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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밝거라 태양으로 맑거라 달로 원문보기 글쓴이: anrao
월족이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뜻에서 월남이라고도 하는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어디가나 공안(경찰)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집회의 자유는 없지만 1986년 도이모이(쇄신)정책을 도입하여 재산권을 인정하면서부터 급속도의 성장을 이루고 있다.
베트남 곳곳에 보이는 180여개의 삼성간판은 우리의 경제적 진출을 나타낸다.
베트남 관광은 하롱베이와 하노이 시내 관광으로 진행됐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는 ‘물의 도시’란 뜻으로 약한 지반구조상 주택도 지하 2층으로 제한되어 있고 지하철도 없다.
버스를 비롯하여 대중교통수단도 여의치 않아 오토바이가 모든 사람들의 필수품이다
따라서 출퇴근 시간이면 쏟아져 나오는 오토바이의 물결은 가이드의 표현대로 멸치떼가 이동하듯 장관을 이룬다.
4명의 가족이 끼어앉은 모습부터 오토바이에 실린 다양한 짐들을 보면(오토바이보다 큰 냉장고를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묘기대행진 같기도 하다.
국민소득 4천불의 하노이는 정치수도라 할 수 있고, 작년에 방문했던 국민소득 8천불의 호치민은 경제수도라고 한다.
쌀 수출국 1위인 베트남은 햇볕이 우리의 6배로 여간해선 실패농작물이 없다고 한다.
씨만 뿌리면 저절로 농사가 이루어져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하다.
베트남의 평균연령은 27.5세라고 한다.
전쟁자본(쌀, 고무, 석유, 목재)이 풍부하여 외세에 침입을 받다보니 세 차례의 큰 전쟁을 겪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나 프랑스, 미국, 중국등 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자존심이 강한 민족성을 갖게되었고 따라서 외국인과의 분쟁시 ‘자국민 우선보호주의’를 택하고 있단다.
그러니 이들과 충돌을 갖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또한 월남전 파병으로 한때 베트남의 적이었던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비자 없이 입국하는 나라이가도 한데 이는 김우중 회장이
대우호텔에 자국민 10만명을 채용하고 박연차 회장이 베트남의 산업연수생들을 적극 후원하면서 경제부흥에 일조한 덕분이란다.
30년만의 한파가 왔다는 베트남은 우리의 초여름 날씨로 살짝 선선한데도 패딩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섬을 여행 할때는 여러겹의 옷을 껴입는것이 아무래도 안전하다
하롱베이
하노이 동쪽에 위치한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립공원인 하롱베이는
‘용이 바다로 내려왔다’라는 뜻의 ‘하롱’이라는 이름에서 시작됐다.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 한 무리의 용들이 내려와 사람들을 구하고자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내뱉은 보석들이
삼천여개의 섬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하롱베이는 삼천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서울시만한 크기의 국립공원이다.
하롱베이는 예로부터 파도, 갈매기, 모래등이 없는 삼무도라고 하는데 파도없는 바다는 소리없는 바다였고, 앙꼬없는 진빵처럼 좀 심심하기도 했다,
하롱베이 관광은 유람선에서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주변 섬들을 둘러보고 식사와 차를 즐기며 진행된다.
보트안에서도 역시 애주가 데오필로는 실력을 발휘한다.
나 모르게 어디서 한국 소주를 준비했을까?
하롱베이내에 있는 수상학교
하롱베이의 아름다운 섬들을 구경하고 돌아오면 다양한 청정해산물을 배안에서 직접 요리한 활어 횟감을 즐길 수 있다.
승솥동굴(천궁동굴)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천궁동굴은 깊은 바다위에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석회동굴이다.
물이 없고 동굴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없는 죽은 동굴로서 천정의 반구형태는 카이스트지형인 이곳이 빙하기, 해빙기를 거쳐왔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티톱섬 전망대
호치민의 친구인 티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호치민은 삼천여개의 섬 중 유난히 반짝이는 섬인 이곳을 달라는 절친인 티톱에게 “이곳에 나의 것은 없다”라며 기념으로 친구의 이름을 섬의 이름으로 명명해주었다고 한다.
가파른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에 오르면 아름다운 하롱베이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스피드보트로 섬을 한바퀴 관람한다.
쏘이심 해변
디카프리오의 영화 촬영지로 이름이 나있다
호치민 박물관(호치민 묘)
베트남 통일에 일생을 바친 영웅 호치민이 잠들어 있는 호치민 박물관이다.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화장하여 베트남의 중부, 북부, 남부 세곳에 뿌려달라’는 호치민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되어 이곳 박물관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다.
