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신 뒤 남긴 약 3,540만 원을 오빠와 나눴다는 이유로, 올케는 저를 “시집간 딸이 왜 친정 돈을 가져가냐”며 찾아와 욕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은 음력 섣달 스물둘이었습니다.
하늘은 잔뜩 흐렸고, 찬바람이 문틈으로 계속 들어왔습니다.
저는 빈소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종이돈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불꽃이 위로 튈 때마다 제 그림자가 벽에 흔들렸습니다.
오빠는 옆에서 담배만 피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례를 다 치르고 나서, 올케가 엄마 통장을 꺼냈습니다.
엄마가 평생 아끼고 아껴 모아둔 돈이었습니다.
통장에는 약 3,540만 원 정도가 남아 있었습니다.
올케가 먼저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모은 돈인데, 잘 나눠야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빠가 저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나누면 좋겠냐?”
저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오빠가 아들이니까 조금 더 가져가.
오빠가 약 2,220만 원 가져가고, 나는 약 1,330만 원만 받을게.”
그게 제 기준에서는 충분히 양보한 분배였습니다.
엄마가 아픈 마지막 2년 동안, 저와 오빠는 함께 책임졌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병원비도 냈고, 간병도 했고, 필요한 물건도 제가 챙겼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제가 더 많이 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오빠가 아들이고, 엄마 집안일도 정리해야 할 테니 조금 더 가져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올케는 그때 웃었습니다.
“역시 시누이가 참 경우가 있네. 어머니가 딸 하나는 잘 키우셨어.”
그 말도 그때는 좋게 들었습니다.
오빠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 자리에서 돈을 나눴습니다.
저는 그 일이 조용히 끝난 줄 알았습니다.
남들 보기에도 흉하지 않게, 형제끼리 싸우지 않고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바뀌자,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정월대보름이 지나고 얼마 안 됐을 때였습니다.
올케가 친척 단체방에 이상한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시집간 딸은 남의 집 사람이라더니, 돈 나눌 때는 친정딸 노릇 잘하네.”
“입으로는 공평하다고 하지만, 속셈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남편이 착하면 옆에서 챙기는 사람이 바보 된다.”
처음에는 그냥 못 본 척했습니다.
괜히 반응하면 일이 커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오빠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습니다.
“동생아… 그 돈 말인데.”
저는 이미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오빠는 힘겹게 말을 이었습니다.
“네가 받은 약 1,330만 원, 다시 돌려주면 안 되겠냐?
네 올케가 매일 난리야.
시집간 여동생한테 친정 돈을 그렇게 많이 나눠줬다고, 내가 못난 오빠라고…”
저는 그때 아이 밥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오빠.”
저는 최대한 목소리를 누르며 말했습니다.
“엄마 병원비 기억나?”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계속 말했습니다.
“처음엔 오빠가 돈이 없다고 해서 내가 약 1,150만 원 먼저 냈어.
나중에 반반 하자고 했을 때도 오빠가 또 어렵다고 해서 내가 약 620만 원을 더 냈고.”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내가 오빠보다 약 1,770만 원을 더 냈어.
그런데 엄마 돈 나눌 때 오빠가 약 2,220만 원 가져가고 나는 약 1,330만 원 가져갔잖아.”
저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습니다.
“이걸 다시 계산하면, 도대체 누가 손해 본 거야?”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때 말하지 않은 것도 많았습니다.
엄마가 마지막 달 병원에 계실 때, 올케는 병원에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더럽다고 했고, 힘들다고 했고, 자기 집안일도 많다고 했습니다.
엄마 몸을 닦아드린 사람도 저였습니다.
기저귀를 갈아드린 사람도 저였습니다.
밥을 떠먹이고, 약을 챙기고, 밤새 옆에서 지킨 사람도 저였습니다.
하루는 엄마가 침대에서 실수하셨습니다.
간병인은 바쁘다며 미루었고, 저는 장갑을 끼고 조용히 하나하나 치웠습니다.
그날 엄마는 제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딸아, 엄마가 너한테 해준 게 너무 없다.
값나가는 것도 못 남기고 가네.”
저는 엄마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엄마가 나를 키워준 게 제일 큰 거야.
다른 건 필요 없어.”
그런 말들을 저는 오빠에게 굳이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끼리 일일이 계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우리 둘 다의 엄마였으니까요.
누가 더 많이 했고, 누가 덜 했는지 따지는 게 싫었습니다.
그런데 올케는 아니었습니다.
