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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공산성 바람소리☆]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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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바람소리]
이헌석 시집 / 문학사랑시인선 44 / 오늘의 문학사(2015.11.11) /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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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바람소리
이헌석
작은 꽃으로 피어나도
나는 좋겠다.
공산성公山城 돌담 아래
푸른 향기로 세상을 적시다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해도 좋겠다.
백제 천년의 노래가
놀빛을 불러 공복루 기왓장을 닦아내는
그리움의 역사처럼
이따금 자귀나무 잎을 어루만지다가
도토리나무를 기어오르는 칡꽃을 만나
아직 맺지 못한 사랑을
동문루 기둥에 칭칭 동여매고 싶다.
세월 건너 금강 여울소리가
깊이 잠든 나를 깨우면 다시 일어나리.
서둘러 진남루 목판 틈새로 올라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눈물은 우리에게 무엇이냐,
왕비를 대신하여 무령왕에게 물어보리.
황토로 다진 돌길을 지나
기우는 햇살에도 눈이 부신 금서루에서
서로 속삭이며 바라던 풍경들,
잊을 수 없어 가슴에 남겨진 기억으로
그대 머릿결을 쓰다듬는데
이제 한 올 한 올 세월이 깃든
추억의 입자를 모아
새로운 노래를 지어 부르리니,
작은 풀꽃으로 흔들려도 나는 좋겠다.
*공산성: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 고성. 2015년 7월에 송산리고분과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
*공복루. 동문루. 진남루. 금서루 : 공산성 안에 있는 네 문루 .
석장리 풀꽃
이헌석
눈빛 고운 소녀가 서성였다.
안개로 길을 쓸며
연모하던 세월이 즈믄 해였을까.
물비늘처럼 흔들리며
기다린 지 수수만년이었을까.
그리워 강을 건너면
산봉우리에 마중 나온 햇살이
바람의 음계마다 홀씨를 뿌리던
추억의 회로에서
아득하게 살아나는 메아리.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가,
팔매돌을 들고 사냥을 나서던
내 모습이야말로 아직도
그대의 맑은 눈에 아른거리던가.
*충남 공주시 ‘석장리구석기박물관’앞 강변에서
*팔매돌 : 돌을 칡넝쿨 등으로 묶어 사냥하던 구석기 도구.
돌이 웃다
이헌석
돌이 웃었다.
푸른 이끼를 둘러쓰고
가마득히 오랜 세월을 버티던
그가 웃었다.
터지고 갈라진
입술 사이
구절초 꽃잎을 하나 걸친 채
빙그레 웃었다.
아미타불
두 손을 모았다.
관세음보살
바람 맞아 삽상하였다.
* 충남 공주시 우성면 대성리 장고개 성황나무 아래 있던 돌부처 지금은 성황나무와 돌부처가 없어졌음.
마곡사 점묘
이헌석
골짜기 물을 따라
반야심경 읊는다.
부처님 염화미소
연꽃을 피우는데
마곡사 대웅전 지나
구경 나온 바람들.
공산성公山城에서
이헌석
이끼 푸른 돌 하나에 땀방울이 엉깁니다. 물집으로 부르튼 석수石手의 손바닥이 드러나 춤추는 잡목림 굽이마다 피멍을 맺힌 목도군 살가죽 벗겨진 어깨뼈가 일어섭니다.
백제百濟의 우울한 상처 속에서 아직도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함성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물결 이는 맥박이 뜨거운 가슴을 식히며 면면히 넘치는 천년을 지키는데, 돌과 돌 사이에서 부서진 혼백이 외칩니다.
잘려진 손가락이 여기 있다. 찢어진 손바닥이 여기 있다. 깨물린 울음으로 사직社稷만을 우러르던 왕국王國의 추운 백성들이 깃발을 올립니다. 바람에 펄럭입니다.
* 성을 쌓고, 또한 무너진 성을 고쳐 쌓았을 석수와 군사들을 떠올리며.
디디울나루 새벽길
이헌석
강물에 비친 새벽길
아름다운 영혼을 보았다
섬바위에 앉아 바라보면
도라지 꽃빛으로 출렁이던
뭇별들이 사라지고
촛불처럼 남은 하나
그대 사랑도 새벽별
저처럼 외로운 걸까.
미명이 걷히고 나면
이슬로나 내려앉을 별이여
바람에 흔들리다가
가슴에나 남을 혼불이여
* 디디울나무 : 충남 공주시 웅진동과 우성면 평목리 사이의 나루, ‘더디올나루’ ‘데데울나루’등으로도 불렸음. 지근거리 상류에 공주보가 건설되어 있고, 그 바로 상류에 곰나루가 있음. 필자는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디디울나루를 나룻배로 건너 통학하였음.
디디울 꽃샘바람
이헌석
세상을 향한 분노였을라
속 터지는 저항이었을라.
맑은 하늘, 푸른 산줄기, 고운 물빛을 지우며 가끔 광란하듯 일어서는 모래바람이 불었다. 모래를 날리며, 풀밭 떡잎들을 휘갈기고, 다시 나뭇가지를 꺾으며 휘몰아쳤다가 금새 사라지곤 했다.
꽃샘바람, 꽃샘바람
아아, 물너울로 넘치는 바람
동학 농병들의 원혼이 꽃불로 살아나서 봄마다 휘도는 바람 속에 혁명도 날아갔고, 나라도 날아갔다. 욕심에 욕심을 더한 일로 가끔 아름답던 꿈이 부러져도, 얼음 같던 세월이 금세 녹아내리곤 했다.
양심의 관절을 맞추어 보지만
볼따구니는 아직도 얼얼하다
꽃대궁
이헌석
바람이여, 그대는
어쩌자고 햇살마저 흔드는가.
