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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지 15코스 성지순례 묵상집
제1차 성지순례 코스 - 명동,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박용순 바오로 엮음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천주교 성지 15코스
성지순례 묵상집
제 1차 성지순례 코스
명동․서소문․당고개․새남터․절두산
박용순 바오로 엮음
나에게는 천당이 둘 입니다
살아서 천주교가 첫 번째 천당이요
죽어서 가는 곳이 두 번째 천당입니다
- 황일광 알렉시오 -
제 1차 오늘코스 : 서울→명동성당→서소문성지→당고개성지→새남터성지→절두산성지.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추천서
한국의 성지(聖地)는 초대 한국교회의 가혹했던 박해와 이에 맞서 장렬히 신앙을 고백한 선조 신앙인들의 삶이 생생히 투영(投影)된 곳입니다.
전 세계 유래 없는 자생(自生)적 교회로서 초대 교회 선조들의 신념이 얼마나 확고 부동했는지, 200여 년의 지난 현재 우리 교회의 위상이 그 결과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국 곳곳에 단장되어 있는 성지는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앙의 뿌리이자 자랑스런 유산이 아닐 수 없으며 나아가 성지를 순례하는 신자들에게는 더 깊은 신앙에 대한 성찰과 영적 성장을 가져다 주는 우리 신앙의 보고(宝庫)이기도 합니다.
이제 발간된〔성지 순례 묵상집〕은 이러한 성지를 단순히 소개하는 안내 책자가 아니라 코스별로 성지를 찾아 기도하고 묵상하며 신앙을 일궈 주는 묵상 기도집입니다. 이 책이 성지를 찾아 어떤 기도를 어떻게 바쳐야 할지 망설이는 신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믿습니다. 책의 발간을 위해 전국 성지를 찾아다니며 선조들의 신앙을 가슴에 가득 담아 글로 엮으려 애쓴 저자의 노고에 독자들의 성장이 화답(和答) 되길 기대합니다.
아울러 구원의 여정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축복이 저자와 이 책으로 성지를 찾아 기도하는 신자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002년 2월
주님 안에서
서울 대교구 총대리 김옥균 주교
성지순례 전례
◎ 성지순례 시작
◉ 환영 인사
◉ 오늘 순례성지 소개
◉ 봉사자 소개
◉ 준비 기도 (주님의 기도․성모송․영광송)
◎ 성가 286장 “순교자의 믿음”
1. 환란과 핍박 중에서 순교로 믿음 지켰네 / 이 믿음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 도다 / 순교자 믿음 본받아 끝까지 충성하리라
2. 순교자 옥에 갇혀도 양심은 자유로웠네 / 우리도 진리 위하여 주님께 생명 바치 리 / 순교자 믿음 본받아 끝까지 충성하리라
3. 순교자 믿음 본받아 형제를 사랑하리라 / 우리도 진리 위하여 주님께 생명 바치 리 / 순교자 믿음 본받아 끝까지 충성하리라
◎ 말씀의 전례
◉ 베드로전서 1장 3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들으시겠습니다.(또는 오늘 독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시고 예수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서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분깃을 하늘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응답 성가 19장 “주를 따르리”
1. 주 예수 우리의 희망 우리의 행복 / 내 일생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리 / 생명의 길 밝혀 주시니 주님을 따르리 / 십자가 길로 주님을 현양하리 사랑의 길로
2. 주 예수 우리의 기쁨 우리의 평화 / 내 일생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리 / 우리들 의 목자이시니 주님을 따르리 / 인내의 길로 주님을 현양하리 겸손의 길로
◎ 지금부터 마태오 복음 10장 26~33절(또는 오늘 복음)
그때에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어두운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103위 한국 성인 호칭 기도
◐ 오늘 순례 할 성지와 관련된 한국 교히사
◑ 묵상 자료 해설
◐ 묵상 자료 낭독
제 1차 코스
명동성당
성지 설명
☏ 02-774-3890
소재지 : 서울 중구 명동 2가
서울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은 서양 중세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사적 제 2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명례방에서 처음으로 신앙 집회가 시작된 때는 1784년 겨울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한역 서학서들이 들어왔다. 이 서학서 중에는 천문학, 과학, 수학, 의학 서적 등이 들어왔고, 천주 실의, 칠극 등 천주교 교리서들도 함께 들어왔다.
이 책들은 새로운 사상에 목말라 하던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면서 이 땅에 천주교회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당시 젊은 학자들의 지도자였던 권철신은 1777년부터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여는 등 새로운 사상과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회에 대해서 좀더 깊이 알고 싶어하던 이벽은, 동지사 서장관인 아버지 이동욱과 함께 북경에 가게 된 이승훈에게, 서양 신사를 만나 교리 서적을 구해 오고, 가능하면 세례를 받고 돌아오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하는 즉시 북당 성당에 가서 그라몽 신부에게 필담으로 교리를 배워 영세하고 돌아왔다. 그는 중국에서 가지고 온 책을 이벽에게 넘겨주었다. 이벽은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한적한 여관에 가서 그 책을 탐독하고 나서,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유학자였던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실학자인 권철신 권일신 형제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중인 지식층인 최인길, 최창현, 김범우, 지황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권일신의 제자인 내포지방 이존창과 전라도 지방의 유항검도 세례를 받았다.
처음엔 이들이 이벽의 집에 모이다가, 명례방에 살던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 신앙 집회를 갖던 중, 노름판으로 오인한 형조의 포졸들에게 발각됨으로서 모두 체포되었다. 이때 교리서와 성화, 성물들을 압수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이가 심했던 시대라 양반들은 모두 풀어 주고, 중인이었던 집주인 김범우는 귀양가서 매 맞은 장독으로 죽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8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을사추조적발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명례방 공동체는 완전히 해체되면서 신자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교회는 박해하면 할수록 엄청난 전교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순교하자 신도들은 이방인 지역인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듯이, 우리나라도 서울에서 박해를 받자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1786년 명례방 사건이 잠잠해 지자 이승훈은 북경에서 본 기억을 되살려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10명의 신자를 신부로 임명하고, 각 지방에 파견하여 성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이러한 가성직제도는 초기교회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전라도의 유항검이 큰 문제를 발견하였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성직행위가 독성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교절요(聖教切要)라는 책에서 발견하고, 1789년에 윤유일을 북경에 보내어 문의한다. 이에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는 가성직제는 물론 조상제사까지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미 성사를 맛본 교회 지도자들은 그때부터 성직자를 모셔오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게 되었다. 그래서 그 무서운 박해 중에도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고, 1831년 9월 9일 조선교구까지 설정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계속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교회 창설 초기부터 크고 작은 박해가 열네 차례나 일어났다. 그중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를 4대 큰 박해라고 한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주문모 신부님을 비롯하여 정약종, 이승훈, 강완숙, 황사영 등 200여명이 순교하였고, 400여명이 귀양을 간 대 박해였다.
다음은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로 앵베르 범 주교, 샤스땅 정 신부, 모방 나 신부과 평신도 으뜸인 정하상 바오로등 103위성인 중에서 70위가 성인 품에 오른 대 박해이다.
1846년에 일어난 병오박해는 우리나라에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 등 아홉 분이 성인 품에 오른 대 박해이다.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는 주교님 두 분과 신부님 다섯 분 등 모두 24분의 성인이 탄생한 박해로, 1866부터 1872년까지 무려 7년 동안 8.000여명이 순교한 대 박해이다.
한국교회가 창설 된지 100여 년 동안 이렇게 끊임없이 혹독한 박해를 받아 오다가, 1882년에 와서 한미 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종교 자유를 예견한 조선교구 제 7대 교구장 블랑 주교는 명례방에 윤 대감 댁을 매입하고, 그 후 30여 차례 토지 매입으로 지금의 명동성당 터를 마련하였다.
명동성당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님이신 코스트 신부님께서 직접 설계 감독하였다. 이 성당을 건축하는데 어려운 점도 많았다. 당시 외무부장관 격인 조병직이 이를 제지하려고, 1888년 1월에 천주교회에서 구입한 대지를 정부 이름으로 소유권을 억류하였다. 이때 조병직은 명동성당 터가 국유지임을 주장하고 또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면서 역대 임금들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의 수호신을 어지럽히는 일이라는 이유를 들어 불법이라고 하였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성당 건축을 방해하였다. 이 사건은 프랑스 공사의 중재로 1890년에 대지 문서를 교회측에 되돌려 줌으로써 끝이 났다. 그 뒤 블랑 주교가 사망함으로 제 8대 교구장에 임명된 뮈델 주교는 1891년 4월 19일 주교관 강복식을 집전하고 1892년 5월 8일 명동 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건물을 건축하는 도중 1896년 코스트 신부가 사망함으로 프와넬 신부가 인수받아 2년 후에 준공하였다. 정초식을 거행한지 6년 만에 이 성당이 완공되었다. 마침내 한국 천주교 주보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를 종현(명동)성당의 주보로 뮈델 주교에 의해,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 대 축일에 대성당을 축성하였다.
이 성당을 지으면서 여기에 쓰인 벽돌은 순교자들이 매장되었던 와고개 흙으로 구운 벽돌이다. 지금 용산 우체국 뒤 육군본부 성당 자리에서 구워 온 벽돌이다. 이 와고개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 4대 교구장 장경일 베르뇌 주교님과 다섯 분의 신부님, 그리고 지도급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던 성지이다. 코스트 신부님은 그 흙으로 20가지가 넘는 벽돌 모양을 직접 만들어 지은 성당이기 때문에 이 벽돌 하나 하나에는 순교자의 피가 섞여 있는 성당이다.
1831년 9월 9일 설정된 조선대목구를 1911년 4월 8일 교황청에서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1962년 3월 10일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와 광주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서울 주교좌는 조선대목구에서 서울대목구로, 또 서울대교구로 이름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한국교회를 상징된다. 그것은 이 명례방에서 처음으로 신앙 집회가 열렸고 그 후손들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얼굴인 것이다.
2.지하 묘소
명동성당 지하 묘소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앵베르 범 주교님과 샤스탕 정 신부님, 모방 나 신부님의 유해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 등 다섯 분의 성인 유해를 모시고 있다. 또 아직 시성 되지 않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배론 신학교의 푸르티에 신 신부와 프티니콜라 박 신부님의 유해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무명 순교자 두 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1836년 1월 12일에 입국한 모방 나 베드로 신부, 1837년 1월 15일에 입국한 샤스탕 정 신부, 그 해 12월 18일에 입국한 앵베르 범 주교님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목숨을 걸고 입국하였다. 모방 나 신부가 제일 먼저 입국하여 구산에서 조선말과 풍속을 배우고 미사를 집전하면서 방인 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36년 2월 6일 안양 수리산에 사는 최경환의 아들 최양업과, 3월 7일에는 홍주에 살던 최형(한지) 베드로의 동생 최방제를 선발하고, 7월 11일에는 용인에 살던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유홍열한국교회사300)을 선발하였다. 모방 나 신부는 그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한편 성직자에게 필요한 성덕을 쌓게 하다가 1834년 1월 3일 입국하였던 중국인 여항덕(余恒徳) 신부가 1836년 12월 3일 귀국할 때 마카오에 유학을 보냈다.
