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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남한산성(南漢山城)
이장희 추천 0 조회 76 14.09.16 23: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한산성(南漢山城)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있다.

 

 

 

사진 : 대동여지도. 오른 쪽 아래 광주(廣州)라 쓴 곳이 남한산성이다.

 

고읍(古邑)은 광주의 읍치(邑治)가 전에 거기 있었다는 뜻이다.

읍치(邑治)를 옮기면 원래 있던 곳이 고읍(古邑)이 되는 것이니 전국 각지에

고읍(古邑)이란 지명이 꽤 많다. 요즈음 아파트 분양광고에 양주시 고읍동이

나오는 바 틀림없이 옛날 양주 군치(郡治)가 있던 곳일 것이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역사(歷史)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은 언제나 중요했다.

남한산성은 그  외곽 요충이니 아득한 옛날 그러니까 (*)백제가 위례성

(慰禮城)에 도읍할 시절부터 방어시설-산성이 있었을 것이다.

 

(*) 한성백제(漢城百濟)시기 :

백제는 그 678년 역사 중 온조왕 개국 기원전 18년부터 고구려의 압박으로

개로왕이 죽고 웅진성으로 옮기는 475년까지 491년을 한강 가에 있었다.

백제 개국연대에 대하여는 논쟁이 많으나 이 글하고는 관계가 없다.

 

(*) 백제의 하남 위례성 (河南 慰禮城) 위치 ;

그 동안 학계의 논란이 많아 경기도 광주설, 충청도 직산설,

서울 몽촌토성설 등등이 있었으나 최근 풍납동 토성의 발굴로

그 위치가 풍납동 일대인 것으로 의견이 대강 수렴되는 듯 하다.

 

남한산성이 백제의 도성(都城) 터라는 설도 있으나 고려할 가치가 거의 없다.

어떻게 산 꼭대기에 도성을 정하나? 다만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평지성과

산성이 세트를 이루어 외적이 들어 오면 평지를 버리고 산성으로 들어가는

전술을 쓴 측면에서 생각할 수는 있다. 예컨대 고구려 졸본에는 오녀산성,

국내성에는 환도산성, 평양에는 대성산성이 있었다.  612년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水軍)이 대동강으로 들어오자 평지성인 안학궁을 내 주고

대성산성에 숨었다가 수나라 군대가 방심한 사이 숨어 들어 가 무찔러 버린 일이 있다. 

 

백제왕실은 고구려에서 내려 온 것이니 그 전통을 받아 도성은 풍납동에

쌓았지만 전시 대비책으로 남한산성에 산성을 쌓았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백제에 이어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도 이 전략요충에 성을 쌓았을 것이다.

최근 남한산성 발굴에서 나오는 옛 성터는 백제 보다 신라 문무왕 12년

(672)에 쌓은 주장성(晝長城)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이 성에서 몽고군의 침입을 피했던 것 같으며 임진왜란 때도

여기 산성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가 보는 산성은 조선 후기에 쌓은 것이다.

 

광해군 13년 (1621년) 후금(後金) 뒷날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으로 끝내지 못하다가,

인조 2년 (1624)에 다시 쌓기 시작하여 동왕(同王) 4년 (1626)에 완성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뒤 전쟁 시 드러난 몇 가지 허점을 보완하는 등

역대로 꾸준히 개수(改修)하여 오다가, 1907년 8월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폭파하여 폐허가 되었다가 요즈음 복원 공사를 하고 있다.

 

성의 둘레

 

우리나라의 문제는 이런 것이 출처마다 다른 점이다. 10 km, 11 km, 12km 설에

옛날 (*)보()로 얼만데 환산하면 몇 키로다 하는 것 까지 있다. 또 바깥

둘레냐 안을 재느냐, 외성(外城)을 포함하여 재느냐에 따라 달라 진다.

