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 한율아!
겨울이 가까워졌구나. 산촌농원의 나무들은 대부분 낙엽을 모두 지우고 나뭇가지들이 휑해졌어. 낙엽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부는 바람은 차가워졌어. 하지만 요즘 꽤 여러 날 날씨가 아주 따뜻했어. 10월 하순에 기온이 영하 6~7℃까지 떨어지면서 겨울이 일찍 오나 싶었는데, 11월 하순에 들어서면서도 마치 인디언 섬머(Indian Summer: 겨울을 앞에 두고 잠깐 따뜻해지는 날씨)와도 같은 포근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구나. 달력을 보더라도 그제가 첫눈이 내린다는 ‘작은 눈’의 절기 소설(小雪)이었는데 말이야.
지난 주말에는 농원의 막바지 가을걷이를 했어. 앞서 김장 채소를 거두며 이미 가을걷이를 마친 셈이었지만 사소한 몇 가지 일들을 마무리했지. 가장 늦게 씨앗이 영그는 섬쑥부쟁이(부지깽이나물/울릉취), 고려엉겅퀴(곤드레), 금잔화 따위의 씨앗을 받았고, 은행나무 열매도 주웠어. 모과도 높은 나뭇가지에 덩그러니 달려 있는 몇 개를 남겨두고는 땅 위로 떨어진 것들을 모두 주워 들였어. 거두어들일 건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라는 상추, 치커리, 개성배추 따위는 가을걷이의 대상은 아니고.
그런데 가장 늦게 씨앗을 여물리고 있는 섬쑥부쟁이의 씨앗을 받으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더구나. 우선 이 나물의 씨앗 받기를 끝으로 올 한 해의 모든 결실과 가을걷이가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섬쑥부쟁이는 다른 야생의 국화류와 같이 가장 늦게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 식물의 하나이기 때문이야. 대개의 식물이 이미 일찍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었는데, 섬쑥부쟁이는 유독 꽃을 늦게 피우고 그만큼 씨앗도 늦게 여물려. 사실 섬쑥부쟁이는 그렇게 게으른 식물이 아닌데 말이야. 봄철 나물로 즐겨 먹을 수 있기에 부지깽이나물 또는 울릉도 특산식물이라 울릉취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섬쑥부쟁이는 아주 이른 봄부터 자라기 시작해. 하지만 가을부터 초겨울 사이에 꽃을 피우고 씨앗을 여물리면서 땅바닥 뿌리 쪽에 새싹을 내고 그 싹이 겨울을 난 뒤에 새순을 올려서 그 어느 것 못잖게 일찍 자라기 시작하지. 그런데 봄 한 철과 긴 여름을 보내고 한가을이 되어서야 꽃송이를 벌고 꽃을 피워. 큰 그릇 마냥 좋은 것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인 대기만성(大器晩成)의 꽃이라고나 할까? 맛 좋은 나물도 주고 아름다운 꽃도 피우자니 다른 것들보다도 더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발버둥을 쳐야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섬쑥부쟁이는 우리나라 울릉도 특산식물이라 육지 쪽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야. 앞선 편지에서 나물로도 즐겨 먹는 섬쑥부쟁이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섬쑥부쟁이는 가을 국화류의 꽃 중에서는 꽃이 가장 늦게 피는 편이고, 그 꽃송이 하나하나의 크기가 가장 작아. 1cm 남짓한 크기의 작은 꽃송이가 여럿 모여서 송아리를 이루어 꽃을 피우는데 꽃 하나하나의 가운데에 샛노란 화심(花心)이 있는 새하얀 꽃을 피워. 꽃 모양이 아주 소담스럽고 무척이나 수수하면서도 말끔한 느낌을 줘. 샛노란 꽃을 피우는 산국이나 감국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모양의 꽃을 피우지만, 그보다 더 단아한 자태의 모습을 보여줘. 섬쑥부쟁이는 나물로도 먹고 꽃으로도 볼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풀꽃, 비단 위에 놓인 꽃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닐까 싶구나!
이렇게 가을걷이를 마치고 나면 겨울이 오기 전에 또 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아. 씨앗을 받은 풀꽃과 나물의 마른 꽃대를 잘라 줘야 해. 우선 섬쑥부쟁이의 마른 꽃대를 잘라내서 겨울나기 순의 자람을 원활하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어. 수북하던 마른 풀대를 잘라내면 파릇하게 자라고 있는 새순의 모습이 가지런해 보인단다. 섬쑥부쟁이뿐 아니고 참취, 곰취, 도라지, 벌개미취, 구절초, 범부채, 부처꽃, 풀협죽도, 산국, 아스파라거스 따위의 다년초 마른 풀대도 마찬가지야. 풀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싹을 내기 쉽도록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운 뒤에 말라버린 풀대는 잘라내는 게 좋아. 코스모스, 백일홍, 금잔화 따위 한해살이의 마른 꽃대는 아예 뽑아내 버려야 해. 이 일은 돌아오는 봄에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바쁜 봄철의 일을 덜어줄 수도, 겨울을 맞는 정원의 모습을 단정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어.
