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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9월 17일 목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 또는
[백] 빙겐의 성녀 힐데가르트 동정 학자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그가 되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며, 죄인인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11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6-50
그때에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에 집으로 손님을 초대하였을 때에는 먼저 문 밖으로 나가서 손님을 환영하는 뜻으로 손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평화를 비는 의미로 볼에 입을 맞추는 것이 예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물과 수건을 준비해서 손님이 발에 묻은 흙과 먼지를 씻을 수 있게 한 다음, 향료를 피우거나 손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 손님이 머무는 동안 그 향이 은은하게 퍼지도록 해 주어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어 보면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이러한 예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인인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 발을 씻어 드리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 다음, 가지고 있던 향유를 예수님 발에 발라 드렸습니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것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랑과 만족을 위해서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복음에 등장한 바리사이와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혹시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려 하거나, 내가 바라는 대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이 보여 준 모습처럼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한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지은 죄와 잘못을 뉘우치며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애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왕태언 요셉 신부)
부끄러움의 은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사목자, 수도자들을 포함한 종교인들이 물질만능주의에 푹 빠져 누릴 것 안 누릴 것 다 누리고 아쉬움 없이 살아가게 될 경우 즉시 나타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고통받는 양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상처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들의 깊은 상처를 싸매주고, 힘겨운 마음을 달래줘야 하는데, 영적인 눈이 감기다 보니 아예 그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딱 그러했습니다. 형식적이고 가시적인 것에만 혈안이 되다보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에 대한 공감 능력도 사라졌습니다. 율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죄인들과 주변인들을 단죄하고 험담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가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이 마련한 잔치에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그 자리에 죄인인 한 여자가 지극 정성으로 예수님을 환대하자, 그 꼴을 못보고 뒷담화를 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잔치를 주관한 바리사이는 육적인 눈은 뜨고 있었지만, 영적인 눈은 감겨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처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드러난 현실을 보고 험담하고 판단하고 단죄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공감의 대가셨습니다. 공감이라는 표현은 동정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아픔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련하고 불완전한 우리 인간의 운명을 당신의 온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고, 우리와 똑같이 살아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우리 주님의 육화강생인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밥먹듯이 죄를 짓고 방황하며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고통이 곧 내 고통이다. 네 눈물이 곧 내 눈물이다. 네 슬픈 운명인 곧 내 운명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한 여인의 삶의 방향을 죄와 죽음에서 생명과 구원으로 되돌려놓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 참으로 소중한 삶의 태도인 듯 합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인데, 부끄러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엉뚱한 사람의 몫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가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끄러워하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크게 용서하시고, 힘을 주시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연히 두 개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조선의 왕은 극진한 보호를 받고, 잘 먹는데도 당시 사람보다 단명하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60억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사막화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조선의 왕이 단명한 이유는 현대의 상식으로는 맞지 않는 구조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왕은 하루에 다섯 번 식사하였다고 합니다. 많은 반찬, 특히 고기 위주의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고된 일에 시달리면서 운동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경연이 있었고, 회의가 있었고, 상소문을 읽어야 했습니다.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도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왕은 너무 먹었고, 운동은 부족했고,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왕들의 사망 원인 중에 ‘종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서 종기를 쉽게 이겨낼 수 있었지만, 당뇨와 심장 질환이 있는 사람은 면역력이 약해져서 종기의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조선의 왕은 바로 그런 구조에서 살았기에 생각보다 단명하였다고 합니다. 반면에 조선의 백성과 신하 그리고 같은 궁궐에서 살았던 내시는 왕들보다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이는 적당한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왕 중에 장수한 왕으로 ‘영조’가 있는데 그는 조선의 왕을 보호하는 구조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국은 사막화가 심화하여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방지책으로 나무를 심어 만리장성을 쌓기로 했습니다. 60억 그루의 나무를 심어서 사막화를 막으려 했습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모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무를 심으면서 지하수가 고갈되었고, 나무는 시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사막화는 막을 수 없었고, 중국의 수도인 북경도 매년 사막화로 불어오는 황사로 피해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원래 사막에 살던 야생마를 풀어놓자는 아이디어입니다. 야생마는 사막을 다시 원래의 생태계로 돌아오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야생마가 돌아다니면서 땅을 밟았습니다. 야생마가 땅을 밟으면서 그 사이로 물이 스며들었습니다. 야생마는 이동하면서 변을 보았는데 그 변에는 발아되기 쉬운 씨앗이 함께 있었습니다. 야생마가 먹은 씨앗은 변으로 나오면서 쉽게 싹이 돋았습니다. 