물결이여, 그대는
어쩌자고 잊은 노래를 되살리는가.
디디울나루에 서면
영혼의 꽃대궁이 흔들린다.
디디울나루 겨울 아침
이헌석
여명의 고운 날빛을 따라
길을 나서면
어둠을 거두어 내는
그대
싱싱한 눈빛을 만났지.
바람에 떨리는 미루나무
부스스 몸을 터는
떡갈나무 사이
까치집처럼 앉아 있는 외딴집
그대 미소가 고왔지.
눈 쌓인 디디울나루
겨울아침
눈에 묶여 강변을 서성여도
그대 있음에
발길은 가볍고 행복했지.
할아버지의 세월
이헌석
사랑채에서 기침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게 가득 놋그릇 지고 가셨다가
양은 그릇 서너 개 바꾸어 오신 날은
할아버지 가슴에
디디울나루 여울소리가 머물렀습니다.
“조상님 뵐 면목이 없는겨!”
“놋그릇은 너무 무겁잖아유.
너무 때가 잘 타잖아유!”
말장단 맞추시는 할머니가
인고의 세월도 함께 풀어놓으셨습니다.
디디울나루 어룽지던 달빛마저
두 분의 눈물에 넘치고 있었습니다.
* 할아버지께서는 1970년대에 놋그릇을 지게 가득 지고 10km를 걸어 공주시장에 가셔서 가벼운 양은그릇으로 바꾸어 오셨음. 놋그릇은 녹이 잘 슬어 양은그릇이나 스테인 그릇을 선호하던 시기였음.
아비지 간병일기 1
- 목욕탕에서
이헌석
아버지 모신 날은 온천물도 차갑습니다.
에이듯 저며 오는 시린 가슴 다잡으며
아버지
날 씻기셨듯이
받은 정을 돌립니다
엄히어 두드리던 너른 등이 아닙니다.
이기려고 용을 쓰던 유년의 팔씨름 너머
눈물 빛
추억을 남기고
몸을 맡기신 아버지.
*허약해진 아버지를 모시고 간 온천의 뜨거운 물도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실에서
- 1997년 4월 중환자실에서
이헌석
윤사월 시린 하늘
유년의 풀빛 추억
올봄도 찔레꽃은 하얗게 피고 버드나무 가지 사이 까치집은 덩그런데, 흐르는 구름이며 바람이 왜 그리 무상할까. 찔레꽃 덤불 사이 까치 독사 날름거리는 혀, 그 두려운 하늘빛이 머리칼을 세웠어라. 도망치는 뒤 꼭지에 섬짓섬짓 묻어나던 전율, 뛰어도 제자리를 맴돌던 발꿈치의 통증, 집 앞 버드나무에서 쏟아지는 까치 소리에 소스라쳐 일어났어라. 숨이 찬 듯 두근거려라. 언제나 만져지던 사랑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가물거려라. 오늘에사 뜨겁다가 차갑다가 갈피 잡을 수 없어라.
아슴슴 꽃불처럼 번지는
눈물겨운 사랑이여.
제삿날 밤을 깎으며
이헌석
고집처럼 단단해진
겉껍질을 벗겨내도
속껍질 떫은맛도
숙명이 듯 깎습니다.
제야除夜에
밤[栗]을 치면서
먹먹해진 귀 울림.
“나 죽거든 쓰거라.”
밤나무를 심으시고
“밤톨처럼 살거라.”
우애를 거두시던
아버지,
어머니 말씀에
뜨거워진 빈 가슴.
유구천維鳩川에서
이헌석
침묵의기지개를 켜는 물풀
물풀 사이 빛살을 따라
마곡사 종소리가 겨울잠을 깨울건가.
아직은 단단한 얼음도
쩡- 쩡- 금이 가고
물살 따라 여린 지느러미가
유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를 테니,
떠나 있을 때의 그리움마냥
찾아도 설레는 단심이다.
이제 산 그림자 드리우는
청명한 물결로 마음은 흐르고
흐르는 물결에 무성산을 띄워
산자락 솔바람 소리를 듣는다.
돌아설 줄 모른 채
냇둑에서 빈 그림자로 서성인다.
* 유구천 : 충남 공주시. 유구면, 신풍면, 사곡면, 우성면을 거쳐 금강에 합수.
* 무성산 : 충남 공주시 사곡면과 정안면에 걸친 산
섬바위 연가 1
이헌석
뜨거운 가슴마저
섬으로
띄워놓고
빛살 고운 바람을
마중하러
길을 찾네.
혼절한
사랑을 깨우며
천 년 사는 저 눈빛
* 섬바위 : 충남 공주시 우성면 대성리 ‘섬바위’라는 곳이 있는 큰 바위. ‘대문동’에서 ‘돌고지’로 가는 언덕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서 있었는데, 개발시대에 깨뜨려 잡석으로 쓰느라 하단 부분만 1/3 이 남아 있음, ‘선바위立石’라고도 하고 ‘섬바위島岩’라고도 함.
사진 한 장 1
이헌석
때로는, 기억에도 없는 사진,
백일사진일까,
돌 사진일까,
번진 듯 흐려진 사진 한 장을 보면
애써 참아도 눈물이 난다.
어떻게 어린 나를 안고
읍내까지 그 먼 길을 다녀오셨을까,
차도 없고
버스도 다니지 않던 시절에
먼 길을 걸으셨던 신작로 30리 길에
미루나무 그늘이라도 짙었을까.
가난하셨던 아버지 어머니가 남기신
흑백 사진에
아직도 두 분의 숨결이 따사롭다.
