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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련 명창 제자들
국악평론가 김 형 일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그리 쉽게 가럇 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 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 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난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야서
각도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 속에 들어서도 나는 못잊겄네
원명이 그뿐이었든가 이리 급작스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천지가 흔들리는 듯,
땅이 꺼지는 듯,
메마른 폭포가 큰물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듯
실성발광 내 던지던 소리를 두고
머나먼 길을 어찌 가셨는가요?
여기 사설의 주인공이 선생님인가요?
그 바디, 그 소리를 이제야 알 것 같은 걸음마인데
이렇게 가시다니」
(안향련 선생 죽음 앞에서 제자의 피 맺은 절규)
1981년 12월 안향련 명창이 생을 마감하기 6개월 전 종로구 행촌동에 살았다 .
안 명창에게는 두 여 제자가 있었다. . 지금의 중견 국악인 유미리 당시 초등학교 3․4 학년 이였고 또 한 제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에서 소리 공부를 하다가 안향련 선생 소리에 반하여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하여 상경한(예명:오향희) 제자와 같이 생활하였다
당시 유미리는 꼬마 명창으로 안 선생 자신도 깜짝깜짝 놀 낼 때가 많았다
받아먹는 소리가 한번 가르치면 그대로 따라 하는데 그 소리가 어린아이 소리가 아니었다.
다루 치는 것이며, 꺾는 소리며, 시김새 까지도 소화 해내는 것이었다.
유미리는 TV출연도 이따금씩 하였는데 명절 특집이나 당시 어린 심청 역을 기막히게 소리와 연기를 소화해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여 제자는 머리를 염색을 하지 안했는데도 원래 노랑머리로 길게 길러서 허리까지 내리고 키는 안 선생처럼 165㎝ 비교적 당시 여자 키로는 적당하게 큰 키에 제자와 스승 간에 서로 마른 형으로 옷을 같이 입고 다녔다
얼굴은 뽀얀 했으며 갈색 눈에다 피부가 뽀얀 하고 머리는 약간의 노랑머리로 마치 러시아인처럼 보였다
그 제자 아버지는 딸이 마치 외국인처럼 생겨서 한 삼년간 지네 엄마를 의심하였다고 한다.
안 선생은 늘 그녀를 방송 출연할 때 마다 데리고 다녔다
당시 국악인으로 최고 인기를 누리며 방송 스케줄이 줄을 잇고 쉴 틈 없이 바빴었다.
그러나 방송출연 횟수는 많았으나 출연비로 살아가기 힘들었다.
그때 당시 대부분 명창들은 후원자들이 있었다.
안향련은 첫사랑으로 21살에 목포에서 임모 씨와 결혼하여
아들하나를 두고 그 아들은 당시 서울에서 엄마와 함께 생활하면서 중학교에 다녔다
그 아이는 착했으나 엄마의 재능을 타고 나지 못했다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 밑에서 다른 아이들이 교복 차림으로 학교 다니는 것을 부럽게 보았던 그녀는 아들에게는 이 고행의 길인 예술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하고 싶은 맘은 없었던 것 같다
그녀는 청소년 시기에 늘 대하는 이들이 어른들하고 소리선생, 북치는 고수, 주변에 있는 소리꾼들에게 에워싸여 한량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평소에 말이 없다가도 입을 열면 재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고 우스갯소리도 유머와 재치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안기선 명창은 그녀가 한창 사춘기인 나이에 돌아 가셨다
오직 소리에만 전념한 그녀는 늘 부모의 품이 그리웠고 타관 객지로 다닐 때 마다 혼자 눈물 흘리며 온갖 설음과 역경을 이루다 말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가족사와 과거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안했었다고 한다.
아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상처가 많아서 그런지 모른다.
그녀를 연인으로 생각하고 찾아오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늘 냉정하게 거절했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선배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늘 외로워하였다.
무대에서면 많은 사람들은 그녀에게 추임새를 아끼지 않았고 박수와 환호로
가는 곳마다 안향련의 인기는 날로 더해갔다.
무대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내려오면 박수로 안향련을 연호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곤 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늘 혼자 이었다
득음의 경지에서 최고의 주가를 기록하는 안향련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이혼의 아픔을 생각하며 다정다감하게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정을 이루고 사는 모습들이 늘 부러웠다
많은 예술인들은 특히 국악인들은 안향련을 부러워했지만
본인은 늘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김소희 명창 제자로 들어와 그녀의 소리는 더 다듬어져 갔다
천구성과 수리성을 타고난 그녀는 소리 에너지가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공력과 오간청으로 높음 성음에다 음폭이 넓고 밀어내는 힘이 내공이 단전호흡을 하는 기공들 보다 더 세고도 남았다
필자가 듣기에도 남자는 임방울이요 여자는 안향련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1978년 그녀는 지방에서 조그만한 사업을 하는 이를 알게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늘 한번 하기로 작정하면 끝을 보는 그런 집념이 삼십대에 자신보다
십년이상 되는 선배들과 함께하며 같은 소리의 반열에 섰던 것이다
그녀가 지닌 사랑도 그러했을까 ?
