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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동별곡(關東別曲)
松江 鄭澈 1585년
天텬根근을 못내 보와 望망洋양亭뎡의 올은말이,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밧근 므서신고. 갓득 노한 고래, 뉘라셔 놀내관데, 블거니 뿜거니 어즈러이 구는디고. 銀은山산을 것거 내여 六뉵合합의 나리난 듯, 五오月월 長댱天텬의 白백雪셜은 므사 일고. 져근덧 밤이 드러 風풍浪낭이 定뎡하거늘, 扶부桑상 咫지尺쳑의 明명月월을 기다리니, 瑞셔光광 千쳔丈댱 이 뵈난 닷 숨난고야. 珠쥬簾렴을 고텨것고, 玉 옥階계랄 다시 쓸며, 啓계明명星셩 돗도록 곳초 안자 바라보니, 白백蓮년花화 한 가지를 뉘라셔 보내신고. 일이 됴흔 世세界계 남대되 다 뵈고져. 流뉴霞하酒쥬 가득 부어 달다려 무론 말이, 英영雄웅 은 어데 가며, 四사仙션은 긔 뉘러니 아메나 맛나 보아 녯 긔별 뭇쟈 하니, 仙션山산 東동海해예 갈 길히 머도멀샤.
(하늘의 맨 끝을 끝내 못보고 망양정에 오르니, (수평선 저 멀리) 바다 밝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성난 고래(파도) 누가 놀라게 하기에, 물을 불거니 뿜거니 하면서 어지럽게 구는 것인가? 은산(흰 물결)을 꺾어 내어 온 세상에 흩뿌려 내리는 듯, 오월 드높은 하늘에 백설(파도와 물거품)은 무슨 일인가? 잠깐 사이에 밤이 되어 바람과 물결이 가라앉기에 해 뜨는 곳이 가까운 동해가에 명월을 기다리니, 상서러운 빛줄기가 보이는 듯하다가 숨는구나. 구슬을 꿰어 만든 밭을 다시 걷어 올리고 옥돌같이 고운 층계를 다시 쓸며, 샛별이 돋아오를 때까지 꽂꽂이 앉아 바라보니. 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흰 연꽃 같은 달덩이를 어느 누가 보내셨는가? 이렇게 좋은 세상을 다른 사람 모두에게 보이고 싶구나. 신선주(신선이 마신다는 술, 자신을 신선에 비김) 가득 부어 손에 들고 달에게 묻는 말이 “옛날의 영웅은 어디 갔으며, 신라 때 사선은 누구더냐?” 아무나 만나 보아 영웅과 사선에 관한 옛 소식을 묻고자 하니. 선산이 있다는 동해로 갈 길이 멀기도 하구나.)
(2) 肅宗大王 御製 詩
列壑重重逶迤開 열학중중위이개 많은 산들이 겹겹이 이어지다 탁 트이니
驚濤巨浪接天來 경도거랑접천래 놀랍고 큰 파도 하늘가에서 밀려오네.
