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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유자적 등산여행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길라잡이
철 원 여 행
철원이 고구려 영토였을 때는 철원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 신라 경덕왕 때는 철성군(鐵城郡)이라 불렀습니다. 901년엔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이곳에 도읍을 정했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고쳐 왕건에게 영토를 빼앗길 때까지 통치했습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송악(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이곳 철원 땅을 동주(東洲)라 하였습니다. 1310년(고려 충선왕 2년) 철원으로 고쳐 부(府)가 되고, 1434년(조선 세종 16)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됐으며, 1895년 철원군이 됩니다.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기차가 다닌 곳이 철원입니다. 1914년 경원선(京元線) 철도가 놓이면서 철원은 경원 남북로와 서울-금강산을 잇는 역으로 중요한 교차점이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 철원역에서 금강산 장안사를 지나 원산까지 닿는 전철이 개통되어 교통의 요충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철원의 운명이 바뀌고 말아 열차도 사람도 더는 갈 수 없는 막다른 곳이 되었고, 예전의 번화했던 철원은 오늘날 적막한 구철원이 되었습니다. 철원은 창졸간에 38선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6.25전쟁 이후 일부 지역이 회복되긴 했지만 되찾은 철원은 당초의 4분의 1밖에 안됩니다.
금강산으로 내달리던 경원선도 끊기고 폐허가 된 채 복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 태봉국의 도읍지는 아예 비무장지대로 잠겨버렸고, 철원의 참맛을 간직하고 있던 구철원은 민통선 안으로 깊숙이 빠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비무장지대와 맞닿아 있는 철원으로 갑니다.(참고자료: 한국문화유산답사회 · ‘답사여행의 길잡이 9’)
제2땅굴
1974년 11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랑포에서 북한이 기습남침용으로 파놓은 땅굴이 발견되어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1975년 3월 19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철원 북방 13km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제2의 땅굴이 발견되었습니다.
철원 북방 13km 지점에서 발견된 두 번째 땅굴은 한 국군 초병이 경계근무를 서던 중 우연히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게 됨으로써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수십 일간의 끈질긴 탐색작업 끝에 발견된 이 땅굴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4개의 땅굴 중 가장 큰 규모의 것입니다.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광장까지 갖추어 놓았고, 출구는 세 갈래로 분산시켜 놓았습니다.
한 시간 안에 약 3만 명의 무장공비가 침투 가능한 규모로 마무리공사까지 이루어졌더라면 사람뿐 아니라 차량, 야포 등과 함께 탱크의 통과도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고랑포 땅굴의 5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이 땅굴이 발견된 곳은 남방한계선으로부터 900m 지점이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넘어온 길이가 1.1km 정도 됩니다.
그런데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km가 남북한한계선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굴을 들어가 보기 위해서는 남방한계선을 지나 비무장지대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지상에서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비무장지대를 북한군이 파놓은 땅굴을 이용해 걸어본다는 점에서 색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평화전망대
철원평화전망대는 지난 2007년 10월 개관한 곳으로, 2층 전망대에 오르면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평강고원, 북한 선전마을까지 내다볼 수 있습니다. 초정밀 망원경시설과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지형 축소판 등이 설치돼 민족분단의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공산 치하의 북녘 산하, 피의 능선, 김일성 고지, 태봉 도읍지 하회산, 낙타고지, 오성산, 저격능선 등이 DMZ 안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기만 합니다. 속 후련하게 트인 산이요 평원이지만 가슴 한 구석이 아리는 이유는 누구나 다 알 것입니다.
6·25전쟁 당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 휴전선 155마일(249㎞) 중 70㎞를 지나는 철원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곳은 정치 ・ 군사적 요충지로 특히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철원 북방 풍천원 벌판에 커다란 궁궐을 짓고 태봉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평강고원과 철원평야로 펼쳐지는 드넓은 들판은 당시 대동방국의 웅지를 품기에 충분한 터전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철원 북방 평화전망대 앞 DMZ 안에는 둘레 12㎞에 달하는 정사각형 모양의 태봉국 도성이 옛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태봉국 도성을 지금의 휴전선이 정확히 반으로 자르고 있어 분단의 아픔이 더해집니다.
