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2. 백거이(白居易)의 표방과 노경(老境)의 긍정적 의미 모색 3. 노경(老境)의 좌절과 늙음의 체념적 수용 4. 결론
<국문초록>
탄로시(歎老詩)는 늙음을 탄식하는 시다. 본고는 백거이(白居易)의 삶과 영로시(詠老詩)를 표방하며 늙음에 관해 여러 편의 시를 남긴 윤기(尹愭)의 한시를 고찰, 그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노화의 징후를 직접 경험한 사람은 처음에는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이후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떤 이는 늙음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며 개탄하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늙음에 대한 이러한 자세는 문학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된다. 백발, 탈모, 낙치(落齒), 시력․청력․기억력․기력의 저하 등을 탄식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이러한 신체적 변화를 오히려 내면 공부의 계기로 삼거나 노년의 한가로움을 만끽하기도 한다. 윤기(尹愭, 1741-1826)는 86세까지 살면서 늙음에 대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그는 늙음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전적으로 긍정하는 어느 한 편에서 있지 않았다. 그도 처음에는 자신의 노화의 징후를 감지하고 개탄하였으나 곧 늙음을 긍정하는 자세로 전향했다. 그러한 전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백거이다. 윤기는 백거이를 존숭한다고 직접적으로 언명하기도 하였고, 그의 노경(老境)의 시 곳곳에서 백거이의 시구를 인용하기도 했다. 윤기가 본받고자 한 백거이의 삶의 자세와 시의 내용은 곧 ‘늙음을 긍정하고 노경을 즐기는 것’이었다. 윤기는 백거이의 삶의 자세와 시적 경향을 이어받아 늙어서 좋은 점, 즉 늙어서야 비로소 한가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시작(詩作)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러나 백거이의 삶과 시세계를 표방했던 것과는 별개로, 윤기는 백거이와 같은 노년의 삶을 누릴 수도 없었고 따라서 그의 시작도 백거이의 그것과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백거이가 벗들과 시주(詩酒)로 노경을 즐겼던 데 반해 윤기는 어울릴 만한 마땅한 벗이 없었다. 이에 윤기는 벗없음과 그로 인한 외로움을 그의 시 곳곳에 피력하고 있다.
둘째, 백거이가 노경에도 산수 유람을 즐길 강건함을 지녔던 데 반해 윤기는 기력이 쇠진하여 유람을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좋아하던 유람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된 것은 윤기에게 무엇보다 큰 상실감을 안겼다. 셋째, 백거이는 벗들과 술을 마시며 여유롭게 지낼 만한 경제적 여건이 되었지만 윤기는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에 허덕이며 노년을 보냈다. 윤기가 누릴 수 있는 노경의 즐거움은 그저 한가로움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는 것뿐이었고, 이는 백거이처럼 노경을 즐기며 늙음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에서 멀어져 늙음을 탄식하며 체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로 귀결되었다.
갑골문의 ‘노(老)’자는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형상이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은 기력이 쇠하여 다리 힘만으로 걷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기력의 쇠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를 모두 늙음의 문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 변화는 구체적으로 백발, 탈모, 낙치(落齒), 시력과 청력의 저하 등으로 나타나며 기억력의 저하 등과 같은 정신적 변화도 수반한다. 이는 모두 기력의 쇠진 때문에 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한가지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징표들이 함께 나타나게 된다.
대개의 탄로시에서도 자신에게 나타난 노화의 징표들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람이 나서 성장하고 늙어 죽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근대 이전에도 노화와 노경(老境)의 문제는 중년 이후의 모든 이의 관심사이자 문학에서의 주 관심사이기도 했다. 『청구영언(靑丘永言)』등에서 ‘탄로(歎老)’가 작품의 주요 분류항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 이래 주제별 분류 형식의 가집(歌集)에서 ‘탄로’는 어김없이 주요 분류항으로 제시되어 왔다.1) 그런데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보면 늙음을 주제로 한 문학 연구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았다.
고전문학 영역에서 늙음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시조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시조 가운데 늙음을 문제 삼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우탁(禹倬, 1262~1342)의 이른바 ‘탄로가(歎老歌)’다. 초기에 이 작품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후,2) 늙음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던 이전 시기 시조와 다르게 17세기에 이르러 시조가 ‘현재를 즐기는’ 취락(醉樂)의 경향성을 띠게 되었다고 하여 탄로가의 새로운 면모를 살핀 연구도 있다.3) 또 시조에 나타난 노인의 형상을 유형화하여 살핀 연구도 보이고,4) 시조에서 ‘늙음’을 주로 문제 삼고 있는 다수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늙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며 늙음의 문제를 정서적으로 어떻게 진술하는가로 세분하여 살핀 연구도 있다.5)
최근 근역한문학회에서 ‘노년의 성찰’이라는 주제로 한문학에서의 늙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고전문학에서의 늙음의 문제에 대한 연구 성과가 눈에 띄게 축적되었다.6) 신체적 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7)나 노인의 심리 변화8) 등 늙음과 관련한 논의가 폭넓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9)
그런데 구체적인 한 인간의 생애에서 노경(老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떤 지속적인 인식을 보이며 혹 그 인식에 어떤 변화가 확인되는지를 살피는 문제도 중요하다고 하겠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미진한 듯하다.
조선후기 문인 윤기(尹愭)는 늙음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詩作)에 임했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백거이(白居易)의 삶과 문학을 표방하였다. 본고에서는 윤기의 삶과 문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이 표방하던 백거이의 그것과 어떤 거리를 두고 변화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최홍원, 「탄로가의 진술방식과 태도의 변주」, 『문학교육학』47, 한국문학교육학회, 2015, 195면. 2) 박수천은 탄로가의 작자 고정(考定) 문제, 작품의 구조, 우탁의 한시 등을 살펴 탄로가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바 있다. 박수천, 「禹倬의 <嘆老歌> 分析」, 백영 정병욱 선생 10주기 추모 논문집 간행위원회 편, 『한국고전시가작품론』2, 집문당, 1992 참조. 3) 길진숙, 「17세기 시가문학의 연행 환경과 창작․향유의 경향」, 『시학과 언어학』22, 시학과 언어학회, 2012. 4) 윤영옥, 「時調에 나타난 老人의 모습」, 『한민족어문학』39, 한민족어문학회, 2001. 이 논문에서는 시조에 나타난 노인의 형상을 ‘노추(老醜)’, ‘탄로(歎老)’, ‘회한(悔恨)’, ‘자적(自適)’, ‘축수(祝壽)’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5) 최홍원, 앞의 논문.
6) 근역한문학회 2016년 춘계 학술대회에서 ‘노년의 성찰’이라는 주제로 1편의 기조발표와 8편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이 발표 가운데 7편이 『한문학논집』 44호에 논문으로 수록되었다. 7) 이종묵, 「늙음에 대한 인식과 格物의 공부」,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송혁기, 「落齒: 쇠락하는 신체의 발견과 그 수용의 자세」,『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8) 장유승, 「노인의 심리 변화에 대한 조선 문인의 인식」,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9) 이 밖에도 장수를 기원하는 시문을 통해 노년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고찰한 김우정의 논문(「祝壽의 문학적 전통과 노년 인식」), 일본의 근대 문인 三島中洲가 노년을 보낸 양상을 살핀 박영미의 논문(「老와 壽: 살아가는 것, 그리고 ‘完生’이라는 축복」), 權重冕의 한시를 통해 그의 노년기 삶의 지향을 살핀 이향배의 논문(「翠陰 權重冕의 한시에 나타난 노년기 삶의 지향과 죽음」), 한시에 나타난 노부부의 형상을 네 가지로 유형화하여 살핀 박동욱의 논문(「한시에 나타난 노부부의 형상」) 등도 같은 논문집에 수록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2. 백거이(白居易)의 표방과 노경(老境)의 긍정적 의미 모색
2.1. 늙음에 대한 초기 인식과 백거이 존숭
윤기(尹愭, 1741~1826)는 한미한 남인계 문인이었다. 호조참의와 같은 벼슬을 하기도 했지만 그를 특징 짓는 것은 그러한 관력이 아니다. 그는 33세에서야 생원시에 합격했고 오랜 성균관 유생 생활 끝에 52세가 되어서야 문과에 급제했다. 평생 열댓 번 정도 이사를 다닐 만큼 안정적이지 못한 생활을 하였고 중년 이후 외손자와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으며 지독한 가난은 평생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10)
윤기의 시는 70세 이전의 것만 전하고 그 이후의 것은 산일(散逸)되었다. 탄로시(歎老詩)를 ‘탄로(歎老)’를 주제의식으로 내세운 시라고 한다면, 그의 시 가운데 본격적인 탄로시라 할 만한 것은 대부분 60대 이후에 지은 것들이다. 그의 시작 가운데 <사회(寫懷)>, <독향산시유감(讀香山詩有感)>(이상 61세작),
<정묘원조(丁卯元朝)>(67세작), <무진원일(戊辰元日)>(68세작), <가탄(可歎)>(70세작), <탄로요(歎老謠)>(72세작) 등을 탄로시로 논할 수 있다.
나이를 얼마나 먹어야 늙었다고 할 수 있을까? 옛 문헌에 따르면 50세 이상, 혹은 70세 이상을 ‘노(老)’라 규정하였다.11) 전통 사회에 ‘노(老)’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주관성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송(宋)의 소식(蘇軾, 1036~1101)은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있을 때 지은 시에서 “늙고 병들어 봄을 맞으니 잠잘 생각만 하여 승탑(僧榻)에서 잠깐 눈 붙이기만 바라네”[老病逢春只思睡, 獨求僧榻寄須臾]라 읊었는데 이 시를 지을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서른일곱에 죽은 이주(李冑, 1468~1504)가 <만성(謾成)>12)이라는 시에서, ‘늙을수록 추운 날씨에 병이 들까 두렵다’고 한 만큼 탄로(歎老)가 이루어 지는 나이는 특정하기 어렵다. 소식이나 이주는 40세 이전부터 노화에 대해 우려와 탄식을 보내고 있지만 대개는 40세를 전후한 시기에 노화의 징후가 표면으로 드러나기에 이 시기부터 늙음을 우려하는 시가 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40세를 ‘생애전환기’라 명명하며 건강검진을 독려하고 있지만 예전부터 40세는 노화가 표면화되는 나이로 인식하였다.『동의보감』에서도 ‘40세 이전에는 방자하게 살다가 40세 이상이 되면 기력이 쇠퇴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기력이 쇠퇴하면 온갖 병들이 벌떼처럼 일어난다’고 하였다.13)
10) 윤기의 생애에 대해서는 이규필, 「無名子 尹愭의 生涯와 交遊」, 『대동문화연구』89,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15 참조. 11) 『논어』 「계씨」의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이라는 구절에 대한 邢昺의 疏에 “老謂五十以上”이라 하였고『자치통감』漢高帝二年條의 “蕭何亦發關中老弱未傅者, 悉詣滎陽” 구절에 대한 胡三省의 註에 “過五十六爲老”라 하여 50대에 이른 이를 ‘老’라 하였다. 한편 『설문해자』에는 “老, 考也, 七十曰老”라 하였고『예기』 「곡례」上에 “六十曰耆指使, 七十曰老而傳” 라 하였으며 『초사』 「이소」의 “老冉冉其將至兮, 恐脩名之不立” 구절에 대한 王逸의 주에는 “七十曰老”라 하여 70세를 ‘老’라 규정하기도 하였다. 12) 李冑, <謾成>, 『國朝詩刪』 卷2: “老怯風霜病益頑, 一簷朝旭坐蒲團. 隣僧去後門還掩, 只有山雲過石欄.”
윤기 또한 40대 초반부터 자신의 노화를 시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41세에 지은 시에서 “쇠잔한 몸 센 머리로 돌아보니, 서울은 아득하기만 하네” [飄零回白首, 京洛似天涯]14)라 하기도 하였고, 43세 되던 해 가을에 지은 시에서 “평소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귀밑머리 세는 건 어쩌겠는가”[素心今尙在, 其柰鬢毛衰]15)라 한 것을 보면 40대 초반부터 자신의 노화를 자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0세를 전후한 시기에는 노화로 인한 신체 변화를 계기로, 앞만 보고 달리던 그동안의 자신의 생을 돌아보고 자신의 전체 생애에 대해 관망하기도 한다. 윤기 역시 45세에 지은 다음 시에서 그동안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남은 생을 가늠하고 있다.
