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봄맞이/靑石 전성훈
이곳저곳에서 봄이 온다기에 어디쯤 왔는지 궁금하다. 예년에 비하여 조금은 추운 겨울을 보낸 우리 강산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알 수 없어, 봄, 봄 하며 호들갑 떠는 봄의 모습이 보고 싶다. 무턱대고 그냥 집에서 기다릴 수 없어 집을 나선다. 출발하기 전에 어디로 갈지 미리 방향을 정한다. 1호선 도봉산역에서 4호선 당고개역으로 수락산 둘레길을 걷기로 한다. 전철을 타고 나서, 전철 안의 시간을 쳐다보니 오전 9시 38분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서 나온 시각이 오전 8시 45분인데 벌써 이렇게 될 리가 없다. 도봉산역에 내려서 역사 안의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9시 05분이다. 도봉산역을 빠져나와 상도교 방향으로 걷는다. 상도교 밑 중랑천에는 아침부터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조깅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보인다. 어른 팔뚝만한 커다란 물고기가 보일까 하고 다리 밑을 열심히 찾아봐도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다. 물고기들도 이른 아침에는 수초나 돌 밑 어딘가에서 느긋하게 쉬는가 보다. 의정부와 서울 노원구 경계에 있는 수락산 둘레길 초입에 들어서니 아주 조용하다. 산새 소리도 들리지 않고 길고양이도 이사했는지 눈에 안 띈다. 의정부 둘레길 안내문에 ‘소풍길’이라고 쓰여 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 아름다운 이 세상을 소풍이라고 표현한 것을 인용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둘레길로 들어서니 개울가에 겨울의 잔재가 보인다. 겨우내 개울을 덮고 있었던 얼음덩어리, 모두 다 녹아 없어졌는데 아직도 떠날 준비가 안 된 얼음 뭉치가 흉물처럼 개울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면 사람이나 자연이나 그 모습이 추하고 볼썽사납다.
20분 정도 천천히 올라가니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벽운골 계곡으로 내려서자, 계곡 옆 잔디밭에서 초로의 늙은이가 아침부터 혼자 술잔을 기울인다. 그 모습이 아름답거나 멋져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쓸쓸하고 을씨년스럽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 양반은 아침부터 사람이 오가는 숲속 길목에서 술잔을 들고 있을까.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 봐주지 못하고 어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듯한 나 자신이 이상한 것 같다. 노원골에 다다르자, 산 정상으로 오르려는 사람과 둘레길을 걷는 사람이 꽤 많다. 이곳에서도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시화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의정부시와 노원구가 경쟁하듯 서로 천상병 시인을 상품화하는 듯하다. 한동안 수락산에서 머물렀던 천상병 시인, 수락산이 두 곳을 모두 품고 있는 형상이니 누구를 탓하리오. 천상병 시인은 저 높은 하늘에서 아등바등하는 속세를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수락산 옛 채석장 터를 향하여 가는 동안 이따금 사람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내 인사말을 못 듣고 그냥 지나가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맞장구를 쳐 준다. 한동안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걸으니 그야말로 산속은 고즈넉하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누렇게 변해버린 나뭇잎뿐이다. 간간이 파란 솔가지가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재선충에 감염돼 예방주사를 맞았다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소나무뿐이다. 산길에 쌓인 낙엽은 후손을 위하여 흙으로 돌아가고 후손은 새봄에 새싹을 피우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미세 먼지가 심해서인지 건너편 불암산 정상이 깨끗하게 보이지 않는다. 거의 반년 만에 수락산 둘레길을 걸으니까, 힘이 들고 다리도 아프고 옆구리도 쑤신다. 불편함을 견디며 걸어가는 내 앞으로 젊은이가 휙 하고 쏜살같이 지나간다. 한때는 번개처럼 빨리 걷는 젊음을 무척 부러워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전혀 부럽지 않다. 세월 따라 그냥 순응하면서 내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욕심을 부리고 맘대로 안 된다고 섭섭해하고 짜증을 내어 본들, 마음이 상하고 힘 드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내 자신이다. 바람이 조금 차게 부는 3월 중순, 아직은 초목에 물이 오르는 파릇파릇한 봄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이지는 않지만, 땅속 어딘가에서는 새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겠지. 세상만사 때가 무르익어야 꽃도 열매도 맺히는 것이리라. (2025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