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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능력주의로부터 자유로운가?
능력주의(Meritocracy)와 교회의 은사(charisma)에 대한 비판적 성찰. 마이클 샌델의 능력주의 비판을 중심으로.
목 차
1. 주제 설정
2. 21세기 능력주의의 신화에 대한 마이클 샌델의 비판
3. 능력주의의 기원으로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4. 사회적 ‘능력주의’는 교회의 은사(카리스마)와 어떻게 다른가?
5, ‘풍요중독사회’ 속의 교회의 역할과 과제
6. 맺으면서: 교회는 세속적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가?
1. 주제 설정
21세기는 소유와 욕망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문명의 시대이다. 인류가 발견해낸 경제체제 가운데 현재까지 온건하게 평가되어온 자본주의 신화는 오늘날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와 이념 논쟁을 일으키며 위기에 봉착했다. 적지 않은 인문학자들은 21세기 인류가 겪고 있는 시대의 고통과 표징은 시장경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신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최근 자본주의 체제를 견고하게 이끌고 있는 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치 철학적 비판을 이끌고 있는 이로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크 샌델(Michael J. Sandel)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이어 최근 출간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현대 사회의 ‘야수 자본주의’와 ‘기술관료주의’(Technocracy)를 지탱해주고 있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자신이 이룬 실적에 대한 평가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 정당한 것임을 강조하는 현대의 자유시장경제의 핵심 원리이지만 동시에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 놓은 능력주의 신화는 외연으로는 동등한 조건과 경쟁 속에서 능력을 지닌 사람이 대우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들지만, 정작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출발점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하다. 우리 시대가 이념의 양극화와 기득세력들만이 사회적 지위와 부를 누리는 불공정한 세상이 된 것은 능력 있는 사람들만이 낙원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의 편견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공정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비판보다는 자책과좌절에 빠져 스스로 능력주의의 패배자로 인정하게 만드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과연 가톨릭교회는 21세기의 자본주의가 숨긴 야수성과 약탈성에 맞물려 성장해온 능력주의 신화에 맞서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이에 대응해나갈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쁨을 세상에 선포하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카리스마)를 공동체의 구성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속의 질서 속에서 사회적 제도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에 세속 질서의 악마성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이점은 현대 가톨릭교회가 자본주의의 병폐와 능력주의의 신화에 맞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를 지향하려는 요청에도 세속의 기득권과 타협하거나 기득세력의 일부가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교회의 역사 속에서 발견된 제도 교회의 약점은 시대의 표징을 식별해야 할 교회의 본질보다는 현실적 성공이나 능력주의의 신화에 함께 함몰되는 약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에 필자는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에 맞서 과연 가톨릭 교회가 복음적 소명을 시대의 표징에 따라 어떻게 해석하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비전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21세기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실체를 마이클 샌델의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분석하고, 기초신학의 관점에서 교회 구성원 각자가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카리스마)를 통하여 세속 질서 속에서 가톨릭 교회가 간직하고 추구해야할 교회론적 원리를 밝히고자 한다.
2. 21세기 능력주의의 신화에 대한 마이클 샌델의 비판
21세기 인류가 겪고 있는 위기를 진단한 많은 인문학자들의 지적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불공정, 불평등의 문제이다. 4차 산업혁명의 전환기 속에 인류는 초연결시대를 살아가며 유전학, 생명공학, 인공지능 등의 개발로 인류가 지닌 본성을 넘어 더 큰 능력을 숭상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이점은 현대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자유시장경제질서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계급을 양산하고 적자생존과 경쟁 속에서 불공정의 위기를 심화할 수 있다.
‘공정’이란 단어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자유 민주주의 사상을 대변하는 말이지만 어떻게 인간을 공정하게 평가하거나 대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치 기준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현대 글로벌한 기술 시대에는 공정의 두 가지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는 고등 교육이 신분상승과 성공 및 사회적 존중을 얻는 길이라는 능력주의 이상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에게 신분상승과 사회적 계층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를 공정하게 주는 기회의 공정성이다. 이 둘의 경우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통해 얻은 사회적 존중과 경제적 부를 얻을 수 있고 그 결과를 향유할 자격을 얻는 것이 당연시된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공정의 원리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얻는 성공의 정당함과 동시에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실패한 이들이 모욕과 자괴감을 갖게 만드는 모순은 안고 있다.
