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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농민도 사장님 소리 듣는 세상 언제 오려나
김영욱
우수 경칩이 지나고 청명 한식도 지나 따뜻한 봄날이다.
그는 강릉 경포해변 부근 넓은 민박집에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한다고 해서 가는 길이다. 졸업 후 무려 40여 년이 지난 뒤에 만나는 동창 모임이다. 모두 60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모이는 동창회라 기분이 묘했다. 가면서도 ‘그녀 나미가 얼마나 변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란 시골 농촌 남자 버리고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남편에게 내조 잘하면서 잘 살고 있을려나!’는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다.
그는 농촌에 박혀 그녀가 얕잡아 보던 농투성이로 늙어 남은 것은 온갖 농사 다 지어보았지만 남은 건 빚 농사였다. 수박 농사, 당근 농사, 오이 농사, 감자 농사를 잘 지어 풍작이 되면 똥값이라서 울어야 했다. 그리고 호주에서 들여온 수입 소 헤어포드를 기르다 소 값은커녕 사료 값도 못 건지고 팔아야 했다. 닭도 키워보고 돼지도 길러보았으나 재미를 보지 못했다.
2002년엔 루사 태풍으로 경작지가 모두 쓸려나갔을 땐 살길이 막막했다. 그래도 재난지구로 선포돼 정부의 도움으로 고맙게도 땅을 복구했지만 복토한 흙으로는 작물을 재배할 수 없었다. 복구 사업자가 어디서 잡석이 섞인 흙을 갔다가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듬해 다시 좋은 양질의 흙을 복토하느라고 한 달이나 늦어 옥수수를 심었다. 하지만 비배관리를 잘해 풍작이 되었다. 그런데 여름 피서지인 경포, 주문진, 사천 등 해수욕장에 내다 팔려고 했으나 수확이 한 달이나 늦어지는 바람에 추석 무렵에야 출하해야 했다. 그래서 마땅히 팔아야 할 곳이 없었다. 강릉번개시장과 강릉농산물시장에 가도 먹을 시기가 지난 옥수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옥수수는 여름에 강릉을 찾아오는 피서객이 주된 소비자인데 철 지난 옥수수를 팔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트럭에 가득 강냉이를 싣고 강릉시청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트럭에서 옥수수를 한 부대를 내려서 메고 무거워서 낑낑거리며 18층 위용을 자랑하는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민원실에 공무원들이 보는 앞 바닥에 놓고 옥수수를 꺼내 마구 던졌다. 옥수수로 날벼락을 맞은 공무원이 어안이 벙벙해 그를 쳐다 볼 뿐이었다.
“강릉시 공무원 여러분! 지난 해 루사 태풍 피해를 입은 농민들을 위해 너무 고생이 많았습니다. 저는 삼산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억만입니다. 고생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제가 지은 옥수수로 보답하고 합니다. 밖에 옥수수가 한 차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마대로 가지고 가셔서 맛있게 삶아 잡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한 공무원이 그의 꽁무니를 붙잡았다.
“선배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속상한 일이라도 ... ... ...”
그가 뒤돌아보니 고등학교 후배로 졸업하자마자 공무원에 발을 담그고 있는 변태성이었다.
“선배님! 진정하시고 나란 저기 가서 얘기 좀 합시다.”
“나는 별 뜻은 없네. 다만 지난 해 공무원들이 태풍피해를 입은 농민들을 위해 복구 사업을 하느라고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그 고생을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어서야!.”
“보답을 하려면 이렇게 하면 안 되지요. 저기 가서 나하고 얘기 합시다.”
그러는 사이에 그와 공무원 변태성 주위에 사람들이 쭉 둘러섰다. 안면이 있는 농정과장도 보이고 시장도 달려왔다. 그는 농정과장의 안내로 시장실로 갔다. 시장도 그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는 한 때 강릉시 새마을연합회 회장을 하기도 했다. 그때 지금의 시장은 강릉농협 조합장이었기에 사회단체 기관장회의에 여러 번 만나게 되어 알게 되었으며 시장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그에게 직접 찾아와서 연곡면을 책임지고 선거운동을 해달라고 제의를 했다. 하지만 그는 선거에 중립을 지키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의 선배가 강릉시장으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어려운 농촌에서 고생이 많습니다.”
“뭐, 고생이라 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그저 천직이라 생각하고 농사를 짓지만 늘어나는 게 빚지는 농사입니다.”
“그러시죠. 저도 어려울 줄 알고 있습니다. 옛말이 장 값이 모자라는 게 농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시작된 면담에서 자초지종을 알게 된 시장은 옥수수 판매는 시에서 팔아줄 테니 염려 말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15층에 자리 잡고 있는 시장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시청 출입문 밖을 나갔다. 농정과장의 지시로 공무원들이 트럭에 실려 있는 옥수수 부대를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시청 전 공무원이 십시일반으로 옥수수를 사주어 고맙게도 판매는 쉽게 해결되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땐 젊어서 객기도 있었는데, 60고개 바라보는 나이에 동창모임에 가면서 회환에 잠겼다. 별별 농사를 다 지어보다가 이제 남은 것은 농사를 지으면서 겪은 애환을 시로 써서 낸 시집『부러진 것이 어디 꽃대 뿐이랴』가 있을 뿐이다.
들녘에서 일하다 때로는 쉴 참에
티켓 다방 아가씨 불러다가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다가
궁둥이도 두드리며 부라자 속에
두 눈이 시퍼런 지폐를 구겨 넣고
농사짓는 사람도
사장님 소리 듣는
나는 그런 농민 세상
오기를 꿈꾼다
하다못해 순댓국밥집 주인도 사장인데
쌀을 생산하는 우리 농민은 왜 사장이 아닌가
오늘도 저 들녘 고개 숙이고 있는 벼를 보며
나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농민도 사장, 나으리 소리를 듣는
그는 그의 시집 속에 있는 그런 시를 중얼거렸다. 농민들이 생산한 농축산물의 값을 제대로 댓가를 받고 사람대접을 받는 그런 세상을 염원하는 뜻에서 지은 시다. 폐차 직전으로 고물차가 다된 농업용 소형 트럭 세렉스를 몰고 가면서 줄곧 머리에 맴도는 건 그녀 ‘나미’다. 한때 사랑했던 그녀도 동창모임에 왔을까 하는 야릇한 마음으로 기대 반 설레임 반이었다. 아! 그 옛날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축구공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모두들 함성이다. 그곳 촌사람들은 거의 대개 공이 높이 올라가면 공을 잘 차는 걸로 생각한다. 해방 후 해마다 8월 15일이면 열리는 각 동리의 자연부락별로 힘을 겨루는 삼산리 축구대회가 열린다. 삼산리는 법정리로 청학동 장천동 묘치동 두릉동 회동 송천동 부연동 등 7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행정상으로 삼산1리는 장천동, 묘치동 삼산2리는 청학동, 삼산3리는 부연동, 삼산4리는 두릉동, 회동, 송천동이라는 자연부락을 품고 있다. 그리고 대회가 끝나면 으레 승자 부락과 패자 부락이 싸우기가 해마다 상례로 된 것도 하나의 전통이다.