지난날의 기대 모두 헛된 꿈 되었으니 45년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네. 하늘이 내 수명을 아흔으로 늘려준다면 반은 이미 지났어도 반은 남아 있으련만. 昔年期望摠歸虛 五九光陰石火如 若使壽延九十歲 半雖已往半猶餘 (윤기, <又戲作一絶>, 『무명자집』시고 책1)
마흔이 되기 전에는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앞만 보고 달려간다. 지난날의 기대가 모두 헛된 꿈이 되었다고 한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윤기 자신은 90세까지 살았으면 했는데 실제 그는 86세까지 살았다. 당시로서는 장수했다고 할 수 있고 기 대했던 수명을 거의 누렸지만 그의 후반 생은 녹록지 않았다. 52세에 문과에 급제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고 54세에는 차남 심배(心培)를 잃게 되며 57세와 61세에는 그나마 얻었던 한미한 벼슬에서 파직되고 옥에 갇히기까지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노경(老境)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늙으니 먼 길 오르기 겁나고 병들어 관복 입기도 어렵구나. 이제부터는 말직도 그만두고 한가로이 누워 주림과 추위 참아야지. 老怯登程遠 病知束帶難 從今休薄宦 閒卧忍飢寒 (윤기, <寫悔>,『무명자집』시고 책4)
윤기가 61세에 지은 시다. 이제 노경에 들어 몸을 제대로 추스를 수 없어 유람을 떠날 수도 없고 그나마 하고 있던 관직 생활도 힘에 부치게 되어, 물러나 쉬고자 하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날 뜻 을 담은 시는, 이후로 찾아올 한가로움에 대한 동경을 표백(表白)하기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이후의 한가로움이 동경의 대상만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늙어서 한가로이 쉬고자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 그 한가로움은 안락한 것이 아니라 주림과 추위가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가난한 시인이 맞을 노경은 이전의 곤궁함이 가져다주던 암담한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윤기는 60세 이후 늙음을 문제 삼은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지만, 필자가 그의 탄로시를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백거이와의 관련성 때문이다. 윤기는 백거이의 시구를 수시로 활용하였고 주석으로 백거이를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시편에 따라서는 노경에 대해 흔치 않은 인식을 보여준 백거이의 주제의식을 표방하기도 했다.
윤기는 자신의 시에서 직접적으로 백거이를 존숭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무진원일(戊辰元日)-又>에서 윤기는 “백낙천은 내가 사모하는 분이라 벗 삼으려 하지만 어찌 감히 견주겠는가”[樂天我所慕, 尙友安敢比]라 하며 백거이의 조정에서의 강직한 태도와 노년의 풍도(風度)를 기리며 존숭의 뜻을 내비친 바 있다.16) 이것 외에도 윤기의 시문 여러 곳에서 백거이 작품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17)
윤기 스스로 백거이의 삶과 시를 흠모하는 뜻을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하였거니와 윤기의 문학과 백거이의 문학은 닮은 점이 많다.
주지하다시피 백거이 시는 전반기의 풍유시(諷諭詩)와 후반기의 한적시(閑寂詩)로 대별된다. 윤기 또한 노년까지 과폐(科弊)를 비판하는 등 사회비판적 시문을 많이 짓기도 했고 노년기에 백거이의 삶에 대한 지향성이 강해져 한적시(閑寂詩),특히 탄로시를 적지 않게 남겼다.
백거이는, 인간이 늙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결코 슬퍼하거나 개탄할 일이 아니라 하고 벗들과 술에 취해 흥겨운 상황에서 많은 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애초부터 노화와 노경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백거이가 40세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탄로삼수(歎老三首)>의 첫째 수만 보더라도 노화를 자각한 그 자신의 충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거니와, 늙는다는 것에 대해 그가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잘 보 여주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 거울에 비추어보니 모습과 그림자 모두 적막하네. 젊은 시절은 나에게서 떠나가고 백발은 빗질하는 대로 떨어지네. 모든 변화는 천천히 이루어지니 천천히 쇠하는 것 보고도 알지 못했네. 다만 두려운 건 거울 속 얼굴 오늘 아침이 어제보다 늙은 것이라. 인생이 백 년도 되지 않으니 길이 즐거움 누릴 수는 없겠지. 누가 천지의 마음을 이해하여 거북이나 학처럼 장수하겠는가. 내 듣기로 좋은 의사로 고금에 편작을 일컬으니
만병은 다 고칠 수 있어도 늙음을 고칠 약은 없구나. 晨興照青鏡 形影兩寂莫 少年辭我去 白髮隨梳落 萬化成於漸 漸衰看不覺 但恐鏡中顏 今朝老於昨 人年少滿百 不得長歡樂 誰會天地心 千齡與龜鶴 吾聞善醫者 今古稱扁鵲 萬病皆可治 唯無治老藥18)
백발과 탈모, 갑작스레 나이가 들어보이는 거울 속 자신을 발견하고는 늙음에 대해 개탄하고 있다. 심지어 늙는 것을 ‘고칠 수 없는 병’으로까지 인식하고 있어 그가 노화에 대해 당시 얼마나 부정적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백거이에게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 36세 내지 37세경이니19) 40세경에는 흰머리가 제법 많아졌을 것이고, 51세에 지은 <백발(白髮)> 시에서는 반백(半白)이 되고 탈모도 심해져 이전과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개탄조로 읊고 있기도 하다.20)
위 시만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 시인들이 늙음을 개탄조로 읊었던 것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노경(老境)에 대해 긍정적으로 읊었던 백거이도 스스로 노화를 목도하던 초기에는 노화에 대해 부정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후기로 갈수록 백거이의 노경에 대한 태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이어서 백거이의 노경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살펴보고, 윤기가 그것을 시에서 어떻게 표방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늙음을 긍정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확인된다. “육체가 상해야 조용함을 찾을 수 있고, 말이 어눌해져야 침묵을 지킬 수 있다”[夫形之壞也, 可以就靜, 語之訛也, 可以守黙]라 한 김창흡(金昌翕)의 말에서 보듯 낙치(落齒)나 백발, 탈모 등 신체적 노화를 계기로 내면을 가다듬고자 하는 것이 그 하나요,21) 벼슬에서 물러난 노경(老境)에서야 한가로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며 한가로움을 기리는 것이 또 하나의 경향이다.
노경(老境)에 겪게 되는 갑작스런 한적(閑寂)은, 특히 벼슬로 황망한 일생을 보낸 이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여겨질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한가로움은 사람에 따라서는 외로운 것일 수도, 공포스러운 것일 수도 있 다. 가령 이유원(李裕元)은, 함께 이야기 나눌 벗조차 없어 부질없이 뜰을 서성인다고 하여 한가로움을 당황스럽고 쓸쓸한 것으로 읊으면서 고요하고 한가로운 경지를 ‘적막(寂寞)’으로 표현하기도 했다.22)
노경의 한가로움을 이렇게 부정적인 것으로 읊은 예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적(閑寂)을 긍정적인 것으로 읊고 있다. 성혼(成渾)이 <증안응휴천서(贈安應休天瑞)>에서 제시한 경지가 그렇고,23) 김안국(金安國)이 <차최용인광윤자박촌거벽상운(次崔龍仁光潤子璞村居壁上韻)>에서 늙고 나서야 한가로이 사는 맛을 알게 되었다[老得閑居味]고 독백한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24) 또 임상원(任相元)은, 벼슬을 그만두고 50대 초반에 광주(廣州)에 우거하며 지은 <서적(書適)>에서 어린 종 아이나 귀여운 손자 보기 등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곧 노경의 즐거움이라 읊기도 하였다.25)
백거이는 그의 자 ‘낙천(樂天)’이 말해주듯, 특히 노년의 삶을 긍정하며 그와 관련한 수많은 시를 지었다. 그의 후기 한적시 가운데 다수가 노경(老境)의 삶을 긍정적으로 읊은 것이다. 50대까지 백거이는 노화와 노경에 대 해 다소 부정적인 내용의 시를 짓기도 했지만, 60세 즈음부터의 시에서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읊고 있다.
늙지 않으면 반드시 요절하는 것이고 요절하지 않으면 반드시 노쇠하게 된다네. 만년에 노쇠하는 게 요절하는 것보다 나으니
이 이치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네. 不老即須夭 不夭即須衰 晚衰勝早夭 此理決不疑26)
백거이가 63세에 읊은 <남경희로(覽鏡喜老)> 가운데 일부다. 이 대목은 생애 후반기 늙음에 대한 백거이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경을 읊은 그의 시를 ‘탄로시(歎老詩)’라 하지 않고 ‘영로시(詠老詩)’라 일컫는 것도 그가 지은 시 가운데 늙음을 탄식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읊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백거이는 <노병상잉이시자해(老病相仍以詩自解)>에서 “벌레의 다리나 쥐의 간이 되는 것도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데 닭살 같은 피부와 흰머리에 어찌 또 상심하랴”[蟲臂鼠肝猶不怪, 雞膚鶴髮復何傷]라 한 바 있다. ‘충비서간(蟲臂鼠肝)’이라는 말은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것으로, 태어나서 죽어 돌아가는 것은 자연 변화의 필연 현상이고 죽는 것도 크게 놀랍거나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닌데, 형체가 쇠하여 늙는 것이 또 어째서 슬퍼할 것인가 반문하는 내용이다. 백거이가 노화와 노경을 긍정적으로 읊을 수 있었던 것은 『장자』에 기반한 이러한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그뿐 아니라 백거이는 여러 벗들과 시주(詩酒)로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에 노경을 즐기며 그 즐거움을 기꺼이 시로 옮겼다고 할 수 있다.
윤기의 시 가운데 백거이의 영로시(詠老詩)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가 62세에 지은 <객유언인유작탄로시자(客有言人有作歎老詩者) 화자파다(和者頗多) 고여역차지(故余亦次之)>이다. 어떤 이가 탄로시를 지었다는 말을 듣고 그에 화답한 오언고시다.
이 시는 차례로 1) 늙음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탄식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 2) 자신이 노경에 이르러 좌절했던 내용, 3) 늙어서 좋은 점들, 4) 노화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 등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분량상 3) ‘늙어서 좋은 점들’의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1)에서는 어떤 이가 탄로시를 지은 것을 두고 늙음을 한탄할 필요가 없으니 눈앞의 술잔처럼 즐길 거리를 즐겨도 좋다고 하며 젊다고 기쁠 것도, 늙었다고 슬플 것도 없다는 말로 서두를 열고 있다.27)
이어서 2)에서 자신도 한때 노화를 자각하고 좌절했던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한 가지 일도 성취하지 못하고 늘 병에 시달려야 했으며 시력은 나빠지고 머리가 세고 기력이 쇠했음을 자각하고는 탄식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28) 3)은 늙어서 좋은 점에 대해 읊고 있는데, 전체 시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4)에서는 늙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하면서 남은 생을 즐기겠노라는 말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3)에 해당하는 부분의 일부를 보자.
그러나 매우 다행스럽게도 내 맘에 꼭 드는 게 있네. 번잡한 세상 보고 듣기 싫으니 귀 밝고 눈 밝은 걸 어디에 쓰겠는가. 외지고 누추한 곳에서 정좌(靜坐)를 배우니 말과 소를 달릴 필요 없다네. 잠이 없으니 책 읽기 좋고 죽만 먹어도 주림을 면할 수 있네. 然有大可幸, 乃於吾心宜. 囂塵厭視聽, 安用聡明司. 僻陋學靜坐, 不須馬牛馳. 失睡或溫故, 恃粥聊救飢. (윤기, <客有言人有作歎老詩者 和者頗多 故余亦次之>,『무명자집』시고 책4)
윤기는, 시력과 청력이 나빠져 세상사를 접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고, 번거롭게 돌아다니지 않고 조용히 앉아있을 수 있어서 좋으며 잠이 줄어들어 책 읽기 좋고 조금만 먹어도 배고픈 줄을 모르는 것 등을 늙어서 좋은 점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윤기가 늙음을 이만큼이나마 긍정하고 있는 시는 이 한 편뿐이며, 이는 다분히 백거이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더 이상 백거이의 시처럼 늙음을 이 정도로 긍정한 작품을 짓지 않는다.
