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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란 이탈리아어인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 이 말은 묶음[束]이라는 뜻이었으나, 결속, 단결의 뜻으로 전용되었다. 파시즘이 대두하게 되는 일반적이고도 보다 광범위한 배경은 18세기 말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안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만성적 공황 및 전승국, 패전국을 막론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에서 초래된 각종의 혁명적 기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근대사회의 위기적 양상은 모두 파시즘의 배경이 된다.
즉, 파시즘이 발생하게 되는 배경은 ① 국제적 대립과 전쟁위기의 격화 ② 대량적 실업과 공황 ③ 국내정치의 불안정 ④ 기존 정당 ․의회 및 정부의 부패 ․무능 ․비능률 등 병리현상의 만연 ⑤ 각종 사회조직의 강화에서 오는 자율적인 균형 회복능력의 상실 ⑥ 정치적 ․사회적 집단 간의 충돌의 격화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위기요인의 격화에 의해 정치체제의 안정과 균형이 파괴되고, 게다가 기존 정치세력이 사태를 효과적으로 수습할 능력을 상실할 경우, 무정부적 진공상태를 메우기 위하여 파시즘이 등장한다.
이데올로기
파시스트들 가운데는 확실한 권위를 가진 파시스트 선언은 없으나, 대개 그 공통적 이데올로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반합리주의(antirationalism)이다. 서구문명의 그리스적인 근원을 부정하며,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이성을 불신하고, 인간의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억제하기 곤란한 요인들을 강조한다. 심리적으로 파시즘은 내성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광신적(狂信的)이며, 편견이 없다기보다는 독단적이다.
② 기본적인 인간평등을 부인한다. 파시스트 사회는 인간불평등의 사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의 이상으로서 불평등을 확신한다.
③ 파시즘의 행동규칙은 여러 국민 내의,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폭력과 기만에 중점을 두고 있다. 파시스트의 견해에서는 정치란 우호관계로서 특징져지며, 정치는 적의 존재가능성 및 적의 전면적 섬멸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난다. 집단수용소와 가스실 등이 이를 입증한다.
④ 엘리트에 의한 정치(government by elite)는 국민들의 자치능력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오류에 반대하는 파시즘의 원리이다.
⑤ 파시즘은 단순한 정치제도보다는 오히려 생활양식으로서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전체주의라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즉, 정치적이든 아니든 파시즘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평생 인간생활의 전국면을 통제하는 것이다.
⑥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는 불평등과 폭력이라는 파시즘의 2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말한다.
⑦ 국제법과 국제질서에의 반대는 불평등 ․폭력 ․인종주의 ․제국주의 및 전쟁을 신념으로 하는 파시스트들의 논리적인 귀결이다.
⑧ 파시즘의 조직 및 관리 원칙은 경제와 관련되는 협동체국가(協同體國家:corporate state)이다. 파시스트 경제는 국가관리의 자본 및 노동연합회로 세분되며, 각 연합회는 상업이나 직업에서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1당독재는 결국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최종 중재자이다.
범위
독일의 파시즘연구가 E.놀테는 파시즘을 유럽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하여,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즉 1919~1939년이라는 기간의 특유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입장에서는 유럽 이외의 현상인 일본의 군부 파시즘이나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는 문제가 되지 않고, 또 네오파시즘운동이나 네오나치즘운동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대중사회이론이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선 파시즘론에서는 현대사회의 모든 반동적 독재정치운동을 파시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파시즘을 지칭한다.
이탈리아
제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는 분명히 전승국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으로 좌절하고 있었다. 전리품의 배분에 있어서 푸대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확장된 영토에 있어서도 그것은 이탈리아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바의 결과는 아니었다. 게다가 통화가치의 하락 때문에 프티부르주아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농민계급은 오히려 전쟁 전보다 더욱 빈곤해졌다. 이러한 형태의 국민적 좌절감은 근대 민족주의와 관계하여 권위주의적 정치형태의 기반을 쉽게 조성시켰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자연자원이 근본적으로 부족하였다. 게다가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있었으나, 대조적으로 남부에서는 후진농촌으로 방치되어 심각한 지역적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지주와 기업소유자로 이루어진 지배계급은 교양을 갖추고 권력을 장악하여, 재산과 교양이 없는 노동자 및 농민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계급적 불균형은 민주화의 기반을 잠식시켜 갔다. 선거권은 읽고 쓸 수 있는 자는 21세 이상, 읽고 쓰지 못하는 자는 30세 이상의 이탈리아인으로 제한되었다.