겨울 징소리
이헌석
목소리도 얼어붙습니다. 모두
잠들어 쉴지라도
몇 마리 새는 깨어 있어야겠지요
맨발로 겨울을 지내는 까치떼마저
울지 않으면
가슴의 살얼음은 누가 흔듭니까?
서릿발 속에 갇힌 보리싹은 누구의
노래로 일어납니까?
“언젠가 봄은 오겠지
동지섣달 정이월 지나면
기다리는 봄이야 오겠지.”
아버지 징채처럼 깔끄러운 손 비비며
참는 법을 익힙니다만, 이제
풀리지 않는 언 가슴에
징소리가 울립니다.
찬바람 흔들며 겨울에도 징소리는
갈기를 세워야겠지요.
충청도 사람들
이헌석
충청도
사람들은
모닥불 장작이다.
타는 듯 잠자는 듯
불시를 지키다가
누군가
기름을 부으면
화산처럼 터진다.
계룡1경, 천황봉天皇峰 일출日出
이헌석
기다림의 눈물을 씻으며
둥기둥 해가 뜬다.
단아한 백제 후예들의 슬픈
허리띠를 풀어낸다.
옷고름 깨물고 참아온
억센 매듭을 이으면
여울로 흘러넘치는
너와 나의 아픔을 되새기며
둥둥 울리는 북채여,
살얼음 깨는 업고의 징채여!
*계룡팔경 : 여덟 작품 모두 10구체 향가鄕歌의 형식을 원용.
계룡8경, 오뉘탑 명월明月
이헌석
이 가슴 영롱한 사랑을
그대 모르시나요.
꿈결에도 부여잡는 옷깃을
그대는 모르시나요.
누이의 그 마음 연분홍빛을
아느니라, 나는 아느니라.
그러나 어이하리, 누이여
이 한 몸 부처님에 바친 뒤이니.
서방西方으로 가던 달이
언뜻 머문 곳에 맴도는 풀피리.
12월의 사랑
이헌석
바다로 떠나 물새가 된 사람아.
애틋한 갈망으로
첫눈이 멍든 세월을 감추는데
그리움이듯 눈이 내려도
바람 속에 내려, 다시 쌓여도
표류하지 않으리.
다시는 슬퍼하지 않으리.
모래밭 지워지는 발자국에
눈물을 묻으며
뜨거운 포말泡沫이 솟아나는데
지금쯤 그대는
침몰하는 추억을 간직한 채
어느 먼 하늘 아래
외로운 섬으로 떠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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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대성리 158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외딴 초가 앞에는 버드나무 고목이 서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오리를 방죽으로 내몰았다가, 해질녘에 다시 몰아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을 통학하느라 아침에 10km, 저녁에 10km를 걸어 다녔습니다. 오솔길을 지나서 ‘디디울나루’를 건넌 후, 웅진동 ‘하고개’를 넘고 시내를 통과하여 중학동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6년이 흘렀습니다.
공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으로 근무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지 40년이 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지은 시시를 헤아려보니 230편이 좀 넘습니다. 그 중에서 신작을 포함한 100편으로 11시집을 묶습니다.
내 고향, 충청남도 공주시를 소재로 한 작품만으로 시집을 발간하게 되어 기쁨니다.
2015년 10월
리 헌 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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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헌석 詩集 [※공산성 바람소리※]
[ 자작시 해설 ] -
꿈길 에서도 거니는 공주 산하山河
리헌석李憲錫
1. 서정의 샘터, 디디울나루
디디울나루는 고향에 있는 금강의 작은 나루였다. 충남 공주시 웅진동과 우성면 평목리를 맞대고 있는데, 중고등학교 6년을 하루같이 나룻배를 타고 통학을 했다. 그곳에서 젊은 시절의 이상을 새기기도 했고, 아름다운 서정을 가슴에 담기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20여리(약10㎞) 시골길을 걸었다. 계절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강나루는 추억의 보물창고였다. 봄이면 화사하게 웃는 산 벚꽃이 손짓을 하고, 여름에는 가슴을 흔드는 여울소리가 정겨웠다. 가을이면 억새가 하얗게 춤을 추었고, 겨울에는 눈보라 속에서 싱싱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짝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고, 그때의 정황을 시로 빚었다.
강물에 비친
새벽별
아름다운 영혼을 보았다
섬바위에 앉아 바라보면
도라지 꽃빛으로 출렁이던
뭇별들이 사라지고
촛불처럼 남은 하나
그대를 향한 사랑도
새벽별
저처럼 외로운 걸까
미명이 걷히고 나면
이슬로나 내려앉을 별이여
바람에 흔들리다가
가슴에나 남을 혼불이여
-「디디울나루 새벽길」전문
아름다운 자연만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다 보면, 선배와 친구, 그리고 아우들이 모두 한 가족과 같다. 누구는 아침밥을 굶었다든지, 누구와 누구는 좋아지내는 사이라든지, 누구는 얼굴보다 마음씨가 곱다든지 시시콜콜 모르는 게 없을 정도니 말하여 무엇하랴.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다. 좋아하면서도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여학생도 나를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성적인 숙맥이라서 터놓고 사랑을 고백하지는 못했다. 언필칭 짝사랑을 하는 사이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심정을 되새긴 것이 앞의 작품이다. 사랑을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그리하여 멋들어진 추억을 간직하지는 못했지만, 작품 한 점 얻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일이 아닌가.
2. 세월이 갈수록 그리운 장승
성황당이 있었다. 고갯마루를 지키는 돌무더기 옆에는 당산나무가 오색 헝겊을 휘날리며 휘파람소리를 만들고, 그 옆에는 돌장승이 머리가 떨어진 채 눈비를 맞으며 세월을 가늠하고 있었다. 돌장승은 ‘장승’이라고도 하고, ‘벅수’라고도 하는데,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마을과 이웃 마을의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고도 한다.