윤기가 말년에 애호하며 바라던 ‘백거이의 노경’을 끝내 스스로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는 마땅히 가까이 어울릴 벗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거이가 말년까지 수많은 벗들과 어울리며 구로회(九老會)와 같은 모임으로 외로움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던 것과 확연히 대비되는 점이다. 67세에 지은 <정묘원조(丁卯元朝)>에서 윤기는 자신이 신유생(辛酉生, 1741년생)임을 떠올리며, 세상에 신유년에 태어난 사람이 많은데 어찌 동갑의 벗이 없는지 개탄하고 있다.29)
그러면서 시 끝에 “백낙천의 시에 ‘함께 만금으로 귀한 술 한 말을 사 마시는데, 서로 바라보니 일흔에서 세 살이 모자라네 [共把十千沽一斗, 相看七十欠三年]’라 하였는데 이는 동갑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놀다가 지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없기에 탄식을 부친다”30)라는 주석을 더하고 있다.
윤기가 인용한 백거이의 시는 <여몽득고주한음차약후기(與夢得沽酒閑飲且約後期)>31)로, 늙어서 술값 아껴 무엇하겠느냐며 술을 사서 친구 유우석(劉禹錫, 772~842)과 즐기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백거이는 유우석과 말년까지 가까이 지내며 그에게 수많은 시를 지어 보냈다. 또 노경에 친하게 지낸 벗 원진(元稹, 779~831)은 백거이를 원추리[萱草]에, 백거이는 원진을 술에 견주며 서로의 존재 덕분에 근심을 잊을 수 있다고 하기도 했다.32) 백거이는 늘 술을 가까이 했고, 벼슬을 그만두고 낙양에 머물며 향산(香山) 용문사(龍門寺)에서 구로회(九老會)라는 시사(詩社)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니 죽을 때까지 벗이 없이 외로워 근심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에 반해 윤기는 <자조(自嘲)>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산속 외딴집에 살았고, 왕래하는 벗조차 드물었다.33) 66세에 지은 다음 시에서도 그가 노경에 병이 들어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노년에 병이 많아 누워서 신음하노라니 문 닫힌 외딴 마을엔 찾아오는 객도 없구나. 말 삼가는 데 힘쓰다 도리어 말을 잊었고 이치 살피는 데 신경 쓰다 무심한 것처럼 돼버렸네. 군평(君平)은 세상과 사귐을 저버렸고 황보(皇甫)는 서책에 오래전에 파묻혔지. 상자 속에 거문고 넣어 유수곡(流水曲) 끊겼다 말라 세상엔 본디부터 지음이 없었으니. 衰年多病卧涔涔 門掩孤村少客尋 愼語用工還忘語 留心觀理似無心 君平與世交相棄 皇甫於書久已淫 莫道匣琴流水絶 俗人自是乏知音 (윤기, <多病>, 『무명자집』시고 책4)
제목이 드러내듯 늙어 병이 많아진 것도 문제였지만, 시인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지음(知音)이 없다는 것이었다. 군평(君平)은 전한(前漢)의 은사(隱士) 엄준(嚴遵)의 자(字)다. 그는 촉(蜀) 땅에 은거하며 성도(成都) 의 저잣거리에서 점을 쳐 생계를 유지했는데 하루에 100전(錢)만 벌면 문을 닫아걸고 저술에 힘썼다고 한다. 황보(皇甫)는 곧 진(晉)의 황보밀(皇甫謐)을 가리키는데 그는 일생 동안 병에 시달리면서도 은거해서 책에 파묻혀 저술에 힘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엄준이나 황보밀 모두 숨어 지내면서 저술에 힘쓴 인물들로 윤기 자신을 그들에 견주고 있는 것이다. 유수곡(流水曲)은 백아(伯牙)가 연주했다는 곡조 이름으로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말없이 백아의 연주를 듣고도 흐르는 물을 떠올렸다는 고사가 있으며 여기에서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종자기가 먼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상자 속에 넣어 더 이상 연주하지 않았다는 고사를 차용하고 있는데, 윤기에게는 종자기와 같은 지음(知音)이 애초부터 없었다.
윤기가 평생 교유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고, 노경을 함께한 벗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윤기의 노년기 벗으로는 말년까지 교유한 처남 신이규(辛履奎, 1758~1829), 58세부터 65세 전후까지 교유한 홍극호(洪克浩, 1731~?) 정도가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나마 그들과도 자주 어울렸던 것 같지도 않다.34)
칠순에서 두 살 적은 낙천옹은 쇠약함 틈타 온갖 질병 침범한다 탄식했지. 구로회 풍류를 부질없이 부러워하니 오늘 누가 있어 서로 어울리랴. 七旬欠二樂天翁 曾歎乘衰百疾攻 九老風流空悵望 有誰今日與相從 (윤기, <戊辰元日>,『무명자집』시고 책6)
이 시는 윤기가 68세 되던 해에 지은 것이다. 시제 끝에 “白詩云: ‘六十八衰翁, 乘衰百疾攻’”이라는 주가 있는데 윤기가 언급한 백거이의 시구는 <병중시십오수(病中詩十五首)-초병풍(初病風)>35)이란 시의 일부다.
백거이의 시에서는 68세 된 자신이 쇠약해진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어쩔 수 없다며 도리어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욕심도 없음을 읊고 있다. 그에 반해 윤기의 시는 백거이의 시 가운데 노쇠한 것을 강조하는 구절을 가져다가 이미 노쇠한 자신에게 벗조차 없음을 한탄하는 데 쓰고 있다.
70세가 넘어서도 윤기의 외로운 생활은 계속되었다. 72세경에 지은 <사세사(謝世辭)>라는 4언시에서 윤기는 장중울(張仲蔚)처럼 쑥대 속에 숨어 지내고 원안(袁安)처럼 큰 눈 속에 묻혀 있던 것에 자신을 빗대면서 그렇게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지내 아무도 자신을 찾아오는 이가 없다고 하여 혼자 지내는 외로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36)
29) 윤기, <丁卯元朝>, 『무명자집』시고 책4: “世人辛酉盖多焉, 獨恨同庚識靡緣. 誰把十千沽一斗, 秪看七帙欠三年. 閒來漸覺身心泰, 老去偏知歲月遄. 平日讀書成底事, 死生窮達任蒼天.” 30) 위의 시: “樂天詩曰: ‘共把十千沽一斗, 相看七十欠三年.’ 此盖與其同庚, 飮遊而作也. 余則不能, 故寓歎.” 31) 白居易, <與夢得沽酒閑飲且約後期>,『白居易詩集校注』卷34, 中華書局, 2006: “少時猶不憂生計, 老後誰能惜酒錢. 共把十千沽一鬥, 相看七十欠三年. 閑徵雅令窮經史, 醉聽清吟勝管弦. 更待菊黃家醞熟, 共君一醉一陶然.” 32) 원진이 백거이에게 보낸 시 <贈樂天>에 “唯君比萱草, 相見可忘憂”라는 구절이 있다. 원추리는 나물로 만들어 먹으면 취한 것 같아 근심을 잊을 수 있어 일명 ‘忘憂草’라고도 한다.
백거이가 원진의 시에 화답한 시는 다음과 같다. “杜康能散悶, 萱草解忘憂. 借問萱逢杜, 何如白見劉. 老衰勝少夭, 閑樂笑忙愁. 試問同年內, 何人得白頭.”(백거이, <酬夢得比萱草見贈>, 『白居易詩集校注』卷34, 中華書局, 2006)
33) 윤기, <自嘲>,『무명자집』시고 책4.이 시에 대해서는 본 장의 3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도록 한다.
34) 윤기의 교유에 대해서는 이규필, 앞의 논문 참조. 35) 白居易, <病中詩十五首-初病風>,『白居易詩集校注』卷35, 中華書局, 2006: “六十八衰翁, 乘衰百疾攻. 朽株難免蠹, 空穴易來風. 肘痹宜生柳, 頭旋劇轉蓬. 恬然不動處, 虛白在胸中.”
36) 윤기, <謝世辭> 중,『무명자집』문고 책11: “仲蔚蓬蒿, 空搔白頭. 袁安大雪, 孰揩靑眸. 門無剝啄, 詩寫幽愁.” 장중울과 원안은 모두 후한의 은자들로, 장중울은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이 혼자 지내 쑥대가 사람 키 높이만큼 자라 집을 덮었다고 하며, 원안은 눈이 한 길 높이로 내린 날 사람들이 양식을 구하러 나가는데도 눈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3.2. 산수유람의 희구와 기력의 쇠진
백거이는 만년에 한적(閑寂)을 만끽하기도 하였지만 손님을 끊고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시로 벗들과 어울려 산수를 유람하거나 꽃을 감상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늘그막의 생활 그대도 알아차렸겠거니, 낮에는 돌아다니고 밤에는 취해 읊는다오”[老來生計君看取, 白日遊行夜醉吟]37)라 하였듯이 노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마음만 있다면야 다리가 무슨 문제일까, 뭍에선 수레 타고 물에선 배 타면 되지”[但有心情何用脚, 陸乘肩輿水乘舟]38)라 하며 다리가 아픈데도 유람을 포기하지 않았다.
늘그막에도 이렇게 활동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체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의 양생법도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백거이는 약을 함부로 복용하지 않고, 먹어야 할 때 먹고 마셔야 할 때 마시며,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고 자야 할 때 자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너무 흥분하지 않고 쓸데없이 근심하지 않으며, 늘 시를 지어 회포를 풀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39)
윤기는 젊은 시절 유독 여행을 좋아하였다. 무명자집 시고에서 우리는 그가 도봉산, 강화, 용문산, 북한산, 계양(桂陽), 치악산, 화성, 순천, 해미,홍주(洪州) 등 여러 곳을 누비며 지은 시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몸이 쇠하여 더 이상 젊은 시절처럼 유람을 떠날 수 없게 되자 상심이 없을 수 없었다. 63세에 지은 다음 시에서는 유람을 유독 좋아하던 자신이 노쇠하게 되어 느끼는 심정을 읊고 있다.
나는 달리 즐기는 것 없고 유람을 좋아하는데 근래엔 늙고 병들어 절로 탄식이 나오네. 다행히 상평(尙平)처럼 혼사 일 마쳤고 두연(杜衍)처럼 수염 세었으니 어떻겠는가. 마음으론 산수를 생각하지만 속절없이 멀기만 하고 꿈에 운산(雲山)을 맴돌 때나 잠깐 한가할 뿐이네. 종남산에 해 지나는 걸 앉아서 보노라니 외로운 소나무도 배회하기에 좋겠구나. 吾無他愛愛遊觀 老病邇來自發嘆 縱幸向平婚嫁畢 其如杜衍鬢髯寒 心思泉石徒虛遠 夢繞雲山只暫閑 坐看終南移白日 孤松亦足供盤桓 (윤기, <歎老>, 『무명자집』시고 책4)
상평(尙平)은 후한 때의 은사(隱士) 상장(尙長)을 가리킨다. 그의 자가 자평(子平)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상장(尙長)은 젊어서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자식의 혼사를 마치면 집안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과연 자식의 혼사를 마치고 나서 명산을 유람하다가 신선이 되기 위해 떠났다고 한다. 비록 얼굴 한번 못 본 채 사위가 혼인 2개월 만에 요절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윤기는 61세에 자식들의 혼사를 마칠 수 있었기에 상평의 고사를 끌어다 쓴 것이다.
또 두연(杜衍)은 북송(北宋)의 대신(大臣)으로 늙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벗들과 오로회(五老會)를 결성하여 시주(詩酒)로 자적(自適)한 인물이다. 윤기 자신도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기에 두연을 끌어온 것이다. 실제로 윤기는 60세에 황산도 찰방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파직되어 벼슬이 없던 상태였고 이후 실록편수관 등을 지내기는 하지만 더 이상의 벼슬은 기약할 수 없었을뿐더러 그것에 미련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윤기는 주로 남대문 밖에서 서대문 밖 사이에서 기거하였으므로40) 집에서 남산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기력이 쇠하고 병이 들어 남산에 직접 오르지 못하고 집 안에 앉아 상상만으로 남산에 오르는 심정을 읊은 것이 위 시다.
이후 67세경에 지은 시에서 윤기는, 몸은 쇠했지만 마음만은 젊은 시절과 다름이 없다며 자신이 특히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자주 유람을 떠났음을 상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정력이 피폐해져 더 이상 젊은 시절처럼 유람할 수 없음을 애석해하고 있다.41)
앞서 윤기가 62세에 지은 시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백거이의 삶을 흠모하여 노경의 한가로움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한가로운 삶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윤기가 66세에 지은 다음 시에서 보 듯이 그는 다시 노경의 자신의 신세를 탄식조 일색으로 읊고 있다.