그 남자는 가정이 있는 유부남 이였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환심을 사려고 돈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일시적인 쾌락을 찾는
바람기가 있는 그 남자는 그야말로 일시풍정 못 이기어
안 선생을 사랑 노리갯감으로 여기며 많은 지인들에게
그녀가 내 마누라라고 하며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방송국에 까자 쫓아다니며 자기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다니자
그녀를 아끼던 선배들이 뭐 저런 사람을 어쩌다가 알게 되었냐고
당장 헤어지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마음이 독하지도 못한 안향련은 집찹력이 강한 그녀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정이 들어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안향련에게 제자, 아들 셋이 살기는 비좁아
녹번동으로 이사를 갈려고 했다
이사 비용과 전세를 얻어야 할 형편인데 그만한 돈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 최고 인기가 있는 연예인이 이런 돈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자존심이 강한 안 선생은 주변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사정을 말하지 안했다
사업을 한다는 그 남자는 당시 천만 원 정도 가는 방을 얻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안향련 선생은 믿고 제자와 함께 행촌동에서 녹번동으로 이사 짐을 챙겨 가지고 갔으나 새로 들어가는 집에서 이삿짐을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전셋돈을 내지 않아 들어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실로 앞이 캄캄했다
사업을 한다는 정 모 씨는 천만 원을 준다고 해놓고선 아무런 소식도 없이 오도가도 않고
사업을 하는 그 남자를 필자가 알고 있으나 차마 밝힐 수 없다
천하의 안향련이 오도 가도 못하는 길거리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하도 남부끄럽고 하여서 누가 알까바 평소에 알고 지내던 언니 집으로 가고 이삿짐은 제자에게 중고 가게에 전화해서 실어가라고 했다
그 제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 했다
추운 겨울인데 눈도 오고 손발은 시리고, 바람은 세차게 불고,
이삿짐은 눈에 쌓여서 하얗게 덮어 옷가지들은 눈이 녹아 물이 질펀하고, 중고가게에서 차가 와서 헐값에 실고 가는데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하였다
안향련에게는 이토록 변변한 사람들이 주위에 없었다.
모두가 그녀의 예술성을 보고 하루 밤 어떻게 품고 놀아 볼 려고 하는 작자들과 순진한 사람을 감언이설로 꾀어내어 세상물정 모르고 오직 소리에 전념한 그녀에게 많은 이들이 찝접거렸다
여기서 그녀가 제대로 된 물주 하나를 잡아 물질에 욕심을 부렸다면
당시 그녀의 인기도를 생각했을 때 어디 서울 장안에 사내 중에서
그녀에게 전셋돈 하나 못 마련해주었겠는가 ?
안 선생 제자는 유미리네 집에서 당분간 지냈다
며칠 후 안 선생은 돈을 마련하여 왔다 그리고 이층 독채에 전세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난방비를 내지 않는다고 아래층에서 사는 주인이 스팀을 꺼 추운겨울 찬방에서 자기 일쑤였다고 하였다
그녀는 지방공연, 방송출연을 하고 오면 녹초가 되었다고 한다.
소리하는 사람은 무대에서 혼신을 다해 열창하고 연기하다보면 모두가 지치고 그저 쉬고만 싶다고 한다.
평소 술을 즐겨 마셔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 않는 체질이며
금방이리라도 쓰러질 듯 아파 누워 있다가도 방송촬영이 있는 날이면 콜택시를 타고 방송국에가 언제 아팠냐는 듯이 목을 풀지 않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위장병으로 늘 속이 쓰리고 아팠다고 한다.
술과 담배는 그녀의 기호품 이였다
그녀는 어느 모 방송국 PD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녀의 연기를 지도하며 카메라 감독으로 유명한 박 모 씨였다
훨씬한 키에 가죽잠바를 즐겨 입고 다니며 행촌동에 살 때도 드나들곤 하였다
백씨는 안향련 선생에게 요즈음 말하면 매니저 역할을 할 정도로 많은 것을 배려해주었다
80년 군사정권은 언론통폐합으로 TV방송국 TBC가 없어진다.
이를 계기로 국악인들의 입지가 좁혀지고 방송출연도 줄면서 그들의 수입도 변변치 않았다
그러던 시절에 어느 동양화가 누구라면 금방 알 수 있는 화가와 교제하며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귀공자처럼 남자는 잘생긴 그런 남자였다
안향련은 여러 번 정에 속아서 남자에게 정실로, 부인대접을 받고 살고 싶었다.
선배 언니들처럼 누구네, 소실이네, 누구네, 첩이네, 세컨드네 이런 수식어를 달고 살고 싶지 않았다
그 화가에게도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이 글을 읽는다면 뭐라고 변명할 련지...
곧 이혼 한다고 하면서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생활고와 정이 그리운 그녀는 밤이면 철현금을 타면서 시름을 달래었다
이따금씩 흥타령 , 구슬픈 육자배기를 부르다가 눈물짓곤 하였다
그 눈물은 다름 아닌 모든 것이 흥타령처럼 꿈에 나서 꿈에 자라 꿈을 깨고 보니 ....