능력주의 중심에 바탕을 둔 공정의 허구성을 갈파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은 오늘날의 성공주의 수사학과 기술관료적 능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예찬을 비판하며 공동선에 대한 숙고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주의의 관점을 대안으로 제시한 바 있다. 마이클 샌델의 주장을 몇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능력주의를 가장 잘 활용한 학력주의와 성공의 원리는 한 인간이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성공한 이들과 실패한 이들 간의 포퓰리즘적 불만을 일으킨다. 오늘날 세계화와 기술혁신이라는 미명 속에 공동체 윤리의 기초인 ‘공공선’은 기술 관료적으로 인식되어 도덕적 논쟁보다 경제 효율의 문제로 둔갑하였다. 이는 기회균등을 빌미로 누구나 재능이 이끄는 만큼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신화로 소득과 사회적 계급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이미 사회적 부와 지위를 지닌 이들이 새로운 형태의 세속귀족제를 탄생시킬 수 있는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2) 능력주의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가는 윤리적 모순을 지닌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고, 나의 노력으로 얻어낸 부정할 수 없는 성과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여긴다. 그럼으로써 그 성공의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을 잊는 경향이 생기고 감사하는 마음을 경감시켜 자신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이는 곧바로 전통적 능력주의에 담겨 있던 “시민적 미덕과 실천지(공공선의 문제에 있어서 추론을 잘하는 실천적 지혜)의 탁월함”을 상실하고, 기술 관료적 능력주의를 양산하여 공동선이라는 도덕적 판단을 제외시킨다.
3) 자유시장경제와 글로벌 자본주의의 성장은 외적으로는 차별 철폐와 기회의 확대라는 신화로 성취의 윤리학을 펼쳤다. 자유로운 경쟁에서 공평한 기회를 제공 받은 개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성공은 미덕의 증표요 나의 부요함은 나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공공선을 위한 복지정책을 펼치는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열심히 일하고 규칙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으로 개인 책임에 대한 담론을 펼친다.이러한 능력주의의 신화는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받을 것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자신의 불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로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 꺽는다.”또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고도의 교육을 받은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4) 능력주의적 오만의 한 증상으로 학력주의 편견이 발생한다. 학력주의는 엘리트 의식으로 노동의 명예를 폄하하고, 기술관료적 공적 담론을 정당화하여 정책 결정을 소수의 엘리트에게 맡기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여 무력하게 만들며 정치적 설득마저 포기하게 한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은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라고 비판한다.
5) 능력주의의 신화는 “모든 시민이 그 인종, 성별, 계층 등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며 그 노력과 재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공허한 약속에 불과하다.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영구화하고, 전문직업인 계급은 자신들의 유리함을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능력주의를 세습귀족제로 탈바꿈시킨다.”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한다.”
6) 20세기 자유시장 자유주의의 이상 속에서 자유사회는 나의 소득과 부가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가치는 수요와 공급의 우연한 일치점에 따라 좌우될 뿐 나의 능력이나 미덕, 또는 내가 기여하는 것의 도덕적 중요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한마디로 경제적 보상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공동체에 빚을 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 공동선에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한다”는 재분배가 요구된다. “시장 수요에 부응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우연히 갖게 된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뜻”이지만 “그런 욕구 충족이 윤리적 중요성을 가진다는 데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욕구를 창출하는 일이 욕구를 충족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능력과 업적이 찬양받을 만한가를 정하는 건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가치관이며, 그것은 ‘좋음’의 영역이지 ‘옮음’의 영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능력주의 편견에 대한 비판은 그의 주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을 주장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와 존 롤스((John Rawls)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토대를 둔다. 첫째로 그는 이른바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라는 도덕적 딜레마를 예시로 들며 공리주의가 수치와 계량화할 수 없는 것들을 수량화하는 문제를 지적한다. 그리고 무엇이 사회와 경제에 이익이 되는지 따지는 문제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 생명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으나 그것을 윤리적 판단으로 바꾸는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이점은 이익과 인권, 이익과 자유와 권리라는 층위가 다른 것들을 동일선상에 놓고 선택하려는 문제를 지적하며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가치로서의 행복을 이득이라는 개념으로 일원화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또 다른 출발점은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다.존 롤스가 정치와 도덕을 분리하여 특정한 좋음(선)에 대한 선호가 아니라 옮음의 범위 안에서 시민들이 좋음을 추구할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의무를 요청하도록 강조한다. 그러나 샌델은 정치를 도덕화하여 특정한 좋음을 미덕이라 하여 시민들이 이러한 미덕을 갖출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공동체주의가 우리 시대에 더 중요한 공동선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그의 사상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사회적 합의만으로 시장 만능주의를 만들어 놓을 위험이 있고, 이 경우 숭고함, 덕의 가치가 사라지고 이윤추구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역할과 책임이 강조된다면 사적 관심을 넘어 시민들 간의 연대의식을 확대시킬 수 있고, 상호 존중과 미덕을 발휘하여 고유한 전통적 가치들을 지켜갈 수 있는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를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공리주의와 자유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반대를 통해 결코 시장 경제에 맡겨서는 안 되는, 곧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들에 대한 옹호를 대변한다고 본다.