월정리역(月井里驛)
효성 깊은 처녀가 살았던 ‘달우물마을’이라는 뜻의 월정리는 분단 전에는 경원선 철도가 통과하는 제법 큰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은 100여m의 철로와 부식된 기차의 몸체만 나뒹굴고 있습니다. 남방한계선에 최근접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보관광의 대표적 경유지로 꼽힙니다.
미군 폭격으로 철원이 파괴되자 북한은 기관차만 가져가고 역사(驛舍)와 객차는 폭파했습니다. 두 줄기 선로는 남방한계선을 향하다 끊겨 있고 역사 건너에는 구멍 뻥뻥 뚫린 녹슨 객차가 수풀 속에 누워 있습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강렬한 메시지의 푯말과 함께 분단된 민족의 한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래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1914년 8월 서울~원산 221.4㎞를 연결한 산업철도입니다. 아울러 철원에서 생산되던 농산물과 북한의 원산 해산물 등을 수송하는 간선 철도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월정역사는 철원 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1988년 복원됐습니다.
두루미관
천연기념물 제202호로 지정된 두루미는 몸길이 136~140cm이고 날개를 펴면 약 240cm 가량 됩니다. 시베리아 흑룡강, 우수리지방 중국 북동부, 일본 홋카이도 동부 등지에서 번식하며, 겨울에는 시베리아와 중국 북동부의 번식 집단이 남하해 중국의 남동부와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에서 월동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두루미는 전 세계적으로 2000여 마리밖에 없는 희귀조로 이중 철원에 400여 마리가 월동하고 있습니다. 두루미박물관은 두루미를 비롯하여 철원에 오가는 철새들과 철원의 자연환경을 전시하고 있는 전문박물관입니다. 안보 관광으로 쓰던 철의 삼각 전망대를 리모델링해 2009년 2월 월정리역 바로 옆에 건립되었습니다.
노동당사
철원은 6·25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을 탈출했던 사람들은 바로 남쪽에 또 다른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앞 도시는 구(舊)철원, 또 다른 도시는 신(新)철원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떠나지 못한 주민들을 관리하는 관청이었습니다. 한 많은 관청이었습니다.
옆 사무실에서는 고문이, 그 옆 사무실에서는 인민회의가 벌어졌습니다. 결국 미군 폭격에 건물은 폐허로 변했지만, 건물에 서린 한은 숭숭 뚫린 포탄, 총탄 구멍에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전쟁과 이념이 인간을 몰아냈던 땅은 이리도 황량하기 그지없습니다.
전쟁에 한 맺힌 누군가가 이 건물을 부숴버렸다면 교과서 100권보다 더 훌륭한 역사 교과서 하나를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징그럽도록 추한 역사, 그나마 폐허로 남아 있기 때문에 현대사의 흔적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분단 비극의 상징물입니다.(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도피안사(到彼岸寺)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 열반의 경지 ‘피안’(彼岸)에 도달한 곳이란 뜻입니다.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가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기 위해 암소 등에 싣고 운반하는 도중에 불상이 갑자기 사라져 사방으로 찾아보니 현재의 자리에 불상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신라 경문왕 5년(865)의 일입니다.
1898년 절이 불에 타 중건했고,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1959년 15사단장 이명재 장군이 철불(鐵佛) 하나가 ‘답답해 죽겠다’며 사라지는 꿈을 꾸고선 절터를 샅샅이 뒤져 철불을 찾아내 절을 중건했습니다. 너른 평원에 눈이 내리면, 도피안사는 말 그대로 별천지로 변합니다.
철원 RPC(철원 ‘오대쌀’)
동송(東松)저수지와 토교(土橋)저수지 모두 대규모 인공 저수지입니다. 철원군은 많은 땅이 북한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수지 등 수리시설이 보강되고 민간인통제선 안으로도 출입영농이 허용되어 강원도 제1의 곡창지대가 되었습니다.