낡아서 보잘 것 없는 우승기지만 거기에는 8.15 광복절의 기념이라는 큰 뜻이 담겨져 있기에 각 동리의 마을은 우승기를 놓고 각축전을 벌렸다. 그러나 패자가 되면 마을의 감정을 앞세운 몇몇의 사람들은 우승한 마을 사람들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그래서 규정에 없는 한바탕 코피가 터지는 난장 난투극이 벌어지는 것 또한 하나의 전통이다.
높이 올라간 공이 허공을 맴돌다가 떨어지면서 운동장 옆 벚나무의 울창한 잎 속에 숨어버렸다. 경기는 잠시 중단되었다. 각 팀 선수 마을에서 나온 응원단에선 응원 함성도 멈췄다.
그는 왕년에 똥볼 꽤나 차올렸지만 신진대사라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밀려 선수들 뒷바라지나 해주는 임원이라는 감투를 썼다. 점심이며 음료수 등을 마련키 위해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쌀이나 돈을 얼마씩 거두어 하루의 경비에 충당해야 했다.
지금 시합이 바로 그의 장천동팀이 하고 있는 중이다. 상대팀은 항시 그의 부락과 감정이 많은 묘치동이었다. 행정구역상 삼산1리에 속해있지만 이장을 장천동 사람이 해야 하느니, 묘치동 사람이 해야 하느니, 하는 골 깊은 대립이 만만치 않고 마을공회당만 해도 그렇다. 장천동에 지을 것을 묘치동에서 빼앗아 갈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써도 안 되니까 나중엔 도지사 앞으로 장천동에 사는 이장을 모함하는 진정서를 도지사 앞으로 보내 한바탕 온 마을이 발칵 뒤집히는 소동의 홍역을 않고 나서야 결국 묘치동에 짓고 말았다.
그는 상대팀의 묘치동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응원단의 서쪽 운동장 벚나무 아래를 지나치게 되었다. 사돈부스러기, 동창생 친구, 선후배 등 다 아는 사람이라 쉽게 인사치례가 오고갔다. 인사라야 별 인사가 아니었다. 그저 고개만 까딱까딱 숙이며 “안녕들 하십니까요?”가 전부였다. 발길을 돌리려는데 그녀 ‘나미’가 수줍어하면서 목례를 했다. 그도 따라서 목례를 하면서 저녁에 만나자고 했다. 그녀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3년 전에 냉정하게 돌아서버렸다. 그는 나미에 대한 사랑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이름은 성수이고 별명이 “억척이”라고 부르는 남동생이 있다. 가정 형편상 정규 중학교는 가지 않았으나 야학이나 다름없는 재건학교를 나와 농사를 지었다. 농사랬자 강원도의 산야지 농촌의 특성상 벼농사를 하기도 하지만 감자와 옥수수, 조, 콩 등 밭농사가 주된 농사였다. 그녀의 동생 성수는 억척이라는 별명답게 억척스럽게 일하는 모범 청년이었다. 그는 억척이를 만나 마을공회당 구판장에서 술을 사주며 애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2홉이나 4홉들이 빈병에 따라서 파는 막소주는 독해서 취기가 빨리 올랐다.
“억척이 할 말이 있네, 그려. 나 느그 누나를 좋아하는데, 서울 느그 누나 주소 좀 가르쳐 주라?”
술기운으로 용기를 낸 그는 어눌한 말투로 억척이게 그렇게 말했다.
“형, 우리 누나를 좋아한다고요?”
“응, 그려!”
“어려울 게 없어요. 그렇게 하지요. 그 대신 형이 이다음에 주문진장날에 가서 문어대가리 안주에 술사시구려! 그리고 아가씨 궁뎅이도 두드리게 해주소!”
“알았어. 문어대가리가 별갠가 그 보다 더 좋은 안주로 술 사줌세! 그리고 부둣가에 있는 술집 ‘삼천포’에 미끈한 아가씨들이 있다는데, 그 집 아가씨 앉혀 놓고 ‘비내리는 삼천포에 부산배는 떠나간다 어린나를 울려놓고 떠나가는 내님이여 이제가면 오실날짜 일년이오 이년이오 돌아와요 네 돌아와요 네 삼천포 내고향으로’를 젓가락 장단으로 부르며 아가씨 궁뎅이 실컷 두드리게 해주마!”
“형, 거짓말은 아니겠죠?”
“그려 그려, 내 과부 대돈변을 내서라도 그렇게 할 거여!”
그러나 술이 취해서 했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대신 삼거리주막집에서 노가리를 안주로 화롯불에 구어 가며 취하면 오대산 부처님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옥수수동동주를 질펀하게 마신 걸로 술집 ‘삼천포’를 가는 것을 대신했다. 그 후부터 억척이는 그를 만나기만 하면 그를 한 동안 농담으로 ‘노가리 형님’이라고 불렀다.
여하튼 그는 그날 마을공회당 구판장에서 억척이로부터 그녀의 서울 주소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몇 번 편지를 보냈다. 한통의 편지를 쓰기 위해 밤새도록 끙끙 앓아야 했다. 간절한 청혼서나 다름없는 편지투였지만 주소가 확실하지 않으면 주소불명으로 돌아올 텐데, 그런 일이 없는 걸 보면 받기는 받아보는 게 틀림없었으나 끝내 그녀로부터 답장이 없었다. 지나간 3년 전 겨울이었다. 그녀와의 그런 일이 없었다면 쉽게 잊을 수 있었고 지금은 홀가분한 기분이었을 텐데 ... ... ...
사오일 동안 쉬엄쉬엄 내린 눈이 신작로와 논밭이 어딘 지 구별할 수 없도록 쌓였다. 하루 두 번 왕래 하던 버스마저 끊겨 적막이 흐르던 마을은 고립되었다. 모레가 설날이고 보면 눈이 많이 올 시기는 분명했다. 라디오에서는 귀성객을 위해 교통량 확보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며 서울역과 청량리역 그리고 고속버스터미널에는 귀성인파가 붐비고 있다고 하면서 강원도 일부 산간지방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은 강릉에서 80리, 주문진에서 40리나 떨어졌으며 오대산 중에서도 동대산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논보다는 밭이 많은 농촌이다 보니, 쌀밥을 먹는 집이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쌀에 감자나 좁쌀 보리를 섞은 잡곡밥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보릿고개의 춘궁기인 봄에는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쑥범벅, 고사리나물죽, 칡반대기, 도토리묵 등인데 하루가 아니라 봄 내내 그런 음식을 먹어야 하는 아이들은 진절미를 냈다. 그리고 겨울의 농한기에는 화투짝 놀음의 도박으로 땅을 팔고 사면서 울고 웃는 일이 벌어졌고 삼거리주막집에 모여 술로 한겨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으로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가끔 심심풀이 오락으로 하는 화투놀이가 도박으로 변할 때가 있기도 했다.
그는 부슬부슬 내리는 눈을 맞으며 삼거리로 나갔다. 삼거리는 청학동으로 가는 길과 오대산 자락 송천동으로 가는 길과 연곡면 소재지 방내리로 갈라지는 곳으로 무려 주막집 겸 가게가 서너 집이나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도 눈 오는 세밑 한겨울이라 할 일이 없어 어슬렁어슬렁 삼거리로 나왔다. 그렇다고 별 뾰족한 수가 없는 그들이다. 그래서 술도 팔고 담배도 파는 주막집 행랑채의 방 한 칸을 차지해 고스톱 판을 벌였다. 그것도 요즈음에 유행으로 들어와 그들에겐 인기 있는 화투놀이였다.