3. 능력주의의 기원으로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능력주의에 대한 마이크 샌델의 비판은 인간이 가진 정신적 능력 전반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의 능력이 서로 다르지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가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머물지 않는다. 시장경제를 우선하는 오늘날의 시장자본주의는 인간의 능력의 조건이 상이할 수밖에 없음에도 기회의 공정함만을 강조하며 승자와 패자에 대한 심리학적 괴리를 양산할 뿐이다. 따라서 능력에 따른 사회적 결과들을 공동체의 보편적인 공동선의 이상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와 참된 정의가 실현되는 것임을 마이클 샌델은 강조한다.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 이상을 비판하는 데에는 그가 지향하는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이 깔려 있다. 그는 능력주의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두어 삶에서 주어진 결과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문제를 지적하고, 실제로 인간이 가진 능력은 어떤 운명이나, 우연이나, 신의 섭리 등에 따라 정해져 주어진 은총의 영역이라는 입장을 지지한다.그는 능력주의가 오늘날 근대 자본주의와 맞물려 성장하게 된 데에는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의 의화론 논쟁과 16세기 칼뱅의 예정설, 그리고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정신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주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주장에 주목하고, 오늘날 자본주의의 정신의 바탕이 된 능력주의의 신화가 프로테스탄트의 구원에 대한 관심에서 종교적 메시지가 사라진 결과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마이클 샌델은 어떤 점에서 능력주의 신화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였을까?
그는 먼저 막스 베버의 입장을 지지한다.베버는 종교적인 신념이 삶 전체는 물론 노동습관과 기업에 대한 접근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하여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정신이 보여준 체계적인 노동, 부의 추구, 덕 있는 행실의 뿌리를 찾고자 하였다.오늘날 능력주의의 바탕이 된 근대 자본주의는 전통적인 경제 윤리에서 벗어나 조직적인 경제 활동에 대한 심리학적 보상을 찾고자 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막스 베버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첨예하게 대립된 ‘의화에 관한 논쟁’에서 구원의 조건을 기도와 선행,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를 강조했던 가톨릭의 구원론과 달리 인간의 노력과 선행이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16세기 칼뱅주의에 주목한다.중세의 가톨릭 신자는 탈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기보다 이윤 추구를 통한 부의 축적을 중요하시는 상인과 기업가를 기독교 윤리를 어기고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착취하는 이들로 여겼기 때문에 전통적인 경제윤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자기 공로와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했고, 칼뱅은 인간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절대적 구원 의지에 인간 구원은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구원의 확실성을 얻지 못하는 인간의 불안감은 구원 받았음에 대한 확신을 필요로 했다. 이에 16세기 이후 금욕주의적 개신교인들은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하여 구원이 예정된 이들이 얻게 될 구원의 확증을 찾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첫째, 직업 노동을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노력과 절제가 요구되는 노동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구원된 사람이라는 해석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노동이 신성시되고, 노동이 하느님의 명령이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둘째, 부의 획득과 성공적인 이윤 획득은 직업 소명 안에서의 노동의 열매이자 하느님의 복으로 받아들이며 부의 축적이 종교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셋째, 성화된 삶과 덕 있는 행실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혜와 역사를 증언하는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직업 노동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하고 합리적인 사고 틀에서 구원이라는 초자연적이고 내세적인 목표를 이루려는 현세적 금욕주의의 덕분에 종교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또한 청교도적인 생활양식은 사치를 배격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하면서 소비를 억제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되더라도 부를 오로지 생산과 부의 창출에만 사용하는 경제적 전통주의를 뿌리 내렸다. 이렇게 전통적 봉건주의 사회에서 겪어온 경제 윤리로부터 벗어나려는 종교적 노력에서 윤리적인 요소들이 약화되면서 근대 자본주의의 토대인 공리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막스 베버는 개신교 윤리에서 탈종교화와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노동 자체를 목적으로 보고, 직업 노동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일하며, 자본을 증식시키고, 부를 누리려고 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돈을 벌며, 물질적인 부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표지”로 이해하는 자본주의 정신이 싹트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노동은 신앙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정직과 자신감과 존경받을 만함을 보여주게 되었고, 자본주의 정신은 본래 “내세지향적인 것에서 현세 지향적인 것으로 변모”되었다.