초하루나 보름이면 마을 아낙들이 성황당 장승이나 ․당산나무․ 돌무덤 앞에 떡시루를 놓고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성황당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가끔 명태포나 떡을 얻을 수도 있고, 대추나 알밤을 집어먹으면서 시장기를 면하기도 했다.
성황당 돌무덤을 지나며
부서질 듯 애절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굴참나무 옹이 속에서 터지는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중략>
대밭을 지나며
울먹이는 눈물빛보다 시린 새벽
밤새도록 이슬로 달아놓았던
어머니, 빈 가슴의 등불을 보았다
-「장승 곁에서」일부
언제이던가, 성황당 돌무덤을 지날 때, 돌무더기에 앉아 흐느끼는 여인을 본 적이 있다. 살기가 힘들어서 그랬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그랬거나, 먼저 보낸 자식 생각에 가슴을 뜯으며 그랬거나, 시집살이가 고달퍼서 그랬거나, 어쩌면 소박을 맞아 오갈 데 없어서 울었거나, 하여튼 서글프게 우는 여인을 보았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성황나무 가지를 흔드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굴참나무 구멍이 뚫린 웅이 자리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성황당에서 울던 아낙의 한 서린 울음소리도 같고, 힘들게 짐을 나르던 삯군들의 긴 호흡도 같았다.
때로는 전쟁터에 나가 산화된 병정들의 혼이 억새풀에서 되살아나는 소리, 산기슭을 흔들며 달리는 외마디 외침소리와도 같았다. 그 휘파람 소리는 나무 가지를 흔들다가, 옹이 속에서 동그라미를 만들다가, 구멍 속으로 휘돌아 빠져 나가는 바람소리였지만, 수많은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친구들마다 그 소리의 느낌이 달랐으니, 그야말로 천의 소리가 아니었나 싶다.
성황당 근처에는 대밭이 있었다. 새벽에 등교하느라, 그 대밭을 지나며 언 손을 호호 불기를 얼마나 했던가. 그 새벽의 여명은 울먹임을 만들었고, 그 울먹임 속에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눈물빛이 시렸다. 그 시린 새벽과 어둔 저녁길을 걸어, 왕복 50리길을 통학하다 보면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생기게 마련이다.
저녁 늦어서 귀가할 때면, 어머니께서 기둥에 지등紙燈을 걸고 기다리셨다. 자식만을 걱정하시는 어머니 가슴, 그 순간만큼은 자식외의 모든 것을 비운 마음이셨을 게다. 그 빈 가슴에 달아 놓은 등불을 보면서 나는 어머니의 사랑에 감읍하였다.
3. 어린 시절 기어오르던 섬바위
고향의 섬바위를 찾았다. 어릴 때에는 우뚝 솟아 있어 올려보기도 힘들 정도로 높았던 바위였다. 그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또래들 앞에서 우쭐거릴 수 있을 만큼 오르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반쯤 낮아져 있다.
그 바위가 수난 당한 것은 새마을 사업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나무골 고개에 있던 홍길동 바위 일명(치마바위, 여장사암)가 사라졌고, 성황당 돌무덤이 사라졌으며, 성황나무가 베어져 사라졌다. 민담民譚으로 전해진 ‘홍길동 바위’는 멍석처럼 넓었으며, 얇고 투박한 원반처럼 생겼었다.
촌민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홍길동 설화는 이러했다. 홍길동이 무성산에 성을 쌓은 뒤에 그 성문으로 쓸 바위를 나르다가 쉬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라에 반역하는 것이 두려웠던 어머니와 여동생의 꼬임에 빠져 홍길동을 콩을 하나씩 먹으며 걷다가 시간을 맞추지 못하였고, 시간을 어기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금강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것이다.
이런 민담과 함께 나무골 고개에는 돌무덤과 성황나무가 있었다. 봄이 되면 그 돌무덤에서 겨울잠을 자고 나온 뱀들이 떼를 지어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은 뱀을 밟을까봐, 그곳을 피해 다녀야 했다. 소원을 담은 색색 천을 두른 성황나무에서는 기이한 휘파람소리가 들려 밤길은 무섭기만 했다.
그러던 중, 거국적인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었다.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고 성황당 돌무덤을 파헤쳤고, 고갯길을 넓히기 위해 ‘홍길동 바위’도 깨뜨려 자갈로 썼다. 성황나무도 베어 불태웠다. 따로 서 있었던 섬바위도 수난을 겪었는데, 화약으로 폭파하는 바람에 상단이 떨어져 나갔고, 잘게 부수어져 자갈로 쓰였다.
이처럼 추억을 조각낸 새마을 사업이지만, 나는 새마을 사업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죽을 만큼 서러웠던 보릿고개를 사라지게 하였고, 당시 만연하던 미신(迷信)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단군 이래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추억 속에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뜨거운 가슴마저
섬으로
띄워놓고
빛살 고운 바람을
마중하러
길을 찾네
혼절한
사랑을 깨우며
천 년 사는 저 눈빛
-「섬바위 연가 1」전문
나는 성황당에 대한 추억을 시와 수필로 옮겼고, 나무골 고개에 있던 홍길동 바위도 시에 담았다. 그렇지만 섬바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동심을 되살릴 수 있어 행복하다. 그 섬바위는 추억 속에서 영원한 내 연인으로 남아 있다.
이제 성황당 돌무덤은 만나 볼 수가 없다. 홍길동 바위도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성황당 고목에서 날리던 청홍 색색의 깃발과 소원을 비는 천 조각도 추억 속에만 머물러 있다. 오로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섬바위이기 때문에 내 가슴에서 더욱 정겹게 살아나는 것이리라.