그는 고스톱 하는 방식에 능하지는 못하지만 그저 오락으로 고스톱에 빠져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눈은 쉬엄쉬엄 내리면서 산하를 메우고 있었다.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눈빛의 반사로 희끄무리했다. 삼거리의 이 집 저 집에서 등잔불 아니면 남포불로 밝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내년쯤 전기공사를 한다고 하니 그때까지 등잔불과 남포불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남포불 아래서 고스톱에 빠진 그들은 귀가를 잊어버린 채 오락의 정도를 넘어서 돈 놓고 돈 따먹기의 돌이짓고땡이라고 하는 화닥떼기로 변했다. 그는 난생 처음 해보는 화닥떼기에 주머니가 툭툭 털려 별별일 없는 꾸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맛이 그날따라 매우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때에 문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의 음성으로 음색이 고운 서울 말씨다. 눈 오는 날, 그것도 저물어 초저녁 밤인데 여자들의 음성에 관심에 쏠린 그는 밖으로 나갔다. 눈빛에 반사된 얼굴들은 낯익은 얼굴들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찌감치 서울로 가서 직공살이를 하는 묘치동의 아가씨들이었다. 설을 쉬러 고향으로 오는 게 분명했다. 저마다 한두 개씩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다.
강릉에서 연곡면소재지까지는 차가 다녀서 별 문제는 아니었지만, 거기서 삼산삼거리까지 30여리를 걸어와야 했기에 모두들 안색이 피곤해 보이고 눈에 맞은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그 가운데 얼핏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는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실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만나게 되었다. 졸업할 때만 해도 키도 작고 똥똥하게 생긴데다가 얼굴이 까무잡잡한 계집아이였는데 참으로 날씬하고 성숙한 숙녀로 변해 있었다.
그는 몇 년 만에 만나는 동창생,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게 “오랜만입니다”로 사무적인 말투로 인사를 했다. 그녀는 그와 반대로 상냥한 서울 말씨로 자연스럽게 “오랜만이네요”라고 응수했다. 그녀는 눈길을 걸어오느라고 외투와 바지가랑이가 젖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피곤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들고 있는 묵직한 여행가방을 들어다 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집에까지 가방을 들어다 주겠습니다. 괜찮을까요?”
그녀는 미안해하면서도 도움을 청하는 눈치였다.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방을 그녀의 손에서 받아 쥔 그는 앞장을 섰다. 그는 그녀를 돕는다는 것보다는 코흘리개 초등학교 시절의 정을 생각해서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졸업 당시 그와 그녀의 학급은 25명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금을 캐던 금광인 송천광산이 폐광되는 바람에 50여 명의 학생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 시절 반공일이라고 하던 토요일에 일찍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가야하는데 집에 가면 남자애들은 소꼴을 베야한다든가 아니면 농사일을 도와야 하고 여자애들은 어머니의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그래서 일찍 집에 갈려고 하지 않고 학교 앞 개울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쩌다 그는 그녀와 가재를 잡기도 하고 소꿉장난 하느라고 해 가는 줄 모르고 재잘거리던 때가 있었다.
“미안해서 어떻게 하죠? 가방이 꽤 무거울 텐데 ... ... ...”
그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미안할 것 뭐 있나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그는 그녀의 생활이 궁금했다. 중학교에 갈려고 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했다. 계집아이치곤 영리했던 그녀는 그와 줄 곳 학급에서 일 이등을 다투던 우등생이었다. 항상 그는 호적수였던 그녀의 서울생활을 알고 싶었다.
“서울,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
“잠실에 있어요. 배운 게 있어야죠. 양재기술을 배워 그 방면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도 언젠가 그녀가 서울에서 양장점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어떤 동창생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뇌리를 쓰치고 지나갔다.
“잠실이면 강남구죠. 전에 서울 갔다가 잠실 쪽을 간 적이 있는데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던군요.”
그는 한 때 서울이 좋다는 바람에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20여 명이 일하는 개인공장에 일하다가 적응을 하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전 지난해 병역의무를 마쳤죠. 농촌에서 정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농고를 나왔으니 마땅히 농업에 종사해야 지요. 농촌의 젊은이들이 툭하면 서울로 가니, 농사지을 사람이 있어야 지요. 그래서 도시 청년들보다 농사지으며 폼 나게 살고 싶어요.”
“그럼, 병역의무를 마쳤다면 군에 갔다 왔나요?”
“아니예요. 방위병 제대랍니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꽃 소령이었지요. 예비군 연곡면 중대본부에 행정병으로 근무했죠.”
“꽃 소령이 뭐예요. 그런 계급도 있나요?”
“그런 계급은 없어요. 방위병은 이병 계급이죠. 일 년이면 제대를 하는데, 일병으로 제대를 하지요. 그런데 방위병들이 쓰고 다니는 군모에 붙인 마크가 둥그런 무궁화 모양이 군대 영관 급 소령의 계급에 비유해서 방위병들이 위안 삼아 그렇게 불렀지요.”
지난해만 해도 후미골과 서낭골에 살던 몇 집이 이농을 했다. 농사를 지어 도저히 자식새끼 공부시키지 못할 바에야 도시로 나가서 날품팔이를 해서라도 공부시켜야 하겠다는 의도였다. 땅만 파가지고는 자식새끼들 중학교 공부는 어림없었다. 그 이유는 다른 면에는 중학교가 있지만 연곡면은 그렇지 못했다. 연곡면 아이들이 중학교를 가자면 주문진에 있는 주문진중학교나 강릉에 있는 강릉중학교, 명륜중학교 또는 경포중학교에 가야 했다. 만약 주문진이나 강릉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을 하더라도 40리길의 주문진과 80리길 강릉에 있는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집을 떠나 자취를 하거나 하숙을 해야 했다.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겨우 서너 명이 중학교에 진학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상당수가 진학을 하고 있다. 예전과는 달리 보릿고개를 면할 수 있었고 교통이 편리해져 농산물과 산에서 나오는 산나물 버섯 약초 등 임산물을 손쉽게 시장에 내다팔 수 있어 돈푼깨나 만질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그 당시 그 집 살림살이 형편으로 보아 중학교에 갈 처지가 아닐뿐더러 하루 세끼를 잇는 것도 벅찼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10년을 뒤늦게 태어났어도 주문진읍이나 강릉시에 있는 중학교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서울 멋쟁이 숙녀가 된 그녀와 동행하게 된 그는 무슨 말을 계속해야 할지 두려움이 앞섰다. 어릴적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말 수가 적었다. 특히 여자들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말을 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보충역으로 방위병 생활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변해 여자들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말을 했다. 그녀와 동행 길에는 달랐다 자꾸만 그 옛날로 돌아가 내성적이 되어서 주눅이 들었다.
“서울에서 생활하기가 어때요?”
“살기 힘들어요. 갑갑하고 앞뒤가 단절된 느낌이지요.”
그녀의 말대로 그가 친구를 따라 서울에서 가서 이미 그렇게 느낀 적이 있으며 어느 잡지책에서 읽은 공해문제가 떠올랐다.
“요즘 서울에 공해 문제가 많이 대두되나 봐요. 어떤 교수가 잡지에 한강 오염도를 측정했는데, 외국에 비해 몇 배나 오염되어 있다고 기고했더군요.”
“사실은 그래요. 탁해요. 그리고 숨이 막혀요. 돈만 있으면 시골 농촌이 살만 해요. 저도 시골로 돌아오고픈 마음 간절해요.”