또한 모방 나 신부님은 신분 위장을 위해 상복을 입고, 방갓을 쓰고 충청도 일대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2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듬해 1월 15일 샤스탕 정 신부님을 맞아 두 분은 험한 산길을 헤매며 빵, 버터, 치즈, 고기대신 시래기로 허기를 채우고, 거적때기 위에서 새우잠을 자며 새벽 2시에 일어나 미사와 세례를 집전하고, 날이 새기 전에 상복으로 갈아입고 서리와 이슬로 옷깃을 적시며 다른 마을로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모방 나 신부님이 입국할 당시 4.000명이던 신자는 2년 만에 8.000명으로 늘어났다.
1837년 12월 18일에는 앵베르 범 주교님께서 입국하여, 평신도에 의해 우리나라 천주교가 탄생한지 53년 만에 완전한 교계 제도가 이루어졌다. 앵베르 주교님도 조선 사람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李在誼)토마스와 이문우 요한과 최방제 신학생의 형 최형 베드로 등 어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직접 가르쳐 빨리 성직자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이 체포되고, 배교자 김순성의 간계로 주교님의 은신처마저 노출되자 포졸에게 먼저 자헌(自献)하시고, 두 신부님께는 편지를 보내 더 이상 박해를 막기 위하여 자수하게 하여, 9월 21일 새남터에서 세분 모두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처형된 세분 성직자는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 두었다가, 20여 일이 지난 뒤 군인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박 바오로와 이문우 등 몇몇 교우들과 같이 목숨을 걸고 시신을 거두어, 지금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에 안장하였다가 4년 뒤에 삼성산으로 옮겨 모셨다.
그리고 1901년 박 바오로의 아들 박순집 베드로의 도움으로 세 성직자의 묘를 발굴하여 명동 지하 묘소에 모셨다.
3.명동성당 내부
명동성당 제대 뒤쪽을 보면 가운데 성모마리아 상이 있고, 그 아래 벽면에는 장면박사의 동생인 장발 화가가 제작한 열두 사도와 바오로, 바르나바 등 14분의 사도 성화가 있다. 제대를 향해 보면 중앙 왼쪽은 베드로 사도가 있고, 맨 끝이 배신자 유다 대신 마지막에 뽑힌 마티아 사도이고, 오른쪽은 바오로 사도이고 맨 끝에, 바오로 사도와 늘 함께 전도 여행을 다니던 바르나바 성인까지 열네 분의 성화(서양화가장발작품)가 있다. 제대 위쪽에 스테인드 글래스의 그림은 왼쪽 위에서 아래로 환희의 신비, 이어서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각 5단, 총 15단이 새겨져 있고, 성당 내부를 살펴보면 왼쪽에 김대건 신부님, 이승훈, 오른쪽에 이벽 성조, 명례방 집주인 김범우의 초상화가 있으며, 명례방 신앙 공동체 그림 속에는 양반들과 중인, 천민까지 신분을 초월한 신앙 공동체인 종교 집회 광경이 걸려 있다. 우측에 성 분도상은, 이 성전을 건축할 당시 여러 차례 사고로 많은 사람이 다쳤으므로, 건축사의 주보를 모시고 기도한 후로는 한 건의 사고도 없이 성당을 완성할 수 있었기에, 제대 우측 벽면에 성분도상을 모시고 있다.
명동 지하 성당에 모셔져 있는 유해
○ 범세형 앵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43세. 주교)
○ 모방 나 베드로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샤스탕 정 야고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님. (홍주. 옥사. 1839. 9.12. 34세. 장)
○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님. (구산. - . 1841. 4.29. 46세. 회장)
○ 신 푸르티에 안토니오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박 프티니콜라 미카엘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무명 순교자님
○ 무명 순교자님
성가 18. 주님을 부르던 날
방 다봉 신부의 편지
說明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북경에 있던 선교사 방다봉 신부가 이 기쁜 소식을 구라파에 있는 자기 친구에게 보낸 편지이다. (샤를르 달레 한국 교회사 상권 306-307)
그대는 한 사람의 입교 소식을 흐뭇한 마음으로 들을 것으로 믿습니다. 천주께서는 아마 그로 하여금 아직 어떤 선교사도 들어간 적이 없는 알지 못하는 나라에 복음의 빛으로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중국 동편에 있는 반도 조선입니다.
그 나라 왕은 자기의 종주로 생각하는 중국 황제에게 해마다 사신을 보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손해가 안됩니다. 조선왕이 황제에게 많은 예물을 바치지만, 황제는 그에게 더 많은 선물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이 조선 사신들이 작년 말에 왔는데, 그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이 우리 성당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서적을 주었습니다. 동지사 중 한 분의 아들은 나이 27세인데 박학하여 그 서적들을 열심히 읽어,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하였고, 또 천주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교리를 깊이 연구한 다음,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성세를 주기 전에 그에게 많은 문제를 물어 보았는데, 그는 모두 잘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만일 왕이 그의 행동을 못마땅히 생각하여,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결심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서슴치 않고 자기가 그 “진리를 명백히 아는 이 종교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형벌과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또 ‘복음이 가르치는 순결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을 용인치 않는다’는 것도 잊지 않고 알려주었더니, 그는 ‘법적인 아내 밖에 없고 또 다른 여자를 결코 얻지 않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출발하기 전에 그 아버지(이동욱)의 승낙을 얻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라몽 신부가 베드로란 본명으로 그에게 성세를 주었습니다. 그의 성은 이가이며 왕족의 인척이라 합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공명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 자기 구령에만 전력하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사신들도 그들의 왕에게 ‘서양 사람들을 그 나라에 불러들이기를 제청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북경에서 조선 한양까지는 육로로 약 3개월이 걸립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들과 글씨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글자와 중국 글자는 모양과 뜻이 같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 하여도 아주 미미합니다. 그러나 발음은 전혀 다릅니다. 조선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생각을 글씨로 써 놓으면, 우리는 그 글자를 보고 뜻을 이해하였고, 그들도 우리가 대답으로 써 놓은 것을 보고 그 뜻을 즉시 알아들었습니다.
조선교구 설정문
說明
교황청에선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6년 동안 조선에서 선교하다 1801년 순교한 후, 30년 동안 신부나 주교가 한 사람도 없는 가운데, 교황령으로 브뤼기애르 소 주교를 조선 대목구 교구장으로 정하고 조선교구를 설정했다. 아직 신부나 주교가 한 사람도 없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세계 교회에서 유래가 없는 결정이었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중권 234-236)
이 일을 길이 기억하기 위하여.
1. 천주의 높으신 섭리로, 본인의 어깨에 메어진 사도직의 의무로 주의 모든 양떼의 책임을 맡고 있는 본인은, 가톨릭의 중심이 되어 있는 이 교황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살고 있는 양들을, 특별히 더 부지런히 보살펴 영원한 목자가 강림하실 때에 의당 그렇게 되어야 할 것처럼, 사도 적인 보살핌으로 그 양들이 참 우리 안에 들어 있어, 천상 양식을 먹으러 오라고 불리고 거기까지 복되이 인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특히 교황 파견 선교사들이 어느 날이고, 마침내 조선 나라에 들어가서 그곳에 사는 교우들의 딱한 사정을 도와주고, 주의 포도밭에 그 쪽 부분을 포교와 성사 집행으로 가꾸게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적지 아니 비치고, 위에 말한 지방의 주민들이 중국의 다른 지방들과 연락을 취하기가 아주 드물고, 또한 지극히 어려운 일이므로 본인은, 포교 사업을 주관하는 로마 성교회의 공경 하올 추기경 형제들의 권고로, 지금 당장 조선 나라를 새로운 교구로 설정하고, 거기에 북경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교구장을 세우는 것이 적당한 줄로 생각합니다.
3. 그러므로 본인은 자진하여 그리고 확실한 지식과 깊은 고려 끝에, 교황의 충만한 직권을 가지고 이 교황 교서로써 조선 왕국을 지금 당장 새 교구로 설정하는 바이며, 이 교구는 북경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교구장을 세울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중국 각 지방이나 중국에 인접한 지방에 있는 교구장들에게, 관례적으로 부여되어 온 특권을 모두 또한, 일일이 교황청에서 간택할 이런 교구장에게 전기한 본인의 권한으로 부여하는 바입니다.
4. 이 편지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결정적이요, 유효하고, 효과적인 것이 되고, 그 전적인 효력을 받아 향유할 것을 결정하며,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관계 당사자들이 전적으로 도움을 베풀어주며, 모든 사람들이 틀림없이 지킬 것을 결정합니다. 또한 상임 혹은 위임 재판관과 교황청 관계자들도 이 친서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여야 하며, 누구든 어떤 권위로나. 알고 혹은 모르고 이 친서와 다르게 행하려고 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무효하고 쓸데없는 것이 될 것임을 결정하는 바입니다.
5. 이 친서의 효력은 이왕에 있는 교황의 규정과 법칙으로 이 친서의 정한 바와 반대되는 것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그밖에 특별하고 명백하게 언급되고 제한되어 마땅한 다른 규정과 벌칙으로도 제약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 마리아 대 성전에서 어부의 지환(指環)을 찍어
1831년 본 교황 재위 제1년 9월 9일 반포함
공경하올 갑사주교 브뤼기애르
說明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 나라에 브뤼기애르 소 주교를 조선교구 초대교구장으로 임명하고 다음과 같이 임명장을 보냈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중권 236-236)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보냄.
경애 하올 형제여, 인사와 교황 축복을 받으시오.
하늘에서 본인에게 맡겨진 목자의 직분은 본인으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신자들이 천주의 계명의 길로 인도되고, 또 자기들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있어 적당한 도움을 받도록, 천주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연구를 하여 돌보도록 밀어 줍니다. 그러므로 샴의 교구장인 소즈뿔리스 주교의 보좌 주교이며, 공경 하올 형제인 그대가 조선 나라에 들어가 조선의 신입 교우들의 일을 맡아 볼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청하셨을 때에, 본인은 조선 교우들의 궁핍한 사정을 고려하고 또한 샴의 교구장은 자기 보좌 주교를 삼을 만한 적당한 신부를 따로 구하기가 쉬울 것이라는 이유를 생각한 끝에, 추기경들의 의견에 따라 그대의 청을 너그러이 들어, 아무 지장이 없는 새 포교지로 떠나기를 허락하며, 이 일을 다행히 또한 복되게 끝내도록 나의 친서로서, 지금 그대를 본인과 교황의 자의로 조선 나라의 교구장으로 선택하고, 임명하고 정하여 중국 지방과 중국에 인접한 지방에 관례적으로 부여되는 모든 특권을 부여하는 바입니다.
다만 이 문제에 관한 포교 성성의 추기경들의 권위는 언제나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관련이 있거나 관련이 있을 모든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이 일에 있어서 그대에게 혼연히 순종하라 하였고, 또한 그대가 주는 유익한 교훈과 명령을 겸손 되이 받아들이고, 효과적으로 이행하도록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불복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대가 정당하게 내릴 선고나 벌을 재가할 것이며, 주의 도우심으로 만족할 만큼 어김없이 지켜지도록 하였습니다. 이 친서의 효력은… 제한을 받지 않으며….