북부 산업지역에서는 조직화된 공산주의 운동이 성장해 가며 갈등을 야기 시키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이러한 만성적인 위기상황은 중산계급들에게 새로운 사태에 대비하게 하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파시즘이 자리 잡도록 환경을 조성시켜 나갔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의 사회와 정치의 이러한 상황은 열성적인 민족주의자들을 각성시켰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지름길이 이러한 분열증식적(fassiparous) 성격 속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탈리아인의 기질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무정치적(apolitical)인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지적은 특히 지주와 정치가에 의해 가치가 박탈되고 있던 농민들에게 적중하였고, 국민적 좌절감, 심리적 열등감, 경제적 혼란, 정치적 분열중식성 등에 관련되어 파시즘은 발생되었던 것이다.
1920~1922년 이탈리아 정국은 불안정하여 빈번한 내각교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정치의 분열증식적인 경향은, 국가적 열등감과 불확실성이 심하였던 이 기간 동안에 특히 주목된다. 단지 공산주의자들만이 그들의 행동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신망과 세력을 잃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성장 때문만이 아니라, 전시에 보였던 그들의 태도로 인하여 비애국적으로 낙인찍힌 여론 때문이었다. 산업체 소유계급들은 이러한 정국의 불안정성에 대한, 특히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확실하고도 새로운 정치적 해결책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본가 ․군부 ․귀족이 당의 후원자가 되고, 제대한 군인과 도시 및 농촌의 중산계급이 대중적으로 파시스트운동에 참가하였다.
파시스트당은 처음에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강조하였으나 곧 국가주의적 경향을 보이게 되고, 1920년 사회주의노동자에 의한 북부 이탈리아의 공장점령이 실패한 이래, 파시스트는 사회주의 조직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당이 우세한 각 도시의 시의회나 시청을 공격 ․점령하였다. 1921년 군부 ․경찰 ․관리의 지지를 얻은 그들의 폭력은 대규모적으로 확대되었고, 1922년 국내가 거의 내란상태로 변하였다. 1922년 10월 27일 무솔리니는 4만 명의 병력으로 결성된 ꡐ검은 셔츠대ꡑ를 이끌고 이른바 ꡐ로마진군ꡑ을 결행하였다. 10월 29일 이탈리아 국왕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결국 로마 진군은 정권접수를 합리화하는 정치적 행사였던 것이다. 당시 왕당파나 자유주의자 ․사회당도 안정된 정부를 조직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이탈리아의 권위의 위기와 사회혁명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층계급이 파시스트당에 정권을 물려준 것이었다.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는, 처음에는 국민들의 확고부동한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1924년 총선거에서 전투표의 65%를 얻는 성과를 올렸으나, 지역적으로 볼 때에 북부지방에서는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1924년 6월 파시스트에 의한 마테오티 사회당의원 암살사건은 파시스트 정권을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비밀경찰의 확대, 언론 ․출판의 통제, 심지어 법령제출권까지 무솔리니의 동의하에 두게 하여 무솔리니의 정령(政令)은 그대로 법령으로 통용되었다. 1925년 파시스트당 이외의 결사를 금지시켰으며,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은 무솔리니의 영토확장주의의 야망을 표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가장 열렬히 무솔리니를 지지했던 것은 정교조항(政敎條項:concordat)의 조인을 통한 가톨릭교회의 지지였다.
무솔리니 자신은 ꡒ내가 말하는 것은 항상 옳다ꡓ라고 호언하였고, 국민들은 또한 무솔리니를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로 여겼다. 이 때부터 파시즘이 부르주아적 정치운동에서 탈피하여 본격적인 대중운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1940년 6월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잇따른 군사적 패배와 전쟁으로 긴장은 결국 국내에 공황을 야기 시켰으며, 히틀러에 대한 맹종 등으로 국민적 불만은 파시즘체제를 붕괴시켰다. 1943년 무솔리니는 파시즘 대평의회에서 해임되어 왕당파에 의해 체포되고 파시스트당은 해산되었다.
미시 파시즘의 문제
미시파시즘의 문제를 제기할 때 가장 많이 부딪치게 되는 비판은 한국처럼 거시파시즘이 공고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거시파시즘이 일차적이고 주요한 적이라는 것과, 이 경우 미시파시즘에 대한 논의는 자칫 잘못하면 눈앞의 이 가시적 적에 대한 공격을 뒤로 하고, 재귀적 반성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우려는 다음과 같은 대화 속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요즘 논의되는 '자기 안의 파시즘', 일상의 파시즘 주장만 해도 그래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입론인데, 문제는 이 일상의 파시즘을 온존시키는 것이 거시파시즘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극우 언론이라는 '한국적' 실상을 망각하는 것이에요. 그에 대한 견해도 없이, 좌파도 미시적 파시즘의 그물에 갇혀 있다고만 주장하면 '모든 게 내 탓이오'로 끝나버리는 일이 되고 말아요."