그녀가 서울은 살기 힘들고 갑갑하다는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는 서울의 공해문제까지 들먹이다가 삼산초등학교를 지나 그녀의 집 들머리까지 당도해서 묵직한 가방을 돌려주었다.
“설 잘 쉬고 시간 있으시면 우리 집으로 놀러올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는 그녀와 헤어짐이 어쩐지 아쉬워 그렇게 말했다.
“글쎄요. 생각해보죠. 고마웠어요. 눈이 그치긴 했으나 조심해 가셔요.”
그렇게 그는 그녀와 헤어졌으나 아쉬움으로 왠지 마음속에 그녀를 품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엷은 미소에서 멍한 상태로 서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일곱 마을 팀의 임원과 여러 가지 의논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축구대회가 끝나면 잠시 만나자는 수식 없는 몇 마디를 던지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녀는 그렇게 발길을 돌리고 대회 진행 본부석을 향해 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벚나무의 가지의 무성한 잎 속에 숨은 공을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나무에 올라가 내렸다. 잠시 멈췄던 경기는 다시 진행되었다. 장천동과 묘치동의 두 팀은 별 포지션도 없었다. 공만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숨 가쁜 열전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두 팀은 여러 차례의 골문을 향해 강한 슛을 날렸지만 득점과 연결되지 않았다. 한 번 그의 정천동 팀이 실점을 할 뻔 했다. 왼쪽 코너 쪽에서 코너킥을 한 공을 헤딩슛을 하려는 순간 펀칭을 했는데 다시 상대팀에서 강한 슛을 날렸으나 공교롭게도 골포스트에 맞고 튕겨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그 때 아연실색을 했다. 꼭 우승을 해야만 마을 어른들에 볼 면목이 서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그의 장천동 사람들은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 도 대표나 국가 대표 선수 하나 배출하지 않았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고 그 이듬해 광복절 기념으로 시작된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시작으로 해마다 줄곧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요 근년에는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곰아! 잘 한다 밀어 넣어라!”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묘치동 팀 골문 앞에서 선수들이 뒤엉켜 마치 이전투구의 혼전인 가운데 육중한 체구의 곰이 공을 골문 안으로 밀어 차서 넣으면서 나뒹굴었다.
“골-인 골-인”
모든 관중들이 골인되었다고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졌지만 심판은 노골을 선언했다. 반칙을 했다는 것이다. 곰이 상대편을 치면서 심한 태클을 걸었다는 게 심판의 주장이다. 곰은 “왜 내가 반칙을 했느냐?”고 심판에게 항의를 했다. 여기저기서 장천동 묘치동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심판과 곰을 에워쌌다. 각자 자기 마을을 위해서 “골이다! 골이 아니다!”를 놓고 옥신각신 다투는 언성이 높아져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로웠다.
심판이랬자 공인된 심판도 아니고 연곡면 면민 중에 덕망 있는 사람으로 축구 경기에 대한 규칙을 상식적으로 어느 정도 알면 되었다. 옥신각신하는 장천동 사람들과 묘치동 사람들에게 둘려 쌓인 심판은 어떻게 사태를 처리해야 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란이었다. 두 마을이 감정이 좋지 않으니 용단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힘든 문제였다. 심판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고 아우성을 치는가 하면 제대로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로 경기는 중단된 채 두 마을에서 말깨나 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을의 입장만 세웠다. 그러나 심판은 계속 노골를 굽히지 않았다.
“심판이 눈까리 까졌나! 그게 어디 반칙이냐?”
“개새끼 와이로 처먹었구나!”
별별 욕이 다 쏟아져 나왔지만 심판은 그런 욕쯤 예사로 여겼다.
“심판은 하느님과 동격이다. 심판의 말씀은 곧 하느님 말 씀이다!”
“에이 시팔새끼 보지 껌 씹는 소리하고 있네!”
“껌 씹는 보지, 네 에미 보지다!”
차마 듣기 거북한 원색적인 언어가 난무했지만 묘치동 사람들은 심판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며 심판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당연지사다. 심판이 노골을 선언하지 않았더라면 귀중한 한 골을 허용해야 하고 후반전이 얼마 남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전제하에서 심판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고 우겼다.
실은 곰이 반칙을 한 것은 틀리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장천동 사람들은 어쨌든 골이 틀림없으니 심판이 골인을 인정해야 한다고 ‘벽이 문’이라는 식으로 어거지를 썼다.
그는 어거지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말깨나 하는 사람들과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스포츠정신’을 앞세워 득점을 해서 이겨야만 꼭 이기는 것은 아니다. 팀웤이 잘 이루어져 단결된 경기를 보여주면 그것이 바로 정신적으로 이긴 것이 아니겠느냐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심판의 선언대로 노골이 틀림없으니 경기를 계속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주위에서 잡음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중단 되었던 경기는 다시 시작되었고 응원하는 북 장구 징 꽹과리와 노랫소리에 삼산초등학교 교정은 떠나갈듯 했다.
팔월의 뜨거운 태양이 서산 쪽으로 기우러질 무렵 전. 후반 경기가 끝나고 두 팀은 득점이 없어서 패널티킥으로 승부를 결정했다. 하지만 장천동 팀이 5대 4로 지고 말았다.
그는 마음 한구석이 텅 빈 상태로 목구멍이 칼칼했다. 적개심이라고 할까 스포츠정신이 어떻고 저떻고 했지만 일단 결승전에서 패자가 되었다는 현실에선 어쩔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응어리가 치밀었다. 그 응어리란 묘치동과의 해묵은 감정이다.
그에게 이제 남은 일은 운동경비를 청산하는 일이다. 학교 아래의 밥도 팔고 술도 파는 가게에 부탁하여 돼지국밥으로 마을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소주와 사이다 콜라 등 음료수를 마신 대금을 계산하고 남은 경비로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마을 사람들과 선수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내년에는 꼭 묘치동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자고 서로들 부등켜 안고 위로했다.
그는 일일이 선수들에게 “오늘 수고가 많았다”면서 양은대접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주었다. 갈증을 풀려고 벌떡벌떡 잘도 마셨다. 그도 선수들이 권하는 술을 몇 대접이나 마시다보니 머리가 어찔했다. 취기가 오른다는 전율이다.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 모두들 그랬다. 그러나 그는 오늘만은 곤드레만드레가 되도록 취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술대접이 계속 밀려왔다.
취해 멍한 상태였지만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어났으나 쉽사리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목적의식은 또렷했다. 만나서 그녀의 외고집을 거울을 깨듯 와장창 깨어버리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서울에서 얼마나 굴러먹은지는 몰라도 나같이 흙 속에 묻혀 사는 사람은 인간 취급을 안 해! 괘씸한 년! 지는 한강 모래 퍼먹고 사나 이 땅의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들이 ... ... ...”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발길이 옮겨가는 대로 걸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분명 그녀의 집을 향해 비틀걸음으로 언덕배기를 올라갔다. 반월형 다락논과 경사진 밭이 펼쳐졌다. 밭 가운데의 감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터를 잡고 있는 굴피집이 그녀의 집이다. 감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마당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곰방대 담배를 물고 연기를 내 뿜으면서 꼴을 한 아름 안고 외양간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고 처마 밑 섬뜰에는 화로에서 모깃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두워지려고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는 술이 취했어도 조심스럽게 마당에 들어섰다. 때마침 부엌에서 나오던 그녀의 어머니와 눈길이 마주쳤다.