섬바위 바로 아래에 묘소를 조성하고 부모님을 모셨다. 그래서 매년 몇 번씩은 섬바위를 찾게 마련이다. 설을쇠고 성묘를 하러 갔다가 잠시 우러러 본 섬바위는 반쯤 내려앉은 모습이지만, 추억 속에는 언제나 우뚝 솟아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한결같이 고요 속에서 사랑을 가꾸고 있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나를 반기고 있었다.
4. 공주휴게소 돌에 새긴 시
대전에서 당진을 잇는 고속도로가 어느 정도 완공될 무렵에 모르는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고속도로 준공 기념으로 조형물을 세운다는 것, 대전-당진 고속도로 준공 기념 조형물을 조각가 권치규선생이 설치한다는 것, 그 조형물에 수록할 시를 청탁한다는 말을 한국도로공사 관계자로부터 들었다.
다음날 이메일(E-mail)로 조형물의 조감도, 시를 새기게 될 비석의 모양과 위치 등을 보내왔다. 그러면서 고속도로 준공의 의미를 담은 시 1편을 기간에 맞추어 창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전에는 한국도로공사 사장 명의로 준공기竣工記를 돌에 새겼는데, 최근에는 그 지역 대표 시인의 시로 대신한다고 했다.
“나는 대전과 충청남도를 잇는 대표 시인이라고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물었더니 간략하게 선정 과정을 설명했다.
“대전-당진 고속도로이기 때문에 대전과 충남의 시인으로 1차 집약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념 조형물 설치 장소가 충남 공주시 지역이어서, 그 지역 출신이거나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으로 2차 의견을 모았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성격상 ‘목적시’이기 때문에 서정과 의미를 아울러 담아낼 분을 찾았습니다. 이런 절차에 의해 원로 시인부터 젊은 시인까지 추천을 받았습니다. 기존의 작품들을 구해 심의기준을 삼아 선정하였습니다. 리헌석 선생님은 충남 공주시에서 태어나셨고, 대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대전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고, 여러 편의 목적시가 두드러졌다는 심의위원들의 견해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날을 고심한 끝에 시를 지었다. 그 작품이「소망의 길이어라」이다. 공주에서 대전을 향한 공주휴게소 조형물 아래 새겨져 있다.
그리움으로 별을 닦는다
먼 옛날 신단수 감돌던 노래가
푸르게 살아나서
산을 넘어 달리리라
강을 건너 달리리라
그대를 향한 뜨거운 소망으로
여기, 길을 연다
그대와 나의 맑은 눈빛이
새 역사를 쓰면
어둠 사이로 무지개가 솟으리
가슴에 묻은 시련도
고운 꽃으로 피어나리
길은 언제나 반가운 만남이려니
찾아오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고향처럼 살가운 것이려니
이제 충청도
하늘처럼 눈부신 약속의 땅에
정겨운 소망을 심는다
-「소망의 길이어라」전문
이 작품은 역사성과 지역성을 고려하였다. 고속도로를 통하여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이웃과 이웃이 소통하고, 우리 지역과 타 지역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 정을 나누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였다.
서두의 <그리움으로 별을 닦는다/먼 옛날 신단수 감돌던 노래가/푸르게 살아나서>의 신단수神檀樹는 우리 겨레의 역사적 시원始原을 일컫는다. 고대 우리 민족이 형성되던 시기의 상징물이었던 신앙적 나무에 감돌던 신비스러운 노래에 뿌리를 두었다. 그 노래가 시련의 역사를 극복하고 길을 열어서 대전-당진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러한 역사는 충청도 사람처럼, 혹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고향처럼, 반갑과 살갑다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충청도를〔하늘처럼 눈부신 약속의 땅〕이라고 노래한 것은 충청도 사람으로서의 긍지이기도 하다. 그런 마음을 담아 쓴 작품이 돌에 새겨져 오가는 사람을 반긴다. 나를 아는 지인들이 감상을 하고,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는 정성도 고맙다.
5. 대전현충원 순국 선열 안장식 추모의 시
장명식이라는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육군 장성 출신이라고 밝힌 그 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지인의 안장식이 거행되어 참석하였는데, 의식 끝마무리 순서에〔임을 위한 헌시〕가 낭독되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스러웠다고 하였다. 시를 지은 분을 담당자에게 문의하였더니, 대전문인협회 회장을 지낸 리헌석 시인이라며, 전화번호를 알려 주더라고 말하였다. 작품을 받아 보고 싶다고 하여 이메일로 보내드렸다.
신명身命을 바쳐 나라를 수호하신
임이시여
우러러, 가슴 벅찬 조국祖國의 하늘에서
오늘도 휘날리는
아름다운 태극 깃발을 보소서!
한번 죽어, 영원히 사는 거룩함으로
이 땅의 어둠을 밝히신
영령이시여
그토록 소망하시던
겨레의 눈부신 비상飛翔을 보소서!
이제, 가시고 남은 자리에
가눌 수 없는
슬픔이 고입니다
눈물이, 새로운 눈물을 불러서, 넘쳐서
보내 드리고 싶어도
보내 드릴 수 없는 가슴 저림으로
통곡하며 무릎을 꿇습니다
향연香煙처럼 피어오르는
이 절절함
눈물 젖은 두 손을 모아
아득한 그리움으로, 여기, 모시오니
임이시여
민족의 성역聖域에서 영면永眠하소서!