如將此海變成酒 여장차해변성주 만약 이 바닷물을 술로 만들 수 있다면
奚但只傾三百盃 해단지경삼백배 어찌 다만 삼백 잔만 연거푸 마시리
(3) 正祖大王 御製 詩
元氣蒼茫放海溟 원기창망방해명 태초의 기운 아득히 바다에 풀어지니
誰人辨此望洋亭 수인변차망양정 뉘라서 이곳에 망양정을 알 수 있으리
恰如縱目宣尼宅 흡여종목선니택 흡사 문선왕 공자의 집을 구경하는 듯
宗廟官墻歷歷經 종묘관장역역경 종묘며 관청 담들이 겹겹이 펼쳐진 것 같네
(4) 望洋亭 鄭樞(1333~1382) 詩
望洋亭上立多時 망양정상립다시 망양정에 올라 한참 서 있으니
春晩如秋意轉迷 춘만여추의전미 늦은 봄이 가을 같아서 마음 더욱 아득해지네
知是海中風霧惡 지시해중풍무악 아무래도 바다 가운데 바람 안개 나쁜 모양이지
杉松不長向東枝 삼송부장향동지 삼나무 소나무 동쪽 향한 가지는 자라지 못했네
萬壑千巖邐迤開 만학천암리이개 일만 골짜기 일천 바위가 잇따라 놓였는데
傍山歸去傍山來 방산귀거방산래 산을 따라 돌아가고 산을 따라 내려왔다네
雲生巨浪包天盡 운생거랑포천진 구름이 큰 물결에서 나니 하늘을 다 감쌌고
風送驚濤打岸回 풍송경도타안회 바람은 놀란 물결을 보내어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5) 望洋亭 沈守慶(1567~1608) 詩
眠窮天外意難窮 면궁천외의난궁 하늘 밖 시야는 다해도 뜻은 무궁한데
安得乘槎借便風 안득승사차편풍 어찌해야 뗏목 타고 바람 맞을 수 있으리
直欲高聲喚仙侶 직욕고성환선려 곧바로 고성 질러 신선을 맞아들여
與之談笑一盃中 여지담소일배중 그와 더불어 한잔 술로 담소할 수 있으리
(6) 林薈(임회,1508~1573) 詩
歷勝探奇遍海邦 기이한 경치를 찾아 바다 고을 두루 다님에
壯觀今日意遍降 오늘 이 장관에 가슴이 절로 출렁이네
登臨恒似身生羽 누에 오르니 황홀하기 깃털과 같고
摹寫還嫌筆欠杠 그 경치 묘사하려해도 붓 들기 주저되네
萬頃滄波舟點點 만경창파에는 점점이 배 떠있고
一邊盤諸鷺雙雙 백사장 위에 쌍쌍이 갈매기 노니노라
人間始信東溟大 인간세상 비로소 동해바다가 큼을 알았으니
肯數三湘與九江 즐겨 삼상과 구강을 헤아려 보리라
(7) 朴蘭(1495~?) 詩
飛亭絶勝冠東邦 나는 듯한 정자 좋은 경치 동방의 으뜸이니
嶺外樓臺惣乞降 영 저 밖의 누대들 모두 이보단 못하리
陽谷浪飜掀出日 파도치는 양곡에서 일렁이며 해 돋고
漁艇風飽露危杠 고깃배는 바람 안고 깃대를 드러내네
誰將學釣驚連六 낚시질 배워 연육을 놀라게 할 이 누구런가
我欲追仙星擧雙 나는 신선을 따라 별을 따리라
千古雄才慟李郭 천고의 큰 재주꾼 이태백과 곽씨에 부끄럽구나
壯奇難賦海兼江 강과 바다를 저 장관을 그려내기 어려워라
이산해의 시. 그는 인조반정 후 간악하고 모략이 뛰어난 음험한 인물로 매김되어 처형 당하였으나, 당대에는 글 잘 짓고 글씨 또한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이다. 아마도 시로만 평한다면 나는 이 시가 망양정을 읊은 시로는 제일 뛰어나다 하겠다.