로마 마리아 대 성전에서 어부의 지환을 찍어
1831년 본 교황 재위 제 1년 9월 9일 베르넷디 추기경
성가 419. 밀알 하나가
서소문 성지
성지 설명
☏ 02-392-5018
소재지 : 서울 중구 의주로 서소문 공원
서소문 밖 성지는 조선시대 아현 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 시장으로 통하던, 소의문(昭義門) 밖에서 사형을 집행하던 지정된 사형장이었다.
당시 풍습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고갯마루나 장터에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경각심을 주어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새벽부터 사람들로 붐비던 시장 골목이었기에 일찍부터 광희문과 서소문은 서울 지역의 중요한 사형장으로서 이용되고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 곳이 우리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기해박해를 거쳐 마지막 병인박해까지 70여 년 동안 수많은 교우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하였다.
현재 이곳에서 치명한 것으로 밝혀진 순교자는 모두 98명으로, 그 가운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를 비롯한 41분과 병인박해 때 순교한 3분 등 모두 44분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 되었다. 그러나 초기 우리나라 천주교를 기초하고 이끌었던 정약종(丁若鍾), 이승훈(李承薫), 강완숙과 황사영(黄嗣永) 등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은 아직 시복도 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신유박해는 1801년 2월 2일(음력1월10일) 대왕대비 김씨가 사학(邪学) 금지령을 내렸고, 1802년 2월 4일(음력12월22일) 토사교문(討邪教文)을 반포함으로 박해는 마무리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들 순교자들에 대해서 그 행적과 증언들을 정리하는 등 시복, 시성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어, 앞으로는 더 많은 성인들이 시성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무튼 이 곳은 새남터와 더불어 한국의 최대 순교 성지임에 틀림없다.
현재 서소문 성지는 중림동 성당에서 관리하고 있다. 옛날 성당 주변에 약초 밭이 많아 약현 성당이라 불리었던 중림동 성당은 1891년 5월 8일 본당이 설립되었다. 조선교구 최초의 본당인 명동성당이 그 규모와 수많은 난관으로 인해 건립이 지연되는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완성된 건물이다. 이 성당은 명동성당과 마찬가지로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하였다. 이 성당의 벽돌은 와고개 연와소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자들의 선혈로 물들인 흙으로 벽돌을 구워 건축하였고,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으나, 1998년 화재로 소실되어 2000년 9월 17일에 다시 복원하여 축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물이었던 이 성당에는 당시 선교사들이 몸에 지니고 다녔던,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 등 초기 사도들의 성해(聖骸)가 모셔져 있다.
서소문 공원에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으나 서울시의 공원 공사로 인해 헐리고, 지금의 현양탑은 1999년 성령강림 대 축일에 새로 축성하였다.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형틀인 칼 모양을 형상화한 화강석 3개의 탑은 죽음과 박해를 상징하며, 주 탑과 좌우 탑의 원형 형틀에서는 7성사(七聖事)를 뜻하는 7개의 선이 흘러내리고 있다. 따라서 현양 탑은 주님의 진복팔단 중 마태오 복음 5장 6절의 “복되어라 의로움에 목마르고 굶주린 이들!” 하는 이 말씀을 전체 주제로 하였다.
중앙 탑의 청동 조각은 참혹한 순교의 현장을 형상화하였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순교자의 모습은 예수님을 품에 안은 성모님과 같이, 오늘날 순교자를 우리 품에 받아 드려야 함을 의미한다. 주 탑을 중심으로 우측은 44분의 성인 성녀들의 명패이고, 또 좌측은 54분의 순교자의 이름을 새겨 이곳의 순교 역사를 현장화 하였다.
칼의 형상이 죽음을 상징한다면 물은 생명을 나타내며, 물 속에 비친 탑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는 생명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였다. 분수대를 통하여 솟아오른 물이 투명한 판유리를 타고 부서져 내리고, 또 여기에 물소리 효과를 주어 생명의 환희와 신비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또 물 속에 잠긴 조약돌은, 이 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야간에는 수면 아래의 조명기구에서 탑과 유리벽을 환하게 비춤으로써 현양탑의 상징을 더 효과적으로 나타내도록 하고 있다.
탑의 뒷면에는 나자로의 회생(回生)과 죽은 사람을 살려내시는 예수님을 부조로 설치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부활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 서소문 성지에서는 정약종의 다섯 가족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정약종은 그의 형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은 1791년 신해박해 때 마음이 흔들렸지만 정약종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열성적이었다.
정약종은 명도회 초대 회장으로써 배를 타고 가거나, 심지어 말을 타고 가면서도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면 힘을 다해 깨우쳐 주었고, 아무리 답답한 사람이라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교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자기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척척 풀어 주었고, 자기가 모르는 교리를 발견하면 모든 일을 전폐하고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았다.
정약종은 무식한 사람들을 위하여 한글로「주교요지」를 저술하였다. 주교요지는 여러 가지 책을 인용하고, 자기 의견을 덧붙여 아주 쉽고 명백하게 썼으므로,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주교 요지를 읽기만 하면 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사람은 스스로 하느님이 계신 줄을 아느니라’ 라는 첫 대목에서 주교요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병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누구나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하느님 이 괴로움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주소서” 하고 빌며, 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요란하면, 자기가 지은 죄를 생각하고 무서워서 숨으려고 한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지 안는다면 사람이 어찌 그런 마음을 가지겠는가. 라고 설명한다.
그는 사형장에서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죽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벌벌 떨던 휘광이의 칼에 맞아 목이 반쯤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 힘없이 쓸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마흔 두 살(2월26일) 이었다. 정약종의 큰아들 정철상 가롤로는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연좌 죄로 붙잡혀 아버지가 순교 한지 35일 후인 음력 4월 2일 같은 자리에서 순교하였다.
정하상 바오로는 아버지 정약종 아오스딩과 형 정철상 가롤로가 1801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할 때 일곱 살이었고, 여동생 정정혜 엘리사벳은 다섯 살이었다.
그 당시 모친 유소사 세실리아와 여동생과 함께 풀려났으나, 가산은 몰수되어 호구지책도 마련할 길이 없어서 고향 마재로 내려갔다. 그러나 천주교를 믿지 않는 가족으로부터 천주교를 믿어서 가문이 풍비박산되었다고 천주교를 믿는 정하상 가족을 학대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정하상은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정하상은 20살이 되었을 때 모친과 누이를 마재에 남겨 두고, 서울에 올라와서 조증이 발바라 집에 머물면서 박해로 흩어진 교우들을 모으고, 성직자 영입 운동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신유박해 때에 함경도 무산으로 귀양간 한학자이며, 아버지 친구인 조동섬 유스티노를 찾아가서 자문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정하상은 교회 활동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816년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역관의 하인 행색으로 북경을 찾아갔으나, 북경교회로부터 성직자 파견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지 않고 매년 북경을 방문하여 성직자를 간청하는 한편 서울에 성직자를 모실 집을 마련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올라오게 하였다. 1823년에는 사절단의 역관인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마부인 조신철 가롤로와 함께 북경 5000리 길을 무려 9차례나 왕래하면서 로마교황청에 조선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성직자를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때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선교사의 전교 없이 기묘하게 복음이 전파되어, 200여명의 순교자까지 낸 조선교회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교황강복을 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마침내 1831년 9월 9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된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 그리고 앵베르 주교님이 조선에 입국하였다. 정하상은 성직자를 자기 집에 모시고 사목 활동을 도왔다. 앵베르 범세형(范世亨) 라우렌시오 주교는 모방 나 신부가 보낸 신학생 외에 또 다른 3명의 소년을 유학시키고자 적당한 인물을 고르는 한편, 정하상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고, 하루 빨리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라틴어와 신학을 주교 자신이 직접 강의하고 가르쳤다.
그는 42세이며 신부 되기를 자원하여 독신을 지켜 온 정하상 바오로와 32세인 이문우(李文祐) 요한과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李在誼) 토마스와 마카오 신학교에 간 최방제(崔方済)의 형 최형(崔炯) 베드로를 발탁하여 그들에게 라틴어 읽는 법을 가르치고 사천성의 아멜 신부가 만든 한문책으로 신학을 가르쳐 이들 중 정하상과 이문우는 2․3년 안에 신품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유홍열한국교회사307)하였다
바로 그 무렵에 기해박해가 일어나 정하상은 주교님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켜 드리고 자신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정하상은 천주교를 변호하여 당시 재상이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올리는 상 재상서(上宰上書)를 작성하여 올렸다. 이는 천주교를 유교 사상에 비추어 설명한 한국 최초의 호교론(護教論)으로서, 당시 사람들이 오해하였던 “무군무부(無君無父)” 즉 ‘천주교인들은 임금도, 부모도 몰라보는 금수같아서 조상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해명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호교론을 써 올렸다. 이 상 재상서는 그 내용이 훌륭하여 후에 중국에서 ‘포교서’로 사용되기까지 하였다.
그의 죄목은 양인을 데려온 역적이었다. 또한 열성적인 교회 활동의 주역이었기에 그에 대한 고문과 형벌은 너무나 처참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땅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로 처형된 이튿날 9월 22일 독신인 정하상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 45세에 참수 치명 하였다.
정하상 바오로는, 11월 23일 79세에 늙은 나이에 포청옥에서 옥사한 어머니 유소사 세시리아와 12월 29일 서소문에서 순교한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1984년 성인 품에 올랐다.
정하상 가족은 오직 하느님을 위하여 살았고, 다섯 식구 모두가 목숨 바쳐 순교한 성가정이었다.(현재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묘는 경기도 광주 천진암에 모셔져 있다.)
정약종의 가족 모두는 로마서 8장 18절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는 말씀에 힘입어 오로지 주님을 증거하는데만 모든 것을 바친 고귀한 분들이다.
성가 490. 십자가에 가까이
성화와 성상이 상징하는 의미
說明
성상이란 예수그리스도, 복되신 동정녀, 성인, 또는 천사의 모습을 조각하거나 주조한 물건 등을 말한다. 천주교에서는 성상을 모시는 관습이 있다. 이는 성상을 대할 때마다 보이지 않게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나 천상에 있는 성모와 성인 성녀들을 쉽게 연상하고 흠숭이나 공경을 효과적으로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성당에 성상을 모시는 관습을 유지하는 한편 건전치 못한 신심을 조장하지 않도록 수효의 조정과 모시는 위치까지 올바른 순서를 지키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100여 년의 박해 시대를 겪으면서 순교자들의 얼이 담긴 성지(聖址)와 유적지가 많이 있다. 아직 부족하지만 성지에는 성상과 유물과 구조물을 잘 보존하고 조성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후손들에게 넘겨줄 시청각의 유산인 것이다.
성상 제작 풍습이 고대 유다 민족은 오늘날처럼 성행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당시 지리적으로 우상 숭배 경향이 짙은 이교 민족에게 둘러싸여 있던 유다 민족에게는 성상 공경의 본뜻에 대한 오해가 일어날 우려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 신자들도 성상을 제조하였지만 이방인들에게 공개하기를 매우 조심했었다. 이것은 천주교회의 성상이 이교도의 우상과 혼동할까 우려하였던 까닭이다. 그래도 천주교 내부에서는 신앙에 관한 상징적인 것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3세기 초까지 천주교 신자들의 밀실인 로마 카타콤바의 유적을 보면 성령의 상징인 흰 비둘기를 그린 벽면과 유리병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거기에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을 어깨에 메신 형상을 새기기도 하였으며, 어린양과 믿음의 표시인 닻 모양과 교회를 의미하는 큰배를 그리기도 하였다.