“안녕하셔요?”
“어서 오게! 공 차러 간 성수는 아직 안 왔다네. 자네도 술이 세지만 우리 성수도 술이 세서 걱정이야! 술을 적게 마셔야 할 텐데 ... ... ...”
성수, 즉 억척이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안 않지만 장천동과 묘치동의 농촌 청소년들의 모임인 4-H구락부 회장을 맡아보고 있다. 전에 성수가 자기 누나의 서울 주소를 일러주었기에 평소에 유대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때로는 자기 누나가 그와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잘 되기를 바라서인지 그를 “형”이라 부르면서 잘 따라 주었다.
“나미 있어-요?”
그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아무 서슴없이 그렇게 물었다.
“학교 운동장 축구 경기 구경 간다고 갔는데, 아직 안 왔네. 그러나 저러나 올 테지. 섬뜰에 좀 올라가 앉게!”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이나마 딸 나미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렵지 않게 대해 주었다.
“올해는 장마가 길어서 유난히도 모기가 극성이네. 모깃불 피운 화로 옆에 가 앉게!”
“괜-찮-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외양간을 돌아 나오고 있었다. 아랫도리에는 곰방바지, 윗도리에는 삼베적삼을 걸쳤는데 소똥냄새가 물씬 풍길 것만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인가?”
“전, 나미를 좀 만나러 왔습니다.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왔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요?”
“이해를 못할 바는 아니지만 올라믄 맑은 정신에 와야지. 여하튼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니까 나미가 올 때까지 기다리게!”
그는 섬뜰에 앉아 어둠이 깔린 적막함 속에 빛나는 별을 쳐다보았다. 입속으로 별 하나 나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별 넷 나 넷 별 다섯 나 여섯 ... ... ...
그렇게 별을 세다가 그만 엄습해오는 피곤에 눈까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련히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날아왔다.
“술이 과했구먼. 성수 방에 들어가 눕게. 매우 피곤해 보이네 그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아버지가 고마웠다. 키가 작아 ‘땅꼬마’라는 별명이 늘 따라 다니는 그녀의 아버지는 평생 땅만 파던 농사꾼이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징용을 갔다가 해방 후에 돌아와서는 얼마 안 있어 6.25 한국전쟁 땐 군에 입대해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전투에서 운 좋게 살아왔다. 그래서 그때 받은 훈장을 하도 많이 자랑하다보니 본명 대신 ‘김훈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다. 묘치동의 명가수로 이름이 나있다. 노래를 잘 불러서 명가수가 아니라 노래를 불러도 음정 박자가 맞지 않는 음치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렇게 불렀다.
모깃불이 사그러지면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쑥 대궁이로 모깃불을 피웠다. 알싸한 쑥향이 역해 잠시 피해갔던 모기가 다시 달려들었다. 그래서 부채를 들고 바람을 일으켜 모기를 날려 쫓아대지만 어느새 또 앵앵거리며 달려들어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성-수 아버님! 저 가겠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두운 밤에 어떻게 가겠느냐고 한사코 성수 방에 들어가 자고가라고 말렸다. 그러나 별빛이 부서져 내리는 길을 나섰다. 언덕배기 내리막에 있는 소나무 숲을 지날 땐 머리카락이 쭉삣쭉삣 했다. 술이 확 깨었다. 그때서야 정신을 바짝 차린 그는 언덕배기 아래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려는 순간에 산모롱이를 돌아오는 말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오는 그들은 분명 그녀와 그녀의 동생 억척이였다. 그들도 징검다리를 건너오는 그를 알아보았다.
“억만 씨! 미안해요. 학교 부근에서 만나려고 찾아보았어요. 그런데 다들 어디로 갔는지 오리무중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왜 여기 있나요?”
“나미 씨 집에 갔다가 나미 씨가 없어서 섬뜰에 앉아 기다리는데 나미 씨 아버님이 억척이 방에 들어가 자라는데 그럴 수 없어 오는 길이었죠.”
“그렇게 취한 몸꼴을 해가지고 어쩌려고 우리 집에 갔어요?”
“나는 나미 씨의 부모님 앞에 나미 씨를 앉혀 놓고 정식으로 청혼하려고 했죠!”
“억만 씨! 그건 사내답지 못한 객기네요. 우리 둘의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하는데, 왜 우리 집까지 가서 분란을 일으키려고 해요!”
그녀의 격앙된 말끝을 받아 억척이가 입을 열었다.
“형! 죄송해요. 우리가 이겨서 섭섭했죠.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셔요?”
“웬 별 소리, 내년에 우리가 이기면 되지 않겠나! 억척아! 난 자네 누나와 할 얘기가 있는데 자리를 좀 비켜주면 안 되겠나?”
“알았습니다. 형! 내 먼저 집에 갈 테니 우리 누나와 싸우지 말고 잘 해결하셔요!”
그녀의 동생 억척이가 자리를 피해 주어서 별빛이 쏟아지는 개울가 너럭바위에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침묵은 금이다. 둘은 아무 말도 않고 누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동안 보낸 편지 잘 받았어요. 답장을 못해 죄송해요.”
“나미 씨를 믿었다는 게 내 잘못이고 주제파악을 못한 나였죠.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될 줄이야!”
“억만 씨! 존경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나 억만 씨의 요구에 응할 수가 없었어요. 결혼 아직 생각한적 없어요. 억만 씨는 왜 나와 결혼을 고집하나요. 나보다 배운 다른 여성도 많잖아요?”
“그래요. 세상에 나뒹구는 게 여자라 그래도 나는 나미뿐이었지요. 그런데 나미란 여자는 여자라는 윤리관도 없나요.?”
“어쩔 수 없는 성적충동이었어요. 그래서 몸을 맡겼지만 사랑의 불장난이라고 봐주셔요. 미숙한 나였어요.”
“불장난이라니! 도대체 그 기준을 어디에 둡니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을 경우가 아닐까요?”
그녀는 자기가 꺼낸 불장난이라는 말에 수치심을 느꼈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미숙했다는 그녀의 항변, 아니 궤변을 들어주기로 했다. 성적충동으로 잃은 자기의 순결에 관대하게 생각하는 그녀가 애처롭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그해 겨울 설날이 지난 지 삼일 째 오후 그의 집에 그녀가 방문했다. 마침 그 때에 초등학교 동창생들도 와있었다. 농사를 짓고 가사를 돕고 있는 동창생보다 유독 그녀는 살결이 희고 옷맵시도 세련되고 몸놀림은 이지적이었다. 처녀농군이 다름없는 왈가닥 영숙이는 까무잡잡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옛말이 맞구먼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 하든가. 나미! 너 너무나 예뻐졌다야. 어디 숨겨 논 애인이라도 있니?”
영숙이의 찬사를 받은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그시 지으면서 말했다.
“영숙아! 너 시골에서 고생이 많겠다. 그러나 네가 생각하는 서울과 내가 직접 살아본 서울이 달라! 나 당분간 집에 있을 거야. 이참에 애인 구해야겠는데 좋은 놈씨 있으면 소개해주라!”
“말나온 김에 억만 씨가 어떻겠니?”
“안될 것도 없지. 동창생끼리 결혼해 살면 어디가 덧나니 ... ... ...?”