望洋亭 鵝溪 李山海
枕海危亭望眼通 침해위정망안통 바다를 낀 높은 정자 눈앞이 탁 틔여
登臨猶足盪心胸 등임유족탕심흉 올라보면 족히 가슴 속이 씻기네
長風吹上黃昏月 장풍취상황혼월 긴 바람이 황혼 달을 불어 올리면
金闕玲瓏玉鏡中 금궐영롱옥경중 황금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
(8) 登望洋亭 鵝溪 李山海(1539∼1609)
縹緲危亭敞 아득히 외로는 저 드넓은 정자여
平臨鏡面澄 드넓게 거울 같은 바닷가에 서 있구나
海雲朝作畵 아침이면 바닷구름 그림을 그리는 듯
山月夜縣燈 밤이면 산위의 달이 등불을 단 것 같아라
踏盡三千界 삼천리 강토를 내 모두 다니다가
依然九萬登 의연하게 이제 구만에 올랐어라
塵緣己抛擲 속세의 인연은 이미 다 내버려두었거니
從此學飛騰 이로부터 신선술법이나 배워 볼거나
(9) 松江 鄭澈 詩
驚濤擊石怒電騰 성난 파도는 바위를 쳐 우레 소리 사나운데
餘沫吹人骨戰競 부서진 포말 몸에 닿아 깜짝 놀라게 하네
剗却玉山飛片片 구슬 산의 옥돌을 깎아 조각조각 날리 듯
折來銀柱落層層 온 기둥을 잘라다 층층이 떨어뜨리는 듯
聲傳海雨魚龍鬪 바닷가에선 어룡이 싸우는 소리 전해지고
光射扶桑日月昇 부상에서 쏘아진 빛 해와 달로 떠오르네
行盡關東一千里 관동 땅이라 일천리 길을 다 가고 나서
望洋亭上獨來登 내 이렇게 망양정 위에 홀로 올랐어라
(10) 登望洋亭看月 망양정에 올라 달을 보다
梅月堂 金時習(1435~1493)
十里沙平望大洋 십리사평망대양 십리 평평한 모래에서 넓은 바다를 바라보니
海天遼闊月蒼蒼 해천요활월창창 바다와 하늘 아득한데 달빛 푸르네
蓬山正與塵寰隔 봉산정여진환격 봉래산 정히 인간 세상과 격하였으니
人在浮藜一葉傍 인재부여일엽방 사람은 물 위에 뜬 마름 한 잎에 사는 게지
(<울진군지> 下권, 제3편 금석문․시․기, 제2장 詩)
망양정기(望洋亭記)
채수(蔡壽, 1449∼1515)
이 정자는 여덟 기둥으로 둘렀는데 기와는 옛 것을 쓰고, 재목도 새로운 것을 쓰지 않았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풍경 물색의 기이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정자의 조금 북쪽을 둘러 8간을 지으니 이름을 영휘원(迎暉院)이라 한다. 벼랑을 따라 내려가면 또 한 돌이 우뚝 솟아 그 위에 7, 8명은 앉을 만하며 그 아래는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이름을 임의대(臨漪臺)라 한다. 북쪽을 바라보면 백보쯤 밖에 위험한 사다리가 구름을 의지하여 그 위로 사람 가는 것이 공중에 있는 것 같으니 이름을 조도잔(鳥道棧)이라 하는데,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유람 관광하는 낙이 이 이상 없다. 바람자고 물결 고요하며 구름 걷고 비 개일 때에, 눈을 들어 한 번 바라보면 동쪽이 동쪽이 아니요, 남쪽이 남쪽이 아닌데 신기루(蜃氣樓)는 보이다 말다 하고, 섬들은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가다가 큰 물결이 거세게 부딪치고, 고래가 물을 내뿜으면 은은하고도 시끄러운 소리에 하늘이 부딪치고 땅이 터지는 것 같으며, 흰 수레가 바람 속을 달리고 은산(銀山)이 언덕에 부서지는 것 같다. 가까이 가서 보면 고운 모래가 희게 펼쳐지고 해당화는 붉게 번득이는데, 고기들은 떼지어 물결 사이에서 희롱하고 향백(香栢)은 덩굴 뻗어 돌 틈에 났다. 옷깃을 헤치고 한번 오르면 유유히 바다 기운[灝氣]과 더불어 놀아서 그 끝간 데를 오르며, 양양하게 조물주와 더불어 함께 하여 고단함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여기서 비로소 이 정자가 기이하고, 하늘과 땅이 크고 또 넓은 줄을 알게 된다. 아, 우리나라를 봉래(蓬萊)․영주(瀛洲) 산수의 고장이라 하지만 그 중에도 관동(關東)지방이 제일이 되며, 관동지방의 누대(樓臺)를 백으로 헤아리지만 이 정자가 제일 으뜸이 되는 것으로서, 하늘도 감추지 못하고 땅도 숨기지 못하여 모습을 드러내어 바쳐서 사람에게 기쁨을 줌이 많으니, 어찌 이 고을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적어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望洋亭記 懶齋 蔡壽