젊은 나이에 명창 칭호를 얻고 보니 내가 이렇게 살려고
그 수많은 역경과 시련을 뼈마디가 늘어나고 목에 피를 토하며
득음을 하였건만 부질없고 헛되고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행복의 삶이 하나만을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38살 나이에 깨달게 된다.
높은 산이 있어 산에 올랐건만 최고봉에 오르고 보니 올라갈 산이
그녀에게는 보이지 안했을까 ?
81년 군부독재는 체육관 선거로 그들만으로 정치권 판을 짜고 기틀을 다지던 시절에 남들처럼 가정을 이루고 살고 싶었다.
안향련은 술만 마시면 늘 입버릇처럼 그 제자에게 ″향이야˝ ! 「난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거야 너도 어서 내 소리를 다 받아야 할 텐데」…….
〃내가 사는 동안 너 시집가는 것도 보고, 너그 집에 가서 밥도 먹고 너랑 맛있는 것도 해먹고 그러고 싶은데〃……. 사제 간을 떠나 친동생 친언니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녀의 푸념은 지극히 여자로써 본능적인 면과
주변에 인척이 있지만 의지할 곳이 없는 그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 같다
그해 겨울 12월의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안향련은 그의 아들과 제자를 조용히 불러서 하는 말이 ″얘 향이야, 태환아, 향이는, 우선 고향에 내려가 혼자 독공하고 태환이 너는 겨울방학이니 목포 니그 아부지 집에 좀 가있어라 ˝
″내가 새로 이사해서 집 단장 해놓고든 오그라 ˝
글고, 향이는 저기 가야금 함동정월이 쓰던 가야금하고
벽에 걸려있는 대금 가지고 내려가거라.
아들과 제자를 보내면서 안향련은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 제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
스승과 제자는 마치 먼 이국땅으로 떠나는 사람들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어쩌면 스승과 제자는 영영 만나지 못할 머나먼 길을 가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이승에 남는 자와 저승으로 가는 자의 이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문 밖까지 나온 안 선생은 ″향이야˝ 잠깐만, 하고선 이층으로 급히 뛰어 올라가
일본공연 갔다가 오면서 제자 줄려고 사온 옷을 가지고 가라하면서 싸주었다고 한다.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예견했을까 ?
제자는 선생님 ! 쬐끔만 있다가 올라 올 거신데 왜 그 라요 ?
그러자 아니다 가지고가 !! 하면서 울음을 터뜨리시던 그 울음의 의미를 지나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안향련선생은 그 화가와 살려고 녹번동에서 성북구 정릉2동 어느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아파트 1층으로 이사를 했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소리연습을 하려면 위층 소리는 펴져나가고 아래층 소리는
크게 들리지 안 해서 아마 1층으로 이사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같이 살자고 한 그 사내는 오지 않고 순진한
안 선생 또 한 번 사랑의 배신에 울어야 했다
추운 겨울 밤 81년 12월 19일 거리에는 캐럴송이 울러 퍼지고 모두가 며칠 남지 않은 가는 해를 아쉬워하며 연말연시, 모임회, 송년회로, 한해가 저물어 가는
그해 안향련 그녀는 다량의 신경 안정제를 한약국에서 많이 팔지 안 해서
동네 이곳저곳 약국에서 구입 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리할 때 북채 ,부채 움켜잡았던 손바닥은 굉이가 박히고
백옥같이 고운 손등이 부들부들 떨면서
부채를 들고 발림 하던 손, 철현금 타던 손, 12줄 가야금 뜯던 손 ,
그 손으로 유서를 썼다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써어 내려간 유서는 쓰다가 눈물 흘러 지면에 잉크는 번지고
그리고선 차분히 담담하게 쓴 유서는 누구에게 썼는지 아는 이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소리로 표출하며 온몸으로
서슬 푸르게 갈고 닦아 화려하면서도 웅장하고
서러움으로 목 놓아 울면서 긴장되는 상하 청을 자유자제로 구사하는
금세기 여자로서 최고 기량을 가진 명창 이였다
그 소리를 남기고 이렇게 그녀는 생을 마감했다
당시 한국일보에 실린 안향련 명창 타계를 보도한 신문기사를 요약하면 한국일보 1981년 12월22일자 20일 하오 9시40분께 안향련씨 (36세 여, 국악인) 집안 방에서 극약을 마시고 숨진 것을 김 모 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고 전한다.
머리맡에는 빈 약병 1개와 유서 6장 남아있는 내용이다
애타게 만나보고 그리워하는 이가 있다
안향련 선생의 제자인 그녀가 이제 나이가 오십 후반이다
결국 하늘이 내린 소리 그 소리를 배우고자 했던 그 제자는 소길을 접었다
왜? 다른 분의 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신앙인으로 믿음의 길에서 섬김을 다하며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완창의 경지에서 유일하게 천하명창 안향련 제자로 수련했던 제자도 소리를 잇지 못하고 안명창은 천재성을 홀로 지닌 체 하늘나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