그때 서울 구로공단에서 공장에 다니다가 설을 쉬러 온 인태가 갑자기 방구를 뽕 소리가 크게 퀴었다. 모두들 월남전에서 들리는 대포소리라고 한바탕 웃었다. 월남전이 끝난 지 수년이 되었는데도 그들은 월남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1966년 가을 그들은 6학년 수학여행을 삼척으로 갔다. 삼척의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와 시멘트 공장을 견학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때 강릉까지는 버스로 가서 강릉역에서 산골 농촌아이들로서는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삼척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월남전에 파병된 맹호부대 군인 아저씨들이 잘 싸우고 돌아오라는 뜻에서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님의 뒤를 따르리라’는 <맹호부대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수학여행길 기차간에서 손뼉을 치면서 부르던 기억이 모두 떠올랐는지 <맹호부대 노래>를 한 번 불러보자고 입을 모았으나 정초부터 그런 노래를 부른다는 게 좀 그렇다고 하는 바람에 노래는 부르지 않고 각자 살아온 얘기를 했다.
그동안 인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중국집에서 짜장면 배달을 하다가 주방 보조 일을 하면서 중화요리를 배워 지금은 짜장면, 짬뽕, 볶음밥, 탕수육은 기본이고 팔보채 등 고급 안주도 만들 수 있다고 자랑을 했다. 그리고 돈만 벌면 고향으로 돌아와 면소거리에 ‘인태반점’이라는 중국집을 낼까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야! 좋은 생각이다. 연곡면 소재지 면소거리에는 중국집이 없으니, 장사가 잘 될 거야!”
이미 결혼해 두 살짜리 딸을 둔 석호가 말했다.
“석호, 너 인태가 중국집을 차리면 외상으로 탕수육 안주로 빼갈 마시려고 그러지!”
그가 농담으로 그렇게 말하자 인태가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석호가 외상으로 뭘 먹든지 괜찮아. 학교 다닐 때 나는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가는 날이 많았잖아. 그때 석호가 도시락을 다 까먹지 않고 밥을 좀 남겨주어 배고픔의 허기를 채워주던 고마운 불알 친구였구먼! 그러니 탕수육 아니라 뭐든지 배가 터지도록 외상으로 먹어도 괜찮구먼!”
석호는 삼대독자다. 그 때문에 스무 살이 되기도 전 열아홉 살에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일 년 후에는 예쁜 딸아이를 보게 되었다. 석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긴 갔으나 삼대독자이기 때문에 부모 성화에 못 이겨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게 되었고 장가를 일찌감치 들게 되었다. 중학교에 갈 수도 있었으나 오늘날처럼 무시험 추첨제가 아니고 입시시험을 쳐야 했는데, 그만 읍내 중학교에 응시했다가 미역국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일 년간 다시 6학년에 다니면서 공부하여 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미역국을 또 먹고 말았다. 그래도 논밭깨나 있어 큰 소리치고 산다.
그녀가 영숙이에게 시골에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보자.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그래. 펜팔로 연애하는 재미로 살지!”
“어떤 사람과 펜팔하는데 ... ... ...?”
“그 왜 있잖아 <새농민>이란 잡지의 펜팔코너에 펜팔을 신청해 놓았더니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가 날아오는 거야. 제주도에서도 날아오고 서울에서도 날아왔지. 그런데 펜팔이란 무엇인지 모르는 부모님은 노발대발하면서 오는 편지를 전부 부엌 아궁이 집어넣어 태워버리는 거야.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 열흘 정도 그렇게 하는데도 계속 수십 통의 편지가 날아오자 나중엔 부모님도 앞발 뒷발 다 들었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펜팔에 대해 알게 되자 가만히 있더라고, 생각해봐라! 하루에 수십 통의 편지가 오는데 일일이 답장을 보낼 수 없잖아! 그리고 직업도 공무원, 군인, 선생, 회사원, 대학생 등으로 다양해. 그런데 가방끈이 초등학교 졸업이니 그들과는 펜팔을 할 수 없잖아! 그래서 농촌에 사는 총각을 선택해 삼년 동안 펜팔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한 달에 한 번쯤은 만나서 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고 그래.”
“한 달에 한 번 만나다는 건 쉽지 않을 텐데 ... ... ...?”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별 문제가 되지 않아 엎어지면 코가 땅에 닿을 우리 연곡면 이웃해 있는 사천면 노동리에 사는 농협 직원이야.”
설에 남은 음식 떡과 명태전, 돼지고기산적, 과즐, 감주를 저녁삼아 먹으면서 그렇게 얘기꽃을 피우다보니 밖은 어둠이 깔렸고 오후에만 해도 잔뜩 흐려 금새 눈이라도 쏟아 부을 것만 같았던 하늘이 별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니 수년 만에 만난 동창생들은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착착이’를 하자고 석호가 제안했다. 착착이는 재밌는 오락의 일종이다.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4-H 구락부가 생기고부터 4-H 회원들이 보급한 건전한 오락이다. 사물이름대기와 번호대기 등의 방법이 있는데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처음 선두 한 사람이 ‘배우 이름 대라’하면 그 다음 사람이 배우 이름을 대면되는데 만약 ‘김지미’라고 크게 외치면 나머지 사람들은 손뼉으로 무릎을 치며 ‘착착’이라고 후렴을 크게 외친다. 또 그 다음 사람은 ‘최무룡’이라고 외치면 다른 사람들은 손뼉으로 무릎을 치면서 ‘착착’이라고 후렴을 크게 외친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며 계속 배우 이름을 대고 착착을 후렴한다. 만약 배우 이름을 못 대거나 다른 사람이 이미 댄 배우 이름을 대었을 때는 벌칙을 받게 된다. 그 당시 착착이에 많이 입에 오르내리던 배우는 김지미, 최무룡, 신영균, 황해, 황정순 김희갑 등이다. 벌칙은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노래를 시키거나 흉내를 내게 한다든가 아니면 장끼자랑을 시킨다.
그날 착착이로 누구나 두세 번씩은 틀려 벌칙으로 노래와 장끼자랑을 했다. 왈가닥 영숙이 때문에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인태의 허리춤에서 허리띠를 빼어 마치 뱀처럼 들고 뱀장수 흉내를 냈기 때문이다.
“자, 신사 숙녀
그리고 지나가는 아저씨 아주머니 여기 좀 봐!
이 뱀으로 말 할 것 같으면 강원도 오대산 깊은 산골
첩첩 산 중 삼산에서 잡은 배암이야
백년 묵은 백사야
내가 오대산에서 땅꾼 생활 30년 만에 잡은 배암이야
이 배암은 다른 건 안 먹어
산삼뿌리만 먹어, 먹어도 어린 건 안 먹여
백 년 이상 묵은 산삼뿌리만 먹어
..............................
자, 애들은 저리 가라!
빨리 집에 가서 엄마 젖이나 먹어라!
배암은 구멍만 있으면 대가리 드리밀고 뚫고 들어갈 줄만 알아
그래서 한 번 들어가면 뒤로 빠꾸를 죽어도 못해
그러니 오대산에서 잡은 백사로 만든 배암 술 한 번 먹으봐!
밤마다 중간다리가 견디지 못해
.................................
중간다리를 거시기서 빼내지 못해
여자가 너무 좋아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
..................................”
