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8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평강이뇨? 》
살후 3:16~18
〈 오마이가스렌지! 〉
‘평강’을 주제로 설교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평강’을 주제로 설교해야지, 다짐하면서 자문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평강을 누려본 적이 있었던가?”
냉큼 “예”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인 내가 지금까지 평강을 누려왔다고 대답할 수 없다니! “오마이가스렌지!”
“오마이가스렌지!” 이 말은 유치원생 여섯 살 손자놈이 가끔 경탄조로 하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한쪽 귀로 흘려듣다가 자세히 보니 “오마이갓” 해야 할 때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손주 녀석을 흉내내어 저도 “오마이갓”이 아니라 “오마이가스렌지”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박장대소합니다.
☞ 하아~ 주님이 저를 보면 얼마나 한심할까요?
“저는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만끽하는 중입니다!” 이렇게 고백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누리는 ‘평강’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해서 그렇지, 목사씩이나 되는 내가 평강을 못 가질 수가 없을거야!”
☞ 사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평강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그 평강을 체감하지 못할 뿐입니다. 학습이 안 되어서입니다.
“이것이 평강이다!” 알아야 손에 쥔 평강을 평강으로 인식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설교를 위하여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은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근심 걱정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사는 것이 평강 아닐까요?”
속으로 ‘오, 명답이네~’ 했습니다. 속으로만 하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당신이 제대로 알고 있네, 한분자 제법인뎅~”하고는 마주 보고 까르르 웃었습니다.
알고보니, 손자놈 흉내로 “오마이가스렌지!”하고는 부부가 마주보고 박장대소하는 것,
“당신이 제대로 알고있네!” 칭찬하고 마주 보며 까르르 웃는 것!
☞ 이것이 평강입니다!
〈 맨발걷기와 평강 〉
저는 요즘 맨발걷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맨발로 하루 한 시간 이상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설교 준비를 하다가 맨발 걷기에 나섰습니다. 아내는 바쁘다하여 혼자 나섰습니다.
혹서기지만 우거진 숲길을 걷습니다. 가다가 벤치에 앉았습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혹시 ‘평강’ 아닐까?”
인생 황혼에 병마도 하나 꿰차고 땀을 뻘뻘흘리며 맨발로 걷다가 벤치에 앉으니 평강?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빼꼼빼꼼 혀를 내밉니다.
불어오는 바람은 땀에 흠뻑 젖은 가슴을 파고듭니다.
하늘이 말합니다. 바람이 말합니다.
“이것이 평강이 아니면 무엇이 평강이뇨?”
참 기가 막히지만 평강입니다.
바쁠 것도 없이, 서둘 것도 없이, 재촉할 것도 없이, 마냥 앉아있습니다.
앉아서 하늘과 바람을 안아주는 일, 평강이 분명합니다.
생각해 보니, 이것만 평강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후 평강이 만땅이었습니다.
아내의 말처럼, “근심 걱정 주님께 맡기고 사는 삶” 이것이 평강입니다.
저는 맨발 걷기를 하면서 사탕 한 알을 먹습니다.
꽤 굵은 알사탕을 사서 배낭에 넣어두고 딱 한 알씩 꺼내서 입에 넣습니다.
깨뜨리지 않고 혀로 굴려 가면서 다 녹을 때까지 단맛을 즐깁니다.
전에는 알사탕의 달디단 맛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평강입니다.
평소에는 몰랐지만 감기 걸리면 알게 되는 공기의 고마움도 평강입니다.
맨발 걷기하다가 나무뿌리에 채여 살갗이 벗겨져 피가 날 때 신발의 고마움을 새삼 압니다.
그러고 보니 신발 신고 걷는 것도 평강입니다.
사방이 ‘평강 천지’입니다. “오마이가스렌지!” 할렐루야, 샬롬! 샬롬!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6~18절)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
☞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3가지가 함께 있기를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3가지 〉
첫째, 평강입니다.
둘째, 주님입니다.
셋째, 은혜입니다.
예수 믿는 이들에게 있어야 하는 3가지입니다. 뒤에서부터 보겠습니다.
셋째, 은혜 (1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그동안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이 말은 기독교인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얼굴이 훤하면, “목사님, 은혜가 충만하시니 얼굴이 달덩이처럼 훤하십니다!”