경지 중 논 비율이 거의 85%에 이르며 쌀 생산량이 강원도 전체 생산량의 20%에 가깝습니다. 특히 철원의 ‘오대쌀’은 휴전 이후 인적이 끊긴 비무장지대에서 흘러드는 청정한 물과 해발 250m 고원의 신선한 바람, 기름진 황토흙, 깨끗한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된 무공해 지역에서 생산되어 밥맛이 좋습니다. 농가의 가구당 경지면적이 넓고, 영농의 기계화도 일찍 추진되었습니다.
철원 RPC는 천혜의 생태보고인 비무장지대(DMZ)에서 발원하는 전국 최고의 청정수로 생산, 수확한 산물 형태의 물벼를 일시에 대량으로 수집 운반하여 정선, 건조, 저장, 가공에 이르는 모든 작업을 컴퓨터 시스템에 의한 자동화 시설로 일괄 처리하고 판매까지 담당하는 미곡 종합처리장입니다.
토교저수지 철새탐조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는 휴전선 남쪽으로 6㎞ 떨어져 있는 토교저수지 인근의 작은 마을입니다. 1953년 휴전과 함께 대한민국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양지리는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만을 간직한 버려진 황무지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입주하기 시작하고, 1972년 정부 시책에 의해 민북마을 개척이 시작되면서 1973년 100가구가 이곳에 삶의 터를 잡았습니다.
이들 1세대는 버려진 땅에 희망을 심기 시작했고, 숱한 고생과 피땀으로 오늘날 국내 최고의 철새마을로 재탄생시켰습니다. 겨울 진객 두루미를 비롯한 겨울철새들이 이곳 철원평야를 찾아옵니다. 겨울철 새벽녘 저수지 수면 위에서 펼쳐지는 쇠기러기 수만 마리의 군무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입니다.
고석정(孤石亭)
한탄강은 서울과 원산 사이의 ‘추가령 구조곡’이라는 좁고 긴 골짜기를 따라 163km를 흐릅니다.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을 연상케 하는 한탄강의 특이한 모습은 철원 관광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골짜기는 화산활동에 의한 지각 변동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한탄강에서는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현무암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50여m 높이의 깎아지른 강 언덕에 펼쳐진 현무암들은 마치 신(神)의 조각품처럼 눈앞을 가로막습니다. 고석정 유원지 안으로 내려서면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싼 협곡이 발밑에 나타납니다. 협곡 안으로 파란 강물이 굽이굽이 흐릅니다. 협곡 사이에 솟은 20여m 높이의 거대한 고석바위와 협곡의 앙상블은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깁니다.
강 한가운데 외롭게 솟은 고석바위에 촘촘히 새겨진 가로결 무늬는 오랜 세월 바람과 물에 깎인 흔적들입니다. 임꺽정이 고석정 주변에 성을 쌓고 은거하면서 관군에 쫓기면 바위 뒤 동굴에 숨거나 ‘꺽지’라는 물고기로 둔갑해 강물에 숨곤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유홍준 씨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고석정의 풍경에 대해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호쾌한 정경’ ‘부감법으로 조망하는 시원스런 눈맛을 갖게 한다’고 했습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기암절벽 사이를 흐르는 초록빛 한탄강 물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직탕폭포
우리나라 산과 계곡치고 폭포 없는 곳이 거의 없지만 이곳의 직탕폭포는 매우 색다릅니다. 한탄강 상류에 기암절벽과 자연적인 ‘ㅡ ’자형 기암으로 이루어진 폭포로서 그 웅장함과 기묘함 그리고 아름다움이 겹쳐 철원8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한탄강의 맑은 물과 풍부한 수량 등으로 자연미가 넘치는 이 폭포의 규모는 폭 80m, 높이 3m로 속칭 "한국의 나이아가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폭포 바로 위편 상류 쪽에는 현무암 더미가 검은 색의 넓은 광장을 펼쳤습니다. 그 광장 끝에서 하얀 물줄기가 쉼 없이 떨어져 내립니다. 흑 · 백의 장쾌한 하모니가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승일교
6.25 전쟁 때 격전지였던 철원의 대표적 전쟁 유적지입니다. 1948년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 당국이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된 이후 1952년 미군 공병대가 완공했습니다. 그래서 다리 양쪽 모양이 다릅니다. 북한이 착공, 남한이 완공한 다리라고 해서 이승만의 ‘承’과 김일성의 ‘日’을 따와 ‘承日橋’라 지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습니다.