 

2000년 한국토지공사에서 여장(女牆)의 옥개전 중심선을 기준으로 계측한

수평거리가 남한산성 성벽 전체 둘레는 12,356m, 남쪽의 돈대를 빼면

12,101m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둘레는 7,545m라니 이것이 맞을 것 같다.

남한산성 현장 안내판에는 7,545 m 이라고 되어 있으니 위 토지공사 측정치

곧 외성, 옹성을 빼고 본성 만 성벽 꼭대기 중심선을 따라 잰 길이다.

 

(*) 보()라고 하면 언뜻 한 걸음을 생각하기 쉬우나 훨씬 길다. 육군(陸軍)

규정에 표준 보폭이 66cm 정도 아니었던가? 하여튼 옛 길이 단위 보()는

여섯 자로 30cm x 6 하면 1.8m 일 것 같지만 자 종류가 또 여럿이다.

남한산성 옛 기록은 성벽 안 둘레는 6,290보, 바깥은 7,295보로 되어 있다.

이걸 환산하면 각각 8,114m , 9,411m 인데 이 때 쓴 자는 주척(周尺)

대략 21.5 cm로, 6자 1보는 1.29 m가 된다.

 

 

사진: 남한산성 성벽-1

 

또한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벽 밖은 산줄기가 가파르고 첩첩해서 적의 기병이 말을 몰아

다가올 수 없으며 성 둘레는 가파르게 출렁거리며 길게 휘어져

갑자기 포위할 수가 없었다. 성벽이 급하게 휘어지는 굽이에서는

멀리 볼 수 있고 넓게 쏠 수 있어 적병이 성 뿌리에 붙을 수 없고

성 밑이 가팔라서 밖에서는 치 쏘고 안에서는 내리쏘니 성 뿌리에

붙는 적병이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수원 화성에 가면 왜 이렇게 성이 낮을까 하는 의심이 들것이다.

그러나 서양도 근세에 쌓은 성은 마찬가지다. 중세에는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세우나, 대포가 발달하는 16세기 이후는 포격에 견디게끔

두툼해야만 했다. 기술상 두꺼우면서 높게 쌓기는 어려우니 서양도

근대 이후는 성이 낮고 대신 두꺼워진다. 수원성은 화살이 아니라

화포 공격에 대비한 성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조선은 화포-홍이포

공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성가퀴, 여장(女牆) 성첩(城堞)

 

 

성 위에 위 사진과 같이 나지막하게 쌓은 담을 성가퀴 한자로는 여장(女牆)

또는 성첩(城堞)이라고 한다. 여장(女牆)이 없으면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숨길 수가 없다. 우리나라 시골 읍성 중에 이런 여장이 없는 경우가 있는 데

그래서는 성을 지키기 힘들다.

 

 

성첩 일타(土+朶)와 총안(銃眼)

 

성첩 한 구역을 일타(土+朶 : 한자 지원 안됨)라고 한다. 타(土+朶) 마다

총안이 셋씩 있는 데, 가운데는 가까운 적을 쏘기 위한 근총안(近銃眼)으로

각도가 대략 38도, 양 측면 둘은 원총안(遠銃眼)으로 각도가 22도 정도다.

 

 

사진 : 성첩 일타

 

남한산성 타(土+朶)의 길이는 3에서 4.5m 까지 장소마다 차이가 있으나

평균 4 m 다. 산성 전체에 모두 1,940 타가 있다. 타 마다 총안이 셋이니,

총안 마다 1명씩 성 전체 총안에 군사를 배치한다면 대략 6천명 정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워낙 험해서 총안 마다 세울 필요 없이 드문드문 두어도

되는 곳도 많고, 호란 때 성에 들어 온 군사 수가 대략 12,000 명 정도니

병력은 충분했다. 그러나 이중환이 택리지에 쓴 것처럼 버틸 양식이 없었다.

 

옹성(甕城)과 치()

 

옹성(甕城)은 성문 외부에 설치한 이중 성벽으로 화성의 옹성이 대표적이다.