산속 외로운 집은 암자와도 같고 고기 반찬 없이 말도 없구나. 등불 아래 돌아보니 그림자마저 대머리니 이 몸이 그대로 늙은 중이 아닌가 하네. 山裏孤棲似佛菴 食無魚肉口無談 燈下顧看頭影禿 自疑身是老瞿曇 (윤기, <自嘲>,『무명자집』시고 책4)
늙은 자신의 신세를 제목 그대로 ‘자조(自嘲)’하고 있는 시다. 시인은 한가롭다 못해 ‘외로운’ 신세가 된 지 오래다. 고기 반찬이 없는 것은 시인이 가난해서이며, 말이 없는 것은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는 데다가 스스로 말 삼가기를 힘썼기 때문이다.42) 마흔 남짓에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머리는 어느새 다 빠져 대머리가 되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늙은 중에 빗대고 있다.
42) 같은 해에 지은 다른 시에서 시인은 “말 삼가는 공부를 하다 도리어 말을 잊었다”[愼語用工還忘語]라 하였다. 윤기, <多病>,『무명자집』시고 책4 참조. 70세에 지은 글에서는 “又或有客而寒暄餘, 便默然則將以我爲簡, 故揀取百無所關之閒辭漫語, 以備酬酢, 其外則惟靜坐看書, 有則喫着, 無則忍飢寒而已, 是足以終其年矣”(<誓瘖>,『무명자집』문고 책10)라 하여 쾌활하게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다.
72세경에 지은 <誓瘖 申前說 更加鞭辟>(『무명자집』문고 책11)은 앞의 <誓瘖>을 부연한 것으로, 여기에서 윤기는, 모욕을 당하고 꾸지람을 듣는 것은 모두 말 때문이며 입은 재앙이 들어오는 문이라 하여 입을 닫고 지낼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윤기는 평생 가난한 삶을 살았기에 우리는 그가 가난에 익숙해질 법도 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이르러서도 솔직히 부자가 부럽다고 토로한 바 있다.
67세 이후 그가 지은 <칠불선일선(七不羡一羡) 각성절구(各成絶句)>라는 시에서 고관대작의 삶, 벗들과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삶 등을 일곱 수로 읊고는 여덟 번째 시에서 “다른 사람 부럽지 않지만 부자는 부럽다”[不羡他人羡富翁]라 한 바 있다. 그저 먹고살 걱정이 없고 장사 지내는 일이나 자식의 혼사, 제사 등을 치르는 데 어려움이 없는 삶을 동경한 것이다.43)
윤기가 부자를 부러워한 것은, 돈을 흥청망청 쓸 수 있기를 바라서였다기보다는 자신의 고된 삶에 대한 원망의 우회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또 다른 시에서 문과에 급제하고도 가난에 허덕이고, 늙도록 밭뙈기 두어 이랑조차 장만하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였다. 당시 세간에 문과에 급제하고도 굶어죽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설마 자신이 그런 처지에 처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44)
윤기는 어울릴 벗이 없기도 했지만 취흥을 즐길 경제적 여력도 없었다. 윤기가 애초부터 술을 안 마셨던 것은 아니다. <주설(酒說)>이라는 글에서 그는 자신이 젊을 적에는 술을 너무 좋아하여 절제할 줄도 모르다가 공맹(孔孟)을 접하고 술을 경계하기 시작, 이후 술을 차 마시듯 조금씩만 마셨다 한다.45) 그러던 것이 노경에 이르러서는 그 조금의 술조차 마실 여력이 없을 만큼 가난한 생활을 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근래 곤궁함이 더욱 심해져 가끔은 몇 달 동안 술맛을 보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다지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래도 50이랑의 밭에다 차조를 심어 좋은 술을 빚어서 아침에 한 잔, 낮에 한 잔씩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은 며칠동안 밥도 짓지 못하여 늘 굶어 죽지 않을까 걱정하니, 어찌 술 마시기를 바라겠는가.46)"
70세를 넘어서자 윤기는 더욱 곤궁해져 술은 고사하고 며칠씩 밥을 굶는 일도 예사였다. 위의 글처럼 굶주린 생활을 하던 차, 어느 날 윤기는 아내가 실을 팔아 막걸리를 사왔는데, 그걸 맛보니 무척 시고 떫어서 다 마시지도 못했다고 한다.47) 윤기는 백거이처럼 노경 나름의 즐거움을 희구하였지만 이런 환경 때문에 그는 끝내 백거이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었고 백거이가 읊은 노경의 즐거움도 지속적으로 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저 마음의 평온이나마 희구하며 어쩔 수 없이 늙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72세경에 지은 다음 시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니 귀머거리라 할 수 있고 잔글씨를 읽지 못하니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랴. 앉으나 서나 곱사등이 같고 머리는 벗겨지고 이도 빠졌네. 머리와 눈은 어질어질하고 정신은 꽉 막혔네. 마치 안개 속에 빠진 듯하다가 번번이 담화(痰火)가 심해지며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잊고 걸음걸이도 절뚝거리네. 갑을 부르면서 을이라 하고 오른쪽으로 가려 하면서 왼쪽으로 간다 하니 집안 사람들 나무라며 비난하고
친지들도 비웃고 놀려대네. 기운이 이미 충만하지 못하니 뜻도 따라 게을러져 시서(詩書)는 시렁에 묶어 두고 멍하니 나조차 잊은 채 지내네. 텅 빈 배를 탄식하면서도 오히려 탐내는 것 부끄럽게 여겨 바람 부는 북창 아래 눕고 따스한 남쪽 처마 밑에 앉았네.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몸과 마음이 두루 평온하니 지금에 이르러서야 거의 재앙을 면했네. 細語不聞 謂聾也可 小字莫辨 非瞽而那 坐傴立僂 髮禿齒墮 頭目暈眩 神精牿鎖 若墜烟霧 輒騰痰火 當言忽忘 能履亦跛 呼甲爲乙 欲右曰左 家人誚譏 親知嘲簸 氣旣不充 志從而惰 束閣詩書 嗒然喪我 縱歎腹枵 猶恥頤朶 北窻風卧 南簷暄坐 事物不嬰 身心俱妥 而今而後 庶免於禍 (윤기, <歎老謠>, 『무명자집』문고 책11)
시력과 청력의 저하, 탈모와 낙치, 현기증, 기억력 저하, 온전치 않은 걸음걸이, 마음과는 다른 몸의 움직임 등 노화의 징표들을 총체적으로 겪으면서 거기에 가난까지 더해진 암담한 노경에 대한 자조적(自嘲的)인 서술이 이어지고 있다. 시의 내용은 대부분 노화로 인해 무기력해진 자신의 모습을 서술한 것이고, 그나마 노경을 긍정적으로 읊은 대목은 마지막 몇 구절뿐이다.
백거이를 좇아 노경을 적극적으로 긍정했던 태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욕심을 줄이고 사물에 얽매이지 않아 겨우 재앙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는데 앞서 노화의 징표들을 부정적으로 읊은 터라 이런 긍정은 시 전체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늙음을 받아들이고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으로 자위하고 있어 다분히 체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 요절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늙는다. 늙음은 대체로 탄식의 대상이었다. 그 탄식의 구체적인 대상은 주로 신체 노화의 징표들, 이를테면 백발이나 탈모, 낙치(落齒), 시력과 청력의 저하 등이었고 이런 징 표들은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나타나기 일쑤이며 이러한 특징은 한시 등 문학에서도 확인된다.
윤기는 평생 백거이를 존숭했으며 그의 삶과 문학을 본받으려 했다. 백거이가 노경에 읊었던 것처럼 윤기 자신도 늙음을 자연스러운 것, 기뻐해야 할 것으로 여겨 늙어서 오히려 좋은 점들을 찾아보려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백거이와는 달랐다. 백거이는 30대 초반에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아가 형부상서(刑部尙書)와 같은 고위직에 올랐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많은 벗들과 함께 시주(詩酒)로써 말년을 즐겼다. 이에 반해 윤기는 52세가 되어서야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사이 끼니해결을 위해 성균관에 출입하였을 정도로 가난에 허덕이는 삶을 살았다. 노경에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으며 외로움을 달래줄 벗 또한 마땅히 없었다. 그가 노경에 접어들 무렵 희구했던, 긍정적인 노경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체념 어린 어조로 늙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늙음에 대한 그의 태도의 역정(歷程)이 그의 탄로시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벗들과 어울리며 늙어서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삶을 즐긴 백거이의 노년은 누가 보더라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백거이처럼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노년을 함께할 벗들, 건전한 신체, 생활을 영위할 만한 경제력은 백거이가 노년을 즐길 수 있었던 주요 요건들이었고 윤기는 이를 갖추지 못해 끝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 요건들은 노년을 잘 보내기 위해 꼭 갖추어야 할 것들인 듯하다. 우리가 젊음을 안락한 노년을 위해 바쳐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노년은 그간 살아온 인생의 결과를 겪는 시기로 볼 수도 있다. 젊은 시절과 노년은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노년에 이르러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할 것이며 앞으로의 우리 사회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노경에 들어선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사회가 윤기가 살던 때에서 나아진 게 없는 사회일 것이다.
2. 논문 길진숙, 「17세기 시가문학의 연행 환경과 창작․향유의 경향」, 『시학과 언어학』22, 시학과언어학회, 2012, 7~44면. 김우정, 「祝壽의 문학적 전통과 노년 인식」,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37~62면. 박동욱, 「한시에 나타난 노부부의 형상」,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145~171면. 박수천, 「禹倬의 <嘆老歌> 分析」, 백영 정벽욱 선생 10주기 추모논문집 간행위원회편, 『한국고전시가작품론』2, 집문당, 1992. 박영미, 「老와 壽: 살아가는 것, 그리고 ‘完生’이라는 축복」,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63~85면. 송혁기, 「落齒: 쇠락하는 신체의 발견과 그 수용의 자세」,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117~144면. 윤영옥, 「時調에 나타난 老人의 모습」, 『한민족어문학』39, 한민족어문학회, 2001, 155~174면. 이규필, 「無名子 尹愭의 生涯와 交遊」, 『대동문화연구』89,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2015, 7~54면. 이종묵, 「늙음에 대한 인식과 格物의 공부」,『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9~36면.
이향배, 「翠陰 權重冕의 한시에 나타난 노년기 삶의 지향과 죽음」, 『한문학논집』44,근역한문학회, 2016, 87~115면. 장유승, 「노인의 심리 변화에 대한 조선 문인의 인식」,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2016, 173~194면. 최홍원, 「탄로가의 진술방식과 태도의 변주」, 『문학교육학』47, 한국문학교육학회,2015, 191~224면. 王拴紧, 「白居易咏老诗探析」, 『焦作大学学报』, 2006.4, 23~24면.
A Study on Yun Ki尹愭′s Tallo-Shi歎老詩
An, Soon-Tae
Tallo-Shi歎老詩 is a poem on a subject of sighing with ag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tudy about Korean Tallo-shi that has been discussed recently and to
clarify the feature of Yun Ki尹愭(1741~1826)′s Sino-Korean classical poem. It
would be natural for people who experience symptom of aging to get a shock. Some
people deny being old and bemoan consistently by getting older and some people
try to accept it positively. These attitudes towards being old emerge in literature
as well. They used to take one′s gray hair, hair loss, falling out of teeth and
malfunction of eyesight, hearing, memory and energy as an object of sighing. And
they took these physical change as an opportunity of inner study or enjoyed the
leisure of their old age.
Yun Ki used to bemoan by catching symptoms of aging but turned to positive
attitude about getting aged. Bai Juyi白居易(772~846) was the one who had an
effect on that change. Yun Ki used to say that he respected and quoted frequently
poems that Bai Juyi wrote in his old age.
Yun Ki tried to emulate Bai Juyi′s positive attitude towards getting aged and
enjoying old age. He reflected actively that he could finally enjoy being free when
he got old on his works. However Yun Ki was not able to enjoy his life like Bai
Juyi did, therefore his works were not like Bai Juyi′s poem. The reasons are as
following: First, Yun Ki had no friend to spend time with and expressed his loneliness
through his poems. Second, He was no longer able to go on a trip since his energy
fell off while Bai Juyi enjoyed his old age with his companions. Third, he had no
money to drink, and even failed to keep pot boiling. It caused him to feel depressed.