성상과 성화의 최초 반대자요 폭행자는 8세기의 콘스탄티노블 황제 네로 이사우리안이다. 네로는 예수 성화와 성인들의 성화를 성당 벽면에서 철거하여 불사르게 하고, 성당에서든 가정에서든 성화와 성물을 강탈하고, 금, 은, 동, 철제 성상을 모아서 자기 초상을 새긴 화폐를 만들게 하였다. 헨리 8세는 겉으로는 신앙의 순결을 외치면서 이면의 동기는 탐욕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네로 황제는 황궁 도서관 학자들에게 그 성상 파괴 칙령에 대한 찬사를 쓰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정의로운 양심을 지닌 학자들은 거절하였다. 그래서 네로는 삼만 권의 책과 귀중한 그림이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 안에 그들을 감금하고 모두 불에 태워 버렸다. 당시 용감한 수도자 스테파노는, 황제의 초상을 새긴 동전 한 닢을 내밀며 폐하, “이것은 누구의 초상입니까?라고 물었다. “짐의 초상이다.라는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것을 내던지고 짓밟았다. 수사는 즉각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형장에서 그는 황제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아, 내가 한 국왕의 모습을 보고 모욕하였다고 사형을 당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불태워 없앤 악당들은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냐!라고 외쳤다.
성상 파괴의 독성 행위는 16세기 때 소위 종교 개혁자들도 저질렀다. 특히 영국, 독일, 네덜란드에서 성화와 성상을 난폭하게 파멸하는 독성 행위를 감행하였다. 그들은 우상 숭배 방지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16세기의 성상 파괴자들도 성상과 성화를 없애고 성전을 온통 점유해 버렸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수많은 개신교 예배당 중에는 이들이 점거한 성당이 많았다. 유명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그 좋은 예이다. 오늘날까지도 이런 교회의 벽면에는 파손된 성상들이 남아 있다. 이런 만행은 다만 극도의 독성죄가 될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만일 이러한 만행이 남부 유럽에까지 침범하였더라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대작들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성상에 대한 천주교의 가르침은 트리덴티노 대 공의회에서 명백히 선언되었다. 그리스도의 성상과 동정 성모와 성인들의 성상을 성당 내에 모시고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교회에서는 성상 자체에 무슨 신성이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며. 또 성물 자체에 무슨 기도를 드려야 되기 때문도 아니다. 천주교에서는 이교도들처럼 우상에게 무슨 희망을 두는 듯 성상에게 미신적 신뢰를 두어서가 아니고, 성상이 상징하는 그 대상에게 존경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성상에 입맞추거나 그 앞에서 모자를 벗거나 무릎을 꿇는 것은 그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고, 성모와 여러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상을 통하여 주 예수의 존재를 감각하고 더욱 깊이 명상하게 되는 것이다.
‘주의 이름은 복되시도다. 주의 이름에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는 거룩한 이름에 대한 경의 표시와 같은 취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형의 성상에 대한 경의 표시는 내적 형상에 대한 경의 표시와 다를 바 없다.
얼마 전 이탈리아 군인이 프랑스 국기를 모욕하였을 때, 프랑스 정부는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군인에게 모욕당한 것은 하찮은 헝겊 조각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이 작은 헝겊 조각 때문에 그처럼 분개하여 전쟁까지 일으키려 하였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 국민이든 자기 나라 국기 앞에 경례를 한다. 국기로 표시하는 조국에 대한 경례가 아니고 그 국기를 만든 자료인 헝겊이나 색깔 자체에 대한 경례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표시 행위를 말로도 할 수 있고, 글자나 그림이나 형상으로도 할 수 있다. 이순신의 표시는 이순신이라는 말이나 글자로도 할 수 있고, 그의 초상화나 이름으로도 나타낸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 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출애굽 20,3-4) 하는 이 계명은 결코 조각상의 제작을 무조건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여러 곳에 이를 금지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제작을 명하였으니 절대 금지란 안될 말이다. 하느님께서 모순을 행하실 리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순금으로 거룹상을 만들라고 하셨고(출애굽 25,18 참조), 또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매달아 두고, 뱀에 물린 자가 그것을 보면 죽지 아니 할 것이라고 하셨다. 거룹은 하늘의 천사이며 뱀은 땅과 물 속에 사는 동물이니까, 이 거룹의 금상과 뱀의 동상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형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무조건 절대 금지라는 개신교 신자들의 해석이 옳다면, 우리는 모두 첫째 계명을 어긴 죄인이 될 것이다. 어느 가정에서든지 산 자나 죽은 이의 초상을 걸어 두지 않은 집은 없다. 산 이의 초상은 땅 위의 것이고 죽은 이의 초상은 하늘의 것이다.
그런데도 천주교 신자를 우상 숭배자라는 선입견을 품은 이가 많다. 성당 안에서, 길에서, 성상 앞에서 천주교 신자의 기도 행위를 보고 “천주교회는 우상을 숭배한다고 선전한다.
어느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동상이 제막되자 그의 웅장함이 나타났다. 그 순간 모두 모자를 벗었다. 한 신사가 옆에 있던 개신교 신자에게 농담으로 “여보게 모자는 왜 벗나” 하였다. “저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벗었네.“그러나 그는 여기 있지 않고 저것은 그의 동상이 아닌가.” “물론 그렇지만 나의 행위는 본인에 대한 경의 표시일세.이처럼 동상 앞에서 모자를 벗는 행위는 나무라지 않으면서 성모 마리아나 성 베드로 상 앞에서 모자를 벗는 것을 보면 그것을 우상 숭배 행위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787년에 개최된 두 번째 니체아 공의회에서도, 트리덴티노 공의회와 같이 성상 성화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하였다.
‘하느님의 감도를 받은 우리 교부들과 천주교회는 성령이 이 안에 기묘히 계심을 알고 있으니, 성전(聖伝)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과 홈 없으신 하느님의 모친과 공경하올 천사들과 성인 성녀들의 상본을, 성당이나 가정에 적당하게 모심은 확실히 거룩하고 좋은 일 임을 선언하는 바이다. 성화나 성상의 공경은 성상이 표상 하는 원 존재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 성상으로 표상하는 이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열교인들을 따라 달리 생각하거나, 달리 가르쳐 교회의 성상을 가볍게 여기거나, 새 교리를 주창하여 천주교회에서 존중히 여기는 복음 성서, 십자가, 상본, 순교자의 유해 등을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성직자인 경우에는 과문 당할 것이요, 수도자나 평신도인 경우에는 통공(通功)에서 제외되리라.’ 라고 하였다.
성가 34.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당고개 성지
성지 설명 ☏ 02-795-2821
소재지 : 용산구 신계동 1번지
용산구 신계동 문배산 마루 당고개가 성지로 지정된 것은, 1839년 음력 12월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10명의 남녀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기 때문이다. 서소문, 새남터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증거한 곳이다. 이곳 순교자들의 사형장은 서소문이었는데, 별안간 당고개로 바꾸어 처형하게 된 이유는 1839년 말 음력 설 명절 대목장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서소문 상인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음력설이 가까운 12월 27~28일 한참 추운 날씨에 순교자들은 얼어붙은 몸으로 이곳까지 끌려와서 순교하였다. 그들 중에는 모녀나 형제가 있어서 같은 날 처형하지 못하고, 이틀에 걸쳐서 처형하였다. 이성례(李聖礼) 마리아도 이날 여기에서 그들과 함께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성지에 설치된 청동 부조에 나타난 순교자들을 보면 왼쪽부터 첫 번째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서울의 전교 회장이었으며,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성녀와는 부부 사이이다. 두 번째 최영이(崔栄伊) 바르나바 성녀는 세 번째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 성녀와 모녀 사이이다. 최영이 바르바라 성녀의 남편은, 조신철(趙信哲) 가롤로 성인이고, 손소벽 성녀의 남편은 최창흡(崔昌洽) 베드로 성인이며, 장인․장모․사위․딸이 모두 순교 성인 성녀가 되셨다. 네 번째가 이문우(李文祐) 요한 성인은 모방 나 신부님의 복사였으며,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앵베르 주교․모방․샤스탕 신부의 유해를 신자들과 같이 남몰래 노고산에 매장한 분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한복을 입으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여섯 번째가 동정녀 이경이(李憬伊) 아가다 성녀, 일곱 번째 아기를 안고 있는 분이 최양업 신부의 모친인 이성례(李聖礼) 마리아 순교자, 여덟 번째 권진이(権珍伊) 아가다 성녀인데, 한영이 막달레나 성녀의 따님이고, 선비 차림의 아홉, 열 번째는, 충청도 여사울의 전교 회장인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홍영주(洪永周) 바오로는 형제 성인이고,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낙민(洪樂敏)의 손자이다. 마지막으로 열한 번째 이인덕(李仁徳) 마리아 성녀는 이영덕(李栄徳) 막달레나 성녀과 자매 사이다.
그중 아홉 분은 1984년 성인품에 올랐지만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는 아직 성녀품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 성지에 올라서면 새남터, 서소문, 와고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앞이 확 트인 높은 이곳 성지에는 한가운데 당고개 순교 현양탑이 있고, 한쪽으로는 기념 제대가 있다. 이 제대는 여성 순교자가 많이 시성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카톨릭 여성회에서 봉헌하였다. 제대 뒤로 당고개 순교자 상의 청동 부조에는 10분의 순교자와 한복 차림의 예수님이 돋보이고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현양탑 오른쪽 뒤에는 1917년 파티마에서 여섯 번 발현하신 성모상이 있고 성지 주위에 14처가 있다. 여기에서는 가정을 위한 기도를 많이 바치게 되는 곳이며, 매주 목요일 정오에 삼각지 성당에서 미사를 주관한다. 앞으로 여기에 경당도 지어야 하고 성지 확장도 필요하다.
우리는 당고개 성지에서 이성례 마리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성례 마리아는 교회 창립 초기에 내포지방의 사도였던 이존창(李存昌)의 손녀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하였다. 18세에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여 여섯 아들을 두었다. 박해를 피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서울과 춘천, 그리고 부평으로 피해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안양 수리산 교우촌에서 살다 남편과 40여명의 교우들이 함께 포졸에게 끌려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본래 부모와 어린이를 함께 투옥시키는 예는 국법에도 없었으나, 이 집은 열다섯 살에서 세 살 된 막내 스더왕까지 함께 갇혔다. 또한 국법에 없다 하여 아이들의 밥은 나오지 않았으므로, 어쩌다 밥 한 덩어리가 생기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머니는 굶었다. 더러운 감방에서 아이들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는 어머니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때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모진 형벌 끝에 옥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례는 어떻게 해서든지 목숨을 부지하여 나머지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배교하고 감옥에서 나왔다(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그러나 그의 아들 최양업 도마가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보내진 것이 탄로 나서 다시 형조로 이송되었다. 옥에서 정 하상의 동생 엘리사벳과 현 석문의 누님 분다 등 여교우들이 간곡하게 죄를 기워 갚으라고 권고하였다(최바리시오이력서220). 마리아는 다시 열렬한 구변으로 관장 앞에 자복하고 치명 예비로 지내고 있었다. 이때 세 살짜리 막내 스더왕은 유두가 끊겨 굶어 죽고 말았다.