더러는 ‘김일성을 이겨야 한다’는 뜻에서 이길 승(勝)자를 쓴 ‘勝日橋’라 풀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내문에 따르면 6.25전쟁 때 한탄강을 건너 덕천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 중 전사한 朴昇日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 ‘昇日橋’란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로 불립니다.
백마고지
6·25전쟁 당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찾고자 처참한 고지 쟁탈전이 전개됐습니다. 백마고지전투는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이 철원 서북방 395고지를 빼앗기 위해 벌인 전투였습니다. 남동쪽으로 펼쳐진 철원평야 일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여서 이 고지만 차지하면 철원 일대를 전부 위협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였습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는 고지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을 정도로 치열했으며 이 과정에서 중공군 1만4389명, 국군 3146명이 희생됐습니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철의 삼각지대의 좌변 일각인 철원 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돼 국군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대마리(大馬里) 뒷산’으로 불렸던 395고지는 본래 무명고지였습니다. 전투 당시 피아의 포탄이 떨어져 산 높이가 1m 가량 낮아졌는데, 하늘에서 산의 모습을 보았을 때 한 마리 白馬(백마)가 누워 있는 듯하다고 ‘백마고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
철원의 소이산은 60여 년 동안 민간인들의 통행이 금지되었던 군사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시림의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길 조성을 따로 하지 않고 군인들이 쓰던 길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녹색길의 특징입니다. 대전차방어벽을 따라 걷기도 합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철원 시내를 비롯해 철원 주변의 전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낮은 구릉을 걷고 숲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철원평야와 북한의 평강평야가 한눈에 바라보입니다. 소이산 녹색길은 6.25전쟁과 관련한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지뢰가 매복돼 있는 지뢰꽃 길을 걸을 때면 전쟁의 상처를 다 치유하지 못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며 서글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뢰꽃이란 철조망의 지뢰밭에서 자라고 있는 야생화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꺾으면 발밑에서/ 뇌관이 일시에 터져/ 화약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꽃들’을 보며 걷는 길입니다.
삼부연(三釜淵)폭포
한탄강 유역 내의 명소이며, 철원8경의 하나인 삼부연폭포에는 궁예가 철원을 도읍으로 삼을 때 이무기 네 마리가 도를 닦고 살다가 그중 세 마리 가 용이 되어 승천하면서 3개의 바위구멍을 만들었고 이 3개의 바위구멍에 물이 고이면서 노귀탕, 솔탕, 가마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3단폭포로서 가마솥처럼 생긴 소(沼) 3개를 만들어놓았다 하여 삼부연이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20m 높이의 폭포와 바위산이 어우러진 절경이 압권인데, 겸재 정선이 금강산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다 진경산수화 한 점을 앉은 자리에서 그려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1,000년 동안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말라본 적이 없어 기우제를 지내왔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폭포 건너편에 부연사(釜淵寺)라는 암자가, 폭포 바로 옆 도로에는 오룡굴이라 불리는 작은 터널이 보입니다. 이 터널을 지나면 폭포 상류인 용화저수지와 용화동이 있습니다.
송대소
한탄강의 바닥 전체가 직각으로 내려앉아서 형성된 깊은 소로서, 명주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가도 끝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이라고 전해집니다. 화산폭발 후 용암이 흐른 자리가 강줄기가 된 한탄강은 낮게는 10미터, 높게는 30미터에 이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곳입니다.
그 절벽이 바로 주상절리로 이뤄진 구간이 많아 더욱 더 신비로움을 자아냅니다. 주상절리대 중 가장 유명한 곳인 엄태웅길(철원 한여울길의 일부)의 중간쯤에 있는 송대소입니다. 송대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주상절리 협곡은 그야말로 절경입니다. 깊고 푸른 물속이 바닥까지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