막스 베버의 이러한 종교사회학적 관점에 주목한 마이클 샌델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선행과 보속을 통한 자기 구제의 가톨릭 신학이 보여준 능력주의에 반기를 든 종교 개혁가들의 사상에서 오히려 오늘날의 세속적 능력주의 신화의 뿌리를 찾고자 한다. 루터의 은총론이 반능력주의를 표방한 것이라면 장 칼뱅의 예정설은 구원의 확증을 얻기 위하여 직업윤리와 금욕주의를 강조하면서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은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로써 근대 자본주의의 표어인 자수성가의 윤리는 자기충족에 대한 만족감으로 성공에 대해 타인에게 빚진 느낌이나 “감사와 겸손의 윤리를 압도하고 일과 노력은 칼뱅주의의 예정설과 열띤 구원의 증표 탐색에서 출발해 독자적으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로써 능력에 따른 성공은 신의 섭리에 따라 ‘은총에 의한 구원’에서 ‘일을 통한 구원’으로 바뀌게 되었고, 신 없는 인간의 선택에 따른 섭리론은 승자와 패자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승리자와 정복자의 윤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마이클 샌델은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의 뿌리가 되어 오늘날 수많은 개신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복과 성공의 윤리를 만들어낸 것으로 본다. 그 결과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보는 능력주의적 생활 방식이 고착화되었고, 자신의 일과 목표가 신의 계획에 연계되어 있다는 ‘성취의 윤리학’을 자극하면서 “겸손한 희망과 기도의 윤리학, 수혜와 감사의 윤리학을 압도”하였다고 비판한다. 결국 능력주의에 따르면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 은총을 받았다는 논리가 개신교 신앙 안에 자리 잡으면서 하느님의 섭리를 인간의 논리에 귀결시키는 모순을 갖게 되었음을 마이클 샌델은 지적한다.
4. 사회적 ‘능력주의’는 교회의 은사(카리스마)와 어떻게 다른가?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가진 능력이 문명 발전의 기초가 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도구의 사용과 창의적 상상력을 통한 인류 문명의 발전에 인간의 지혜와 능력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샌델이 지적한 ‘능력주의’는 사회적 능력과 이에 따른 성공과는 다른 것인가? 중요한 점은 이 능력의 활용 범위와 대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능력을 발휘하는 인간 개인의 역량이 자신과 관련된 특정 대상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이기적 욕망의 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인간이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능력을 순전히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인식하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들을 패자로 몰아가는 사회적 양극화 현상을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의 폐단으로 꼽는다.
그렇다면 능력주의가 이기적 자기 보존을 넘어 사회적 관계망을 확대하고 보편적 이상을 넓히는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시장경제의 원리에서 보면 공동선이란 “모든 사람의 선호와 이해관계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공동선을 달성하기 위해서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첩경은 경제성장의 극대화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에 따르면 “공동선은 단지 여러 선호를 합산하거나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호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 다시 말해 이상적으로는 그것을 한 단계 위로 올리고 개선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보람 있고 번영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밝힌다. 그는 능력주의 이상으로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단순히 기회의 평등만을 강조하며 조건이 평등할 수 없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을 개선하기 위하여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이 공동선을 추구하고 이기적 집단주의를 넘어 공동체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길임을 강조한다.
샌델이 제안한 공동체주의 이상은 다분히 종교적이고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쳐온 ‘은사’, 곧 카리스마의 원리와 맥을 같이 한다. 가톨릭교회는 세상 속에서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사목헌장 1항)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의 능력주의 신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마태 5,45) 모든 이에게 공평하신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서 나온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구원의 성사, 곧 “표징이며 도구”(교회헌장 1항)인 교회는 세상과 다른 공동체 구성원리를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 곧 카리스마(charisma)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란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인간 개개인의 믿음의 능력과 태도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는 교회의 은사와 외연적으로 유사하게 보이지만, 은사는 은사의 주체를 한 인간의 독립적이고 자발적인 능력으로 보지 않고 그에게 선사된 하느님의 은총, 곧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된 자유’로 받아들인다는 점이 다르다.