-「임을 위한 헌시獻詩」전문
여러 해 전에 국립 대전현충원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현충원에서는 겨레와 나라를 위해 순국殉國하신 영령들을 모시는 안장식安葬式을 거행한다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때로는 수시로 안장식을 거행하는데, 무엇인가 좀 더 잘 모셔야 할 격식이 필요한 것 같다는 중론衆論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계자들이 논의를 하였다고 한다. 안장식은 관계자의 말씀과 예포 및 헌화 등을 통하여 가신 분을 기리고,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을 위로한다. 이때 정서적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시를 낭송하면 좋겠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기존에 발표한 시 중에서 최적의 작품을 물색하였는데, 관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를 청탁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수소물 끝에 본인을 설정하여 작품 창작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을 빚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신이 쓰고 싶은 작품을 쓰는데 익숙한 대부분의 시인들은 목적시 창작을 기피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겨레와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영령을 기리고 위로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어서 응낙하였다.
조국 광복을 위해 살신성인을 하신 분, 전쟁 영웅, 군경으로 애국하신 분, 순직한 분 등 다양한 분야의 영령들을 포괄할 수 있어야 했다. 그 분들의 뜨거운 겨레 사랑과 나라 사랑의 업적을 찬양해야 했다. 뒤에 남은 우리도 그 분들을 따라 애국 애족의 길을 나서리라는 다짐도 들어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을 담아 작품을 송고하였다. 방송국 아나운서의 낭송으로 CD가 제작되었다는 통보와 함께 그 CD를 1매 받았다.
이 시는 대전현충원에서 안장식이 거행될 때마다 낭송된다. 영령을 기리는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린다고 전한다. 유가족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할 때도 있다고 한다. 그 낭송 작품의 저작자가 ‘리헌석 시인’이라고 밝히지는 않지만, 가슴은 보람으로 벅차올랐다.
6. 금강일보 창간호 발행을 축하하며
시업詩業을 생업生業으로 삼고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생명이 유지되는 한, 시와 더불어 살아가는 길이 운명인 듯싶다.
문학의 길에서 금강일보 이광희 사장님을 만났다. 모 일간지의 문화부 차장 시절에 그는 문학과 교육을 담당하여 자주 만났다. 막역하게 지낼 때쯤 자신도 독학으로 소설 공부를 하였다는 말을 듣고, 문학의 숲으로 발을 딛도록 권하였다. 그래서 소설로 등단도 하고, 7권의 소설집과 몇 권의 저서를 발간하였다.
다니던 신문사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본인이 나서서 신문사를 굳건하게 세우기 위하여 나섰다.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미더워서 여러 차례술도 나누었다. 그 신문사는 발전해 갔지만, 정론직필의 꿈을 간직한 그는 다시 2010년 5월 3일에 〔금강일보〕를 창간하기에 이르렀다.
금강錦江은 대전, 세종, 충남, 충북 주민의 젖줄이다. 창간한 신문이 충청인의 가슴에 흐르는 금강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기를 소망하며 작명하였다. 금강이 살면 충청도 역시 살아날 것이매, 그 간절함을 축시祝詩에 담았다.
새벽길을 쓸며
역사의 거보巨步를 내딛는다
일월日月처럼 눈부신 비상을 위하여
붓 끝에 혼을 담아
새 하늘을 연다
작은 샘물에서 시원始原하지만
큰 강은 도도하게 흐르는 법
산과 들을 끼고 돌며
무한한 힘으로 생명을 길어 올리는 법
그리하여 국토의 중심에서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새로운 나무를
보듬어 가꾸는 소망이리니
신천지를 개척하기 위해
한 마음으로 일구는
언론창달言論暢達의 건강한 노래일지니
우리의 출범出帆은 어둠을 쓸어내고
창창한 미래를 열어 가는 일
순정한 지면紙面에
진실의 알곡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 일
이제, 그대와 내가 마주잡은 손은
총이나 칼보다 강하리니
흔들리지 않는 함성이리니
금강, 영원한 모천母川의 사랑으로
작은 마을과 큰 도시를 감싸 안으며
삶의 현장을 올곧게 지킬진저!
하여, 반듯하게 올린 깃발은
우리네 아름다운 열정의 표상일지니
양심의 눈빛 형형하게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중심을 잡을진저!
오호, 설레는 마음으로
그리움의 별을 닦는다
편견과 아집을 허무는 북소리
갈등과 모순을 치유하는 징소리로
새 세상을 연다
-「웅비雄飛하는 영광 앞에서」전문
시업詩業을 생업生業으로 삼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정론직필을 지향하는 언론의 길도 그만큼 어려운 것 같다. 어려움을 극복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도출함이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일임이 분명하다.
세상의 편견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자기밖에 모르는 아집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이를 허물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갈등과 모순을 치유하는 것도 언론의 사명인 것 같다. 그런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작품에 담았다.
7. 시민에 대한 배려가 웅숭깊은 유림공원
유림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이 77세 희수喜壽를 맞아 사재私財 100억원을 출연하여 뜻있는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대전 광역시 박성효 시장의 추천으로 대전광역시 유성구 어은동 2만 평의 불모지를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하고, 대전광역시에 기부채납하기로 MOU를 체결하여 ‘유림공원’이 탄생하였다.
2년 여에 걸쳐 조성사업이 완료되고, 이를 기리는 내용을 시詩로 빚어 돌에 새기기로 결정되었다. 시 창작 청탁에 의하여 여러 날을 궁리한 끝에 시 1편을 빚었다. 그 다음에는 시를 새길 돌을 찾아 충청남도 보령시를 여러 차례 오가던 차에 적당한 오석을 만나 시를 새겨 공원에 건립하였다.