밖에서 문전걸식을 하던 둘째 아들 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다니다가 어머니가 갇혀 있는 옥에 찾아와 창살을 붙들고 목메어 불렀다. 그러나 이성례 마리아는 다시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돌아앉았다. 일찍 철이 난 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 거지로 떠돌아다니던 4형제는 어느 날 부잣집에서 얻은 인절미를 식지 않게 가슴에 품고 옥에 찾아와 어머니에게 넣어 주었다. 어린 아들의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는 그 떡을 목이 메어 어떻게 넘겼겠는가? 하루는 야고보가 찾아오자 이성례 마리아는 아들의 머리를 빗겨 주면서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사랑으로 보호하고 어려우면 친척집에 데려다 두고 지내다 마카오에 간 네 형이 신부가 되어 돌아오면, 너희들이 고생을 면할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고 지내거라. 그리고 며칠 있으면 엄마가 치명 당할 날이 닥칠 것이니 그 날은 여기에 오지 말아라.” 하고 당부하며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어린 야고보는 가슴이 막히고 슬프기 그지없었지만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희광이를 찾아갔다. 한 푼, 두 푼 동냥한 돈과 쌀자루를 희광이에게 주면서, 고생을 많이 한 우리 엄마가 순교할 때라도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에 보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희광이도 감동하여 밤새 칼을 갈아 이튿날 이곳 당고개에서 약속을 지켜 주었다. 먼발치에서 장렬하게 순교하는 어머니를 바라본 네 형제는,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 장면을 보고, 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면서 “우리 엄마 천당 갔네, 우리 엄마 천당 갔네” 하며 울었다.
이성례 마리아는 39세로 순교하였지만 인간적인 모성애로 한번 배교한 것 때문에 성인품에 오르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성례 마리아와 그 아들 최양업 도마 신부님이 하루 빨리 성인 반열에 오르도록 많은 기도를 드리자.
성가 236. 사랑하올 어머니
당고개에서 순교한 성인 성녀
○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성인님.( - . 당고개. 1840. 1.31. 48세. 회장)
○ 최영이 바르바라 성녀님. (서울. 당고개. 1840. 2. 1. 22세. )
○ 손소벽 막달레나 성녀님. (서울. 당고개. 1840. 1.31. 39세. )
○ 이문우 요한 성인님. (이천. 당고개. 1840. 2. 1. 31세. 회장)
○ 이경이 아가타 성녀님. (서울. 당고개. 1840. 1.31. 27세. 동정녀)
○ 권진이 아가타 성녀님. (서울. 당고개. 1840. 1.31. 21세. )
○ 홍병주 베드로 성인님. (서울. 당고개. 1840. 1.31. 42세. 회장)
○ 홍영주 바오로 성인님. (서울. 당고개. 1840. 2. 1. 39세. 회장)
○ 이인덕 마리아 성녀님. (서울. 당고개. 1840. 1.31. 22세. 동정녀)
○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님. (홍주. 당고개. 1840. 1.31. --세. )
베르뇌 장 주교 입국
說明
조선 제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음력 1855년 12월 10일 상해를 떠났다. 주교를 모셔 오기 위해 그간 상해에 가서 대기 중이던 홍봉주(洪鳳周)는 베르뇌 주교와 같이 상해 사람인 심덕성(沈德成)의 배에 올라 조선에 입국했다. 푸르티에 신부가 서울 거리에서 어떻게 신경을 썼던지 군중 속에서 일행을 놓치고, 외교인을 자기 안내자로 착각하고 그의 뒤를 따라 갔다. 그러나 다행히 안내인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안내인을 다시 찾는데 성공하였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235-250)
벌써 우리는 내 동료 두 신부가 아마 포교지의 재산을 가지고 상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교우촌에 가기까지 아직 남아 있는 5백 리 길을 육로로 갈 결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방법이었지만, 우리 안내자들이 그 방침에 따른 위험 앞에서 좌절하지 않으므로 나는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길 생각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길 방법들을 의논하고 있을 때인데 예수 수난 축일 아침 9시쯤 작은 배 한 척이 우리에게로 향하여 오며 선원들이 손을 하늘로 올리고 십자성호를 많이 그으며 우리 신호에 응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은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찰을 하고 나서 아무 의심도 받지 않기 위하여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닻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주께 감사를 드린 후 마지막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활주일 새벽 한 시에야 중국 배를 떠나 조선 배에 옮겨 탔습니다.
4일간 섬들과 어선들 사이를 항해한 후에도 우리는 아직 서울에서 150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바람이 자고 그와 동시에 물도 부족하였으므로 안내인 중의 한 사람과 노 젓는 사공 세 사람과 함께 아주 조그만 종선에 탔습니다. 조선 신자들은 우리에게 상복을 입혀 주었는데, 어깨에까지 내려오는 짚으로 만든 모자와 포장을 만드는데 쓰는 투박한 천과 비슷한 베로 만든 옷과 짚신 따위였습니다. 밤 11시에 조수가 역류하여 더 전진할 수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아직 남아 있는 4, 50리 길을 걸어서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의 신분을 속이고 시내로 들어가는데 우리 모자의 넓은 테보다는, 밤의 어둠이 더 미더워서 날이 밝기 전에 도착하기 위하여, 길도 나쁜 상태인데 처음으로 신어 보는 신발이 허락하는 한 빨리 걸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조선의 수도인 서울의 성곽까지 왔을 때에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임금님이 서울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성문들이 해뜰 무렵에나 열리게 되어 있었으므로 우리는 교우 집으로 가서 조금 쉬었습니다.
해가 뜨고 성문이 열리자, 우리는 조선 나라의 수도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신자 한 사람의 뒤를 따라 걷고 좀 떨어져서 프티니콜라 신부와 푸르티에 신부가 뒤를 따랐습니다. 그때에 손수레 같은 것을 타고 많은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나오는 고관을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볼까 무서워서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때에 내게 아주 필요한 모자를 바람이 채 가려고 하는 것을 막기에 급급하였습니다. 내 동료 중 한사람인 푸르티에 신부는 한층 더 조심성이 있어서, 어떻게나 살피는 것에 신경을 썼던지 거리를 메운 군중 속에서 우리 일행을 놓치고, 외교인들을 자기 안내자인 줄로 착각하고 그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방향이 다른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가 사라진 것을 이내 알아채었고, 우리를 다시 찾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조금 뒤 우리는 훌륭한 다블뤼 신부와 만나서 모두 함께, 우리에게 그렇게도 다행스러운 여행을 허락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선교사들과 모든 신자들의 기쁨과 행복이 어떠하였는지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주교가 계시다는 것은 몸에 머리가 결합한 격이었고, 새 선교사들이 도착한 것은 장래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여 주신 목자가 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분이 얼마나 요령과 열성과 사랑과 자기 희생으로, 그분들이 새 포교지에 헌신하는지를 인정할 수 있었을 때 그들의 만족은 더 한층 강렬하였습니다. 주교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지난해에 앓았던 병이 다시 재발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들은 한동안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더 오랜 활동을 시키기로 하셨던 섭리는 그분을 보존하셨고, 3개월 동안 고통을 겪은 후 주교는 서울의 신자들을 찾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르뇌 주교의 동료 중 한 사람이 거룩한 주교의 편지를 아래와 같이 보충하였습니다. 주교님의 편지가 아주 길기는 하지만 모두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주교님은 가령 견장결석으로 줄곧 고통을 당하시고 무 잎 몇 개와 약간의 쌀밥으로 살아가시면서 어떤 때는 하루에 22시간을 일하시고 가장 긴 밤에 4시간 동안 주무시는 것을 크나큰 안일(安逸)로 생각하신다는 말씀은 조금도 아니하셨습니다. 모든 동료들이 항의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주교님은 ‘당신들이 나라면 어떻게 하겠소’라는 단 한마디로 모두의 입을 막아 버리시니까요.
무엇보다도 베르뇌 주교의 이 초인적 노력을 고무하는 것은 특수한 개종이 자주 있는 것과 하느님의 은총이 신입 교우들에게 뚜렷이 작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르뇌 주교가 초기에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감격스러운 실례를 직접 이야기하여 줍니다.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시작하던 한 외교인 처녀가 부모의 명으로 외인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시집에서 이 여인은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날마다 기도문을 계속 외웠습니다. 그러나 들키지 않으려고 갖은 조심을 했지만 방 한구석에서, 곁에 모두가 자는 줄로 생각한 밤중에 무릎을 꿇는 것을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여러 번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여인이 그지없이 온순하고 참을성 있고, 그가 받는 아주 하찮은 지시에도 언제나 지극히 공손하게 복종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시누이가 그 여인에게 “언니는 저한테 숨기는 비밀이 있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제가 비밀이 있어요? 무슨 비밀이요.” “마음대로 웃으세요. 그렇지만 언니는 비밀을 가지고 있어요. 언니는 다른 여인들하고는 아주 딴판이거든요.” “농담을 하시는군요. 제가 도대체 뭐가 그리 이상하다는 거지요?” 마침내 처녀가 하도 물고늘어지는 통에 그에게 자기 속내 이야기를 해도 아무 위험이 없을 것을 알고는 “사실 그래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큰 비밀을 가지고 있으니 들어보세요. 전 다행히도 참 천주를 알고 그분을 공경합니다. 밤중에 제가 무릎을 꿇는 것을 아가씨가 보았을 때 저는 그분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감히 성을 내지 못하고 분부를 어기거나 험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천주께서 그것을 금하시기 때문이고, 또 제가 그분을 섬겨서 얻고자 하는 것은 천당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랍니다.”
처녀는 경건한 주의로 듣고 있다가 그 날부터 올케와 함께 천주교인들의 기도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올케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올케와 시누이가 이렇게 친밀한 것을 눈치채고, 특히 딸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전에는 경솔하고 화를 잘 내던 딸이 얌전해지고 무슨 일에나 올케와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도 이 비밀의 설명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설명이 어머니에게 주어졌고 그것은 또한 딸에게서와 같은 결과가 어머니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연세 높은 할머니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할머니도 같이 교회의 은총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네 여인은 자기들이 발견한 보물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신자의 본분 중에서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을 남편들과 아버지 모르게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세 받는데 방해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미신 행위입니다. 미신에서 해방되려면 가장에게 자기들이 천주교인이라는 것을 밝혀야 되겠는데, 그렇게 의사 표지를 하면 학대만 받게 될 것이고, 감시의 대상이 되어 이제는 아무런 신심의 실천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머니와 할머니는 성세를 받음으로 그들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미신의 색채가 있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기로 그들 사이에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시누이와 올케만이 우상들에게 바치게 될 고기를 준비하면서, 그들의 마음속을 보시고 천주께 죄가 되는 행위에 얼마나 마지못해 협력하는지를 아시는 천주께서, 그들이 면할 도리가 없는 가정의 미신에서 구출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행위의 예는 수천 가지라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부님은 천주께서 이 교회에 내려 주시는 은총을 보고 판단한다면, 그분이 교회에 대해 큰 자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심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참으로 사도 적인 열성에 불타고 있는 거룩한 주교의 마음이 가장 힘든 수고도 가볍게 극복하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성가 426.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새남터 성지
성지 설명 ☏ 02-716-1791
식당 02-713-3113
소재지 :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새남터의 이름은「노들」혹은「사남기」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여기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이 연무장과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사형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새남터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周文模) 신부를 처형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선혈을 뿌리기 시작했다.