여기서 ‘카리스마’란 개념에 대하여 언급이 필요하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이 지닌 복음 선포의 능력, 곧 예언자 직무를 수행하는 능력으로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고 지탱하여 주시는”(교회헌장 12항) 초자연적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언급한 바 있다.신앙 감각이란 개별 신자가 자신이 “그리스도교 교리와 실천을 파악하고 그에 동의하며, 잘못된 것을 배척하도록 해주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본능”이자 제2의 본성을 말한다. 동시에 개별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 감각을 타자의 신앙 감각의 표현을 만나 학습되거나 교정되고, 식별되어 전달되는 전승의 과정속에서 표현한다. 한마디로 개별 신자의 신앙 감각(sensus fidei fidelis)은 필연적으로 신앙 공동체의 신앙 감각(sensus fidei fidelium)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신앙 감각은 개인의 자립적 능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온전히 성령의 선물로 주어진 초자연적 은사(charisma)에 속한다.
따라서 ’카리스마‘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를 완성하기 위한 각자의 지체로서의 소명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선물이다(1고린 12,6-1 참조). 그리고 성령께서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구성하는 원리이시기에 이 카리스마는 개별 신앙인의 신앙 감각이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보편적 진리를 향해 발현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카리스마는 오늘날 “타인의 구원에 봉사하고,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성령에 의해 개별적으로, 실제적으로 선사된 능력”을 일컫는다. 포그리머(H. Vorgrimler)는 “카리스마란 우월하고 예외적이지 않고, 오히려 일상적인 은사이며, 단일한 형태도 아닌 다양한 형태를 지녔으며,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교회 전체에, 그리고 완전히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카리스마는 초기교회에서나 가능하고 실현될 수 있는 과거의 은사도 아니고, 오히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은사이며, 또한 부분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 안에서 본질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라고 밝힌다.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의 확산되는 상호 의존성을 고려한다면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로서 공동선이 인간의 행복을 지향해야 하고, 인간의 행복이란 철회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입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이어야 한다고 밝힌다. 따라서 “세상을 향한 은사적인 활동은 언제나 구원 공동체의 맥락 속에서, 철저하게 교회를 통하여, 교회를 향해 발생해야 한다.”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은사는 하느님으로부터 발출된, 곧 교회와 세상 속에서 봉사하기 위해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나눠진 능력임을 뜻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봉사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가 주어져 있으며, 카리스마의 가치는 이들이 개별적으로 주목받는 바대로가 아닌 하느님 백성에게 유익한 한에 있어서 그 기준이 정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속적 질서 속의 능력은 서로 다르더라도 그 능력이 지향하는 바가 사회적 공동선을 지향할 때 인간사회의 참된 질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마이클 샌델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구성원리인 은사가 지닌 공동체 지향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교회의 구성원 개개인은 자신의 신앙 감각을 공동체 안에서 표현할 때 그 지향점이 보편적 가치와 공동선인 경우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공통 본성(connaturalitas)’을 갖게 되는데, 이 본성은 ‘교회와 더불어 느끼기’(sentire cum ecclesia), 곧 교회와 조화를 이루며 느끼고 체험하며 지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공동 본성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능동적 주체로 다양한 은사로 서로 봉사하며 함께 걸어가는 친교의 공동합의적 교회, 곧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를 이루는 기초가 된다.