이 작품은 정재淨財를 조성하는 공원의 의미를 새기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런 글이 자칫하면 개인을 우상화하는 ‘용비어천가’가 되기 쉬워서 그런 우愚를 범하지 않되,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에게 희사하는 아름다운 공적은 드러나야 되기 때문에, 작품의 균형을 잡는 것이 요체라 하겠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일은 과거의 인연과 닿아 있게 마련이고,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미래 지향적인 내용을 담아내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하늘의 뜻이었을까
기러기 떼甲川落雁 찾아오고
고기잡이 횃불甲川漁火도 밝더니
피리漁隱夜笛 가락 따라
바람이 먼저 알고 길을 쓸었네
2007년, 희수喜壽맞아
유림裕林 이인구李麟求선생이
정재淨財 100억 원을 베풀어
2009년, 빛을 본 명품 공원
한밭의 중심에
숨결보다 귀한 세상을 열어
그대와 함께 가꾸는 행복의 노래가
정겨운 무지개를 세우리니
도심의 숲이 그립거든 오라
즐기고 공부하며
순정한 메아리를 아름다이 펼치며
눈빛을 나눌 그대여
봄꽃 사이 사랑이 흐르면
새들도 여름을 노래하고
단풍잎 붉게 타는 하늘이 고와
눈꽃 또한 마중하리니
웅숭깊은 배려가 사철 눈부시리니
-「유림공원에서」전문
1연은 유림 공원을 세우는 곳이 갑천의 한쪽이고, 지역적으로 대전광역시 유성구 어은동이어서 이와 관련한 역사를 인용하였다. ‘기러기떼’ 찾아온다는 부분은〔조선 환여승람〕의 대전 8경 중 ‘갑천낙안甲川落雁’에 연유한다. 또한 ‘고기잡이 횃불’이 밝다는 부분은 우암 송시열의 대전 8경중 ‘갑천어화甲川漁火’에 연유한다. ‘피리가락’은 김병홍의 유성8경 중 ‘어은야적漁隱夜笛’에 연유한다.
이와 같이 선인들이 노래한 아름다운 터에 유림공원을 건립하는 것은 역사적 의의가 뚜렷하고, 이는 하늘의 뜻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의미다. 1연의 마지막 행 <바람이 먼저 알고 길을 쓸었네>는 앞서 바람이 길을 깨끗이 쓸어서 귀인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뒤에 올 귀인이 훌륭한 업적을 쌓도록 준비하는 예비적 상황에 해당한다. 이렇게 선인先人들이 여러 번 노래하여 아름다운 공원이 건립되기에 이르렀으리라.
2연은 이인구 명예회장의 공원 건립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을 요체로 삼았다. 3연은 공원준공과 시민이 여가를 즐기는 행복을 노래하였다. 한밭의 중심은 세계의 중심이기도 하고, 이 공원에서 수많은 시민이 행복하게 즐기기를 소망하였다. 특히 ‘그대’는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모든 시민을 위한 배려라 하겠다. 4연은 즐거움을 나누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공원 조성의 초심(初心)에 해당하며, 여러 사람들이 와서 즐기고, 특히 어린이들의 학습장으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5연의 <봄꽃 사이 사랑이 흐르면/새들도 여름을 노래하고/단풍잎 붉게 타는 하늘이 고와/눈꽃 또한 마중하리니>는 사계절의 순환을 통하여 영원성을 상징하였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상세하게 설명해야 할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간결성을 부여하였다. 특히 <웅숭깊은 배려가 사철 눈부시리니>에서 ‘도량이 넓고 큰’ 이인구 명예회장의 배려가 오래도록 눈부시기를 기원하였다.
7. 가을빛 사랑을 위하여
구절초 흔들리는 가을의 산록에서 여름의 상처를 바라보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다. 토사가 쓸고 간 깊은 상처, 뽑혀진 나무가 누워있고, 구르던 돌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그러나 그 상처 속에서 여린잎이 솟아나고 있다. 반쯤 뽑힌 나무와 풀은 그 자리에서 푸름을 간직하고 있으며, 황토가 드러난 곳에서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태풍과 홍수에 쓸려 살갗이 찢어진 산과 들이지만, 그 속에서도 자연은 변함없이 태동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경이로움이다.
이처럼, 자연은 그대로 두어도 상처가 치유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이 상처를 서둘러 치유하고 아픔을 줄이는 일은 우리 모두의 관심과 사랑이다. 다시 토사에 쓸려나지 않도록 작업을 하고, 풀과 나무가 잘 자라도록 배려할 일이다. 이러한 일은 수동적 의무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사랑과 봉사로 실현된다.
높은 하늘 아래, 여름의 아픔을 잊고 가을을 수놓은 나무와 풀을 보며, 이들 모두 더욱 행복한 환경에서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가을에 우리는」이라는 시1편을 지었다.
저것 봐
맑은 하늘을 머금으며
구절초, 저 연연한 눈빛이
그리움을 가꾸네
분노처럼 거칠게 몰아치던
태풍도 용서하고
폭우의 아픔도 잊고
하늘 닮은 마음이 되려네
저것 봐
과원에 넘치는 함성들
인고의 세월 건너 흔드는
진실의 깃발들
가을에 우리는
햇살에 영그는 소망을 보며
하나가 되네
순정한 가슴을 나누네
-「가을에 우리는」전문
산이 무너지고, 둑이 터지고, 농토에 토사가 밀리는 아픔처럼, 우리의 현실 생활에도 헤아릴 수 없는 아픔들이 가까이에 있다. 나무가 뽑히듯이 어떤 가족은 뿌리째 뽑히기도 하고, 어떤 어린이는 돌볼 사람마저 찾아볼 수 없기도 하고, 어떤 여성은 또 다른 피해로 눈물을 짓기도 한다. 이처럼 약한 사람들에게 울타리가 되고, 일어서도록 부축하는 힘이 되고, 따뜻한 가족이 되려는 봉사가 실행되고 있다.