야생마가 다니면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땅이 부드러워졌고, 그 위로 식물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식물이 자라면서 곤충도 날아오고, 곤충이 날아오면서 새도 날아왔다고 합니다. 인간의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던 사막화가 수만 년 동안 그곳에 살면서 생태계를 유지했던 야생마가 함께 하니 사막화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은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입니다. 군인들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도 복음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된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복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은 마음 졸이던 사람에게 복음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부모에게 복음입니다.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맞이하는 제대의 날도 복음입니다. 서류 미비자로 불안하게 살던 사람이 영주권을 받았다는 소식도 복음입니다. 의식을 잃었던 환자가 마침내 눈을 뜨고 가족을 바라보는 순간도 복음입니다. 제게도 복음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던 벽보에서 제 이름을 발견했던 순간입니다. 그 이름은 제가 신학교에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초대받았다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가장 큰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군대를 조직하지 않으셨고, 권력을 차지하지 않으셨으며,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을 치유하셨고, 죄인을 용서하셨으며, 소외된 사람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고, 향유를 발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주었다.” 바리사이 시몬에게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율법이 있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따뜻한 사랑과 자비가 부족했습니다. 반면에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여인에게는 내세울 만한 지위도 없었고, 율법에 관한 지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회개의 눈물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죄는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인이 용서받고, 상처 입은 사람이 위로받고, 길을 잃은 사람이 다시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심판과 비난이 아닙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강요와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사람의 마음을 바꿉니다. 인간은 나무를 심을 수 있지만 생명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법과 제도를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 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병을 치료할 수 있지만 영혼의 상처까지 온전히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머물면 메마른 사막에도 생명이 돌아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면 미움이 용서로 바뀌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며, 전쟁이 평화로 바뀝니다. 오늘도 인간의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기보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면 좋겠습니다. 판단보다는 용서를 선택하고, 비난보다는 위로를 건네며, 소유하기보다는 나누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웃에게 기쁜 소식이 되고,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당신 나에게 나 당신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당신의 마음이
늘 먼저
나에게
나의 마음을
잊지 않고
당신께
당신의 눈길이
늘 먼저
나에게
나의 눈길을
잊지 않고
당신께
당신의 손길이
늘 먼저
나에게
나의 손길을
잊지 않고
당신께
당신의 발길이
늘 먼저
나에게
나의 발길을
잊지 않고
당신께
당신의 믿음이
늘 먼저
나에게
나의 믿음을
잊지 않고
당신께
당신의 희망이
늘 먼저
나에게
나의 희망을
잊지 않고
당신께
당신의 사랑이
늘 먼저
나에게
나의 사랑을
잊지 않고
당신께
오늘의 성인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e)
신분 : 추기경, 교회학자
활동연도 : 1542-1621년
같은이름 :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 벨라르미누스
성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또는 로베르토)는 1542년 10월 4일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몬테풀차노에서 태어나 1560년 10월 예수회에 입회하여 1570년 3월 2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당시 교회는 종교 개혁자들에 대항하느라 교부학과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경시되던 상태였다. 토스카나 지역의 유망한 젊은 학자로서 그는 종교 개혁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교리를 체계화하고 성서를 연구하는 두 가지 일에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루뱅(Louvain)에서 예수회 회원으로는 처음으로 교수가 된 사람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그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세 권으로 된 “이단 반박론”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교황의 세속권과 평신도의 역할에 관한 부분들이다. 그는 ‘왕권신수설은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분노를 초래했으며, 또한 로마 교황의 세속권을 발전시켰다. 비록 그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인 버클레이와 대항하여 교황을 옹호했지만,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벨라르미노는 1599년 ‘학식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다. 벨라르미노는 바티칸 궁전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이 실천해 오던 내핍생활을 전혀 완화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만을 먹으면서 거의 아주 필수적인 것 이외에는 가계비 지출을 제한했다.
그는 군에서 탈영한 한 군인의 몸값을 치렀고, ‘벽은 감기 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방의 커튼을 가난한 사람의 옷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많은 활동 가운데 그는 특히 교황 클레멘스 8세 시대의 신학자로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두 개의 교리서를 준비했다.
벨라르미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논쟁은 1616년에 일어난 일로 그가 찬양하던 자기 친구 갈릴레이에게 충고를 해야 했던 것이다. 벨라르미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성서에 위배된다고 결정한 신앙교리 성성을 대신하여 충고를 했다. 이 충고는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것을 가설 이상으로 지나치게 비약시키는 데 대한 하나의 본보기였다.
벨라르미노는 1621년 9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성 과정은 1627년에 시작했으나 그의 저서에서 연유된 정치적 이유로 인해 지연되다가, 1923년 5월 13일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930년 6월 29일 시성되었다. 1931년에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성 람베르토 (Lambert)
활동년도 : 635-705년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마스트리흐트(Maastricht)
같은 이름 : 람베르또, 람베르뚜스, 람베르투스, 램버트
플랑드르(Flandre) 지방 마스트리흐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람베르투스(Lambertus, 또는 람베르토)는 성 테오다르드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의 스승이 668년에 살해되자 통그레스-마스트리흐트의 주교로서 그를 승계하였다. 그러나 서 프랑크의 실력자인 에브로인의 미움을 받아 스타블로(Stavelot)로 귀양을 갔다. 그 후 681년에 에브로인이 살해됨으로써 복권되었다. 그러나 그는 국왕 피핀이 아내의 동생인 플렉투르다와 간음한 사건을 묵인하지 않고 비판함으로써 리에주(Liege)에서 살해당하였다. 그는 위대한 순교자이자 복음 선포자로서 벨기에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