 

 

사진 : 김억(金億) 화백의 판화- 화서문(華西門)

 

위와 같이 옹성을 쌓으면 성문 아래 몰려든 적을 안팎으로 에워싸 위에서

내려다 보고 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문과 옹성의 터진 방향은 일부러

일치 시키지 않으니 적 공격 방향을 한번 꺾어주기 위함이다.

한양 도성에는 동대문-흥인문에 유일하게 옹성이 있는데 방어목적 보다는

그 일대 지반이 약해서 대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이라고 한다.

 

()는 아래 사진처럼 성벽을 일부러 돌출시킨 부분이다.

 

사진: 화성의 치 중 하나. 치는 꿩 치자 인데 꿩은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고 한다.

성벽이 일자(一字)면 공격과 수비가 1대 1이 되지만, 치를 만들면 성벽에 붙은 적을 정면, 좌우 측면

합해서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남한산성에서는 위 부분을 남옹성이라 부르는데 치(雉)에 더 가깝다.

남한산성은 자연 굴곡이 심하여 치()를 많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

 

 

대문(大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군데 대문이 있다.

 

남문-지화문(至和門)

 

 

 

정문으로 인조대왕은 1636년 병자년 12월 14일 밤 이 문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 12월 15일 이 문을 나가 과천, 금천 들을 가로 질러 강화도로

가려고 했으나, 내린 눈에 말이 미끄러지고, 내려 걸으니 대왕의 발이

얼어 붙어 이 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동문; 북에서 남을 바라볼 때 동은 왼쪽이라 좌익문이다.

 

 

성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옛날 남한산성 소풍 갈 때 이 문으로들 다녔다.

병자호란 때 적이 본격적으로 공성을 했다면 이쪽으로 했을 것이다.

1637년 1월 1일 청 태종 홍타이지가 이 문 밖에서 성을 둘러 보았다.

 

북문 : 병자호란 때 전투에서 유일하게 이겼다 하여 전승문이다.

이겼다고 하기에는 내용이 낯 간지럽지만 사기 문제도 있었을 테니까.

 

 

북문으로 나서면 하남시 상사창, 하사창동이니 옛날 사창 (司倉) 곧 창고가

있던 동네다. 경강(京江) 조운으로 곡식을 사창까지 실어 오면, 등짐으로

북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져 날랐다. 그런데 난리 얼마 전 광주목사가

져 나르는데 백성이 힘들다고 사창에 그냥 쌓아 두었다. 막상 난리가 나자

사창(司倉)에 있는 곡식을 날라 올 새도 없이 성이 포위되어 곡식은 모두

적의 손에 들어가고, 안에서 쫄쫄 굶으니 항복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임금이 나만갑 에게 묻기를, “양식은 며칠이나 지탱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60일은 지탱할 만하니, 절약해서 쓰면 70일은 버틸 수 있습니다.

마두(馬豆)는 하루에 한 되이고 백관의 노비들은 겉 곡식을 주며, 지금

남아 있는 양식은 1만 4천 3백여 섬이고, 장은 2백 2십여 독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가 맡은 일에 명맥이 걸려 있는 것이니 삼가고

조심스럽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연려실기술-병자록)

 

더욱이 짐승 먹일 풀은 엄동(嚴冬)에 포위 된 산성에 없었다.

 

성중에 말 먹이 풀이 떨어져 말이 많이 굶어 죽으므로 말을 거둬들여

군사를 먹이었다 (연려실기술)

 

(*)성에 들어 간 인원은 13,800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호조판서 김신국은

같은 양을 한달 분으로 계산하였다. 항복은 성에 들어 간지 47일 만이었다.

 

 

서문 : 오른 쪽에 있어 우익문이다. 

 

 

1637년(정축) 1월 30일 인조대왕은 이 문으로 나가 삼전도 수항단으로 갔다.

말 탄 채 나오기에는 문이 너무 낮고, 바깥은 매우 가팔라 대왕은 걸어야 했을 것이다.