충남지방경찰청과 충남대학교병원이 힘을 모아〔여성, 학교 폭력피해자 ONE-STOP지원센타〕를 충남대학교 병원에 개설하여 그들의 눈물을 씻어줄 요량이다. 충남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계에서는 경찰에게 주어진 의무와 함께 피해자들이 상담, 의료, 수사, 법률 지원 서비스를 한 곳에서 받도록 운영하고 있다. 이 ‘ONE-STOP 지원센터’의 벽에 걸어놓을 시화를 청탁받았다. 심신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게 소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작품을 부탁받았다. 그래서 시 한 편을 쓰면서, 우리 사회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제 토사가 쓸고 간 상처 속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풀과 나무가 자라듯이, 몸과 마음의 상처를 받은 여성과 청소년들도 아름다운 소망을 가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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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의 글 ◆
문학은 생동하는 울림이다
<문학의 날갯짓을 위하여>
새는 부리로 날개를 다듬고, 다시 날개를 펴서 바람에 씻는다. 이는 날아야 할 때를 위한 준비다. 집에서 기르기 때문에 날지 않는 닭도 부리로 날개를 다듬거나, 모래로 멱을 감으면서 몸과 털을 정리한다. 오리도 기름샘에서 기름을 묻혀 털이 물에 젖지 않도록 준비한다. 이러한 준비과정은 비상飛翔을 위함이다.
문학 창작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살면서 부딪친 사물들에 대하여, 정교한 언어로 정확하고 멋지게 표현하자면, 수많은 부리 다듬음과 날갯짓이 필수적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준비과정이 필요함은 물론, 시행착오와 같은 수많은 반복을 통하여 전문가로 자리한다. 예술품다운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함이다.
<문학의 뜨거움을 위하여> 문학청년일 때에는 양면성을 띠었다. 문학은 생의 목표이자 평생을 바쳐 추구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굳은 신념도 지녔었다. 때로는 문학이 내가 살아가는데, 윤활유와 같이 삶의 보조적 취미활동이라는 여기餘技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문학창작의 길에 깊이 빠지면서 문학이 내 삶의 일부이자 전체라는 의미에 이르렀다. 그 길이 허상을 좇는 어리석음을 내포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구도자와 같은 테두리를 만들었다. 그 속에 갇히는 일이 행복하고 만족하였다. 스스로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을 즐겼다.
문학에 대해서 주문처럼 속삭이는 말이 있다.
<문학은 역사 이래 예술 중의 으뜸으로 자리매김 되어 왔습니다. 아름다운 서정을 노래하기도 했으며, 사회 여러 분야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기도 했고, 때로는 문학이 곧 학문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문학은 질풍노도가 되어 세상의 어둠을 쓸어내기도 했으며, 어둔 밤에 촛불의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고, 새벽을 노래하는 닭 울음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문학의 역할을 주문처럼 되새기며 창작의 밭을 갈고 있다. 이런 날갯짓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되풀이될 것이다.
<나와 우리의‘문학사랑’을 위하여>
여전히 부족한 글을 빚어내고 있으며, 어쩌면 만족할 만한 작품을 영원히 창작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문학에 대한 짝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가난과 힘든 작업, 두서없던 일들로 청춘시절을 보내고, 문학창작에 전념하기 시작하였을 때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발표지면의 부족이 심각하였다. 1980년대만 해도, 문학잡지 발간이 문화공보부의 허가사항이어서 한정된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가뭄에 콩이 나는 형국이었다.
몇몇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려면, 시골 문사들은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가끔 원고청탁을 받기도 하였지만, 선물을 들고 찾아가거나 점심을 거나하게 대접하거나, 정기 구독을 하면 발표 지면이 수월하게 제공되었다. 혹자는 작품 수준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점심을 대접하면 수준 낮았던 작품들이 콩나물처럼 자라니, 그것이 요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충청권에서도 문학잡지를 발간하기로 하였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한국문인협회에서 발행하는〔월간문학〕에 월평을 자주 쓰기도 하여 지면의 부족을 심각하게 느끼지는 않았지만, 신진 문인들의 경우에는 실망을 하다가 낙담하기도 하였다.
1977년부터 발간하던 동인지『도가니』를 1993년에 문학전문잡지『오늘의문학』으로 등록하여 발간하였다. 이후, 2002년에 제호를『문학사랑』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 한 권의 결호도 내지 않았다. 400여 쪽의 분량도 엄중하게 지켰다.
혹자는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부피가 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작품 수준이 중요하다는 질시어린 충고를 접하기도 하였다.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반성하며, 일신日新 우일신又日新하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동시에 엄혹한 문학전문지 상황을 극복하며, 끝끝내 살아남기로 다짐하였다.
때로는 질시하는 투로 말씀하시는 분들의 작품 수준을 우리가 발간하는 문학지의 수준이 이미 추월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험난한 길을 치열하게 걸어왔다. 앞으로도 자존감을 찾으며 이 길을 계속 걸을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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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헌석 시인∥
∙ 1951년 충남 공주 출생
∙ 시집
『갈채의 술. 1982』『네가 시인이라 하니. 1986』『어부슴.1990』
『미완성 연가.1996』『디디울나루.1999』『반 내림을 위하여.2003』
『은이의 인형.동시.2005』『새소리는 덤이다.2007』
『갈채하는 숲(한중대역).2008』『섬바위.시조.2011』『숨결찾기.선집.2014』
『공산성바람소리.2015』
∙ 수필집(에세이)
『혼자 알기가 미안하여.2012』『식장산 편지. 2013』
∙문학평론집
『한국 현대시사의 신지편.1988』『우리 시의 얼개.1993』『불심이 깃든 시 산책.2003』
『정훈 시 읽기.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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