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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배반 (막14:3-11절)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주님은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위대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절정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세계 역사의 초점이었고 구심력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사실상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신기원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 세계 안에 주어진 온갖 시간과 공간들 가운데서 가장 성스럽고 인상 깊은 한 주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보내신 최후의 한 주간입니다. 보통 교회사는 이 주간을 수난주간 (the holy week) 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지상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경건의 옷을 입게 됩니다.
이 수난주간의 첫 번째 날은 안식 후 첫 날 일요일로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날로서 ‘개선의 날’ 혹은 ‘종려의 날’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막11:9-10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둘째 날 월요일은 ‘권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이 날에 주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깨끗이 하셨습니다.
*막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하시매..
셋째 날 화요일은 ‘변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이 날에 가장 많은 말씀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한 경고와 질문과 대답, 공격, 과부의 연보, 헬라인과의 대화, 유대인을 향한 심판 선언,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에 대한 예언, 유대인의 음모 등이 일어났습니다.
넷째 날 수요일은 ‘은퇴의 날’ 이라고 부릅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지상에 살 동안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한 날을 베다니에서 보내셨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공개적인 공생애 사역을 조용히 마감하신 것입니다.
다섯째 날 목요일은 ‘아픔의 날’ 혹은 ‘고민의 날’로 부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의 만찬으로 제자들의 가슴에 영원한 사랑의 기념비를 새겼습니다. 다락방 고별 설교를 했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여섯째 날 금요일은 ‘수난의 날’ 이라고 부릅니다. 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날입니다.
일곱째 날 토요일은 ‘비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무덤에 머물렀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여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최후의 한 주간 중에 ‘은퇴의 날’ 즉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을 장식하는 수요일에 벌어진 장면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날은 사랑과 배반이 대치한 날이었습니다.
이 사랑과 배반은 베다니에서 일어난 기쁨의 잔치 중에서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받던 제자 가룟 유다의 배반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악의 표본이요, 배반자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1. 그는 예수에게 부름을 받은 자였습니다.
*마10: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막3: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눅6: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복음서는 한결 같이 말하기를 그가 다른 열한 제자와 동일하게 예수에게 부름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자신의 제자가 될 사람을 부르셨으며 그 중에 특별히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도 공생애 삼 년 동안 예수님의 사도로 칭함을 받았고 다른 많은 제자들로부터 존경과 예우를 받았던 것입니다.
2. 그는 예수님께 경고를 받았습니다.
*요6: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푸신 기적의 역사 후에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떠난 사실을 제자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을 떠난 군중들은 썩는 양식을 보고 따르던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군중이 떠나버린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모든 제자들을 대신하여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요6: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이 대답을 들으신 후에 주님은 경고를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였지만 그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들은 제자들은 모두 동의하고 예수를 떠나지 않기로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이 예수를 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열둘을 택하셨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그 중에 하나는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귀’라는 헬라어 ‘디아볼로스’는 ‘참소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예수를 참소할 자라고 이미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3. 그는 돈궤를 맡은 도적이었습니다.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라.
가룟 유다는 제자들 사이에서 재정을 맡은 자로서 모든 돈을 관리하였습니다. 그는 적지 않은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고 치부하였습니다. 오늘도 300데나리온의 돈 중에서 어느 정도 자신이 착복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자 그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비난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그가 가난한 자를 핑계한 것은 그의 본성적인 사기성에서 나온 사리사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민한 계산으로 순간적인 이해득실은 따질 줄 알았으나 인간됨의 가치나 영적인 가치는 계산할 줄 몰랐고 고려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여인의 스승에 대한 헌신적인 행위를 경제적인 낭비로 일축해버리는 냉랭함을 가진 그는 결국 자신의 스승의 목숨을 팔아서까지 자신의 부의 축적을 노린 파렴치한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4. 그는 위선자였습니다.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가룟 유다의 논조는 매우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셨으며 친히 그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특히 주님은 왕궁에서 호화스럽고 사치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질책하셨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행동은 왕궁의 사람들처럼 사치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일 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을 단 한 번에 낭비한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가난한 자들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예수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는 분을 내었습니다. 많은 제자들도 여기에 동조를 하였습니다. 은근히 제자들을 선동하여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던 그의 계책이 성공을 한 것입니다.
*막14: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예수님의 왕위 대관식은 다윗 왕의 전통적인 취임 의식과는 다릅니다. 취임 의식이 거행되는 자리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다니라는 점, 대제사장이 아니라 한 익명의 여인이 기름을 붓는 점, 그리고 기름부음 받음이 만수무강을 비는 축복 속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이루어진 점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감정은 단순히 기름을 아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분한 마음이 충천하여 여인의 행위를 무기치한 것으로 매도하고 질책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인을 책망하였는데 그 여자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심히 꾸짖었습니다.