 

 

암문(暗門)

 

 

위 사진은 암문의 전형적 모습이다. 적이 혹 문을 발견해 들어 오더라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구조니 막기 쉽고 여차하면 무너뜨리면 그만이다.

남한산성에는 이런 암문이 16개 있다.

 

 

군포지(軍 舍+甫 址 )

 

 

사진: 남한산성 군포지. 산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비바람을 피하는 곳이니

온돌 설비는 없고 앞도 틔어 있었다. 남한산성에 125개 있었다고 한다.

 

기계나 컴퓨터를 쓰다 보면 몸체도 중요하지만 별것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주변 액세서리가 결정적 역할을 할 때가 있다.

병자호란 때 산성에 들어 온 병사들은 굶주리기도 했지만 그 한 겨울

눈비 내리는 밤에 산 꼭대기에서 손발과 몸이 꽁꽁 얼어 붙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 해 겨울 추위는 땅속 깊이 박혔고 공기 속에서 차가운 칼날이 번뜩였다.

성첩 위 총안 앞에서 가리개 없는 군졸들이 눈비에 젖었다.

군졸들의 손가락마디가 떨어져 나갔고 손가락이 제대로 붙어 있는

자들도 언 손이 오그라져서 창을 쥐지 못했다……김훈 남한산성에서..

 

역사 기록에는 이렇게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당시 정황상 그러고도

남았을 것으로 김훈 씨는 작가적 상상력으로 리얼하게 그린 것이다.

 

이 설비들은 호란 후 만들었을 것이다. 병자호란 때 있었다면 병사들이 버티기

한결 수월했을 텐데 난리 나기 전에는 이런 것에 생각이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홍이포(紅夷砲)

 

병자호란 때 조선이 미처 생각 못한 것이 홍이포(紅夷砲)다. 홍이(紅夷)는

털이 붉은 오랑캐 곧 서양사람으로 홍이포는 서양식 대포를 말한다.

홍의포(紅衣砲) 라고도 하는데 16세기 포르투갈 상인이 명나라로 전한다.

우리나라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인 효종 때 마침 표류한 네델란드 인 박연-

벨테브레와 하멜 일행을 이용하여 홍이포를 처음 만든 것 같다.

 

 

 

사진 : 수원 화성에 있는 홍이포

 

청나라도 홍이포(紅夷砲)에 혼이 난 적이 있다. 홍타이지 (청 태종)의 아버지

누르하치(청 태조)는 1626년 요서를 공략한다. 이 때 명나라 장수 원숭환

(袁崇煥)은 남방에서 포르투갈 대포-홍이포를 구하여 만주-요동에서 산해관

으로 가는 길목 영원성(寧遠城)에 걸어 놓고 밀집대형으로 기병돌격을 하는

만주병에게 포격을 가한다. 누르하치는 이 영원성 공격 실패 뒤 곧 죽는 데

겉으로는 병사(病死)라지만 실은 포격에 맞은 부상 때문이라고 한다.

 

그 뒤 명나라 군대 상당수가 항복하며 홍이포를 가져가고 또 기술자-

철장(鐵匠)도 끼어 있어 청나라도 일종의 짝퉁 홍이포를 만들게 된다.

이것을 병자호란 때 들고 온 것이다.

 

실록 정축년 (1637년) 1월 19일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 만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연려실기술 1637년 1월 25일

며칠 전에 적이 망월대(望月臺) 밖에 대포를 설치하니 신경진이 사졸들에게

천자포(天字砲)를 쏘도록 하여 오랑캐의 장수와 졸개 몇 명을 맞추니, 적이

흩어져 갔다. 이에 이르러 적이 또 10여 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남격대

(南隔臺) 밖에 또 7, 8대를 설치하였는데, 대포의 이름을 호준(虎준)이라 하고

일명 홍이(紅夷)라고도 하였다. 탄환의 크기는 모과와 같고 능히 수십 리를

날 수 있었는데, 매양 행궁(行宮)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탄환의 위력은 사창(司倉)에 떨어져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 수십 리: 위 기사에 ‘홍이포가 수십 리를 날 수 있다’ 고 하지만 실재는
800 m 정도 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주었으리라.

