데, 그가 형장(刑場)에 나아갔을 때 자신의 속죄(贖罪)를 위하여 이 사곡을 비로소 만들었다고 함.
*2. 광릉곡(廣陵琴) : 그문고 곡조 이름. 광릉산(廣陵散). 진(晉)의 혜강(嵆康)이 사마소(司馬昭)에게 끌려 동시(東市)의 형장으로 갔을 때 태학생(太學生) 3천 명이 나서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청했으나 사마소는 그를 불허했다. 이에 혜강은 그 전에 화양정(華陽亭)에서 자면서 어느 나그네에게 전수받았던 광릉산(廣陵散)을 마지막으로 거문고 가락에 울려 퉁겼다고 함.
*3. 감히 수릉(壽陵)의 옛 걸음걸이를 잃을 수 없다(不敢失壽陵舊步) : 자기가 평소에 배운 바를 지키는 것을 비유함. 수릉(壽陵)은 연(燕)나라의 지명. 《장자(莊子)》 추수(秋水)편에, “그대는 수릉(壽陵)의 청년이 한단(邯鄲 조(趙) 나라 수도)에서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운 것에 대해 듣지 못하였는가. 한단의 걸음걸이를 습득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의 걸음걸이까지도 잊어버리고 기어서 자기 나라로 돌아왔다.” 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