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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만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중에서
고양이 신드롬
타고난 우아함과 게으름의 대명사 고양이. 요즘 왠일인지 고양이가
온나라에 넘쳐난다. 주택가를 배회하는 관록있는 길고양이들 숫자가
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고양이, 고양이 하고 부르는 말들이 늘어났다.
몇 년전만 해도 스노우캣 혼자 놀고 있던 인터넷 곳곳에 솟아나는
'깨물어주고 싶게 이쁜' 고양이 사진들과 고양이에 넋을 잃은 인간들의
모임들부터 해서 각종 깜찍한 고양이 옷과 소품들, 거기에 한 술 더 뜨는
고양이 노래들에 영화까지, 심지어는 고양이 애호서도 나왔다. 지난 시절
주류 밑에 살짝 숨어 흐르던 고양이 애호증은 이제 당당한 포즈로
유행임을 선포하는 중이다.
고양이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명확하게 갈려버리는
동물도 드물다. 한국에서는 어쨋거나, 동물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 바에야,
개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만큼이나 많다. '고양이는 요물스럽다'라는게 주된 혐오증의
이유인데, 발정기가 되면 어린애 소리를 내면서 밤새 울어댄다는
것이야말로 면제받을 수 없는 혐의라고 할 수 있다. (오로지 그 이유로
갖은 박해를 받기도 한다.) 그 외에 에드가 알란 포우의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의 영향도 있으려나? 어느 것도 쥐를 잡아주면서 인간의
동반자로 길들여진 고양이가 '요물스럽다'는 혐의를 직접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보다는 '사람한테 복종하는 꼴을 못 봐서' 혐의를
갖는다고 봐야할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활활 타오르는 고양이 신드롬의 뿌리는 순정만화계에
있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주변의 고양이 핍박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라는 생물에 매혹되고, 매혹을 거리낌없이 표현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사상적 지원'이 필요한데, 그동안 여자 만화가들이 줄기차게
표현한 고양이 애호증이 그 역할을 한 것이다. 90년대, 순정만화계는
참으로 매니아적 취향들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소년 애호와 코스튬플레이, 고양이에 시베리안 허스키의 유행까지도!
[닥터 스쿠르]의 위대함이여! (요즘 아사히티비에서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한다. ㅠ.ㅠ)
그후 초고속 인터넷과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고양이 애호증은
대중화되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 서식하는 고양이 사이트에서 예쁜
고양이 사진을 보고, 고양이를 예뻐하는 애호가들의 이야기에 취해서
고양이에 빠져든다. 그러다 급기야는 고양이를 분양받아 애지중지하게 된다.
왜 고양이인가?
조금은 냉소적으로, 먹고 살 만해지니까 집안에서 애완견을 키우고,
그마저 만연하고 나니 좀더 튀어볼려고 색다르게 고양이를 키운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요즘 티비에 범람하는 각종 동물 프로를 보면 원숭이, 새,
이구아나, 벼라별 동물들이 인간과 동거를 하고 있다. 그러나 냉소를
절제하고 지나치게 일반적인 설명으로 만족하지 않고 좀더 나아간다면,
애호가들의 순수하고 절절한 미감적인 이유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최고의 부드러움과 강함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자태에 이끌려서,
너무나 아름다운 장밋빛 항문을 자랑스레 내놓고 다니기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비굴함도 없이 독립적이기에, 고양이를 사랑한다. 이것이
시대가 개인의 자기존중을 드높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반대로
자기존중감이 낮아서 도도한 고양이를 모시고 사는 것인지
형식논리상으로는 갈팡질팡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시대변화가
'개랑은 정반대인 고양이의 태도'를 더 멋진 것으로 보도록 만들었다는
점은 명확하다. 단순히 귀엽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도도한
애완동물, 절제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육식동물, 단순한 삶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표상이 되는 동물인 것이다.
작은 맹수, 긴장과 늘어짐
야성을 그 작은 몸집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러면서 최고의 게으름과
날렵하고 민첩한 몸놀림이 함께한다는 것이 고양이의 독보적인 매력일
것이다. 여유를 갖는 것은 육식동물의 특권이다. 하루종일 풀을 뜯어먹고
소화를 시켜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초식동물과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고양이는 인간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거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큰 힘들이 인간의 손가락 끝으로 모여들고
있는 지금, 절제와 균형의 묘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단순한 삶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가능한 관조와 건강만큼 절실한 것이 없다. 인간이
만족을 알아야 지구가 편안하다. 그 여유와 균형을 체득하기를 갈구하는
마음이, 어느새 고양이를 향한 미감적인 욕망으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고양이의 자기중심성은 그 무심함과 함께 하기에 건강하고 아름답다.
무심함은 단순한 삶만이 허락하는 욕망의 균형상태이다. 더 가볍고
부드러운 생리와 더 단순하고 균형잡힌 윤리, 이런 것들을 고양이와
가까이하면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의 선비들이 사군자를
가까이하면서 뭔가를 배웠듯이 말이다. 물론 고양이들은 우리의 욕심엔
아무런 관심도 없을테지만.
남승희
캠퍼스스타일 5월호 트렌드스토리
http://amalgam.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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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양이 너무 귀여워요^^ 집만 넓으면 키우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