He could only console himself satisfying that he was at leisure and obviously it was
not voluntary acceptance.
keywords: Yun Ki尹愭, Bai Juyi白居易, Tallo-Shi, ageing, sighing with age.
1. 서론 2. 백거이(白居易)의 표방과 노경(老境)의 긍정적 의미 모색 3. 노경(老境)의 좌절과 늙음의 체념적 수용 4. 결론
<국문초록>
탄로시(歎老詩)는 늙음을 탄식하는 시다. 본고는 백거이(白居易)의 삶과 영로시(詠老詩)를 표방하며 늙음에 관해 여러 편의 시를 남긴 윤기(尹愭)의 한시를 고찰, 그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노화의 징후를 직접 경험한 사람은 처음에는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이후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떤 이는 늙음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며 개탄하고 또 어떤 이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늙음에 대한 이러한 자세는 문학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된다. 백발, 탈모, 낙치(落齒), 시력․청력․기억력․기력의 저하 등을 탄식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이러한 신체적 변화를 오히려 내면 공부의 계기로 삼거나 노년의 한가로움을 만끽하기도 한다. 윤기(尹愭, 1741-1826)는 86세까지 살면서 늙음에 대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그는 늙음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전적으로 긍정하는 어느 한 편에서 있지 않았다. 그도 처음에는 자신의 노화의 징후를 감지하고 개탄하였으나 곧 늙음을 긍정하는 자세로 전향했다. 그러한 전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백거이다. 윤기는 백거이를 존숭한다고 직접적으로 언명하기도 하였고, 그의 노경(老境)의 시 곳곳에서 백거이의 시구를 인용하기도 했다. 윤기가 본받고자 한 백거이의 삶의 자세와 시의 내용은 곧 ‘늙음을 긍정하고 노경을 즐기는 것’이었다. 윤기는 백거이의 삶의 자세와 시적 경향을 이어받아 늙어서 좋은 점, 즉 늙어서야 비로소 한가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시작(詩作)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러나 백거이의 삶과 시세계를 표방했던 것과는 별개로, 윤기는 백거이와 같은 노년의 삶을 누릴 수도 없었고 따라서 그의 시작도 백거이의 그것과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백거이가 벗들과 시주(詩酒)로 노경을 즐겼던 데 반해 윤기는 어울릴 만한 마땅한 벗이 없었다. 이에 윤기는 벗없음과 그로 인한 외로움을 그의 시 곳곳에 피력하고 있다.
둘째, 백거이가 노경에도 산수 유람을 즐길 강건함을 지녔던 데 반해 윤기는 기력이 쇠진하여 유람을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좋아하던 유람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된 것은 윤기에게 무엇보다 큰 상실감을 안겼다. 셋째, 백거이는 벗들과 술을 마시며 여유롭게 지낼 만한 경제적 여건이 되었지만 윤기는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에 허덕이며 노년을 보냈다. 윤기가 누릴 수 있는 노경의 즐거움은 그저 한가로움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는 것뿐이었고, 이는 백거이처럼 노경을 즐기며 늙음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에서 멀어져 늙음을 탄식하며 체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로 귀결되었다.
갑골문의 ‘노(老)’자는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형상이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은 기력이 쇠하여 다리 힘만으로 걷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기력의 쇠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를 모두 늙음의 문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 변화는 구체적으로 백발, 탈모, 낙치(落齒), 시력과 청력의 저하 등으로 나타나며 기억력의 저하 등과 같은 정신적 변화도 수반한다. 이는 모두 기력의 쇠진 때문에 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한가지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징표들이 함께 나타나게 된다.
대개의 탄로시에서도 자신에게 나타난 노화의 징표들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람이 나서 성장하고 늙어 죽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근대 이전에도 노화와 노경(老境)의 문제는 중년 이후의 모든 이의 관심사이자 문학에서의 주 관심사이기도 했다. 『청구영언(靑丘永言)』등에서 ‘탄로(歎老)’가 작품의 주요 분류항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 이래 주제별 분류 형식의 가집(歌集)에서 ‘탄로’는 어김없이 주요 분류항으로 제시되어 왔다.1) 그런데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보면 늙음을 주제로 한 문학 연구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았다.
고전문학 영역에서 늙음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시조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시조 가운데 늙음을 문제 삼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우탁(禹倬, 1262~1342)의 이른바 ‘탄로가(歎老歌)’다. 초기에 이 작품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후,2) 늙음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던 이전 시기 시조와 다르게 17세기에 이르러 시조가 ‘현재를 즐기는’ 취락(醉樂)의 경향성을 띠게 되었다고 하여 탄로가의 새로운 면모를 살핀 연구도 있다.3) 또 시조에 나타난 노인의 형상을 유형화하여 살핀 연구도 보이고,4) 시조에서 ‘늙음’을 주로 문제 삼고 있는 다수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늙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며 늙음의 문제를 정서적으로 어떻게 진술하는가로 세분하여 살핀 연구도 있다.5)
최근 근역한문학회에서 ‘노년의 성찰’이라는 주제로 한문학에서의 늙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고전문학에서의 늙음의 문제에 대한 연구 성과가 눈에 띄게 축적되었다.6) 신체적 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7)나 노인의 심리 변화8) 등 늙음과 관련한 논의가 폭넓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9)
그런데 구체적인 한 인간의 생애에서 노경(老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떤 지속적인 인식을 보이며 혹 그 인식에 어떤 변화가 확인되는지를 살피는 문제도 중요하다고 하겠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미진한 듯하다.
조선후기 문인 윤기(尹愭)는 늙음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詩作)에 임했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백거이(白居易)의 삶과 문학을 표방하였다. 본고에서는 윤기의 삶과 문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이 표방하던 백거이의 그것과 어떤 거리를 두고 변화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최홍원, 「탄로가의 진술방식과 태도의 변주」, 『문학교육학』47, 한국문학교육학회, 2015, 195면. 2) 박수천은 탄로가의 작자 고정(考定) 문제, 작품의 구조, 우탁의 한시 등을 살펴 탄로가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바 있다. 박수천, 「禹倬의 <嘆老歌> 分析」, 백영 정병욱 선생 10주기 추모 논문집 간행위원회 편, 『한국고전시가작품론』2, 집문당, 1992 참조. 3) 길진숙, 「17세기 시가문학의 연행 환경과 창작․향유의 경향」, 『시학과 언어학』22, 시학과 언어학회, 2012. 4) 윤영옥, 「時調에 나타난 老人의 모습」, 『한민족어문학』39, 한민족어문학회, 2001. 이 논문에서는 시조에 나타난 노인의 형상을 ‘노추(老醜)’, ‘탄로(歎老)’, ‘회한(悔恨)’, ‘자적(自適)’, ‘축수(祝壽)’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5) 최홍원, 앞의 논문.
6) 근역한문학회 2016년 춘계 학술대회에서 ‘노년의 성찰’이라는 주제로 1편의 기조발표와 8편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이 발표 가운데 7편이 『한문학논집』 44호에 논문으로 수록되었다. 7) 이종묵, 「늙음에 대한 인식과 格物의 공부」,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송혁기, 「落齒: 쇠락하는 신체의 발견과 그 수용의 자세」,『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8) 장유승, 「노인의 심리 변화에 대한 조선 문인의 인식」,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9) 이 밖에도 장수를 기원하는 시문을 통해 노년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고찰한 김우정의 논문(「祝壽의 문학적 전통과 노년 인식」), 일본의 근대 문인 三島中洲가 노년을 보낸 양상을 살핀 박영미의 논문(「老와 壽: 살아가는 것, 그리고 ‘完生’이라는 축복」), 權重冕의 한시를 통해 그의 노년기 삶의 지향을 살핀 이향배의 논문(「翠陰 權重冕의 한시에 나타난 노년기 삶의 지향과 죽음」), 한시에 나타난 노부부의 형상을 네 가지로 유형화하여 살핀 박동욱의 논문(「한시에 나타난 노부부의 형상」) 등도 같은 논문집에 수록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2. 백거이(白居易)의 표방과 노경(老境)의 긍정적 의미 모색
2.1. 늙음에 대한 초기 인식과 백거이 존숭
윤기(尹愭, 1741~1826)는 한미한 남인계 문인이었다. 호조참의와 같은 벼슬을 하기도 했지만 그를 특징 짓는 것은 그러한 관력이 아니다. 그는 33세에서야 생원시에 합격했고 오랜 성균관 유생 생활 끝에 52세가 되어서야 문과에 급제했다. 평생 열댓 번 정도 이사를 다닐 만큼 안정적이지 못한 생활을 하였고 중년 이후 외손자와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으며 지독한 가난은 평생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10)
윤기의 시는 70세 이전의 것만 전하고 그 이후의 것은 산일(散逸)되었다. 탄로시(歎老詩)를 ‘탄로(歎老)’를 주제의식으로 내세운 시라고 한다면, 그의 시 가운데 본격적인 탄로시라 할 만한 것은 대부분 60대 이후에 지은 것들이다. 그의 시작 가운데 <사회(寫懷)>, <독향산시유감(讀香山詩有感)>(이상 61세작),
<정묘원조(丁卯元朝)>(67세작), <무진원일(戊辰元日)>(68세작), <가탄(可歎)>(70세작), <탄로요(歎老謠)>(72세작) 등을 탄로시로 논할 수 있다.
나이를 얼마나 먹어야 늙었다고 할 수 있을까? 옛 문헌에 따르면 50세 이상, 혹은 70세 이상을 ‘노(老)’라 규정하였다.11) 전통 사회에 ‘노(老)’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주관성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송(宋)의 소식(蘇軾, 1036~1101)은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있을 때 지은 시에서 “늙고 병들어 봄을 맞으니 잠잘 생각만 하여 승탑(僧榻)에서 잠깐 눈 붙이기만 바라네”[老病逢春只思睡, 獨求僧榻寄須臾]라 읊었는데 이 시를 지을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서른일곱에 죽은 이주(李冑, 1468~1504)가 <만성(謾成)>12)이라는 시에서, ‘늙을수록 추운 날씨에 병이 들까 두렵다’고 한 만큼 탄로(歎老)가 이루어 지는 나이는 특정하기 어렵다. 소식이나 이주는 40세 이전부터 노화에 대해 우려와 탄식을 보내고 있지만 대개는 40세를 전후한 시기에 노화의 징후가 표면으로 드러나기에 이 시기부터 늙음을 우려하는 시가 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40세를 ‘생애전환기’라 명명하며 건강검진을 독려하고 있지만 예전부터 40세는 노화가 표면화되는 나이로 인식하였다.『동의보감』에서도 ‘40세 이전에는 방자하게 살다가 40세 이상이 되면 기력이 쇠퇴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기력이 쇠퇴하면 온갖 병들이 벌떼처럼 일어난다’고 하였다.13)
10) 윤기의 생애에 대해서는 이규필, 「無名子 尹愭의 生涯와 交遊」, 『대동문화연구』89,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15 참조. 11) 『논어』 「계씨」의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이라는 구절에 대한 邢昺의 疏에 “老謂五十以上”이라 하였고『자치통감』漢高帝二年條의 “蕭何亦發關中老弱未傅者, 悉詣滎陽” 구절에 대한 胡三省의 註에 “過五十六爲老”라 하여 50대에 이른 이를 ‘老’라 하였다. 한편 『설문해자』에는 “老, 考也, 七十曰老”라 하였고『예기』 「곡례」上에 “六十曰耆指使, 七十曰老而傳” 라 하였으며 『초사』 「이소」의 “老冉冉其將至兮, 恐脩名之不立” 구절에 대한 王逸의 주에는 “七十曰老”라 하여 70세를 ‘老’라 규정하기도 하였다. 12) 李冑, <謾成>, 『國朝詩刪』 卷2: “老怯風霜病益頑, 一簷朝旭坐蒲團. 隣僧去後門還掩, 只有山雲過石欄.”
윤기 또한 40대 초반부터 자신의 노화를 시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41세에 지은 시에서 “쇠잔한 몸 센 머리로 돌아보니, 서울은 아득하기만 하네” [飄零回白首, 京洛似天涯]14)라 하기도 하였고, 43세 되던 해 가을에 지은 시에서 “평소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귀밑머리 세는 건 어쩌겠는가”[素心今尙在, 其柰鬢毛衰]15)라 한 것을 보면 40대 초반부터 자신의 노화를 자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0세를 전후한 시기에는 노화로 인한 신체 변화를 계기로, 앞만 보고 달리던 그동안의 자신의 생을 돌아보고 자신의 전체 생애에 대해 관망하기도 한다. 윤기 역시 45세에 지은 다음 시에서 그동안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남은 생을 가늠하고 있다.