是亭繚以八柱。瓦用其舊。材不新聚。雖不壯不麗。而景物之奇。莫可端倪。亭之小北。環搆八間。名迎暉院。緣崖而下。又有一石突起。上可坐七八人。下臨無地。名臨漪臺。北望百步外。有險棧欹雲。人行如在半天。名鳥道棧。凡行旅遊觀之樂極矣。每風恬波靜。雲消雨止。擧目一望。則其東無東。其南無南。蜃樓隱見。鼇嶼出沒。或洪濤怒號。鯨鯢噴薄。則隱隱轟轟。如天摧地裂。如素車奔風。銀山碎岸。近而視之。鳴沙鋪白。海棠飜紅。群魚族戲於波間。香柏蔓生於石隙。披襟一登。悠悠乎若與灝氣游而莫得其涯。洋洋乎與造物者俱而不知其所窮。然後始信亭之奇。而天地之大且廣也。嗟夫。我國號蓬瀛山水之窟。而關東爲最。關東之樓臺以百數。而此亭一朝冠焉。天不能慳。地不能祕。呈奇獻異。悅人多矣。豈非此邑之幸歟。是不可不志以傳於後也。
<아계유고> 제3권 기성록(箕城錄) ○ 잡저(雜著)
망양정기(望洋亭記)
이산해
내가 소싯적부터 글짓기를 좋아하여, “글은 배워서 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옛사람의 책들을 구하여 읽었는데, 마음에 기억하고 입으로 독송하기를 오래 한 다음 시험삼아 써 보았더니 글은 비록 이루어졌으나 비루하여 보잘 것이 없었다. 이윽고 생각해 보니, 글이란 기(氣)가 주가 되므로 기가 충실하지 못하고서 글을 잘할 수 있는 경우는 없었다. 옛날에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사해(四海)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여, 기에서 얻어 말로 나타내었던 까닭에 그 글이 소탕(疎宕)하고 기건(奇健)하여 변화가 무궁한 것이다. 나는 치우친 땅에 태어난 데다 그나마 나라 안의 기이한 경관들도 다 보지 못하였으니, 글이 이처럼 조잡함도 괴이할 것이 없다 하겠다.
그 후 영동(嶺東)으로 귀양 오는 길에 낙산(洛山)을 지나면서 일출(日出)을 보고, 임영(臨瀛, 강릉의 옛 이름)을 지나면서 경포대와 한송정의 빼어난 경관을 바라보고, 소공대(召公臺)를 지나면서 아스라이 먼 울릉도의 자태를 바라봄에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망양정에 올라,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깊어 그 크기가 밖이 없고 그 넓이가 가이없고 그 깊이가 끝이 없음을 본 뒤에야, 비로소 평생의 장관을 유감없이 다하여 호호탕탕한 흉중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듯 느껴졌다. 온갖 시내가 도도히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기(氣)는 반드시 본원(本源)을 길러야 하며 문장은 혼후(混厚)하고 심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삼광(三光, 해, 달, 별)이 하늘을 돌아 쉼 없이 출몰하는 것을 보고는 기는 간단이 있어서는 안 되고 문장은 순실(純實), 맹건(猛健)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교룡과 고래가 물기둥을 뿜고 사납게 날뛰는 것을 보고는 기는 모쪼록 웅용(雄勇)해야 하고 문장은 동탕(動盪), 발월(發越)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신기루와 오서(鰲嶼, 신선이 산다는 섬)가 숨었다 나타났다 멀리서 명멸하는 것을 보고는 