3월 어느 날, 올케가 직접 제 시댁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 앞에서 제 얼굴을 가리키며 소리쳤습니다.
“시집간 딸이 무슨 낯으로 친정 돈을 가져가요?
그 돈은 어머니가 우리 집에 남긴 돈이에요.
당장 받은 돈 돌려줘요.”
그 순간 제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시어머니는 옆에서 난처한 얼굴로 서 있었고,
동네 이웃들은 창문 너머로 슬쩍슬쩍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땅속으로 숨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참지 않았습니다.
저는 방으로 들어가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습니다.
그 안에는 엄마 병원비와 약값, 간병비 입금 내역이 모두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한 장씩 꺼내 올케 앞에 펼쳤습니다.
“엄마 병원비 2년 동안, 내가 쓴 돈이 약 1,800만 원이야.”
그리고 다음 장을 펼쳤습니다.
“오빠가 낸 건 약 490만 원.”
올케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저는 계속 말했습니다.
“엄마 돈 나눌 때 나는 약 1,330만 원 받았어.
계산하면 나는 아직도 손해고, 오빠는 오히려 더 가져간 셈이야.”
올케는 서류를 한참 내려다봤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떠나기 직전, 딱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그건 다르죠.
딸이 엄마 돌보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돈으로 계산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정말 웃음이 나올 뻔했습니다.
돌볼 때는 딸이니까 당연하고,
나눌 때는 시집갔으니까 외인이라는 겁니까.
그날 오빠는 마당 밖에 서 있었습니다.
끝까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올케가 저를 그렇게 몰아붙이는 동안,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석 달 동안 저는 오빠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늘 말했습니다.
“네 오빠는 집안의 기둥이야.
네가 여동생이니까 조금씩 양보해.”
저는 평생 양보했습니다.
먹을 것도, 옷도, 엄마의 관심도, 집안일도.
그런데 마지막에는 엄마가 남긴 작은 흔적까지 양보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전환점은 6월에 찾아왔습니다.
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차와 부딪혔고,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올케 혼자 감당이 안 됐는지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저는 전화를 끊고 집 안에 10분쯤 앉아 있었습니다.
가지 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실에 들어가자 오빠는 다리에 깁스를 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얼굴도 부어 있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오빠 눈이 빨개졌습니다.
“동생아…”
그는 목이 쉬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오빠가 미안하다.”
저는 침대 옆에 서 있었습니다.
눈물이 났지만,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만해. 몸이나 먼저 낫게 해.
갈비탕 끓여왔어. 보온통에 있어.”
올케는 옆에서 사과를 깎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국을 그릇에 따라 침대 옆에 놓고 돌아서려는데, 오빠가 저를 불렀습니다.
“그 돈…”
저는 멈춰 섰습니다.
오빠가 말했습니다.
“내가 받은 약 2,220만 원, 우리 다시 반반 나누자.”
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오빠는 이어 말했습니다.
“네가 맞았다.
엄마는 우리 둘의 엄마였어.
내가 너무 늦게 알았다.”
저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가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오빠, 그건 돈 문제가 아니야.”
제 목소리가 조금 떨렸습니다.
“그건 엄마가 우리 둘에게 남긴 마지막 것이었어.
나는 그 돈 때문에 우리 남매 사이가 망가지는 게 싫었어.”
며칠 뒤, 오빠는 퇴원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약 890만 원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다시 제대로 나눈 거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밀고 당기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은행에 넣어두었습니다.
언젠가 조카가 대학에 갈 때 쓰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제 마음속에는 아직도 작은 응어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게 꼭 돈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에게 시집간 딸은 부모를 돌볼 때만 자식이고,
부모가 남긴 것을 나눌 때는 남이 되는 걸까요.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고,
같은 엄마 손에 자랐고,
같은 엄마 병원 침대 옆을 지켰는데,
왜 아들은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고,
딸은 받는 순간 욕심 많은 사람이 되는 걸까요.
엄마가 이 일을 알았다면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직도 가끔 엄마 생각을 합니다.
엄마 통장에 남아 있던 그 돈은 큰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 때문에, 저는 많은 걸 알게 됐습니다.
누가 엄마를 정말 마음으로 기억하는지.
누가 돈 앞에서 얼굴을 바꾸는지.
그리고 가족이라는 말이, 생각보다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모님 병간호는 딸도 똑같이 했는데,
유산을 나눌 때만 “시집간 딸은 외인”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냥 참고 넘어가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