지난날의 기대 모두 헛된 꿈 되었으니 45년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네. 하늘이 내 수명을 아흔으로 늘려준다면 반은 이미 지났어도 반은 남아 있으련만. 昔年期望摠歸虛 五九光陰石火如 若使壽延九十歲 半雖已往半猶餘 (윤기, <又戲作一絶>, 『무명자집』시고 책1)
마흔이 되기 전에는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앞만 보고 달려간다. 지난날의 기대가 모두 헛된 꿈이 되었다고 한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윤기 자신은 90세까지 살았으면 했는데 실제 그는 86세까지 살았다. 당시로서는 장수했다고 할 수 있고 기 대했던 수명을 거의 누렸지만 그의 후반 생은 녹록지 않았다. 52세에 문과에 급제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고 54세에는 차남 심배(心培)를 잃게 되며 57세와 61세에는 그나마 얻었던 한미한 벼슬에서 파직되고 옥에 갇히기까지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노경(老境)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늙으니 먼 길 오르기 겁나고 병들어 관복 입기도 어렵구나. 이제부터는 말직도 그만두고 한가로이 누워 주림과 추위 참아야지. 老怯登程遠 病知束帶難 從今休薄宦 閒卧忍飢寒 (윤기, <寫悔>,『무명자집』시고 책4)
윤기가 61세에 지은 시다. 이제 노경에 들어 몸을 제대로 추스를 수 없어 유람을 떠날 수도 없고 그나마 하고 있던 관직 생활도 힘에 부치게 되어, 물러나 쉬고자 하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날 뜻 을 담은 시는, 이후로 찾아올 한가로움에 대한 동경을 표백(表白)하기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이후의 한가로움이 동경의 대상만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늙어서 한가로이 쉬고자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 그 한가로움은 안락한 것이 아니라 주림과 추위가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가난한 시인이 맞을 노경은 이전의 곤궁함이 가져다주던 암담한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윤기는 60세 이후 늙음을 문제 삼은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지만, 필자가 그의 탄로시를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백거이와의 관련성 때문이다. 윤기는 백거이의 시구를 수시로 활용하였고 주석으로 백거이를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시편에 따라서는 노경에 대해 흔치 않은 인식을 보여준 백거이의 주제의식을 표방하기도 했다.
윤기는 자신의 시에서 직접적으로 백거이를 존숭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무진원일(戊辰元日)-又>에서 윤기는 “백낙천은 내가 사모하는 분이라 벗 삼으려 하지만 어찌 감히 견주겠는가”[樂天我所慕, 尙友安敢比]라 하며 백거이의 조정에서의 강직한 태도와 노년의 풍도(風度)를 기리며 존숭의 뜻을 내비친 바 있다.16) 이것 외에도 윤기의 시문 여러 곳에서 백거이 작품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17)
윤기 스스로 백거이의 삶과 시를 흠모하는 뜻을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하였거니와 윤기의 문학과 백거이의 문학은 닮은 점이 많다.
주지하다시피 백거이 시는 전반기의 풍유시(諷諭詩)와 후반기의 한적시(閑寂詩)로 대별된다. 윤기 또한 노년까지 과폐(科弊)를 비판하는 등 사회비판적 시문을 많이 짓기도 했고 노년기에 백거이의 삶에 대한 지향성이 강해져 한적시(閑寂詩),특히 탄로시를 적지 않게 남겼다.
백거이는, 인간이 늙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결코 슬퍼하거나 개탄할 일이 아니라 하고 벗들과 술에 취해 흥겨운 상황에서 많은 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애초부터 노화와 노경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백거이가 40세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탄로삼수(歎老三首)>의 첫째 수만 보더라도 노화를 자각한 그 자신의 충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거니와, 늙는다는 것에 대해 그가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잘 보 여주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 거울에 비추어보니 모습과 그림자 모두 적막하네. 젊은 시절은 나에게서 떠나가고 백발은 빗질하는 대로 떨어지네. 모든 변화는 천천히 이루어지니 천천히 쇠하는 것 보고도 알지 못했네. 다만 두려운 건 거울 속 얼굴 오늘 아침이 어제보다 늙은 것이라. 인생이 백 년도 되지 않으니 길이 즐거움 누릴 수는 없겠지. 누가 천지의 마음을 이해하여 거북이나 학처럼 장수하겠는가. 내 듣기로 좋은 의사로 고금에 편작을 일컬으니
만병은 다 고칠 수 있어도 늙음을 고칠 약은 없구나. 晨興照青鏡 形影兩寂莫 少年辭我去 白髮隨梳落 萬化成於漸 漸衰看不覺 但恐鏡中顏 今朝老於昨 人年少滿百 不得長歡樂 誰會天地心 千齡與龜鶴 吾聞善醫者 今古稱扁鵲 萬病皆可治 唯無治老藥18)
백발과 탈모, 갑작스레 나이가 들어보이는 거울 속 자신을 발견하고는 늙음에 대해 개탄하고 있다. 심지어 늙는 것을 ‘고칠 수 없는 병’으로까지 인식하고 있어 그가 노화에 대해 당시 얼마나 부정적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백거이에게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 36세 내지 37세경이니19) 40세경에는 흰머리가 제법 많아졌을 것이고, 51세에 지은 <백발(白髮)> 시에서는 반백(半白)이 되고 탈모도 심해져 이전과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개탄조로 읊고 있기도 하다.20)
위 시만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 시인들이 늙음을 개탄조로 읊었던 것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노경(老境)에 대해 긍정적으로 읊었던 백거이도 스스로 노화를 목도하던 초기에는 노화에 대해 부정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후기로 갈수록 백거이의 노경에 대한 태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이어서 백거이의 노경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살펴보고, 윤기가 그것을 시에서 어떻게 표방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늙음을 긍정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확인된다. “육체가 상해야 조용함을 찾을 수 있고, 말이 어눌해져야 침묵을 지킬 수 있다”[夫形之壞也, 可以就靜, 語之訛也, 可以守黙]라 한 김창흡(金昌翕)의 말에서 보듯 낙치(落齒)나 백발, 탈모 등 신체적 노화를 계기로 내면을 가다듬고자 하는 것이 그 하나요,21) 벼슬에서 물러난 노경(老境)에서야 한가로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며 한가로움을 기리는 것이 또 하나의 경향이다.
노경(老境)에 겪게 되는 갑작스런 한적(閑寂)은, 특히 벼슬로 황망한 일생을 보낸 이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여겨질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한가로움은 사람에 따라서는 외로운 것일 수도, 공포스러운 것일 수도 있 다. 가령 이유원(李裕元)은, 함께 이야기 나눌 벗조차 없어 부질없이 뜰을 서성인다고 하여 한가로움을 당황스럽고 쓸쓸한 것으로 읊으면서 고요하고 한가로운 경지를 ‘적막(寂寞)’으로 표현하기도 했다.22)
노경의 한가로움을 이렇게 부정적인 것으로 읊은 예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적(閑寂)을 긍정적인 것으로 읊고 있다. 성혼(成渾)이 <증안응휴천서(贈安應休天瑞)>에서 제시한 경지가 그렇고,23) 김안국(金安國)이 <차최용인광윤자박촌거벽상운(次崔龍仁光潤子璞村居壁上韻)>에서 늙고 나서야 한가로이 사는 맛을 알게 되었다[老得閑居味]고 독백한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24) 또 임상원(任相元)은, 벼슬을 그만두고 50대 초반에 광주(廣州)에 우거하며 지은 <서적(書適)>에서 어린 종 아이나 귀여운 손자 보기 등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곧 노경의 즐거움이라 읊기도 하였다.25)
백거이는 그의 자 ‘낙천(樂天)’이 말해주듯, 특히 노년의 삶을 긍정하며 그와 관련한 수많은 시를 지었다. 그의 후기 한적시 가운데 다수가 노경(老境)의 삶을 긍정적으로 읊은 것이다. 50대까지 백거이는 노화와 노경에 대 해 다소 부정적인 내용의 시를 짓기도 했지만, 60세 즈음부터의 시에서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읊고 있다.
늙지 않으면 반드시 요절하는 것이고 요절하지 않으면 반드시 노쇠하게 된다네. 만년에 노쇠하는 게 요절하는 것보다 나으니
이 이치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네. 不老即須夭 不夭即須衰 晚衰勝早夭 此理決不疑26)
백거이가 63세에 읊은 <남경희로(覽鏡喜老)> 가운데 일부다. 이 대목은 생애 후반기 늙음에 대한 백거이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경을 읊은 그의 시를 ‘탄로시(歎老詩)’라 하지 않고 ‘영로시(詠老詩)’라 일컫는 것도 그가 지은 시 가운데 늙음을 탄식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읊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백거이는 <노병상잉이시자해(老病相仍以詩自解)>에서 “벌레의 다리나 쥐의 간이 되는 것도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데 닭살 같은 피부와 흰머리에 어찌 또 상심하랴”[蟲臂鼠肝猶不怪, 雞膚鶴髮復何傷]라 한 바 있다. ‘충비서간(蟲臂鼠肝)’이라는 말은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것으로, 태어나서 죽어 돌아가는 것은 자연 변화의 필연 현상이고 죽는 것도 크게 놀랍거나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닌데, 형체가 쇠하여 늙는 것이 또 어째서 슬퍼할 것인가 반문하는 내용이다. 백거이가 노화와 노경을 긍정적으로 읊을 수 있었던 것은 『장자』에 기반한 이러한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그뿐 아니라 백거이는 여러 벗들과 시주(詩酒)로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에 노경을 즐기며 그 즐거움을 기꺼이 시로 옮겼다고 할 수 있다.
윤기의 시 가운데 백거이의 영로시(詠老詩)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가 62세에 지은 <객유언인유작탄로시자(客有言人有作歎老詩者) 화자파다(和者頗多) 고여역차지(故余亦次之)>이다. 어떤 이가 탄로시를 지었다는 말을 듣고 그에 화답한 오언고시다.
이 시는 차례로 1) 늙음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탄식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 2) 자신이 노경에 이르러 좌절했던 내용, 3) 늙어서 좋은 점들, 4) 노화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 등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분량상 3) ‘늙어서 좋은 점들’의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1)에서는 어떤 이가 탄로시를 지은 것을 두고 늙음을 한탄할 필요가 없으니 눈앞의 술잔처럼 즐길 거리를 즐겨도 좋다고 하며 젊다고 기쁠 것도, 늙었다고 슬플 것도 없다는 말로 서두를 열고 있다.27)
이어서 2)에서 자신도 한때 노화를 자각하고 좌절했던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한 가지 일도 성취하지 못하고 늘 병에 시달려야 했으며 시력은 나빠지고 머리가 세고 기력이 쇠했음을 자각하고는 탄식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28) 3)은 늙어서 좋은 점에 대해 읊고 있는데, 전체 시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4)에서는 늙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하면서 남은 생을 즐기겠노라는 말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3)에 해당하는 부분의 일부를 보자.
그러나 매우 다행스럽게도 내 맘에 꼭 드는 게 있네. 번잡한 세상 보고 듣기 싫으니 귀 밝고 눈 밝은 걸 어디에 쓰겠는가. 외지고 누추한 곳에서 정좌(靜坐)를 배우니 말과 소를 달릴 필요 없다네. 잠이 없으니 책 읽기 좋고 죽만 먹어도 주림을 면할 수 있네. 然有大可幸, 乃於吾心宜. 囂塵厭視聽, 安用聡明司. 僻陋學靜坐, 不須馬牛馳. 失睡或溫故, 恃粥聊救飢. (윤기, <客有言人有作歎老詩者 和者頗多 故余亦次之>,『무명자집』시고 책4)
윤기는, 시력과 청력이 나빠져 세상사를 접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고, 번거롭게 돌아다니지 않고 조용히 앉아있을 수 있어서 좋으며 잠이 줄어들어 책 읽기 좋고 조금만 먹어도 배고픈 줄을 모르는 것 등을 늙어서 좋은 점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윤기가 늙음을 이만큼이나마 긍정하고 있는 시는 이 한 편뿐이며, 이는 다분히 백거이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더 이상 백거이의 시처럼 늙음을 이 정도로 긍정한 작품을 짓지 않는다.
