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趙明河 (1905~ 1928) "단검 하나로 일제 육군대장 척살 조명하 의거"
1918년 황해도 풍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건전지제작소·메리야스공장·상점 등의 고용원으로 일하면서 오사카[大阪]에 있는 상공학교(商工學校)를 마쳤다.
그 뒤 큰일을 계획하고 대만(臺灣)으로 건너가 타이중시[臺中市]에 있는 부귀원(富貴園)에 들어가 점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인으로부터 칼쓰는 법을 익혔다. 1928년 5월 일제침략자들이 중국본토 산둥[山東] 출병 등으로 대중국침략전쟁을 계획하면서 일본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인 구니노미야[久邇宮邦彦王] 육군대장을 육군특별검열사로 대만에 파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5월 14일 타이중시 다이쇼정[大正町] 도서관 앞으로 나가 환영하는 일본인 인파에 묻혔다가 날쌔게 달려들어 독검(毒劍)으로 구니노미야를 찔렀다. 이 때의 부상으로 구니노미야는 이듬해 1월 죽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붙잡혀 순국하였다.
1928년 5월 14일 일본의 지배를 받던 당시 대만에서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대장의 환송식이 있었다. 무개차를 타고 환송 인파들 사이를 서서히 지나가던 구니노미야, 그때 인파 가운데에서 뛰쳐나온 청년 조명하가 독검으로 그를 찔렀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만총독은 해임되었고, 결국 구니노미야는 8개월 뒤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1905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조명하 의사. 군청 서기로 근무하던 중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야간학교를 다니며 고학을 하던 중 송학선이 사이토 총독 암살을 시도하려 했던 금호문 사건,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파 사건 등을 겪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자 마음먹었다. 이에 임시정부로 가고자 했던 조 의사는 상해로 가기 위해 대만에 들러 찻집에서 일하던 중 일본 육군대장이 대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척살을 결심했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게 한스러울 뿐이며 죽어 저승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유언을 남긴 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한 것이다.
낯선 곳에서 일본 왕족 처단 의거를 일으키고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바로 스물 네 살의 나이에 어떤 지원도 없이 홀로 의거를 시행한 조명하 의사입니다.
조명하 의사는 일찍이 독립운동을 결심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기회가 여의치 않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대만에 머물며 상해 임시정부로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던 중 대만에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육군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가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조명하 의사는 그를 처단할 것을 결심하고 틈틈이 칼쓰는 법을 배워 연마했습니다.
1928년 5월 14일 조명하 의사는 대만에 도착한 구니노미야가 방심한 틈에 차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를 향해 독을 바른 칼 한자루를 힘껏 던졌고 목에 상처를 입힌 후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조명하 의사는 순국 직전까지 독립을 염원했습니다. '혼자만의 의지로도 일본 처단 의거를 시행할 수 있다'는 결의를 보여준 조명하 의사를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