기는 모쪼록 침착해야 하고 문장은 기고(奇古), 유묘(幽眇)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노한 풍랑이 울부짖으며 지축을 뒤흔들고 은산(銀山)과 옥봉(玉峯), 소거(素車, 흰 수레)와 백마(白馬)의 모습을 한 파도가 눈과 얼음 같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좌충우돌로 마구 치달리는 광경을 보고는 기(氣)는 모쪼록 능려(凌厲)해야 하고 문장은 참절(巉截), 준발(峻拔)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람이 잠들고 물결이 잔잔하여 수면이 잘 닦은 거울 같고 위에는 오직 하늘, 아래에는 오직 물뿐이어서 달빛이 언뜻언뜻 비치는 가운데 물과 하늘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광경을 보고는 기는 모쪼록 응정(凝定)해야 하고 문장은 부박(溥博), 연홍(淵泓)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천지의 사이에 만물의 변화로서 놀랄 만하고 기쁠 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하게 할 만하고 슬퍼하게 할 만한 것들을 이 정자 위에서 남김없이 거두어 잡아 나의 기운을 돕는다면, 문장으로 발휘되는 것이 뭇 체식(體式)과 온갖 자태를 모두 갖출 터이니, 예전에 기송(記誦)하고 표절하기만 일삼던 것과 비교하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아, 내가 미미한 일신으로 정자에 올라 천지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나의 존재가 겨나 하루살이보다도 더 보잘 것이 없건만, 높푸른 하늘과 드넓은 땅, 아득한 바다와 수많은 만물이 갖가지 괴이한 변화를 일으키면서 가슴 속으로 달려 들어와 나의 작용이 되지 않음이 없은즉, 그 또한 장엄하다 하겠다. 이에 한 호리병의 텁텁한 막걸리를 자작(自酌)해 마시다 취해 창안(蒼顔) 백발로 정자 위에 쓰러져 누우면 천지가 일개 이부자리이고 창해가 일개 도랑이고 고금이 일개 순간이라, 시비니 득실이니 영욕이니 희비니 하는 따위는 남김없이 융해되고 세척되어 저 홍몽(鴻濛)한 혼돈의 세계에서 조물주와 서로 만나게 되니, 그 또한 통쾌하다 하겠다. 그 장엄함이 이와 같고 그 통쾌함이 이와 같고 보면, 기가 어찌 충실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결핍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뒤에 붓을 잡고 종이를 펴서 시험 삼아 내 흉중에 간직한 것을 쓴다면, 그 글을 보고 필시 무릎을 치며 탄복하는 이가 있을 터이니, 오늘 이 정자에서 얻은 바가 훌륭하지 않겠는가.
정자는 군(郡) 북쪽 30리 거리의 바닷가 깎아지른 벼랑 위에 있는데, 고인이 된 군수 채후(蔡侯)가 세운 것이다.
모년 모일에 기(記)를 쓰노라.
(한국고전번역원 이상하 (譯) 1997)
<鵝溪遺稾>卷之三 雜著
望洋亭記
余自少時。喜爲文辭。以爲文可學而能也。求古人之書而讀之。記於心而誦於口。久之。試書之。文雖成而陋不足觀。旣而思之。文者。以氣爲主。氣之不充而能爲文者未之有也。昔太史公周覽四海名山大川。得於氣而發於言。故其文疏宕奇健。變化無窮。余則生乎偏方。而亦不能盡國中之奇觀。無怪乎文之鹵莽如是也。及謫嶺東。過洛山而觀日出。過臨瀛而望鏡浦寒松之勝。過召公臺而望蔚陵之縹緲。中心已自喜幸。而及登望洋亭。見天容海色之蒼然淵然。而其大無外。其闊無涯。其深無極。然後始有以盡平生之壯觀。而浩浩乎匈中。若與曩時異矣。百川滔滔。日夜不止。則知氣之必養其本原。而爲文不可不混厚深遠。三光繞天。出沒無停。則知氣之不使有間斷。而爲文不可不純實猛健。蛟龍鯨鯢。噴薄紛挐。則知氣之務要雄勇。而爲文不可不動盪發越。蜃樓鰲嶼。隱現明滅。則知氣之務要沈着。而爲文不可不奇古幽眇。