예배 마치고 목사와 인사를 나누면서도 “목사님 오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무 공로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인으로 판결하십니다.
그리고 천국 백성을 삼아서 천국으로 영접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둘째, 주님 (16절 b) “주께서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경은 물론이고 교회나 성도에게 ‘주님’이라는 단어는 2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성자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종종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물론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야 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수시로 자문자답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주님이 함께 계시는가?’
이 질문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바울 사도가 축복기도를 해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16절 b)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면, 우리에게 3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평강, 둘째 주님, 셋째 은혜.
우리에게 있어야할 것이 많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도 있어야 합니다.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도 계셔야 합니다. 평강-주님-은혜도 충만해야 합니다!
☞ 오늘 집중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주제가 ‘평강’입니다.
〈 평강 - 에이레네 〉
평강, 신약의 언어인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에이레네’ 즉, 평강은 신약에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중 “다 이루었다”(요 19:30)가 있습니다.
가상칠언 중 여섯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평강’을 비로소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숨을 거두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흘 뒤 부활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19:20)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려고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려야 하는 평강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들을 하나하나 제거하십니다.
이제 예수님 앞에는 거역하는 것들이 단 하나도 있지않습니다.
☞ 전쟁으로 비유하자면, 완벽한 승리입니다. 적군을 완전히 섬멸했습니다.
이렇게 승리하여 이룩한 “평강”입니다.
그 “평강”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3장 16절을 다시 읽습니다.
(16절)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먼저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그저 입술로만 말하는 그런 평강이 아닙니다.
평강을 헤치는 모든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까지 내놓으시며 완전한 평강을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평강을 주려고 어떻게 합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녀가 누려야 할 평강을 깨뜨리는 세력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녀가 평강을 누리도록 해 주십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평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손에 쥔 평강을 평강인 줄 모릅니다. 바울이 그래서 말씀합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 평강 – 샬롬 〉
평강은 신약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평강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언어인 히브리어의 평강이 무엇입니까? ~ 샬롬!!! 샬롬입니다.
신약에서는 헬라어로 에이레네, 구약시대에는 히브리어 샬롬!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구약시대에 이미 오실 메시아,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선포된 대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본문 16절에서도 “평강의 주”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평강,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원대하고 치밀하신 섭리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평강”을 주님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축복합니다.
첫째 평강, 둘째 주님, 셋째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3:18)
〈 우리가 받아 누리는 평강 〉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임마누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야 한다!
이 둘은 우리가 잘 알고 신앙생활 합니다.
그런데, “평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여기에 취약성을 드러냅니다.
예수 믿고 살면서도 늘 한숨과 불안과 불평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이 맞지요?
예수 믿었다고 집안에 우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마음먹은 대로,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통계는 없겠지만, 예수 믿은 사람과 안 믿은 사람의 평균 수명에 별 차이 없을 겁니다.
신자와 불신자, 질병에 걸리는 확률에도 별 차이 없을 겁니다.
☞ 이런 현실이 우리에게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는 줄 못 깨닫게 합니다.
한 마디로 안 믿는 세상사람과 평강을 똑같은 개념으로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세상 기준으로 보는 평강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래서, 예수 믿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한 평생 사는 동안 안 믿는 자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고생하며 땀흘리고 삽니다.
우리에게는 그러나 세상은 알지 못하는 평강이 있습니다.
그 평강을 두 손에 쥐고 기뻐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평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구나 똑같이 근심하고 걱정하고 수고하고 병마에 시달리지만 우리는 평강이 있습니다.
모든 수고와 근심, 질고를 주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여섯 살 손주놈이 어디서 배웠는지, “오마이가스렌지!” 할때도 평강을 확인합니다.
세상살이가 버겁지만, 서로 얼굴 마주보면서 까르르 웃을 때, 평강을 확인합니다.
인생 황혼 무렵, 몸은 쇠약하지만 건강을 위해 맨발걷기를 하면서 평강을 실감합니다.
사업을 하고, 직장에서 수고하면서도 주님이 계시고 은혜가 있으니 평강입니다.
고난에 허덕일 때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평강입니다.
지금 어려워도 천국에 소망이 있으니 평강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이 있고,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있고, 섬기는 교회가 있으니 평강입니다.
세상은 알지 못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니 평강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주님이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평강입니다.
천국 소망이 있으니 오늘도 평강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