그러나 거시파시즘과 극우 파시스트 논객들의 권력이 근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반은 어떻게 구축되는가. 파시즘, 국가주의, 군사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는 일상적 관계의 외부에 있는 그저 추상적인 거시 구조들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의 영역 속에 내재하면서 특정한 효과를 발휘하는 구체적 권력이며 일상의 미시권력을 통해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미시파시즘이야말로 거시파시즘의 구조를 뒷받침하고 온존시키는 기초가 아닌가. 그러므로 미시파시즘론을 제기하는 것은 거시 파시즘이라는 적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거시 권력의 효과를 구체적 행동을 통해 분쇄함으로써 거시 권력의 기초를 침식해 들어가자는 것이다. 요는 문제가 발견되고 제기되는 각 순간마다 이 국소적 권력 관계 속에 체현되어 있는 미시파시즘을 공략하지 않는 한, 거시파시즘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거시 파시즘을 존속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자들과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 미시 파시스트적 요인들을 발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분자적 수준에서 투쟁할 때 우리는 몰적 수준에서 진정으로 파시스트적인, 거시 파시스트적인 구성체를 막아낼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시파시즘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고 격파하고자 하는 투쟁은 '내 탓이오'라는 개인적 반성의 문제, 혹은 '좌파에게도 도덕적 오점은 있다'는 집단적 고해성사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가타리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유죄냐 순수냐가 아니다." 이 경우, 정치적 행동에 미시파시즘에 대한 발견과 분석을 결합시켜야 하는 이유는, 거시 파시즘에 대항하는 집단조차도 은연중에 일상생활에서 파시스트적 삶의 양식과 어법을 존속시키면서 거시 파시즘이 구조화될 수 있는 기초를 공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활동가 집단 혹은 '진보적' 단체들의 일상적 관계의 수준에서, 활동가와 그의 아내의 관계에서, 남성 활동가와 여성 활동가의 관계에서, 역할 분배와 고정의 다양한 양식 속에서, 커뮤니케이션과 투쟁의 다양한 층위를 포함한 일상적인 활동양식과 권력 관계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모든 파시스트적 부르주아적 남근지배적 권력형태, 인식, 태도, 욕망으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집단적 삶의 양식과 윤리학을 창조하는 문제인 것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그것은 자본 착취와 국가 권력을 철폐하고자 하면서, 그 투쟁의 한가운데서 자본과 권력이 보존해온 모든 분리차별과 위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부활시키는 문제를 정면에 제기한다. 가따리에 의하면, "러시아와 중국 등에서의 계급투쟁은 부르주아 권력을 뒤엎고 나서도 부르주아 권력 형태가 국가, 가족, 그리고 심지어 혁명세력 속에서도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중앙집중적이고 관료제적인 권력이 혁명적 전쟁기계가 포함하는 필수적 조정 역할에 포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체적 수준에서 투쟁은 여러 단계와 중간 시기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미시적 수준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은 먼저 코뮤니즘으로의 일종의 직접적 이행, 즉 관료, 지도자 혹은 활동가가 권력을 구현하는 한에서 부르주아 권력의 즉각적 폐지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 속에서 드러난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본에 대한 예속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가 가정에서 아내에게 자신을 섬길 것을 강요하면서 아내를 예속화한다면, 국가에 맞서 투쟁하는 집단들이 국가의 군대 조직과 동일한 훈육과 위계, 통제를 자신의 조직체에 도입하면서 군사주의를 온전히 작동시키고, 국가의 관료적 조정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활동과 소통 양식 속에 도입하여 대표체나 관료로의 대중 권력의 위임을 고착화하고 대중을 모든 결정 과정에서 소외시킨다면, 활동가 집단이 민주적 중앙집중제의 원리를 고수하면서 대중의 혁신 능력을 부정하고 모든 체계를 중앙-전달벨트-대중의 결정 구조 속으로 수직적으로 위계화한다면, 그리고 합의와 조직적 통일, 일사불란한 대응을 이유로 내부에서 제기될 수 있는 다양한 모순과 이견, 차이를 억압, 제거한다면, 남성활동가가 여성활동가를 정복, 지배, 소유의 대상으로 삼아 언어적 성적 폭력을 휘두르거나 자신의 집단 속에 기존의 모든 성별 분업을 재생산한다면, 탈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건 집단이 보스(boss)의 양식과 배제의 양식을 온존시키면서 위계화의 논리를 내부에서 분비시킨다면, 설사 내일 당장 혁명이 일어나 부르주아 권력이 폐지된다고 하더라도 일상적 관계의 수준에서는 변함없이 부르주아 권력이 재생산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체집단과 예속집단의 개념, 천의 고원의 수목형 조직과 리좀형 조직의 개념, 그리고 분자혁명의 여러 페이지를 관통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투쟁 그 자체가 아니라, 투쟁을 통해 구성되는 새로운 주체성 양식과 새로운 관계맺음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가따리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전복은 