호치민처럼 방부처리되어 보관되는 4구의 시신(김일성, 김정일, 레닌, 모택동)은 매해마다 200억원을 들여 러시아에서 재방부처리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하니 이들에게 “안녕하십니까?” 라고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바딘광장 (호치민 묘앞 광장)
베트남의 님북통일을 이룬 호치민은 이곳에서 1945년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때마침 호치민 박물관 공안들의 교대식이 있었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라는 포스터가 광장 왼편에 걸려있다.
베트남의 공공근로자는 대부분 여성들이다.
이같은 사이공모자의 여성근로자들을 공안이 지키고 있었는데 공안의 부정부패가 심하다(특히 교통공안들은 뒷돈으로 일년이면 집을 장만한단다)는 가이드의 설명탓인지 그리 권위가 없어 보인다.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호치민은 베트남의 국부이자 영웅이며 신같은 존재이다.
선진국을 배우기 위해, 지피지기를 위해 오랜시간 외국에서 머물던 호치민은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게 됐다.
70여개의 가명으로 오랜기간 망명생활을 하던 호치민은 폭력이 아닌 힘 있는 글을 서방세계에 기고하며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호치민이라는 이름은 중국에서의 망명생활중에 특히 감옥에서 사용하던 이름이다.
검소한 지도자로도 유명한 호치민은 사후 남겨진 것이 헌 인민복 두벌과 타이프라이터, 신발뿐이었다고 한다.
문묘
공자의 사당 모신곳으로 1073년에 세워진 베트남 최초의 대학이었다고 한다.
거북이 모양의 81개의 비석에는 300년동안 시험에 합격한 합격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간혹 지워진 흔적도 있는데 이것은 역모를 꾀한 역적들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자신들을 용의 후손이라고 믿는 베트남에선 이러한 용의 조각을 많이 볼 수 있다.
거
거북이는 장수와 지혜의 상징으로 문묘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원에 모셔져 있다.
한기둥 사원(일주사)
1049년에 세워진 베트남의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국보 1호이다.
후사가 없던 황제가 꿈에 관음보살이 건낸 아이를 받고 득남을 하게 되어 감사의 표시로 지어바친 사원이라고 한다.
그 후 이 사원에는 아이를 기원하는 기도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사원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돌면 아들을,
왼쪽으로 돌면 딸을 얻는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시내 곳곳 거리에는 상인들이 모여 간단히 식사를 하는 모습을 흔히 볼수 있다.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
국기의 붉은 바탕은 혁명의 붉은 피를 상징하고 별의 다섯 모서리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 군인의 단결을 의미한다고 한다.
365일 국기를 다는 베트남은 공산당기도 함께 걸리곤 하는데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하는 낮과 망치 무늬가 선명하다.
다양한 교통수단중 하나인 자전거택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오토바이의 행렬
오토바이의 앉은 두 남녀의 모습으로 둘의 사이를 짐작한다고 한다.
둘 사이에 가방이 있으면 아직 서먹한 사이, 남자주머니에 손을 넣고 앉으면 애인사이, 가운데 아이가 있으면 부부사이,
명절을 앞둔 시장의 모습
금색과 홍색의 화려함이 인상적이다.
옥산사
옥산사의 실제 거북이 박제
호안끼엥호수(환검호)
이 호수안에 옥산사가 있다
베트남 농경생활과 설화를 인형을 통해 해학적으로 묘사한 수상인형극이라는데 설화를 몰라서인지 직접 연주되는 전통음악이외에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아마도 시간떼우기 과정인듯~~
베트남의 정통 쌀국수인 분짜정식
잘 익힌 숯불돼지불고기를 채소에 싸서 쌀국수 면과 함께 먹는 하노이 고유의 음식
첫댓글 베트남은 예전 우리나라 70년~80년전후 처럼 무언가 성장하기 위한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시내에 많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 이었으며,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먹는 모습 예전 우리나라의 포장마차에서 음식을 먹던 모습처럼 보였다. 음식점에는 우리나라 소주가 항상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식당에서 갖고온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식당에서 갖고온 소주 마시면 5달러, 음식점에서 사마시면 7달러를 받는다. 무비자 나라는 우리나라와 프랑스 두나라뿐 자부심을 느꼈으며, 대우 김우중회장님 역활 컸다는 이야기에 개인적으로 가슴이 뭉클했다. 예전에 베트남에서 전사하신 많은 장병들이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