영숙이의 뱀장수 흉내에 그만 방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모두들 너무 웃어 나중에는 기운이 빠졌다고 여기저기 누워버렸다.
영숙이는 학교에 다닐 땐 아이들 앞에 나서서 말 한마디 못했다. 아주 내성적이었다. 비록 집이 가난해 중학교를 가지 못했으나 주문진 읍내에서 고무신만 전문적으로 파는 삼천리고무신상점에 처음에는 식모살이를 하다 나중엔 점원으로 있었다. 장날이면 평일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무신을 사려는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말 수가 늘고 장사하는 수완도 생기면서 성격이 왈가닥으로 변했다. 그런데 장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장돌뱅이 중에 뱀장수가 상점 앞 공터에 자리를 잡고 뱀을 미끼로 장꾼들에게 엉터리 약을 팔곤 했는데, 그때 그 광경을 장날마다 보아서 뱀장수 흉내를 진짜 뱀장수보다 뺨치게 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영숙이가 점원을 그만 두고 집으로 와서 부모님의 농사와 가사를 돌본 지 삼년이 넘었는데 그 뱀장수 때문이었다. 그 놈은 장날마다 삼천리고무신상점에 영숙이에게 접근해 서울로 가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고 꼬두겼다. 그래서 꾐에 빠진 영숙이는 뱀장수를 따라 서울로 갔다. 그리고 취직시켜 준다고 간 곳이 청량리의 어떤 골목이었다. 반나체의 여인들이 짙은 화장을 하고 골목을 지나는 군인을 붙잡고 낮인데도 어두침침한 집으로 끌고 들어가는 이상야릇한 곳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속칭 ‘청량리 588’이라는 윤락가였다. 영숙이는 그때서야 뱀장수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도망을 쳐야 했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 부들부들 떨면서 골목 깊숙이 들어가는데 순경이 저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영숙이는 있는 힘을 다해 순경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순경의 허리를 잡고서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그 순간 뱀장수는 도망을 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조건 살려달라는 영숙이는 순경의 보호 아래 파출소에 가게 되었고 자초지종을 들은 파출소에서는 청량리역에서 강릉행 열차에 태워 귀가조치를 하려고 했으나 미성년자이면서 여자여서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강릉경찰서를 통해 연곡지서에 연락을 해 영숙이의 부모가 서울에 와서 딸을 데리고 가라고 전달을 했다. 그래서 그런 소식을 들은 영숙이의 부모들은 서울에 가서 영숙이를 데리고 왔다.
영숙이는 뱀장수의 흉계에 인생을 망칠 뻔 했다. 그래서 인지 그녀, 나미에게 서울에는 못된 뱀장수들이 많으니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 영숙이 네 말대로 서울에는 뱀장수들이 많지. 자칫 한눈 팔다보면 구렁텅이에 빠질 곳이 너무나 많아! 그 왜 우리 학교에 다닐 때 송천광산에서 다니다가 폐광되는 바람에 5학년 때 면소거리로 이사 가느라고 전학 간 연숙이, 그 애 한번 서울에서 우연히 만난 적 있는데, 차림새가 꼭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 같았어!”
“나미, 너 모르고 있었구나. 그 애 연숙이 소식을 최근에 알게 되었지. 양공주라는 거야. 동두천에서 미군 깜둥이와 동거생활 하다가 애까지 낳았는데 깜둥이가 즈그 나라 미국으로 들어가자 깜둥이 자식 키우기 위해 양공주를 하고 있다는 거야.”
“그런 소식은 어떻게 알았는데 ... ... ...?”
“연숙이 사촌 인숙이라고 있지. 우리보다 한해 후배 말이야. 인숙이가 그러는데 양공주를 둔 연숙이 아버지가 얼굴 들고 살기 부끄럽다고 한동안 술로 세상을 보내다가 술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는구먼. 그런데 연숙이가 양공주로 야무지게 돈을 벌어 자기 아버지에게 보내주어 논밭을 사고 송아지도 사서 살림이 택택해져 오히려 양공주 딸 자랑을 한다는 거야!”
“그래서 돈벌이라면 양공주를 해도 괜찮다는 거니?”
“그런 건 아니고, 시골의 농촌에서 서울로 가면 어쩌다 그렇게 되기도 한자는 얘기야!”
그런 얘기로 밤이 깊어갔다.
그의 어머니가 야참으로 술과 떡, 과자를 차린 상을 내왔다. 여자들은 떡과 과자를 먹기도 하였지만 남자들이 권하는 술을 받아 한두 잔은 마셨다. 밤은 깊어갔다. 인태는 술이 취해 한 쪽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코를 낮게 높게 골았다. 석호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며 좌중을 둘러보며 내년 설에 다시 만나자면 문밖을 나섰다. 그녀와 영숙이도 집으로 가야겠다면 그를 보고 집까지 바래 달라고 했다.
영숙이 집은 얼마 안가면 되었으나 그녀의 집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먼저 영숙이 집 앞에 가서 영숙이를 떼어놓고 그는 그녀와 함께 윗마을 묘치동으로 올라가는 신작로를 걸었다.
“나미 씨! 고백해도 될까요?”
“무슨 고백인데요?”
그녀는 그가 자기에게 할 고백이 무엇인지 짐작을 하는 것 같았다.
“나미 씨! 사랑해요!”
그 말에 그녀는 머뭇거렸다. 아마 초등학교 동창생이 프로포즈를 한다는 게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억만 씨! 저를 사랑한다고요.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면 하는 거지요. 우리가 왜 사랑을 못합니까?”
“억만 씨는 고등학교를 나왔고 나란 여자는 배운 것도 없는데 서로 사랑한다는 게 부담이 되지요. 그리고 집안으로 보아도 사는 것도 억만 씨의 집은 손색이 없잖아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가난한 농사꾼의 집안이잖아요.”
“사랑에는 그런 장벽이 필요 없잖아요. 나미 씨를 사랑합니다. 저의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주셔요. 주시겠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를 포옹했다. 그녀는 놀라기 보다는 침착하게 포옹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입술까지 포개는 것을 허락했다. 한참 포옹하면서 키스를 하고 난 그는 그녀를 집 앞까지 배웅했다.
그날 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녀가 집에서 봄을 지내고 초여름에 서울로 같 때까지 그는 밤마다 사흘이 멀다시피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아랫말 장천동과 윗말 묘치동의 중간 지점에 있는 외딴 정미소 앞 냇가에서 만났다. 그곳에는 둘이 나란히 누울 수 있는 넓이의 바위가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만나서 사랑을 불태웠다. 그곳은 마을에서 외져서 어느 누구에게도 그들의 사랑을 들키지 않을 아늑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도 그녀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순결을 바쳤다.
그후 삼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이제 그와 그녀의 만남은 운명을 결정지어야 했다.
“나미 씨! 진정 사랑했소. 그리고 영원히 인생의 동반자로 동행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농촌에서 흙과 싸우는 나를 배신했소!”
“억만 씨! 난 농촌이 싫어요. 나는 찌들게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 몸이 떨려요. 배움을 갈망했지만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가 봉제공장 시다로 일해 돈을 좀 보아 양재학원에 다녔지요. 그렇게 배운 양재기술로 밥을 먹고 살았지요. 그렇다고 고생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시골 농촌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가난한 고향이 지긋지긋해요.”
그는 삼년 전 그녀가 사랑의 고백을 할 때와는 전연 다른 태도로 돌변했다.