주문모 신부는, 명도회(明道會) 회장인 정약종(丁若鐘)을 비롯한 선구자적인 지식인들이, 칼 앞에서도 주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고 죽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황해도 황주(黄州)까지 갔다가, 발길을 되돌려 자진해서 의금부에 나섰고 이곳 새남터에서 장렬하게 순교했다.
주 신부를 잃은지 38년만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세 명의 외국인 사제 앵베르 범 주교, 샤스탕 정 신부, 모방 나 신부도 주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의 군문 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1846년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님과, 기해 일기를 남긴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회장도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다시 1866년 전국적으로 8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병인박해 때 베르뇌 장 주교, 브르트니애르 백 신부, 볼리외 서 신부, 도리 김 신부, 푸르티에 신 신부, 쁘띠니 꼴라 박 신부 등 여섯 명의 프랑스 사제들이 순교하셨고,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 10여명이 순교하였다.
이렇게 새남터에서는 20여명의 순교자 중 11분은 1984년 5월에 시성 되면서 이곳은 천주교의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이 곳에 1981년에 새남터 본당이 설립되었고, 1987년 한국 복자수도회에서 현재의 성전을 봉헌하였다. 다음은 새남터 성당의 내부에 대해 알아보면, 새남터 성당은 한국의 전통 양식으로 건축한 것이며, 대성당 안에 대형 십자가 뒤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문양이 있다. 또 사방 팔방으로 뻗쳐 있는 선은 세계 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상징한다. 십자가 아래 바치고 있는 백합꽃은 순결을 뜻한다. 돔 아래에 있는 비둘기는 성령을 의미하고, 어린양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지구 모양을 하고 있는 감실은 한 덩어리의 통 돌에 무궁화 꽃을 조각했고, 감실 문은 인간의 심장을 나타내는 하트(♡)모양을 하고 있다. 제대는 경전을 읽을 때 쓰는 경상 모양이며 역시 통 돌에다 조각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 성수 대는 우리나라 고유의 도자기 모양이고, 왼쪽의 독서대는 장구 모양으로서 장구 소리처럼 복음이 널리 퍼져 나가라는 것을 상징한다.
정면에 있는 부조는 제대를 중심으로 103위성인 성녀 상인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왼쪽에는 임금 중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국의 임금님으로 표현했고 성인 성녀를 따로 조각한 것이다. 오른쪽의 아기 도령의 모습인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마리아 역시 우리나라 왕후의 옷을 입으셨다. 성모님을 중심으로 새남터와 갈매못에서 순교하시고 성인품에 오르신 주교․사제․평신도를 표현한 것이다. 아래쪽에 출렁이는 파도는 세상의 세파를, 배는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이다. 또 성전 양쪽 벽면 십 사처에 예수님과 로마 병사들도 우리나라 사람으로 표현했다.
종탑은 목조 3층 모양으로 지었으며 그 안의 종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순교 성인들의 후손들이 보내 준 헌금으로 주조한 것이다.
다음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김대건(金大建)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에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에서 김제준(金済俊) 이냐시오와 고 우르슬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때는,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비오 때부터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의 권유로 천주교를 받아 드렸다. 이존창의 조카딸이 김대건의 증조모이다.
김진후 비오는 위패를 모시지 않아 일어난 1791년 진산 사건 때 이미 신앙을 고백하였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해미에서 10여 년 간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은 증조부인 김진후 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선후와 그들의 손자를 포함해서 10명이 순교하신 순교자 가문이다.
김대건 신부님이 7살 되던 때에 박해를 피해, 용인 한덕골로 이사하셨다가 다시 골배마실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에서 15세 때에, 정하상 바오로 집에 계시던 모방 나 신부님이 김대건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천주님이 선택한 아이라 생각하여 최양업과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김대건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 두 차례나 필리핀 마닐라로 피난하는 고역을 치르고 있을 때에, 국내에서는 기해박해로 앵베르 범 주교, 모방 나 신부, 샤스탕 정 신부와 최양업의 부모님, 김대건 부친과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고, 그의 어머니는 걸식한다는 소식을 접하지만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여 1844년 당시 만주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고 주교에게 최양업과 같이 부제품을 받고 일단 조선에 입국하였다. 입국할 때 교회의 밀사와 만나기 위해 엄동설한에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맨발로 걷기까지 하였다.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 도착하여 중병에 걸려 힘든 중에도, 신학생 두 명을 지도하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면서도 보고 싶은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주교님과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해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길이 25자(8.1m) 넓이 9자 높이 7자 되는 작은 배를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가까운 섬에만 다니게 되어 있는 목선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구사일생으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 만 24세가 되어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고, 15일 후 조선에서 타고 갔던 목선을 수리하여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그 배로 상해를 출발하여 천신만고 끝에 제주도까지 표류했다가 50여일 만에 강경 나바위에 도착하였고, 서울과 용인 은이 공소에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걸식하던 어머니를 만난다. 그러던 중 조선의 입국을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맞아들이기 위해 뱃길을 알아보고, 지도와 편지를 백령도에 와 있던 중국 어선에 전하고 순위도에 들어왔다가 배를 빌리려는 일로, 관장과 문제가 생겨 신부님의 본색이 발각되어 체포된다. 그 후 100일 동안 40여 차례 문초를 받으며 그동안의 행적과 천주교회의 교리에 대해 묻자, 천지창조, 강생구속, 영혼 불멸, 상선 벌악 등을 합당하고 이치에 맞게 설명하였다. 이에 감탄한 관장이 국왕에게 그의 생명만은 보존해 달라고 상소까지 올렸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에게는 배교를 권유했지만 신부님은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은 인간에게 정해진 이치요. 천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면서 오늘 묻고 내일 묻고, 때리고 죽여도 똑 같다고 대답했다.
그 당시 영의정인 권돈인(権敦仁)은 저 지독한 자를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 큰 일이 일어날 것이니 죽여야 된다고 주장해서 사형 선고를 받게된다.
새남터에서 형리가 사형 선고문을 낭독하자, 김대건 신부님은 일어나 힘차게 말하였다. ‘여러분도 죽은 후 영복을 얻으려면 천주님을 믿으시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형리들이 달려들어 양 귀에 화살을 꽂고 얼굴과 온몸에는 물을 뿌리고 회칠을 하는 등, 잔인하게 형벌을 가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시퍼런 칼을 들고 춤을 추던 희광이의 칼에 여덟 번만에 목이 떨어졌다.
그 당시 국사범이나 중죄인은 처형 한지 3일 후에 가족들이 장사를 지낼 수 있었는데, 김대건 신부님의 몸은 모래사장에 묻고, 목은 장대에 높이 올리는 군문 효수형을 당하여 40일쯤 지난 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와 교우들이 신부님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밤에만 옮겨 미리내에 안장하였다.
신앙을 위해 죽음을 맞이하신 김대건 신부님과, 나라의 충신이었던 유명한 성삼문(成三問)의 죽음을 비교해 볼까 한다.
비록 두 분의 이상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충절을 다한 신념의 의인들이었다. 마지막 죽음에 임했을 때 성삼문은 사세시에서
북소리는 목숨을 앗기 위해 재촉하는데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해는 저무누나
황천길에는 객사도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엔 뉘 집에서 머물까!!
피 비린내나는 곤장과 노린내나는 담근질에도 굴복치 않던 성삼문도 죽음 앞에서는 내세에 대한 불안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님은 ‘천주님을 위해 나는 죽는다. 바야흐로 나에게는 영원한 생이 시작된다.’ 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신앙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성가 62.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성인
○ 범세형 앵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43세. 주교)
○ 장경일 베르뇌 시뫼온 성인님.(프랑스. 새남터. 1866. 3. 7. 52세. 주교)
○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님. (솔뫼. 새남터. 1846. 9.16. 25세. 신부)
○ 모방 나 베드로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샤스탕 정 야고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백 브르트니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8세. 신부)
○ 서 볼리외 루도비코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8세. 신부)
○ 김 도리 헨리코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7세. 신부)
○ 현석문 가롤로 성인님. (서울. 새남터. 1846. 9.19. 49세. 회장)
○ 정의배 마르코 성인님. (서울. 새남터. 1866. 3.11. 71세. 회장)
○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님. (서흥. 새남터. 1866. 3.11. 21세. )
○ 주문모 야고버 순교자님. (중국. 새남터. 1801. 5.31. 49세. )
○ 신 푸르티에 안토니오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 박 프티니콜라 미카엘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 김면호 토마스 (안동. 새남터. 1866. 9.10. -- 세. )
○ 김문원 바오로 ( 새남터. 1866. 9.10 .--세. )
○ 이연식 이서방 (대원군하인.새남터.1866. 3.11. -- 세. )
○ 이유일 안토니오 (연풍. 새남터. 1866. 7.20. -- 세. )
성가 489.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서울대교구 및 통합추진회의 선정 제출자 (43명)
강경복(수산나), 권(데레사), 권상문(세바스티아노). 김계완(시몬), 김광옥(안드레아), 김대권(베드로), 김연이(율리아나), 김이우(마태오), 김정둑(베드로), 김종교(프란치스코), 김진후(비오), 김현우(마태오), 문영인(비비안나), 박취득(라우렌시오), 방(프란치스코), 손경윤(제르바시오), 신태보(베드로), 원시장(베드로), 이경도(가롤로), 이경언(바오로), 이도기(바오로), 이보현(프란치스코),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이 현(안토니오), 인언민(마르티노), 정태봉(바오로), 정복혜(칸디다), 정산필(베드로), 정인혁(타데오), 정철상(가롤로), 조숙(베드로), 최인철(이냐시오), 최창현(요한), 최뀔공(토마스), 최필제(베드로), 한신애(아가타), 현계홈(바오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흥낙민(루가), 홍익만(안토니오), 홍인(레오), 황일광(시몬)
여섯 분의 선교사 순교
說明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선교사 여섯 분이 새남터에서 순교 하셨다. 이때 서소문에서도 같은 시간에 남종삼과 홍봉주도 순교하였다. 이분들의 순교 장면을 생각하면서 나의 신앙생활은 어떠한지 묵상해 보자. 신자가 순교할 수 있는 힘은 우주 만물의 주재자인 하느님을 믿고 평상시 작은 일에 충실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을 때 그 능력이 길러지는 것이다. 내가 지금 땀의 순교를 하려면 항상 순교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갖고 살아야 세상 유혹을 이겨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바로 순교이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400-404)
네 분의 선교사는 천국의 현관인 그 고약한 감옥 속에서 서로 만났을 때 그들의 기쁨이 어떠했는지를 누가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영광스러운 상처가 뒤덮인 몸을 서로 바라보면서, 그들이 서로 축하하는 말을 주고받으며 스스로의 마지막 제헌을 준비할 때, 드린 그들의 기도와 환희의 노래와 사랑의 열정을 누가 우리에게 말하여 줄 것인가. 드디어 승리의 날이 밝았습니다. 1866년 3월 7일 그들을 사형장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옥에서 끌어냈습니다. 외국인 신부들을 구경하려는 군중이 구류간 문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과 태도를 신기한 듯이 바라다보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웃고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웃고 놀리지 마시오. 당신들은 오히려 울어야 할 것이요. 우리는 당신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마련해 주려고 왔는데, 이제 누가 천국의 길을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겠소. 참말로 당신들은 불쌍하오.”