가룟 유다와 제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이 베다니에 있는 동안 마리아와 그의 언니 마르다에게 관대한 대접을 자주 받았었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인 예상 밖의 놀라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5. 그는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엄밀히 말하면 예수를 팔아넘긴 주체는 기룟 유다이며 사탄은 그 배후의 조종자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the devil had already suggested to judas lscariot' 이 말의 뜻은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제안했다. 그런 뜻입니다.
그는 회개라고는 모르는 영적 상태가 마귀적이었으며, 그 결과 마귀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락했던 것입니다.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그는 철저히 이해타산을 따지는 현실주의적 동기를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은 삼십 세겔을 받음으로서 그동안 예수와 함께 지내며 힘들고 어려웠던 지난날의 보상을 받고자 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자신이 팔릴 것을 말씀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여러 차례 주셨으나 그는 그 기회를 사탄에게 모두 팔아버리고 사탄의 영원한 지배 아래 들어가 버렸습니다.
6. 그는 스승을 배반하고 예수를 넘겨주려고 모의를 했습니다.
*막14:10-11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기회를 찾더라.
자신과 제자들이 합세하여 여인을 질책하자 이에 예수께서 급히 변호를 하시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여인을 괴롭게 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무분별한 행동과 비난과 책망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들이 지금 하는 행동이 옳지 않음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여인의 행위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위를 ‘좋은 일’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행위’ 즉 예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영원히 기억하실만한 아름다운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과 ‘항상이 아닌 것’을 강조하시면서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원하기만 하면 항상 도울 수 있지마는 예수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시간은 단 한 번의 기회로 이 절박성을 인식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와 헌신을 바친 여인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정과 칭찬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배반의 싹을 트게 하였습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났고, 자신의 주장이 완전히 묵살되고 반대로 여인의 행동이 칭찬받는 상황이 몹시 싫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크게 분노한 그에게 사탄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갔다고 누가는 기록하였습니다.
*눅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마태는 그가 돈을 사랑함으로써 배신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배신의 동기가 어떠하든지 그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오리 길이나 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이때부터 그는 예수와 완전한 단절을 한 것입니다.
7. 그는 애찬의 암초였습니다.
*요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대중들 앞에서 예수의 공식적인 가르침과 사역은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배반의 사건과 함께 마감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은 때가 이미 이른 줄 아시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애찬의 암초를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편들은 압살롬의 반역을 배경으로 지은 것으로 예수는 가룟 유다의 전형을 아히도벨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사이며 정책 자문관으로 신임했던 아히도벨로부터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다윗의 경우처럼 주님도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합니다. 함께 식탁에 앉아서 떡을 뗀다는 것은 가장 절친한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제자들 가운데 자신을 배반할 사람이 나타날 것을 두 번이나 예언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지금 구체적으로,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심령에 민망하여’ 이 말은 심령이 떨리고 아픈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 어거스틴은 예수께서 배반자의 일에 대해 그토록 큰 번민을 나타내신 것에 대해 의아해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열두 사도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던 인물,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 동안 동고동락했던 인물이 수 차례의 회개의 기회를 묵살하고 마침내 사탄의 손아귀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순간에 이르자 그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비통함은 사탄의 꼬임에 빠져 그 도구로 전락해 버린 사랑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고 느끼신 심령의 격통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번만큼은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에 대한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깊으셨던 주님은 유다의 발도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의 폭탄선언에 제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배반자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제자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자 성급한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예수의 품에 의지하고 누운 요한에게 그 제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품에 기댄 채로 은밀하고 조용하게 물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배반자를 공개적으로, 공식 석상에서 물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공개적으로 이를 거명한다면 그는 당연히 부인할 것이며 그로 인해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 사람이다.’라고 속삭이듯이 은밀히 대답하시면서 떡 한 조각을 초에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그 이름을 거명하기보다 시편의 예언대로 행동을 통하여 대답을 주셨습니다.
당시의 풍습으로는 떡을 건네는 것은 특별한 우정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통하여 요한은 배반자가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나 다른 제자들은 예수께서 먼저 가룟 유다에게 떡을 건네는 것을 보고 유다를 제일 신임하시는 것으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는 이미 사탄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실 때에 그는 내심으로 그것이 바로 자기를 가리켜 하시는 말씀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모르는 체 하면서 태연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가 바늘방석과도 같이 불편하고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떡을 초에 찍어서 자기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애정이 담긴 마지막 호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자신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는 주님이 싫어서 더욱 주님을 멀리하고 자신을 사탄의 지배 속으로 내어던져 사탄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요13:27 조작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기룟 유다가 예수를 팔려고 작정했던 시간은 이날 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필시 이전에 대제사장들과 더불어 예수를 팔아넘길 가장 적절한 때를 모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당할 수난의 시간을 정확히 알고 계셨으므로 그 시기가 임박했음을 아시고 유다에게 일을 더 빨리 진행하도록 재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유대인들의 최고 종교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가 고심하고 있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민중을 자극하지 않고 예수를 체포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의 세력이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삼킬 자를 찾는 순간, 가룟 유다는 제 발로 악의 소굴을 찾아가서 스승 예수를 팔아넘기는 언약을 합니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간 뚜렷한 목적은 ‘예수를 넘겨주려고’ 였습니다. 유다는 존귀한 제자로 택함을 받아 예수와 삼년 동안 동거하며 사랑을 받고 제자 훈련도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고 섬길 수 있도록 양육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스승을 원수에게 팔고자 약속했다는 것은 가증스러운 배신의 행위입니다. 배신은 비인간적인 행위이며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주변에는 위기감이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 위기가 고조되는 순간을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스승을 넘겨 줄 최대의 기회로 활용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과 동거했기 때문에 주님이 언제, 어느 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지식, 그 정보를 이용하여 예수가 체포될 수 있도록 도운 것입니다.