윤기가 말년에 애호하며 바라던 ‘백거이의 노경’을 끝내 스스로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는 마땅히 가까이 어울릴 벗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거이가 말년까지 수많은 벗들과 어울리며 구로회(九老會)와 같은 모임으로 외로움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던 것과 확연히 대비되는 점이다. 67세에 지은 <정묘원조(丁卯元朝)>에서 윤기는 자신이 신유생(辛酉生, 1741년생)임을 떠올리며, 세상에 신유년에 태어난 사람이 많은데 어찌 동갑의 벗이 없는지 개탄하고 있다.29)
그러면서 시 끝에 “백낙천의 시에 ‘함께 만금으로 귀한 술 한 말을 사 마시는데, 서로 바라보니 일흔에서 세 살이 모자라네 [共把十千沽一斗, 相看七十欠三年]’라 하였는데 이는 동갑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놀다가 지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없기에 탄식을 부친다”30)라는 주석을 더하고 있다.
윤기가 인용한 백거이의 시는 <여몽득고주한음차약후기(與夢得沽酒閑飲且約後期)>31)로, 늙어서 술값 아껴 무엇하겠느냐며 술을 사서 친구 유우석(劉禹錫, 772~842)과 즐기는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백거이는 유우석과 말년까지 가까이 지내며 그에게 수많은 시를 지어 보냈다. 또 노경에 친하게 지낸 벗 원진(元稹, 779~831)은 백거이를 원추리[萱草]에, 백거이는 원진을 술에 견주며 서로의 존재 덕분에 근심을 잊을 수 있다고 하기도 했다.32) 백거이는 늘 술을 가까이 했고, 벼슬을 그만두고 낙양에 머물며 향산(香山) 용문사(龍門寺)에서 구로회(九老會)라는 시사(詩社)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니 죽을 때까지 벗이 없이 외로워 근심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에 반해 윤기는 <자조(自嘲)>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산속 외딴집에 살았고, 왕래하는 벗조차 드물었다.33) 66세에 지은 다음 시에서도 그가 노경에 병이 들어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노년에 병이 많아 누워서 신음하노라니 문 닫힌 외딴 마을엔 찾아오는 객도 없구나. 말 삼가는 데 힘쓰다 도리어 말을 잊었고 이치 살피는 데 신경 쓰다 무심한 것처럼 돼버렸네. 군평(君平)은 세상과 사귐을 저버렸고 황보(皇甫)는 서책에 오래전에 파묻혔지. 상자 속에 거문고 넣어 유수곡(流水曲) 끊겼다 말라 세상엔 본디부터 지음이 없었으니. 衰年多病卧涔涔 門掩孤村少客尋 愼語用工還忘語 留心觀理似無心 君平與世交相棄 皇甫於書久已淫 莫道匣琴流水絶 俗人自是乏知音 (윤기, <多病>, 『무명자집』시고 책4)
제목이 드러내듯 늙어 병이 많아진 것도 문제였지만, 시인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지음(知音)이 없다는 것이었다. 군평(君平)은 전한(前漢)의 은사(隱士) 엄준(嚴遵)의 자(字)다. 그는 촉(蜀) 땅에 은거하며 성도(成都) 의 저잣거리에서 점을 쳐 생계를 유지했는데 하루에 100전(錢)만 벌면 문을 닫아걸고 저술에 힘썼다고 한다. 황보(皇甫)는 곧 진(晉)의 황보밀(皇甫謐)을 가리키는데 그는 일생 동안 병에 시달리면서도 은거해서 책에 파묻혀 저술에 힘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엄준이나 황보밀 모두 숨어 지내면서 저술에 힘쓴 인물들로 윤기 자신을 그들에 견주고 있는 것이다. 유수곡(流水曲)은 백아(伯牙)가 연주했다는 곡조 이름으로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말없이 백아의 연주를 듣고도 흐르는 물을 떠올렸다는 고사가 있으며 여기에서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종자기가 먼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상자 속에 넣어 더 이상 연주하지 않았다는 고사를 차용하고 있는데, 윤기에게는 종자기와 같은 지음(知音)이 애초부터 없었다.
윤기가 평생 교유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고, 노경을 함께한 벗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윤기의 노년기 벗으로는 말년까지 교유한 처남 신이규(辛履奎, 1758~1829), 58세부터 65세 전후까지 교유한 홍극호(洪克浩, 1731~?) 정도가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나마 그들과도 자주 어울렸던 것 같지도 않다.34)
칠순에서 두 살 적은 낙천옹은 쇠약함 틈타 온갖 질병 침범한다 탄식했지. 구로회 풍류를 부질없이 부러워하니 오늘 누가 있어 서로 어울리랴. 七旬欠二樂天翁 曾歎乘衰百疾攻 九老風流空悵望 有誰今日與相從 (윤기, <戊辰元日>,『무명자집』시고 책6)
이 시는 윤기가 68세 되던 해에 지은 것이다. 시제 끝에 “白詩云: ‘六十八衰翁, 乘衰百疾攻’”이라는 주가 있는데 윤기가 언급한 백거이의 시구는 <병중시십오수(病中詩十五首)-초병풍(初病風)>35)이란 시의 일부다.
백거이의 시에서는 68세 된 자신이 쇠약해진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어쩔 수 없다며 도리어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욕심도 없음을 읊고 있다. 그에 반해 윤기의 시는 백거이의 시 가운데 노쇠한 것을 강조하는 구절을 가져다가 이미 노쇠한 자신에게 벗조차 없음을 한탄하는 데 쓰고 있다.
70세가 넘어서도 윤기의 외로운 생활은 계속되었다. 72세경에 지은 <사세사(謝世辭)>라는 4언시에서 윤기는 장중울(張仲蔚)처럼 쑥대 속에 숨어 지내고 원안(袁安)처럼 큰 눈 속에 묻혀 있던 것에 자신을 빗대면서 그렇게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지내 아무도 자신을 찾아오는 이가 없다고 하여 혼자 지내는 외로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36)
29) 윤기, <丁卯元朝>, 『무명자집』시고 책4: “世人辛酉盖多焉, 獨恨同庚識靡緣. 誰把十千沽一斗, 秪看七帙欠三年. 閒來漸覺身心泰, 老去偏知歲月遄. 平日讀書成底事, 死生窮達任蒼天.” 30) 위의 시: “樂天詩曰: ‘共把十千沽一斗, 相看七十欠三年.’ 此盖與其同庚, 飮遊而作也. 余則不能, 故寓歎.” 31) 白居易, <與夢得沽酒閑飲且約後期>,『白居易詩集校注』卷34, 中華書局, 2006: “少時猶不憂生計, 老後誰能惜酒錢. 共把十千沽一鬥, 相看七十欠三年. 閑徵雅令窮經史, 醉聽清吟勝管弦. 更待菊黃家醞熟, 共君一醉一陶然.” 32) 원진이 백거이에게 보낸 시 <贈樂天>에 “唯君比萱草, 相見可忘憂”라는 구절이 있다. 원추리는 나물로 만들어 먹으면 취한 것 같아 근심을 잊을 수 있어 일명 ‘忘憂草’라고도 한다.
백거이가 원진의 시에 화답한 시는 다음과 같다. “杜康能散悶, 萱草解忘憂. 借問萱逢杜, 何如白見劉. 老衰勝少夭, 閑樂笑忙愁. 試問同年內, 何人得白頭.”(백거이, <酬夢得比萱草見贈>, 『白居易詩集校注』卷34, 中華書局, 2006)
33) 윤기, <自嘲>,『무명자집』시고 책4.이 시에 대해서는 본 장의 3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도록 한다.
34) 윤기의 교유에 대해서는 이규필, 앞의 논문 참조. 35) 白居易, <病中詩十五首-初病風>,『白居易詩集校注』卷35, 中華書局, 2006: “六十八衰翁, 乘衰百疾攻. 朽株難免蠹, 空穴易來風. 肘痹宜生柳, 頭旋劇轉蓬. 恬然不動處, 虛白在胸中.”
36) 윤기, <謝世辭> 중,『무명자집』문고 책11: “仲蔚蓬蒿, 空搔白頭. 袁安大雪, 孰揩靑眸. 門無剝啄, 詩寫幽愁.” 장중울과 원안은 모두 후한의 은자들로, 장중울은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이 혼자 지내 쑥대가 사람 키 높이만큼 자라 집을 덮었다고 하며, 원안은 눈이 한 길 높이로 내린 날 사람들이 양식을 구하러 나가는데도 눈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3.2. 산수유람의 희구와 기력의 쇠진
백거이는 만년에 한적(閑寂)을 만끽하기도 하였지만 손님을 끊고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시로 벗들과 어울려 산수를 유람하거나 꽃을 감상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늘그막의 생활 그대도 알아차렸겠거니, 낮에는 돌아다니고 밤에는 취해 읊는다오”[老來生計君看取, 白日遊行夜醉吟]37)라 하였듯이 노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마음만 있다면야 다리가 무슨 문제일까, 뭍에선 수레 타고 물에선 배 타면 되지”[但有心情何用脚, 陸乘肩輿水乘舟]38)라 하며 다리가 아픈데도 유람을 포기하지 않았다.
늘그막에도 이렇게 활동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체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의 양생법도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백거이는 약을 함부로 복용하지 않고, 먹어야 할 때 먹고 마셔야 할 때 마시며,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고 자야 할 때 자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너무 흥분하지 않고 쓸데없이 근심하지 않으며, 늘 시를 지어 회포를 풀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39)
윤기는 젊은 시절 유독 여행을 좋아하였다. 무명자집 시고에서 우리는 그가 도봉산, 강화, 용문산, 북한산, 계양(桂陽), 치악산, 화성, 순천, 해미,홍주(洪州) 등 여러 곳을 누비며 지은 시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몸이 쇠하여 더 이상 젊은 시절처럼 유람을 떠날 수 없게 되자 상심이 없을 수 없었다. 63세에 지은 다음 시에서는 유람을 유독 좋아하던 자신이 노쇠하게 되어 느끼는 심정을 읊고 있다.
나는 달리 즐기는 것 없고 유람을 좋아하는데 근래엔 늙고 병들어 절로 탄식이 나오네. 다행히 상평(尙平)처럼 혼사 일 마쳤고 두연(杜衍)처럼 수염 세었으니 어떻겠는가. 마음으론 산수를 생각하지만 속절없이 멀기만 하고 꿈에 운산(雲山)을 맴돌 때나 잠깐 한가할 뿐이네. 종남산에 해 지나는 걸 앉아서 보노라니 외로운 소나무도 배회하기에 좋겠구나. 吾無他愛愛遊觀 老病邇來自發嘆 縱幸向平婚嫁畢 其如杜衍鬢髯寒 心思泉石徒虛遠 夢繞雲山只暫閑 坐看終南移白日 孤松亦足供盤桓 (윤기, <歎老>, 『무명자집』시고 책4)
상평(尙平)은 후한 때의 은사(隱士) 상장(尙長)을 가리킨다. 그의 자가 자평(子平)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상장(尙長)은 젊어서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자식의 혼사를 마치면 집안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과연 자식의 혼사를 마치고 나서 명산을 유람하다가 신선이 되기 위해 떠났다고 한다. 비록 얼굴 한번 못 본 채 사위가 혼인 2개월 만에 요절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윤기는 61세에 자식들의 혼사를 마칠 수 있었기에 상평의 고사를 끌어다 쓴 것이다.
또 두연(杜衍)은 북송(北宋)의 대신(大臣)으로 늙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벗들과 오로회(五老會)를 결성하여 시주(詩酒)로 자적(自適)한 인물이다. 윤기 자신도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기에 두연을 끌어온 것이다. 실제로 윤기는 60세에 황산도 찰방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파직되어 벼슬이 없던 상태였고 이후 실록편수관 등을 지내기는 하지만 더 이상의 벼슬은 기약할 수 없었을뿐더러 그것에 미련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윤기는 주로 남대문 밖에서 서대문 밖 사이에서 기거하였으므로40) 집에서 남산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기력이 쇠하고 병이 들어 남산에 직접 오르지 못하고 집 안에 앉아 상상만으로 남산에 오르는 심정을 읊은 것이 위 시다.