단지 물질적 노예화와 가시적 억압형태에 대항한 투쟁 문제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행동하는 데서, 기능하는(functionning) 데서 완전히 대안적인 방식을 창조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주체성 양식의 창조>는 선결적인 구조 혁명 이후 점진적으로 개조되어야 할 부차적인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자 자신이 소속한 집단 속에서 구성원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로서 "미시적 수준에서 코뮤니즘으로의 직접적 이행"을 즉각 실현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안티 오이디푸스적 틀에서 보면, 그것은 주체집단의 배치를 구성해나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들뢰즈, 가따리에 의하면, 이해의 전의식적 투여 속의 혁명적인 것은 무의식적 욕망 투여 속의 혁명적인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혁명적 전의식은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사회적 종합, 새로운 권력을 겨냥하지만, 무의식적 리비도는 계속 권력의 낡은 형태와 그 코드들을 투여할 수 있다. 이 경우 그 집단은 설사 권력을 장악한다고 해도 욕망하는 생산을 예속시키고 파괴하기를 계속하는 한 예속집단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 집단 속에는 초자아화, 집단의 위계질서, 욕망의 억압 메커니즘이 보존되면서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파시스트적 투여가 계속된다. 반대로, 주체집단은 그 리비도의 무의식적 투여 자체가 혁명적인 집단이다. 이 집단은 욕망을 사회적 장 속에 침투시키고, 집단의 초자아도 위계도 없는 횡단적 네트워크를 실현한다. 천의 고원에서는 이와 같은 주체 집단이 수목형에 대비되는 리좀형 집단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단일한 중앙에서부터 상하 수직적으로 계열화되는 위계화된 구조가 아니라, 횡단적이면서 유연한 접속을 작동시키는 열린 체계이다. 여기서 '횡단적'이라는 것은 수직적이고 경직된 위계구조나 하향평준화된 균일성에 입각한 수평적 공동체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와 같은 집단은 자본의 지배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본과 동일한 방식의 분리차별과 위계화의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정치적 행동을 모든 형태의 단일화와 전체화로부터 해방시키고, 행동, 사유, 욕망을 피라미드적 하위분할과 위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증식, 병치, 분기에 의해 증대'시키는 집단이다.
그렇다면, 미시적 수준에서 이러한 코뮤니즘으로 직접 이행하라는 것은, 단번에 유토피아적 기획을 완성하라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가따리는 "기원, 본성, 초월성으로 소급해 들어가는 모든 형태의 유토피아적 향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조직적으로 완전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이것이 권력의 기호가 아닌지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체집단은 하나의 고정된 집단 유형이 아니며, 언제라도 예속집단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들뢰즈, 가따리는 이후에는 주체집단과 예속집단이라는 집단 범주보다는 배치 개념을 선호한다. 문제는 어떠한 관계를 구성해 나갈 것인가라는 배치의 문제이며, 이 때 배치는 완전한 적대의 소멸이라는 궁극목적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거시 권력의 지주(支柱)이자 구체적 효과로서 집단 속에서 발아하는 모든 파시즘적 권력과 투쟁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일성과 형식적 합의를 강조하면서 활동가와 대중, 남성과 여성, 장년층과 청년층 등 관계의 다양한 수위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입장들 및 관점들간의 충돌과 모순을 은폐, 억압하고 행동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독특한 상황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다수자의 권력을 분석하고 또 그러한 권력과 투쟁하면서 지배적 전통의 위계나 분리차별을 침식시킬 수 있는 전혀 다른 유형의 배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권위를 획득하는 미시 파시즘 그리고 '진보진영'내로 끊임없이 이식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권력형태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이 노동으로부터 욕망을 단절시키고 내핍과 희생을 강요하는 자본의 금욕주의적 논리를 그대로 자신의 운동과 조직 속에 답습하고 있는 한에서, 활동가 집단이 "금기나 의례를 통해 리더십, 자기 동일시, 암시효과, 거부, 희생양 등 집단을 자기 자신 속으로 폐쇄해버리게 하는 현상들을 작동시키면서 규율과 훈육의 메커니즘에 기초한 예속집단의 배치를 재생산하는 한에서, 변혁 주체를 자임하는 남성이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남근지배자로 스스로를 확립하는 한에서, 미시파시즘을 끊임없이 발견, 분석하고 이에 대항해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매 순간 관계 구성의 매 국면마다 부르주아적 권력의 주체성 양식과 단절하고 새로운 주체성 양식을 창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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