風濤怒號。振撼坤軸。銀山玉峯。素車白馬。橫馳逆走於雪花氷雹之中。則知氣之務要凌厲。而爲文不可 不巉截峻拔。風恬波靜。鏡面如拭。上有一天。下有一水。而水天相涵於空明有無之中。則知氣之務要凝定。而爲文不可不溥博淵泓。凡天地之間。萬物之變。可驚可愕。可喜可娛。使人憂。使人悲者。無不收攬於是亭之上而助吾之氣。則其發於文者。衆體百態。無不兼備。而其視前日之記誦剽竊者。果何如也。噫。以眇然之身。登亭而俯仰。則不啻如糠粃蜉蝣之微。而天之蒼蒼。地之茫茫。海之浩浩。物之林林。百怪千變。無不驅入於方寸之中。而爲己之用。則其亦壯矣。壺村釀。自酌自飮。蒼顔白髮。兀然頹於其中。則天地一衾枕也。滄海一溝瀆也。古今一須臾也。是非也得喪也榮辱也欣戚也。無不消融蕩滌。而與造物者相揖於混沌鴻濛之域。其亦快矣。其壯也如是。其快也如是。則氣焉有未充。又焉有餒之者乎。然後把筆伸紙。試書吾胸中之所有。則其必有擊節而嘆賞者矣。余之有得於是亭者。不其韙歟。亭在郡北三十里濱海斷岸之上。故太守蔡候所建云。月日。記。
망양정 이건 상량문(望洋亭移建上樑文)
石屛 鄭願基
바다는 천하에서 제일 커서 한도 끝도 없고, 물 보는 것도 기술이 있다. 정자는 세월과 같이 흘러 왔으니 새 것이 어찌 옛 것만 하랴. 오직 저 산이 바꿔 있을 뿐이라네. 바다 위 우뚝한 저 정자는 자미원(紫微垣)과 은하수(銀河水)를 이고 있고, 나라님의 문장이 밝게 빛나니 바로 이것이 관동팔경이라네. 서쪽으로 황하의 근원에 통하며 선객(仙客)이 띠배를 타고 오셨다네. 돌아보면 그 경치 모두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올라 있는데 저승의 극락인지 이승의 인간 세상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이승 저승 합쳐서 제일이라네.
옛터는 멀지 않는 이웃에 있었는데 좌우의 호수와 산은 다소 빼어나지만 중건할 겨를이 없었다네. 길가는 사람들이 빼어난 경치를 아쉬워하였지만, 영랑(永郞)․ 술랑(述郞)의 놀던 터는 지금은 비바람에 무너졌다네. 명승지의 흥함과 폐함도 무상하여 옛날엔 문무가 모여 풍악이 질펀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기왓장과 자갈만 쌓였네. 우리 군수님 진공(陳公) 필덕(弼德)이 오신지 3년에 명망이 높고 우아하였으며 정자가 오래 동안 무너진 것을 한탄하였다네.
일군(一郡) 사람들이 복원해야 한다고 노래 노래하며 등자경(縢子京)이 화악루(和岳樓) 중건하듯이 해주길 고대하였다네. 새롭게 옮겨 지을 자리는 백리 안의 산천들이 빼어남을 뽐내고 있어서 이곳으로 옮겨올 것을 여러 사람에게 자문하였더니 윤삼월(閏三月)이 조금 한가해서 좋다네.
백성들이 아비 일에 자식이 오듯 모여 와서 산의 나무와 벽돌과 바다의 돌들을 다투어 함께 모아 왔는데 위치는 동헌에서 정남방 10리 허에 잣나무 소나무 어우러져서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네. 누가 옛 정자보다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으랴. 어느 물 어느 산 어느 나무 어느 언덕을 막론하고 어부는 노래하고 초부(樵夫)는 피리 부니 이를 일러 아름다움이라 하네. 새로운 정자는 서에서 동에서 남에서 북에서 구름 삽과 바람 돛대이고, 해안의 소나무는 맑은 바람이요, 구름 사이 난새와 학은 조화의 울음이다. 비래봉이 푸른 하늘에 반쯤 떨어지고, 봉황대(鳳凰臺) 아래의 해당화에 성긴 비 내리고, 갈매기와 백로는 긴 날 봄꿈을 꾸네. 강물은 절벽 위 연자루(燕子樓) 앞을 휘감아 돌아가나 잘 알지는 못하지만 소상의 동정호가 어찌 이곳만 하겠는가. 이야말로 봉래(蓬萊)의 누대라 아니할 수 없으니 들어서 알지만 풍호(豊鎬)의 경치도 이만 못할 것인즉 완전히 황홀무제한 재명(滓溟)의 세계로다. 진시황(秦始皇) 당일의 동남동녀를 태운 배는 돌아오지 못하여 일방(一方)에서 선인을 기다리고 있으며, 공자님도 띠배 타고 오시고져 하셨으니 몇 천 년 예의의 나라라 하였다네.