최근 가톨릭 교회가 추구하는 ‘공동합의적 교회’를 위한 여정에는 개별 신자의 은사가 지닌 공동체성이 중요하다. 곧 교회의 은사는 교회의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경청과 식별, 자문을 통해 공동합의와 공동책임을 실현하려는 교회의 자기실현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점은 마이클 샌델이 공동체주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시민적 공동선을 강조한 점과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시민적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라고 강조하였다.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주의 사상은 ‘정의’의 원리를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자유주의의 공리주의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갖는다. 그가 말하는 공동체주의에서 정의란 일종의 ‘기여적 정의’라고 표현한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 전통에 따르면 근본적인 인간 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이점은 공동선을 향한 능력이 교회의 은사 활동으로 승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
5, ‘풍요중독사회’ 속의 교회의 역할과 과제
우리 시대를 ‘풍요중독사회’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경제적 조건이 인간 행복감과 상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풍요가 화목한 사회를 만들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인간 체험에 비춰보면 가난하면서도 화목한 사회가 가능하고, 풍요 속에 불화가 싹트기도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를 불안하지 않기 위해 풍요에 중독된 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풍요의 역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풍요중독사회를 견인하는 능력주의 신화는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 탓, 곧 개인의 불행을 개인 책임으로 몰아가며 상대적 박탈감에 빠뜨린다. 그 결과 “능력에 의해 발생한 불평등은 정의롭고 공정하다는 궤변”을 만들어내는 부자들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해지고, 적자생존과 경쟁 속에서 개인은 존중받기 위해 돈을 욕망하고 자기 계발을 통해 성취에 대한 욕망을 갖지만 더 초라해진 개인주의에 매몰되는 것이 현실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세속적 능력주의가 낳은 오늘의 불공정과 불의의 현실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서 나온 능력과 학벌 지상주의의 결과물이다. 균등하지 않는 조건에서 출발한 개개인의 능력의 차이를 획일화하고 서열화하는 것은 기득권을 지닌 이들의 물질적 성공을 정당화해주는 논리에 지니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은 오늘날 경제적 양극화 시대를 이끄는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는 일은 지속성 있는 유혹이다.”라고 말하고, 이 능력주의 신화가 뿜어내는 유혹이 계속해서 공동선을 통해 공동체가 함께 성장하려는 여정을 방해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점은 가톨릭 교회가 오늘날 세속적 능력주의에 맞서 보편적 정의와 대속적 희생을 강조해온 역사 속에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한 문제이다. 그것은 능력주의 신화가 교회 자신이 지닌 양면성, 곧 가시적 제도로서의 교회의 본질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비가시적 영적 교회의 양면성이 지닌 균형감을 잃게 하는 큰 도전이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세속의 질서 속에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역량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제도적 확장의 노력을 피할 수 없지만, 개별 그리스도인의 신앙 감각을 바탕으로 성찬의 희생과 나눔의 신비를 지향하는 친교와 봉사의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는 역설이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인간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창조적 능력이 ‘노동하는 인간’의 바탕이며, 일을 통해 사람은 인간으로서 충족되고, 그리하여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동시에 노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부합하는 것,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높여주는 것이어야 하며, 노동의 사회적 질서와 함께 덕으로서의 근면과 관련된 도덕적 의무를 긍정적으로 요청한다. 이 도덕적 의무는 노동으로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기력이 쇠진될 뿐만이 아니라 특히 인간에게 고유한 존엄성이나 주체성이 파괴되기 때문에라도, 노동으로 인간성이 격하되지 않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서 교회가 가르치는 노동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경제의 금융화는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가치를 감소시킨다. 마이클 샌델이 지적했듯이 “금융 시장의 카지노적 성격”과 “도덕 및 정치적으로 시장이 금융계에 주는 막대한 보상과 그것이 실제 공동선에 거의 기여하지 않는 것 사이의 큰 불일치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불일치에다 금융 종사자들이 투기 활동을 하면서도 분에 넘치는 명성을 누리는 현실은 실물 경제에서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존엄을 조롱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한다.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스는 현대 사회는 네트워크 사회로서 “자본은 세계적으로 협력하지만 노동은 개인화”되는 경향이 짙어져 “투자자, 투기 자본, 금융 사기꾼 등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는 반면에 손으로 일해서 수입을 얻어야 하는 사람들은 불리해질 수 밖에 없는 경제 구조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교 사회윤리의 핵심은 하느님의 모상성(창세 1,26 참조)을 기초로 인격성과 유일성, 대체불가능성을 지닌다. 그리고 인격성은 언제나 자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인간들의 올바르고 정의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사회윤리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인격적 존재인 ”인간은 공동체에 속하고 공동체성을 띤다“는 점이 중요하다. 오늘날 야수적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능력주의 신화의 위험은 인간의 자유와 인격성을 시장경제의 논리로 축소하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고 있다는데 있다. 경쟁을 통한 능력과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축복으로 가득 찬 노동이 만개하고 온 사회에 풍요가 흘러넘치기는커녕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새로운 경제 방식과 생산 방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익이 공장의 주머니에 담겼고, 노동자 대중은 고통과 근심 속에 살게“되었다. 시장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인격을 훼손하고 지배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오늘날 세속적 능력주의 신화로부터 교회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교회가 줄곳 강조해온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는 일이다.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인권과 세계 경제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가톨릭교회는 인간의 사회성과 공동체성을 바탕으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성의 가치를 회복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독일의 마르크스 추기경은 교회가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세계적 연대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인간이 경제, 정치, 문화 그리고 사회 가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런 연대성은 국가 공동체에 국한되면 안 된다. 지구의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윤리적으로 합당하다. 그러나 세계화된 세상에서 정치경제적 격변은 한계 없이 퍼져나가고 있고 국제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기에, 세계적 연대성이라는 윤리적 요구는 정치적 지혜이자 명령이 된다.”