 

 

망월봉(望月峰) 홍이포(紅夷砲) 포대(砲臺)

 

(敵)이 포를 걸었던 곳은 남한산성 바깥으로 조총이나 활은 소용이 없지만

그러나 성을 굽어 볼 수 있어 대포를 쏠 수는 있는 위치일 것이다. 홍이포

(紅夷砲)가 요즈음 야포(野砲) 같지야 않을 테니 빤히 보이는 자리일  것이다.

 

 

 

사진 : 위 오른 쪽으로 성곽이 지나가고 그 바깥 왼쪽 봉우리가 벌봉-

망월봉으로 성안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수풀이 무성해 보이지 않는다.)

홍이포가 아니라면 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으리라. 적은 바로 그 지점에 포를

거치해 쏜 것이다. 호란 후 숙종 때 성(城)을 확장하여 지금은 외성이 있다.

 

 

 

 

사진 : 남한산성 안내도

 

수어장대(守禦將臺)

 

산성에는 동,서, 남, 북 네 군데에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장대(將臺)

Commanding Post 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서장대(西將臺)가 총사령부로

수어장대(守禦將臺)라 부른다.

 

 

 

사진 : 남한산성 행궁

현재 발굴과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종묘(宗廟)-좌묘우사(左廟右社)

 

행궁은 여러 군데 있지만 종묘 시설을 갖춘 곳은 남한산성 뿐이다.

옛날에는 난리 나면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조상 신주니 병자호란 때도

강화도 피란 최우선 순위가 종묘의 신주였다. 오죽하면 신주단지 모시듯

이란 말이 다 있을까 ?

 

궁궐(宮闕)의 조영 원칙은 좌묘우사(左廟右社)였으니 한양 도성 왼편-동쪽에

(廟)-종묘(宗廟)가 있고, 우-서쪽에 사(社)-사직단(社稷壇)이 있다.

남한산성에도 행궁 왼쪽에 종묘가 있고 오른 쪽 사직은 지금 복원 중이다.

 

 

사진 : 남한산성 종묘

서울 종묘에 비하여 규모는 작지만 구조는 완전히 같다.

모두 다섯 칸으로 각 칸에 달린 문 안이 신주를 모시는 감실(龕室)이다.

 

산성 종묘의 칸이 다섯인 것은 천자는 7대, 제후는 5대를 모시기 때문이다.

서울 종묘는 칸이 훨씬 많은데 이것은 후대로 갈수록 과례(過禮)를 하기

때문으로 원칙은 다섯 임금만 모시면 된다. 모시는 순서는 소목(昭穆)으로

(昭)는 왼쪽, 목(穆)은 오른 쪽이다. 예를 들면 5대조 신주를 중앙에 두면,

2, 4대조는 그 왼편-소(昭)에,  1, 3대조는 오른 편- 목(穆)에 두어, 할아버지와

손자가 언제나 같은 편이고 아버지와 증조부가 다른 편이 된다.

 

5대가 넘어가면 종묘에서 영녕전으로 옮기는 데 조천(示+兆 遷)이라고 한다.

남한산성 종묘 옆에도 영녕전이 있고 서울 종묘에도 영녕전이 있다.

 

민간에서는 이런 경우-모실 대수가 넘어가면 신주를 땅에 파 묻는데

조매(示+兆 埋)라고  한다.  원칙은  그렇지만 이런 일은 해가 갈수록

지나치게 마련이라 왕실 종묘도 공이 많다고 대수를 넘겨 자꾸 더 모시고,

민간에서도 문중을 빛낸 현조(顯祖)라고 하여 영원히 모시는 불천위(不遷位)

들이 늘어난다. 임금이 5대를 모시니 경대부 4대, 사서인은 양대(兩代)봉사가

원칙인데 모시는 분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옛날 법으로도 참람한 일이다.