증거자들은 각기 긴 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었고, 상투 머리를 뒤로 젖혀져 매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의자 뒤쪽 머리 뒷면에는 ‘여러 가지 형벌을 받은 후 사형 선고를 받는 반역자이고 불복종한 아무개라고 쓰여진 판자가 달려 있었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 운반인들은 여러 번 멈추어 쉬었습니다. 그럴 때 베르뇌 주교는 젊은 동료들과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그를 따라오는 군중에게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쉬며,
아아 참말로 저 사람들이 불쌍하구나!
하고 말하였습니다.
서울에는 형장으로 지정된 장소가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서둘러서 일을 끝낼 필요가 있거나, 처형될 자의 수효가 너무 많거나, 또는 처형을 비밀로 붙이고자 할 때에는 바로 궁궐 경내에서나 관청에서 몇 분 거리에 있는 두 개의 다리 위에서도 목을 벨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흔히는 1킬로미터 떨어진 서문 밖 네거리까지 사형 선고받은 자들이 끌려가고, 중죄인이거나 사형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대로 널리 알리고자 할 때에는 더 멀리 새남터라는 마을 근처 강변 모래사장으로 갑니다. 선교사들이 끌려간 곳은 바로 이 새남터입니다.
그들을 호송할 병정 4백 명과 매우 많은 호위병을 거느린 군관이 천막 앞에 반원형으로 늘어섰습니다. 이 원 한가운데 백기가 펄럭이고 있는 큰 장대 밑에 희생자들을 땅에 내려놓은 다음, 그들을 의자에서 풀고 팬츠 하나만 남기고 옷을 전부 벗깁니다. 베르뇌 주교가 제일 먼저 풀렸습니다. 그의 양팔은 등에 단단히 묶여 있었습니다. 망나니 하나가 위에서 아래로 양쪽 귀에 화살을 꿰뚫어 꽂아 놓았습니다. 다른 망나니는 얼굴과 머리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석회를 뿌렸습니다. 그런 다음 몽둥이 두 개를 겨드랑 밑으로 꿰어 그를 쳐들고 광장을 여덟 바퀴를 돌리면서 구경꾼들에게 보이는데, 그들이 걸어가며 만드는 동그라미를 매번 줄여 가며 여덟 번째를 돌았을 때는 사형 터 중앙에 와 있게 됩니다.
그때에 희생자는 무릎을 꿇고, 병정 하나가 붙잡고 있는 끈으로 머리칼을 묶어서 나무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6명의 망나니는 긴칼을 치켜들고. 야만적인 춤을 추고 무서운 고함을 지르며 빙빙 돌아갑니다. 그들은 각기 제멋대로 치고 싶은 때에 칼질을 합니다. 세 번째 칼질에 공경 하올 주교의 머리는 땅에 떨어지고 모든 병사와 망나니들이끌 났다!하고 일제히 외쳤습니다. 곧 머리를 거두어 관례에 따라 작은 소반에 젓가락 두 짝과 함께 올려놓아 군관에게 가져가서 사형수의 머리가 틀림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젓가락은 사형 집행을 주관하는 군관이 더 자세히 검사하고자 하는 경우에, 머리를 집어 뒤척이기 위하여 거기 놓는 것이지만 보통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머리는 몸뚱이 곁으로 다시 가져다가 높이 네다섯 자 되는 기둥에 선고문을 쓴 판자 밑에 머리칼로 매달아 놓습니다.
다른 선교사도 같은 순서로 반복하였습니다. 브르트니애르 신부가 베르뇌 주교 뒤를 따랐고, 그 다음이 불리외 신부였고, 끝으로 도리 신부가 뒤따랐습니다. 그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세 번이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난 뒤 자신도 영광스러운 순교를 완성하였습니다. 시체들은 3일간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새남터에서 외교인들이 순교자들을 모두 한 구덩이에 함께 묻었습니다. 사형 집행이 있을 때에는 사형수의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이 시체를 거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가 죽을 때에 바라다 본 쪽에 있는 마을 주민들이 시체를 매장해야 합니다. 서울의 신자들이 직접 그들의 목자들을 매장하고 싶었으나 그때에는 그것이 절대로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들은 6개월이 지난 뒤에야 이 경건한 의무를 이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베르뇌 주교의 연세는 52세이고, 조선에서 일 한지가 10년이 되었습니다. 이 10년 간의 포교지의 놀라운 진보의 역사는 그가 교구장으로써 어떠하였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사생활과 개인 성격에 대하여 몇 마디 언급하면 우리는 그분을 한층 더 잘 알고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베르뇌 주교의 순교 소식을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알리면서 페롱(Feron) 신부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천사적인 신심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에다가 베르뇌 주교님은 깊은 신학 지식과 드문 행정력을 아울러 겸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활동은 아무런 휴식도 그분에게 남겨 주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선교사 3, 4명이 할 수 있는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었으며, 어떻게 영육간의 모든 일을 아주 자세한 것까지 보살필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가장 넓은 활동 지역을 가지고 계셨고, 선교사들과 신자들과 더불어 편지 왕래가 매우 찾았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의논 상대가 되었고 포교지에 경리 책임자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은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선교사가 그분을 뵈러 가면 그 선교사의 말을 듣고 그를 보살펴 주고, 재치와 친절이 넘쳐흐르는 화술로 즐겁게 해주는 외에 다른 일이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분은 성인이 아니라면 그분의 농담은 풍자가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이 모든 것을 바로 잡았습니다. 무슨 일이나 그분에게 반대 의견을 내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줄 아셨고 그분이 보낸 편지에는 언제나 정이 넘쳐흐르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분의 겸손은 지나친 경향이 있어 우리가 어떤 때 웃는 일도 있었는데, 그분이 먼저 웃으시면서도 조금도 그 겸손을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분이 혼자 계실 때는 밥 조금과 약간의 야채가 전부였습니다. 만년에 와서는 약주를 드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들 중의 누구를 대접하는 때가 아니면 고기도 생선도 심지어 계란까지도 그분의 식탁에 오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손님을 접대하실 때에는 손님을 잘 대접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하셨고, 조선 사람들이 빵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혼자 계실 때에는 결코 빵을 드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뵈러 오는 동료에게 주거나 어떤 기회에 지방으로 보내기 위하여, 손수 빵을 반죽해서 굽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사실이 그분의 고신 극기의 정도를 말씀 해 드릴 것입니다. 늘 고생하고 계시던 결석(結石)으로 인한 심한 고통도, 그분은 거의 임종 지경에 이르러 땅에 누워 계시게 되는 때가 아니면 그분의 일을 중단시키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분이 24시간을 계속해서 고해소(告解所)에 계시는 것을 본적이 있었는데, 내가 감히 나무람을 하자 주교님은어떻게 해요. 이렇게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는걸하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르뇌 주교가 처형되던 날 배론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도 서울에 도착하자 곧 우포청 포장 앞에 끌려나갔습니다. 이 포장은 며칠 전에 다른 선교사들을 신문하였고 또 이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름은, 국적은, 누가 그대들을 데려왔는가, 무엇 하러 왔는가, 베르뇌 주교를 아는가 등등.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들도 비슷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대들을 죽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소하고 포장이 덧붙이니 프티니콜라 신부는우리가 죽은 뒤에 조선은 크나큰 재난을 당할 것이요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푸르티에 신부는 병으로 기진맥진하여 포장 앞에서 몇 마디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통 프티니콜라 신부가 대변하였습니다. 그가 더 자주 더 혹독하게 매를 맞고 뾰족한 몽둥이로 찔린 것이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새로 붙잡혀 온 선교사들에게 먼저 번 증거자들에게 적용된 법적 절차가 대부분 생략되었습니다. 이들은 금부에 이송되지 않고 구류간에 남아 있었으며, 거의 즉시 내려진 그들의 사형 선고는 그들이 도착 한지 사흘째 되는 날에 집행되었습니다. 1866년 3월 11일, 4일 전에 다른 선교사들에게 행한 것과 같은 의식으로 군대를 크게 전개시킨 가운데 그들을 새남터로 데려갔고, 모든 것이 같은 모양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푸르티에 신부의 머리는 첫번 칼질에 떨어졌고 프티니콜라 신부의 머리는 세 번 째 칼질에야 떨어졌습니다.
성가 61. 주 예수와 바꿀 수 없네
절두산 성지
성지 설명 02-3142-4434~5
소재지 :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성지는 한강변에 위치한 작은 산으로 세종 때 이곳을「가을두」또는「들머리」라 불렀고, 산 모양이 용머리 같다 하여「용두봉」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또한 성종 때는 누에 머리 같다 하여「잠두봉」이라고도 불렀다.
양화진 주변은 잠두봉이 어울려 이름난 명승지로,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빼놓지 않고 다녀갔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고, 조선시대에는 풍류객이 즐겨 찾던 곳인데, 이곳이「절두산(切頭山)」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1866년 9월 20일 프랑스 로즈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침입했다가, 별다른 충돌 없이 10월 1일 중국으로 물러갔고 다시 13일에 재차 군함 네 척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이르러 16일 강화 읍을 점령하였다.
이날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으고 1866년 10월 22일 흥선대원군이 「양인에게 화친을 허락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라는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다는 것은, 남부지방에서 물자를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게 뱃길을 막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물자 부족을 겪게 되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천주교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서양 오랑캐에게 더렵혀진 한강을, 서학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서소문과 새남터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했던, 양화진 근처 잠두봉을 택하여 처형함으로써, 서양 사람들의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첫 순교자는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1866년 10월에 부인 김엇분 마리아, 아들 이붕익(李鵬翼) 바오로와 함께 참수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일가족을 비롯해서 30여명만이 기록에 남아 있을 뿐, 이곳에서 수천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먼저 참수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先斬後啓) 명령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무조건 참수 당했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이 많은 사람의 목을 잘랐다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6년 3월에 시작하여 1967년 10월 21일 축성하고 28분의 성해와 2000여종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박물관과 종탑, 그리고 성당으로 구성되었는데,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전통인 선비들이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던 갓 모양이고, 종탑은 목 칼 형태이며 지붕 끝에 늘어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지하 경당은 우리나라에서 순교하신 28위 성인의 성해(聖骸)를 모셨으니, 순교자 기념관은 우리의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1972년 5월 우리나라의 애국선열 동상 건립위원회에서는 절두산 광장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세워 그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원인은, 1860년 중국에서 영국과 프랑스군이 천진과 북경을 점령한 사건이 전해졌고, 우리나라는 1865년 러시아의 남하 정책으로 통상을 요구하며 남침의 위협이 겹치자 흥선대원군은, 이 난국을 천주교의 협력을 얻어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이때 남종삼(南宗三) 승지와 베르뇌 주교님의 집주인 홍봉주(洪鳳柱) 등은 교회의 지도급 인물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한불 동맹의 체결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바로 이때 사신으로 가던 이홍교는 북경에서 선교사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는 거짓 편지를 보냈고, 러시아군의 남하 기세도 수그러들자 흥선대원군은 마음이 돌변했다.