연대성의 원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체험에 속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 속의 나자렛 예수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회상하며, 전달하면서 형성된 기억 공동체이자 기억된 사건을 현실로 재현하기 위해 소통하고 담론을 만들어가는 이야기 공동체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야기를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인 신학으로 승화시켜 현실 세계의 질서를 복음의 정신으로 변혁시키는 세상 속 교회, 곧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너머를 지향하며 서로 연대하는 정치 공동체이자 신앙 공동체라는 점이 중요하다.교회 역시 세상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기에 오늘날 시장경제적 자유주의와 능력주의 신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이지만, 교회는 세상 너머 대조 사회로서의 교회(게하르트 로핑크)이며, 정치경제적 질서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세상에 선포하며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 표지이자 도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현대 세계의 교회가 처한 어려움은 교회 역시 다양한 형태의 경제 논리에 도전을 받으면서 가톨릭 사회윤리의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는 소명에 있다. 그것은 교회법에 규정된 가톨릭 경제 윤리와 상관 없이 교회 내에는 세속적 능력주의의 신화 속에서 자본에 대한 탐닉에 빠져 있는 교회 구성원들이 있고, 그들의 교회 내 역할이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노동의 존엄과 노동자,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중시하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원리에서 교회가 사회의 공동선을 실천하는데 장애되는 교회 내 세속적 성공주의와 교회 성장론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별 신자들의 신앙 능력은 세속적 기준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 공동선을 지향하는 ‘은사’ 행위로 적극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은사는 철저하게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이어지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하느님 백성의 연대성을 회복하는 능력으로 재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6. 맺으면서: 교회는 세속적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기인 불공정과 불공평의 원인인 능력주의 신화에 대한 마이클 샌델의 비판은 시의적절하다. 필자는 센델의 정치철학적 입장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시장경제 우선의 자본주의 경제 논리와 개인의 능력과 시장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방식의 자본주의 병폐가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한다. 최근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가적 방역통제와 소상공인들에 대한 자의반 타의반 희생의 강요로 경제적인 불균형이 더 심각해지고, 금융의 자본화로 인하여 노동소득이 아닌 불로소득이 부의 원리로 작동하는 현실에서 마이클 샌델이 지적한 능력주의 폐단이 표본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능력주의 신화와 시장경제적 신자유주의 성장 논리의 물결에서 한국 교회는 자유로운가?
앞서 지적한 대로 근대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근거한다는 막스 베버의 주장이나, 이를 지지하는 마이클 샌델의 입장에 필자가 어느 정도 공감하는 이유는 한국 개신교의 교회 성장론과 교회의 현장 체험에서 겪는 ‘성장지상주의’가 한국 개신교 저변에 깔려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한국의 대형교회들의 ‘성장지상주의’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시장경제논리가 있고, 일부 오순절 운동을 전개하는 개신교단에서는 “친자본주의적 번영 신학”을 바탕으로 신을 축복을 선사하는 존재로 생각하며 자본이 신이 되고, 신이 자본이 되는 왜곡이 발생했다는 비판이 있다. 여기에는 한국 개신교 성장론에 숨겨 있는 능력주의의 폐단이 그대로 담겨 있다. 곧 미국식 자기계발론이 봇물을 이루면서 긍정의 힘으로 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도를 강조하며 신앙이 욕망의 원리로 둔갑되는 오류가 편향성이 생긴 것이다. 이는 능력주의 폐단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 개인의 책임과 노력만을 강조하면서 실패를 개인의 책임에게 따맡겨 자책과 죄의식을 갖게 하고, 정작 실패를 구조화하는 교회는 시스템의 잘못에 책임을 지지 않는 모순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자본이 된 신은 “소비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욕망을 위해 자기를 규율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지배”하게 되어 버렸다.