겨울이 오기 전에 해야만 할 일은 또 있어. 잘라내고 뽑아낸 풀대와 수북하니 여기저기에 모아놓았던 낙엽을 한데 모아 거름더미를 만드는 일이야. 마른 풀대와 낙엽 사이사이에 약간의 유기질 퇴비를 넣어주고 물을 뿌린 뒤 덮개를 덮어서 되도록 빨리 전체 거름더미의 퇴비화가 진행되도록 해주지. 그리고 눈이 내릴 때가 되면 덮개를 열어줘서 수분이 보충되도록 하고, 이것이 얼고 녹기를 반복해서 퇴비화의 진행이 빨라지도록 해주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퇴비는 텃밭의 흙으로 돌아가 밭의 땅심을 높여주게 돼.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말이 있어. 이것은 ‘낙엽은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말로 풀어쓸 수 있어. 자연은 있던 그대로의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서 삶과 생명의 순환을 지속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지. 우리 사람도 흙으로부터 태어나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하듯이 말이야.
겨울이 오기 전에 할아버지가 농원에서 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마도 농원 일은 끝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래. 할 일은 이뿐만이 아니지. 난롯불을 지필 장작도 틈틈이 많이 패두어야 하고. 장작을 패서 쌓아두는 일은 따뜻하게 겨울을 나기 위한 필수 작업이야. 추워지기 전에 장작더미를 여럿 만들어놓아야 해. 그리고 땅이 겨울 동안 숨을 쉬며 잠을 자도록 부쳤던 밭을 일궈줄 수 있다면 더욱 좋지. 또 된 추위가 오기 전에 나무들 가지치기를 해주는 일도 나쁘지 않아. 농원에서는 이처럼 할 일이 끝이 없단다. 그래서 쉼 없이 몸을 움직여야만 하고. 그리고 이렇게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면 다른 잡념이 사라지고 몸의 건강도 잘 유지해 ᄂᆞᆯ 수 있는 것 같아. 더구나 이렇게 농원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놀이처럼 천천히 해나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즐거워진단다.
한비, 한율아!
이제 곧 12월이 되면 겨울방학에 들어가지. 그때쯤이면 할아버지의 농원에 아마도 더는 할 일이 없게 될 거야. 그러면 할아버지도 한비와 한율이처럼 한 2달쯤의 농원 겨울방학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좀 쉬어야지. 쉬면서 내년에 할 일도 차분히 생각해 보고. 그래야 내년 농원 일을 더 즐겁고 재미있게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방학이 오기까지는 우리가 하던 것들을 여전히 열심히 해나가자꾸나. (2022.11.24)
첫댓글 섬쑥부쟁이 꽃이 보기에 아름답습니다. 정성들여 씨앗을 받고, 퇴비와 장작까지도 준비하려하니 가을걷이 이후에도 많은 일들이 줄지어 있군요! 사실 어느 일이든지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니 바로 인생살이에 비유해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그 쌓여가는 정성이 손녀들에게 은연중에 전해져 오래오래 가풍이 되고, 큰 영예와 보람을 성취하게되길 성원합니다!
농부에게 씨앗은 생명과도 같은 존재이지요. 그런데 이 작업이 매우 섬세한 일이지요. 이런 점에서 씨앗다운 씨앗을 받아보지 못한 나는 얼치기 농부이지요. 벽난로 화목인 장작도 같은 크기로 잘라 가지런히 쌓아놓은 모습을 보니 부지런한 농부임을 알 수가 있네요. 동안거간 충분한 휴식과 내밀한 성찰로 내년에는 좀더 풍성한 농사와 새로운 글들이 많이 집필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섬쑥부쟁이는 나물로도 먹고 꽃으로
도 볼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풀꽃, 비단 위에 놓인 꽃 금상첨화(錦上添花)라에 공감.
땔감 장작을 보니 순우의 부지럼함
을 볼 수 있네요.
어제 백내장 수술후 모처럼 글을 접
합니다.
어렸을 땐 모두 들국화로만 알았던 꽃들이 이제 보니 각각 고유의 명사를 지니고 있더군요. 그래서 과거에는 이름 없는 꽃이니 무명의 꽃이니 하는 식으로 글짓기를 했지만 이젠 이름 모를 꽃이라고 표현해야 무식하지 않다는 소릴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고유의 꽃과 외래종이 혼재되어 자세히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야생화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늦가을 초겨울에 국향을 은근히 풍기면서 바람에 흔들거리는 들국화 쑥부쟁이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