천주교를 반대하던 대신들은, 신자들과 외국 선교사들을 체포하도록 요구해서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이 처형되었다. 이때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하여 박해 사실을 알리는 한편, 아직 조선에 남아있던 깔레 강 신부와 페롱 권 신부를 구출하고 조선교회를 도와줄 것을 로즈 제독에게 요청하여 프랑스군에 두 차례에 걸쳐 침입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를 승리로 이끌면서 혹독한 박해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한편 로즈 제독은 닥쳐올 추위와 패전으로 강화도에 소장되어 있던 고문서와 은괴만을 탈취하고 철수하였다. 또 1868년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한 독일인 오폐트르 사건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그래서 오가작통법으로 붙잡힌 신자들은 재판도 하지 않고 선참후계로 처형되었다. 또 1871년 신미양요로 참혹한 박해가 절정에 이르면서 187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무려 7년 동안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였다. 이때 병인박해로 순교하신 분들이 전국에서 8.000에서 20.000여명으로 추산되지만 확실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 양반 계급이 아닌 신분이 낮은 중인 이하는 거의 재판을 받지 않고 형장으로 직행하여 처형하였으니 대부분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순교자들이다.
그리고 절두산 광장에는 1972년 5월 14일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상을 세웠다.
성가 55. 착하신 목자
병인박해 진상
說明
참혹한 병인박해는 조선 천주교회의 크나큰 승리로 장식되었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애르, 볼리외, 도리 신부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갈매못에서 순교한 안 다블뤼 주교, 민 위앵 마르띠노 신부, 오 오매트르 신부에게 박해의 먹구름이 몰려온 것은 국제적인 문제와 흥선대원군의 정치 야욕의 희생물로 제단이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385-391)
수년 전부터 러시아인들은 만주(満洲)까지 와서 부동항을 개척하기 위해 조선 쪽으로 불안스러운 전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병합에 병합을 거듭하며 그들은 작은 강 하나만으로 경계를 이루는 함경도 북쪽 국경에까지 내려왔습니다. 1866년 1월에 러시아 선박 한척이 원산에 나타나, 거기서 통상의 자유와 러시아 상인들이 조선에 정박할 수 있는 권리를 아주 강압적으로 요청하는 서한을 조선 정부에 보냈습니다. 이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와 동시에 군부대가 함경도의 국경을 월경하였습니다. 아시아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이 사건은 적당히 얼버무려 넘겼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므로 조선 정부에서는 황제의 허가 없이는 어떤 다른 나라와도 교섭할 수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북경으로 즉시 특사를 파견한다는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매우 불안하였고, 대신들은 그들의 난처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꽤 냉담했던 신자로 박해 기간에 총애를 잃었던 서울의 몇몇 양반들은, 러시아인들의 이 교섭을 천주교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얻어 주고, 그와 동시에 자기들로서는 수완과 애국심이 많다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김면호(金勉浩) 도마와 교구장이 거처하는 집주인 홍봉주(洪鳳周) 도마와 이퇴일(李堆-) 안또니오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러시아인들에게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과 불란서와 동맹을 맺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편지를 쓰고, 조선에 와 있는 서양 주교들을 이용하면 그보다 더 쉬운 일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들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졸렬한 솜씨를 발휘해서 꾸민 이 편지가,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晋)이라는 사람의 손으로 대원군에게 제출되었습니다. 대원군은 그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하더니, 아무 말 없이 깔고 앉았습니다. 징조가 좋지 못한 이 침묵에 김면호 도마는 몹시 겁을 집어먹고 곧 지방으로 내려가 숨었습니다.
김면호 도마가 도망 간지 2일 후에 왕의 유모 박 마르타가, 대원군의 부인을 보러 가니 부대부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왜 이렇게 가만히들 있는거요. 러시아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나라를 빼앗는데, 아마도 이 불행을 막을 수 있을 주교가 여기 있는 것이 그렇게도 필요한데 지방 순회를 떠나는구려. 내 남편에게 편지를 한 번 더 올리라고 하시오. 내가 장담하겠소. 그 편지는 성공 할거요. 그리고 나서 즉시 주교를 돌아오시게 하시오.” 박 마르타가 홍봉주(洪鳳周) 도마에게 달려가 이 말을 전하니, 홍봉주 도마는 곧 승지 남종삼(南鐘三) 요한을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편지를 다시 쓰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남종삼 요한은 학식이 매우 높은 신자로 여러 선교사에게 조선말을 가르쳤는데 그 중에는 리델(Ridel)신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궁중에 머무르면서 조정 대신의 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남종삼 요한은 편지를 쓰기로 동의하였고, 그것을 직접 대원군에게 제출하러 갔는데 그때 대원군의 주위에는 5, 6명의 고관이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매우 주위 깊게 편지를 읽고좋소. 대신에게 가서 이 이야기를 하시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튿날 그는 남종삼 요한을 다시 불러 그와 더불어 오랫동안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교리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참됨을 인정하였습니다.다만 내가 비난하는 것이 한가지 있소. 당신들은 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소하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이렇게 물었습니다.주교가 러시아인들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해요?물론입니다하고 남종삼 요한이 대답하였습니다.주교가 지금 어디에 있소. 서울에 있소?”
아니올시다. 며칠 전에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렇지! 황해도에 천주교인들을 둘러보러 갔겠구먼.네 황해도에 계십니다.그러면 내가 좀 보았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알리시오.남종삼 요한은 나와서 여러 사람에게 방금 가졌던 대화를 이야기하였다. 종교 자유의 시간이 마침내 이르렀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습니다. 신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우리나라 수도에 어울리는 큰 성당을 지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김면호 도마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교를 만나 보기를 희망했는데도 아직 아무도 교구장과 그분의 보좌 주교를 모시러 가지 않은 것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두 분이 다 서울에서 엿새 길이 되는 곳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먼길을 가기에 필요한 돈이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북쪽에, 다블뤼 주교는 남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 딸의 시아버지 조기진이 이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는 여비로 70프랑과 그의 교군 중의 하나와 교군 두 사람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면호 도마는 베르뇌 주교에게 알리러 떠났고, 이퇴일 안토니오는 다블뤼 주교를 모시러 갔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1월 25일에 서울에 도착하였고, 베르뇌 주교는 4일 뒤에 도착하였습니다. 31일 남종삼 요한은 주교들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대원군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꽤 냉정하게 맞아들였고, 입을 열기도 전에 흥선대원군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니, 당신 아직 여기 있었소. 춘부장을 뵈러 시골에 간줄 알았었는데.”사실 시골에 가야 합니다. 하지만…중요한 일 때문에 서울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그렇고 말고요.” 하고 대원군은 그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급한 일이 하나도 없소. 나중에 봅시다. 그리고 춘부장을 뵈러 간다니 모든 일에 대해서 그이와 좀 상의하시오.”
남종삼 요한의 아버지 남상교(南尚教) 아우구스띠노는 84세의 노인으로 훌륭한 천주교 신자였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들의 입으로 듣고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너는 충성스러운 신민의 일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너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너에게 사형 선고에 서명하라고 하면 거기에서 천주교의 욕된 표현은 일체 지우도록 명심해라.”
남종삼 요한에 대한 대원군의 대접은 얼마간의 불안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설날이 가까웠다는 핑계로 회견을 늦추는 것을 보고. 그의 주교 순시를 공연히 중단한 것을 후회하였고, 주교는 이웃에 있는 부천과 인천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러 갔습니다. 거기서 3일을 지내고 2월 5일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다블뤼 주교는 내포로 돌아가 늘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치 아니하였고, 5일부터는 집에서 외출한 것이라고는 북쪽지방의 몇몇 신입 교우에게 견진과 그 밖의 성사들을 주기 위하여 5분 거리에 있는 정의배(鄭義培) 마르꼬 회장 집에 두세 차례 간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2월 10일 페롱(Feron)신부에게 보낸 다음 쪽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편지에 이 나라의 평화와 모든 사람의 머리를 번거롭게 하는 사정들이 다행스럽게 타결되기 위해, 미사 한대를 드리라고 신부에게 요청했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렇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임금의 모친이 각 선교사에게 이런 뜻으로 미사 한대씩 드리기를 원하는 것이오. 이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시오. 뭔가 좀 수상하지만, 그것이 이내 밝혀지지 않는구려 나더러 급히 돌아오라는 요청이 있었던 만큼 내가 돌아오는 즉시 대원군과의 면담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지금까지 아직 아무 일도 없어요. 면담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우리는 자유를 향해 커다란 전진을 했어요. 우리 주님과 착하신 성모님께 이 중대한 상황에서 나를 도와주시라고 기도합시다. 또 신자들에게도 아주 조심성 있게 행동하라고 부탁합시다.”
슬프다! 바로 그 시각에 그와 그의 모든 동료의 죽음과 조선의 천주교를 제거하기 위한 박해의 결정이 의결된 길이었습니다.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이 조정은 거의 복음에 대한 철저한 적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벌써 여러 차례 박해령을 다시 선포하기를 요구하였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들은 유리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는 러시아인들의 문제가 해소되었습니다. 그들의 배가 물러가고 그들의 군대가 국경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처음에 불러 일으켰던 공포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편 1865변 12월에 북경으로 떠나간 조선 사절단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중국인들이 나라 안에 흩어져 있는 서양인들을 사형에 처하고 있다는 말이 전해졌습니다. 이 편지가 1월 하순에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그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4명의 중요한 대신들은 주교들에 대한 대원군의 교섭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서양인들을 증오해야 합니다. 그들과 동맹을 맺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끝장입니다. 서양 오랑캐를 모두 죽입시다. 천주교도를 모두 죽입시다하고 외쳤다. 대원군은 영불 연합군의 중국 원정과, 조선이 침입 당할지도 모른다는 점 등등을 상기 시켰습니다. 그들은아니올시다.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우리는 벌써 서양인 여러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누가 일찍이 그들의 죽음을 보복하려고 했습니까. 우리가 그때문에 무슨 손해를 입었습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정 신부를 빗대고 말하는 것이었고, 또 어쩌면 여러 시기에 해안에서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난파자들도 암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혼자서 의견을 달리하던 흥선대원군은 그들이 내놓는 이유에 설복 당하고 그들의 광신에 질질 끌려갔던 것인가, 혹은 흥선대원군 자신의 권위를 위태롭게 하고, 자기의 지위를 위험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격류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나중에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들어와서 그 시기에 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더 완전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든 흥선대원군은 굴복하여 모든 서양인 주교와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 판결과 천주교인들에 대한 국법으로 박해하는데 서명하였습니다.
성가 478. 주님께 영광을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