*막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가룟 유다는 겟세마네 동산에 대제사장들이 보낸 하속들과 함께 나타나서 군호를 짠 대로 예수께 입을 맞추어 그들이 주님을 체포하기에 용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는 인간의 탐욕을 좇아 주님의 길을 버렸습니다. 자기중심적인 기대와 세속적인 욕망이 예수를 버리게 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욕망으로 허전한 마음은 돈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돈은 구속력을 가지고 인간을 파멸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을 주고, 받기 위하여 스스로 비참한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함정을 파는 자는 그곳에 자신이 빠지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태리 밀라노에 가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성만찬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서 요한은 예수의 오른편에, 가룟 유다는 예수의 왼편에 있습니다. 그처럼 유다는 예수의 몸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에 있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마음은 육체의 건강도 좌우합니다. 실로 마음은 사람의 전부인 것입니다. 마음이 먼 곳에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곡’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단테는 가룟 유다를 배신자의 표본으로 그렸습니다. 사실 역사는 그를 가장 악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과연 가룟 유다가 역사상 최악의 죄인인 것이 확실합니까.
가룟 유다보다도 더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이름에 해악을 끼친 악한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에게 탐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스승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탐심도, 배신도, 그의 죄의 출발점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죄의 뿌리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을 바꾸지 못한 것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유다민이 주디아(Judean) 출신입니다. 주디아는 혁명의 불꽃이 타는 곳입니다.
예수의 인품과 능력은 유다의 혁명 의지를 흥분시켰습니다. ‘저분이면!’ 하는 기대로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예수의 코스는 다른 곳을 향하여 달립니다. 자신의 기대와 생각과는 상반되는 예수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는 용케도 자신의 감정을 숨겼습니다.
이로 볼 때 유다는 수준급의 외식자이기도 합니다. 유다는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비극입니다. 잘못된 메시야 관을 바꾸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에게 자신을 항복시키지 않았습니다.
수년 전에 일본의 히로히또 천황이 죽었습니다. 그의 공적이 하나 있다면 주전파의 고집을 물리치고 맥아더 장군에게 항복을 한 것입니다. 원자폭탄을 맞고도 항전을 주장하던 일본의 주전파처럼 가룟 유다는 주님이 직접 주시는 떡을 받고도 마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 떡 한 조각은 유다를 향하여 쏜 예수의 마지막 사랑의 화살이었습니다. 최후의 살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말씀은 사람을 항복하게 하든지, 아니면 마음을 강퍅하게 하든지 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하게 합니다.
유다의 경우는 떡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벼락은 잔디보다는 큰 나무를 찾아가서 때립니다. 마지막 말씀의 떡, 사랑의 떡에 항복하지 않는 가룟 유다의 마음에 사탄의 벼락이 내리 앉은 것입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것은 하늘의 신비입니다. 오묘입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시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법칙이 운행되고 있습니다. 우주가 태초의 법칙대로 운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도, 심판도, 빛과 어둠을 나누신 태초의 법칙대로 운행되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에게는 주님께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나니.’ 그런데 가룟 유다를 위해서는 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가룟 유다는 지금까지 불신을 품고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불신을 그대로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몬인 베드로에게는 충성도 있고, 회개도 있고, 순종도 있고, 은혜도 있습니다. 선택과 은혜는 언약의 축복에서 왔습니다. 언약은 책임을 말합니다. 거룩한 책임입니다. 언약의 주인이신 예수는 시몬을 위하여 거룩한 책임을 지셨습니다.
예수는 지금 다락방에 계십니다. 가룟 유다가 보기에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초라한 다락방입니다. 그러나 이 다락방에서 떡을 떼시는 예수는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에녹, 아벨, 아담과 같은 언약의 가족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는 믿지 않습니다.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탄의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밤길을 향하여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밖으로 나가니 밤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과거에는 ‘유다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주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잔을 들고 서원을 주님께 갚으며, 찬송하고, 감사하고, 충성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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