 

 

감실(龕室)

 

조상을 모시는 집이 사당이고 그 사당 안 위패를 모신 방이 감실이다.

집집마다 사당이 있은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당이 있다면 상당한

집안이다. 필자 네가 대단치는 않아도 고향에서 12대를 살았지만 사당은 없다.

사당이 별도로 없는 경우에는 사랑방 마루 지붕 아래에 감실을 만들어서 위패를 모셨다.

 

 

사진 : 서울 종묘의 감실 안과 신주. 종묘 안을 찍을 기회가 없으니 자료화면이다.

 민간에서도 규모나 화려함은 덜하지만 기본 생김새는 같다.

 

숭렬전(崇烈殿)

 

 

사진 : 백제 시조 온조대왕을 모신 숭렬전.

사세(事勢)가 급하게 돌아가니 어디에라도 기대고 싶은 조선 조정은

온조 대왕에게 제사를 지낸다.

 

인조 14년( 1636)병자년 12월 25일 ; 예조에서 아뢰기를,

“온조(溫祚)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반드시 그 신(神)이 있을 것입니다. 옛사람은 군대를 일으켜 머무를 때에

반드시 그 지방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대가가 머물러 계시면서

성황(城隍)에도 이미 사전(祀典)을 거행했는데, 온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실록)

 

이러고도 효험이 없자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가 여겨 1월 중순에 한 번 더 지낸다.

 

사찰(寺刹)

 

산성 안에는 절이 아홉 개나 된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 망월사가 보인다.

 

 

 

사진 : 망월사 원경

경관이 꽤 근사하다고 느꼈는지 지나가던 어느 일행이 ‘우리나라 경치

좋은 데는 중들이 다 차지 했어’ 한다. 필자도 절이나 중을 마뜩찮게

여기지만 남한산성은 경우가 다르다.

 

조선 왕조 들어 배불정책을 쓰다 보니 후기에 오면 절이 종교단체가 아니라

노무자 내지 노예 집단 비슷하게 된다. 나라에 특산물을 바쳐야 함은 말

할 것도 없고, 지방 양반들의 수탈도 참아야 했다. 그리고 부역이란 부역은

다 불려 나가고 전쟁 나면 승군도 조직해야 했다. 남한산성 축성에도

전국의 중들을 다 모아 그 힘이 가장 컸다. 다 쌓은 뒤에는 지킬 사람이

있어야 하니 절을 세워 중들이 하게 시킨 것이다. 그래서 절이 많은데

‘좋은 데는 중놈들이 다 차지했어’ 하면 억울하지 않은가 ?

역사를 배우는 목적에는 애매한 소리 없애는 것도 들어간다.

 

현절사(懸絶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호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洪翼漢 1586-1637)

오달제(吳達濟 1609-1637), 윤집(尹集 1606-1637) 등 삼학사(三學士)를 모신

사당이다. 숙종 25년에 김상헌,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할 때 조건 중 하나가 척화대신을 내 주는 것이었다.

 

오달제와 윤집이 장차 청의 진영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기색이 조금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슬피 울면서 술을 주며

이르기를, “너희들의 부모와 처자는 내가 평생토록 돌보아 줄 것이니,

이 점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연려실기술)

 

홍익한은 당시 쉰 둘 중진이니 청나라에서 지명하여 내 놓으라고 벼르고 있었지만,

오달제와 윤집은 각각 스물 아홉, 서른 둘 젊디 젊은 나이로 척화론 중심이라서가

아니라 누군가 머릿수를 채워야 하겠기에 자원하여 죽음의 길로 간 것이었다.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보낸다면 묘당이 당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젊은 사람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호란 후 유백증의 상소 중)

 

붙잡혀 간 삼학사는 나중 청나라에서 끝까지 굴하지 않다가 참형을 당한다.

요즈음 시대착오니 뭐니 하는 평을 하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가 가진 정보를

당시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기 이념에 목숨까지 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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