드디어 장로(張老)와 같이 노래나 불러볼까. 어흐랑차 달구, 이 집 지은 동쪽에는 무엇이 자랑인고 두루 살펴 찾아보자. 자라 거북이 창공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닭은 울어 무릉도원의 나무들을 깨우누나. 어흐랑차 달구, 이 집 지은 서쪽에는 만국을 크게 밝힐 햇빛 붉그레 솟았구나. 12봉 꼭대기에 구름 안개 가랑비 내리는데 기나긴 춘양대(春陽臺)에 신녀가 꿈을 꾼다. 어흐랑차 달구, 이 집 지은 남쪽에는 은근한 미인봉이 그림처럼 앉아 있네. 남극성 노인성이 하늘가에서 서광을 발산하니 우리 님 두고두고 만수무강 하실지고. 어흐랑차 달구, 이 집 지은 북쪽에는 백배산(百拜山) 높은 봉에 만세삼창 소리소리 대붕(大鵬)이 높이 날아 구름 위에 나래 펴고 장풍(長風)이 부는 날에 남쪽으로 날으겠지. 어흐랑차 달구, 이 집 지은 윗쪽에는 햇빛이 난간 끝을 지나가도 여름을 모른다네. 모든 신선 이 곳에서 쉬었다 가시는데 내려다보니 호해(湖海) 풍류가 그만이네. 어흐랑차 달구, 이 집 지은 아래쪽은 웃으며 농사하고, 노옹들의 격양가 소리 높은 강구의 들녘이네. 수십 수천 짝을 지어 여기 저기 농사하니 봄 일이 하도 바빠 쉴 틈이 전연 없네.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 집 지은 후에 지경 안이 두루 태평하고 강산이 새롭게 보일지며, 바다도 풍성 강도 맑아서 국가의 기반이 크게 번창하고 지방의 풍속이 순후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탄탄하도록 하옵소서.
숭정 기원후 4경신(崇禎紀之後四庚申, 1858)
상지 즉조 11년 윤3월 6일 정원기 씀(鄭願基書)
현령(縣令) 이희호(李熙虎) 성조도감(成造都監) 신명호(申命昊)
공조(工曹) 임학영(林鶴英) 감관(監官) 주선호(朱善浩) 이유정(李儒正)
색리(色吏) 장성유(張性維) 장병두(張秉斗)
망양정 약사(望洋亭 略史)
東海의 萬頃蒼波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屯山에 세워진 망양정은 關東八景 중의 하나로 고려시대에 기성면 망양리 해안가에 처음 세워졌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진 것을 성종 2년(1471) 평해군수 蔡申保가 현종산 남쪽 기슭에 옮겨놓았다. 중종 12년(1517) 비바람으로 정자가 파손되어 다음해에 안렴사 尹希人이 평해군수 金世瑀와 협의하여 중수하였고 선조 23년(1590) 평해군수 高敬祖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허물어졌다. 철종 11년(1860) 윤3월 6일에 울진현령 李熙虎가 정자가 오랫동안 무너진 것을 한탄하여 郡承 林鶴英과 더불어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그 이름 하였다. 그 후 정자가 퇴락되어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57년에 울진군 및 울진교육청의 주선으로 국도비 보조금과 金容湜 張聖業 朴承甲 등으로부터 목재를 기증받아 보수에 착수하였으며 崔重吉의 설계건축과 孫穉厚의 단청으로 1958년에 중건하였다. 이후 다시 낡고 기울어진 것을 울진군에서 1979년과 1995년 두 차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던 것이 다시 심하게 낡아 경북 북부권 유교문화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2005년에 완전 해체하고 새로 지었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정자가 영원히 보전되기를 기원하면서 그 내력을 간략히 적는다.
2005년 12월 일 艸史 申相九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