이후 67세경에 지은 시에서 윤기는, 몸은 쇠했지만 마음만은 젊은 시절과 다름이 없다며 자신이 특히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자주 유람을 떠났음을 상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정력이 피폐해져 더 이상 젊은 시절처럼 유람할 수 없음을 애석해하고 있다.41)
앞서 윤기가 62세에 지은 시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백거이의 삶을 흠모하여 노경의 한가로움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한가로운 삶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윤기가 66세에 지은 다음 시에서 보 듯이 그는 다시 노경의 자신의 신세를 탄식조 일색으로 읊고 있다.
산속 외로운 집은 암자와도 같고 고기 반찬 없이 말도 없구나. 등불 아래 돌아보니 그림자마저 대머리니 이 몸이 그대로 늙은 중이 아닌가 하네. 山裏孤棲似佛菴 食無魚肉口無談 燈下顧看頭影禿 自疑身是老瞿曇 (윤기, <自嘲>,『무명자집』시고 책4)
늙은 자신의 신세를 제목 그대로 ‘자조(自嘲)’하고 있는 시다. 시인은 한가롭다 못해 ‘외로운’ 신세가 된 지 오래다. 고기 반찬이 없는 것은 시인이 가난해서이며, 말이 없는 것은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는 데다가 스스로 말 삼가기를 힘썼기 때문이다.42) 마흔 남짓에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머리는 어느새 다 빠져 대머리가 되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늙은 중에 빗대고 있다.
42) 같은 해에 지은 다른 시에서 시인은 “말 삼가는 공부를 하다 도리어 말을 잊었다”[愼語用工還忘語]라 하였다. 윤기, <多病>,『무명자집』시고 책4 참조. 70세에 지은 글에서는 “又或有客而寒暄餘, 便默然則將以我爲簡, 故揀取百無所關之閒辭漫語, 以備酬酢, 其外則惟靜坐看書, 有則喫着, 無則忍飢寒而已, 是足以終其年矣”(<誓瘖>,『무명자집』문고 책10)라 하여 쾌활하게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다.
72세경에 지은 <誓瘖 申前說 更加鞭辟>(『무명자집』문고 책11)은 앞의 <誓瘖>을 부연한 것으로, 여기에서 윤기는, 모욕을 당하고 꾸지람을 듣는 것은 모두 말 때문이며 입은 재앙이 들어오는 문이라 하여 입을 닫고 지낼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윤기는 평생 가난한 삶을 살았기에 우리는 그가 가난에 익숙해질 법도 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이르러서도 솔직히 부자가 부럽다고 토로한 바 있다.
67세 이후 그가 지은 <칠불선일선(七不羡一羡) 각성절구(各成絶句)>라는 시에서 고관대작의 삶, 벗들과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삶 등을 일곱 수로 읊고는 여덟 번째 시에서 “다른 사람 부럽지 않지만 부자는 부럽다”[不羡他人羡富翁]라 한 바 있다. 그저 먹고살 걱정이 없고 장사 지내는 일이나 자식의 혼사, 제사 등을 치르는 데 어려움이 없는 삶을 동경한 것이다.43)
윤기가 부자를 부러워한 것은, 돈을 흥청망청 쓸 수 있기를 바라서였다기보다는 자신의 고된 삶에 대한 원망의 우회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또 다른 시에서 문과에 급제하고도 가난에 허덕이고, 늙도록 밭뙈기 두어 이랑조차 장만하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였다. 당시 세간에 문과에 급제하고도 굶어죽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설마 자신이 그런 처지에 처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44)
윤기는 어울릴 벗이 없기도 했지만 취흥을 즐길 경제적 여력도 없었다. 윤기가 애초부터 술을 안 마셨던 것은 아니다. <주설(酒說)>이라는 글에서 그는 자신이 젊을 적에는 술을 너무 좋아하여 절제할 줄도 모르다가 공맹(孔孟)을 접하고 술을 경계하기 시작, 이후 술을 차 마시듯 조금씩만 마셨다 한다.45) 그러던 것이 노경에 이르러서는 그 조금의 술조차 마실 여력이 없을 만큼 가난한 생활을 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근래 곤궁함이 더욱 심해져 가끔은 몇 달 동안 술맛을 보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다지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래도 50이랑의 밭에다 차조를 심어 좋은 술을 빚어서 아침에 한 잔, 낮에 한 잔씩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은 며칠동안 밥도 짓지 못하여 늘 굶어 죽지 않을까 걱정하니, 어찌 술 마시기를 바라겠는가.46)"
70세를 넘어서자 윤기는 더욱 곤궁해져 술은 고사하고 며칠씩 밥을 굶는 일도 예사였다. 위의 글처럼 굶주린 생활을 하던 차, 어느 날 윤기는 아내가 실을 팔아 막걸리를 사왔는데, 그걸 맛보니 무척 시고 떫어서 다 마시지도 못했다고 한다.47) 윤기는 백거이처럼 노경 나름의 즐거움을 희구하였지만 이런 환경 때문에 그는 끝내 백거이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었고 백거이가 읊은 노경의 즐거움도 지속적으로 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저 마음의 평온이나마 희구하며 어쩔 수 없이 늙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72세경에 지은 다음 시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니 귀머거리라 할 수 있고 잔글씨를 읽지 못하니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랴. 앉으나 서나 곱사등이 같고 머리는 벗겨지고 이도 빠졌네. 머리와 눈은 어질어질하고 정신은 꽉 막혔네. 마치 안개 속에 빠진 듯하다가 번번이 담화(痰火)가 심해지며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잊고 걸음걸이도 절뚝거리네. 갑을 부르면서 을이라 하고 오른쪽으로 가려 하면서 왼쪽으로 간다 하니 집안 사람들 나무라며 비난하고
친지들도 비웃고 놀려대네. 기운이 이미 충만하지 못하니 뜻도 따라 게을러져 시서(詩書)는 시렁에 묶어 두고 멍하니 나조차 잊은 채 지내네. 텅 빈 배를 탄식하면서도 오히려 탐내는 것 부끄럽게 여겨 바람 부는 북창 아래 눕고 따스한 남쪽 처마 밑에 앉았네.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몸과 마음이 두루 평온하니 지금에 이르러서야 거의 재앙을 면했네. 細語不聞 謂聾也可 小字莫辨 非瞽而那 坐傴立僂 髮禿齒墮 頭目暈眩 神精牿鎖 若墜烟霧 輒騰痰火 當言忽忘 能履亦跛 呼甲爲乙 欲右曰左 家人誚譏 親知嘲簸 氣旣不充 志從而惰 束閣詩書 嗒然喪我 縱歎腹枵 猶恥頤朶 北窻風卧 南簷暄坐 事物不嬰 身心俱妥 而今而後 庶免於禍 (윤기, <歎老謠>, 『무명자집』문고 책11)
시력과 청력의 저하, 탈모와 낙치, 현기증, 기억력 저하, 온전치 않은 걸음걸이, 마음과는 다른 몸의 움직임 등 노화의 징표들을 총체적으로 겪으면서 거기에 가난까지 더해진 암담한 노경에 대한 자조적(自嘲的)인 서술이 이어지고 있다. 시의 내용은 대부분 노화로 인해 무기력해진 자신의 모습을 서술한 것이고, 그나마 노경을 긍정적으로 읊은 대목은 마지막 몇 구절뿐이다.
백거이를 좇아 노경을 적극적으로 긍정했던 태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욕심을 줄이고 사물에 얽매이지 않아 겨우 재앙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는데 앞서 노화의 징표들을 부정적으로 읊은 터라 이런 긍정은 시 전체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늙음을 받아들이고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으로 자위하고 있어 다분히 체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 요절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늙는다. 늙음은 대체로 탄식의 대상이었다. 그 탄식의 구체적인 대상은 주로 신체 노화의 징표들, 이를테면 백발이나 탈모, 낙치(落齒), 시력과 청력의 저하 등이었고 이런 징 표들은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나타나기 일쑤이며 이러한 특징은 한시 등 문학에서도 확인된다.
윤기는 평생 백거이를 존숭했으며 그의 삶과 문학을 본받으려 했다. 백거이가 노경에 읊었던 것처럼 윤기 자신도 늙음을 자연스러운 것, 기뻐해야 할 것으로 여겨 늙어서 오히려 좋은 점들을 찾아보려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백거이와는 달랐다. 백거이는 30대 초반에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아가 형부상서(刑部尙書)와 같은 고위직에 올랐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많은 벗들과 함께 시주(詩酒)로써 말년을 즐겼다. 이에 반해 윤기는 52세가 되어서야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사이 끼니해결을 위해 성균관에 출입하였을 정도로 가난에 허덕이는 삶을 살았다. 노경에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으며 외로움을 달래줄 벗 또한 마땅히 없었다. 그가 노경에 접어들 무렵 희구했던, 긍정적인 노경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체념 어린 어조로 늙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늙음에 대한 그의 태도의 역정(歷程)이 그의 탄로시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벗들과 어울리며 늙어서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삶을 즐긴 백거이의 노년은 누가 보더라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백거이처럼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노년을 함께할 벗들, 건전한 신체, 생활을 영위할 만한 경제력은 백거이가 노년을 즐길 수 있었던 주요 요건들이었고 윤기는 이를 갖추지 못해 끝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 요건들은 노년을 잘 보내기 위해 꼭 갖추어야 할 것들인 듯하다. 우리가 젊음을 안락한 노년을 위해 바쳐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노년은 그간 살아온 인생의 결과를 겪는 시기로 볼 수도 있다. 젊은 시절과 노년은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노년에 이르러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할 것이며 앞으로의 우리 사회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노경에 들어선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사회가 윤기가 살던 때에서 나아진 게 없는 사회일 것이다.
2. 논문 길진숙, 「17세기 시가문학의 연행 환경과 창작․향유의 경향」, 『시학과 언어학』22, 시학과언어학회, 2012, 7~44면. 김우정, 「祝壽의 문학적 전통과 노년 인식」,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37~62면. 박동욱, 「한시에 나타난 노부부의 형상」,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145~171면. 박수천, 「禹倬의 <嘆老歌> 分析」, 백영 정벽욱 선생 10주기 추모논문집 간행위원회편, 『한국고전시가작품론』2, 집문당, 1992. 박영미, 「老와 壽: 살아가는 것, 그리고 ‘完生’이라는 축복」,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63~85면. 송혁기, 「落齒: 쇠락하는 신체의 발견과 그 수용의 자세」, 『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117~144면. 윤영옥, 「時調에 나타난 老人의 모습」, 『한민족어문학』39, 한민족어문학회, 2001, 155~174면. 이규필, 「無名子 尹愭의 生涯와 交遊」, 『대동문화연구』89,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2015, 7~54면. 이종묵, 「늙음에 대한 인식과 格物의 공부」,『한문학논집』44, 근역한문학회, 2016, 9~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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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Yun Ki尹愭′s Tallo-Shi歎老詩
An, Soon-Tae
Tallo-Shi歎老詩 is a poem on a subject of sighing with ag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tudy about Korean Tallo-shi that has been discussed recently and to
clarify the feature of Yun Ki尹愭(1741~1826)′s Sino-Korean classical poem. It
would be natural for people who experience symptom of aging to get a shock. Some
people deny being old and bemoan consistently by getting older and some people
try to accept it positively. These attitudes towards being old emerge in literature
as well. They used to take one′s gray hair, hair loss, falling out of teeth and
malfunction of eyesight, hearing, memory and energy as an object of sighing. And
they took these physical change as an opportunity of inner study or enjoyed the
leisure of their old age.
Yun Ki used to bemoan by catching symptoms of aging but turned to positive
attitude about getting aged. Bai Juyi白居易(772~846) was the one who had an
effect on that change. Yun Ki used to say that he respected and quoted frequently
poems that Bai Juyi wrote in his old age.
Yun Ki tried to emulate Bai Juyi′s positive attitude towards getting aged and
enjoying old age. He reflected actively that he could finally enjoy being free when
he got old on his works. However Yun Ki was not able to enjoy his life like Bai
Juyi did, therefore his works were not like Bai Juyi′s poem. The reasons are as
following: First, Yun Ki had no friend to spend time with and expressed his loneliness
through his poems. Second, He was no longer able to go on a trip since his energy
fell off while Bai Juyi enjoyed his old age with his companions. Third, he had no
money to drink, and even failed to keep pot boiling. It caused him to feel depressed.
He could only console himself satisfying that he was at leisure and obviously it was
not voluntary acceptance.
keywords: Yun Ki尹愭, Bai Juyi白居易, Tallo-Shi, ageing, sighing with 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