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날 우리는 다시 군인들 트럭에 태워져 대구역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대구역을 보니 그 규모가 엄청 큰 것에 놀랍니다.
우리는 또 군인들의 트럭에 태워져 대구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날이 1950년 7월27일입니다.
나는 나이가 14살이라고 하지만 키가 작아서 어린소년으로 보였는지 작은 방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는 어린아이들 3명이 누워 있고 나 까지 4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보호자들이 있지만 나만이 보호자가 없습니다. 내가 소변이 마려울 때 보호자 한분이 내 고추에 소변기를 대 주어 소변을 누게 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대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더운 지역입니다.바람 한점 없는 병실에는 창문이 하나 있는데 창밖에는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게 보입니다.
그 무렵에는 선풍기가 뭔지도 모를 때 입니다. 그리고 그 흔한 부채도 없습니다. 숨이 막히고 땀이 비오듯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은 의사와 간호사가 부족하고, 약품이 부족하여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해 환자들의 상처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데 그 고약한 냄새가 병원을 가득 메워 나는 자꾸만 구역질을 합니다.환자들은 3일에 한번씩 치료를 받습니다.
그리고 밖은 웬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너무 시끄럽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고 말도 많습니다.,더구나 대구시민만 있는게 아니고 전국의 피난민들이 다 대구로 모였잖은가?
아까 군인들 차를 타오고며 보이는 것은 천지가 흰옷을 입은 사람들 뿐입니다. 어디를 봐도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형들은 다 어찌 되었을까? 나는 하루종일 문만 바라봅니다 혹시 어머니가 살아서 돌아와 나를 찾아올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틀림없다라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종일 문만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창문밖의 은행나무에 징그러울 정도로 열린 은행알을 셉니다. 세다가 잃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세고 또 잃어버리면 다시세기를 반복하지만 한번도 제대로 센 적이 없습니다. (계속) |
첫댓글 같은 풍파와 고난을 다 겪으셨습니다.
올리신글 잘 보고 갑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님만이 찾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깔끔이님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