한국 개신교가 이른바 “팽창주의적 배타적 공동체”로 비판받는 이유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뿌리를 둔 근대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논리가 교회 운영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교회들의 성장론이 사회적 인맥을 형성하는 학벌주의와 연고주의는 물론 사회의 정책이나 공공성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다양한 형태로 한국 개신교의 어두운 모습을 사회에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교회가 세속적 능력주의의 위기에 빠진 엄연한 현실임을 직시하게 한다.
최근 교황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교회가 스스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가톨릭교회는 가톨릭의 보편성과 교회의 단일성을 기초로 교회법과 교회의 다양한 규정을 통하여 왜곡된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교회 안팎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가톨릭교회 역시 세상 속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수많은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교회 역시 지상의 교회로서 세속적 질서와 윤리적 가치, 사회법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교회가 추구하는 공동체 이상과 교회 정신을 현대 세계에 구현하데 수많은 장애를 만날 수 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교회가 세상 속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모인 신앙 공동체라면,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며, 교회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공동선을 증대하고 사회적 연대를 통하여 복음을 세상에 구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톨릭교회가 “시대의 표징을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이를 해석”(사목헌장 4항)해야할 소명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분석하기에 앞서 가톨릭교회 스스로의 자리를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하나의 탐욕으로부터 다른 탐욕으로의 끊임없는 추이”인 탐욕이 오늘날 자본주의 세상의 가치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가톨릭교회 역시 스스로 세속적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지 물어야 한다. 교회 내 신자들의 다양한 은사의 고유성을 존중하기보다 사회적 능력을 지닌 이들을 통한 교회의 재정적 부유함에 도취되거나 이를 탐닉하는 유혹에 빠지지는 않는지, 가난한 이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부유함과 재능을 지닌 이들을 향한 사목적 편향이나 교회 재정 운영에 있어서 성직자들의 도덕적 불감증 역시 극복해내야 할 대상이다.
둘째로, 세속적 능력주의가 추구하는 시스템의 효율성과 공정함에 대한 착각이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충만한 삶에 대한 믿음의 태도를 왜곡시키지 말아야 한다. 소유적 삶의 태도로 인간의 신체적 생존에 필요한 것이 우선시 되고,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변혁이 인간 마음의 변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되어버리는 모순을 반복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소유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존재에 대한 삶과 공감 능력을 중시하고,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창의력과 현재를 긍정하고 의미를 기획하며 미래를 희망하는 초월에로의 감각을 증진시키는 사목적 역량에 집중해야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능력주의 신화의 폐단인 가난과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문제를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느끼지 않도록 교회는 이웃사랑의 가치를 가르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연대를 강조해야 한다. 능력주의의 문제는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의 빈곤층으로 전락되어 버린 현실과 불평등으로 개인의 존엄이 훼손되어 버렸다는 한탄이라면, 교회 내에서도 개인 능력에 대한 편견과 편향이 신자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 점점 거대해지는 치열해지는 오늘날의 시장경제논리에 교회가 빠져 작고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이들이 성령께 받은 신앙 감각을 존중하고 이들의 신앙 감각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도록 교회 생활에서 각자의 은사를 계발해주고 서로의 은사로 합심할 수 있는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의 교회를 추구해야할 사목적 역량을 키워야한다.
끝으로 세계화나 글로벌 경쟁이라는 21세기 시대 정신 속에서 한국 개신교 대형교회가 추구해온 교회의 외적 성장에 대한 유혹이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가 현대 세계에 더 철저하게 자본화, 금융화되고 있는 학교 교육과 병원운영, 사회복지시설 운영 등에 있어서 복음적 역량을 균형 있게 펼쳐야 한다. 사제들을 사목자가 아닌 시설 관리자로 둔갑하게 만들거나, 사제 각자의 은사와 무관한 인사 정책으로 교회운영의 편향성이 생겨서는 안 되며, 사회적 능력의 잣대로 사제들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방식의 인사문제 역시 해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필자는 부족하지만 이런 점들이 21세기 교회가 마이클 샌델이 비판한 능력주의 신화에 빠지지 않고 복음의 기쁨을 세상에 전하는 표징이나 도구로서 시대의 예언자적 소명을 실천해나갈 수 있게 하는 작은 움직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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