“나미 씨가 나를 서울로 올라와 함께 산다는 보장을 해달라고 숱하게 말했지만, 난 그럴 수 없습니다. 나 역시 나미 씨를 이해해요. 농사꾼이라는 게 하루 종일 흙먼지 속에 일하다 저녁이면 손발 씻기 무섭게 곯아떨어지니, 농촌으로 누가 시집오려고 그러겠소. 입장과 처지를 바꿔 생각해도 그러리라 생각되오. 그러나 난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 집 농토거리 다 팔아 서울로 간들 전세방 얻을 돈 밖에 더 되나요. 서울 변두리의 집 한 채 값도 안 되는 재산이지만 나에게는 소중해요. 흙은 거짓이 없고 노력의 댓가를 반드시 알아줘요.
우리 할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손자들에게 ‘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넓은 세상 대도시로 나가기를 바랐으나 부산에서 경찰관으로 치안 공무원 생활을 하신 아버지 생각은 달랐지요. 작은 물고기는 큰물에 가면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쯤은 통째로 삼켜버린다며 농촌에서 살면서도 큰 뜻을 펼칠 수 있다고 하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난 사랑했던 당신, 나미를 포기하고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불타는 사명감으로 농촌을 지키겠습니다.”
“억만 씨! 농촌을 떠나지 않는 한 생각할 여지가 없네요. 나 역시 억만 씨의 끈질긴 청혼을 받아들이려고 몇 번이나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줄곧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네요. 억만 씨와 서울에서 사는 외에는 ... ... ...”
실은 그랬다. 그녀는 그와의 육체적 관계 이후 순결문제로 무척이나 고민했던 나날이 있었다. 그 고민은 결국 한두 번 성경험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정신적으로 순결하면 되지 않는가. 스스로 단정을 내리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는 그해 초여름 그녀가 서울로 상경한 후 몇 번의 청혼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기에 포기하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다시 8.15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에서 다시금 만나게 된 운명은 가난한 탓으로 농촌을 등지려는 여성과 그래도 농촌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남성과 일치하지 않는 건 분명했다.
“나미 씨! 당신과 나의 운명의 길은 따로 있는가봅니다. 욕심 많은 내 생각으로 무척 괴롭혔나 보오. 이제부터 우리의 관계를 하느님만 아는 걸로 합시다. 그리고 이후에는 꿈에라도 만나서는 안 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남긴 채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니면 ‘이 세상에 어디 여자가 없나 용기를 갖자!’라는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굽이진 소로를 따라 삼산초등학교 쪽으로 내려가서 집으로 향했다. 낮에는 숲속에서 잠만 자다가 밤에만 활동하며 우는 쏙독새가 열심히 칼질하는 소리로 무거운 밤공기를 썰어댔다.
“쏙독 쏙독 쏙독 ... ... ... ... ....
싹둑 싹둑 싹둑 ... ... ... ”
40여 년이 훨씬 지나서 만나게 된 동창모임에서 모두들 처음에는 서먹서먹했다. 그러나 술잔이 한 순배 돌더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변했다. 도토리 키 재듯이 고만고만한 얘기로 왁자지껄해졌다. 그런 틈을 타서 그는 그녀, 나미 곁으로 다가가서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가 죄라도 지은 듯이 움찔하면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나미 씨! 아주 오랜만 입니다.”
“그렀군요. 잘 지내셔요?”
“그럼요. 이제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되었답니다.”
“저는 딸이 둘인데 아직 출가를 못 시켰지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그리 밝게 보이지 않았다.
“나미 씨! 지금도 서울에서 사시나요?”
그 말에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그의 물음에 대답하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서울에 안 사시는 모양입니다”
“그래요. 시골에서 살아요. 경기도 이천에서요.”
“이천이라면 지난해 겨울에 구제역으로 많은 소를 생매장했다는 뉴스를 보고 여주 이천이 벼농사로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소, 돼지를 많이 키운다는 걸 알았지요. 그런데 이천에서 어떻게 지내십니까?”
“억만 씨에게 얘기하기 부끄럽네요. 시골에 살지 않겠다고 했던 내가 시골에서 살줄은 미처 몰랐어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할게요.”
모임은 더욱 뜨거워져지자 왈가닥 영숙이가 옆에 앉았던 누군가의 바지에서 허리띠를 빼앗아 뱀장수 흉내를 낼 때는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그 옛날과는 다른 버전이었다.
저기 가는 아저씨들 이리와 봐
남자는 배꼽아래 힘이 좋아야 돼
재벌 부인이 왜 바람 나고
교수 부인이 왜 바람 나며
의사 부인이 왜 춤 바람에 미쳐 집을 나가는지 알아
여자는 밥심 만으로도 못살아
남자가 배꼽아래서 힘을 써주길 바래
이 오대산에서 잡은 백사
백사로 담은 배암술 마시면
거시기가 벌떡 벌떡 일어서 부인네들 그냥 죽여줘
한바탕 폭소를 터트리게 했던 영숙이가 고마웠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동창모임은 크게 웃을 일이 없었다.
모두 초등학교 6년 동안 있었던 얘기를 서로 나눌 때 그녀는 밖으로 나가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그도 다른 동창생들이 알지 못하게 그녀를 뒤따라나갔다. 파도가 너무나 잠잠했다. 달빛이 해수면에 내려 칼치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나미 씨! 옛날 생각 이젠 하지 맙시다. 그땐 우린 성인이기는 했으나 철이 없었지요. 그 후 난 나미 씨를 잊고 열심히 농투성이로 살아왔지요.”
“억만 씨, 그땐 제 생각이 짧았나 봐요. 그 후 후회 많이 했어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서울에서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버스기사였던 남편을 만났죠. 그이가 어쩌다가 교통사고를 내게 되어 그만 두게 되었죠. 그래서 남편의 고향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시조모, 시부모 모시고 살면서 시동생들도 돌보아야 했지요. 거기에다 농사일까지 해냈지요. 그러다보니 빠듯한 살림살이 어쩌다 못해 수익이 괜찮다는 젖소를 키우다가 한우를 기르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가격하락으로 소파동이 날 때마다 소가 애물단지였지요. 그렇지만 소를 키우지 않으면 애들 공부도 시킬 수 없었지요. 그런데 지난 해 겨울 구제역 때문에 소를 자그만치 100여 마리나 살처분으로 파묻고 나니, 그만 머리가 돌 것만 같았지요.
그런데 우리 소는 구제역이 걸리지 않았지만 정성으로 애지중지 키우던 소를 정부의 ‘구제역 발생지역 안에 있어도 살처분 매장하라’는 지시로 살아있는 소를 포크레인을 동원해 판 구덩이에 묻을 때 서로 엉켜서 버둥거리며 시퍼런 두 눈을 부릅뜨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던 소를 본 남편은 충격을 받아 한동안 술병만 껴안고 지냈지요. 한땐 생매장할 때 포크레인 삽날로 배를 가르면서 묻기도 했는데 출산 직전의 송아지가 뱃속에서 빠져나와 피범벅이 되어 꿈틀거리는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어른거려 정신과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기도 했지요.”
“아!, 그랬군요. 지금은 어떻게 ... ... ...?”
“한 일 년 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손을 놓고 지냈지요. 그러나 무한정 일손을 놓고 살 수 없는 노릇이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는 게 소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남편과 나는 다시 용기를 내서 송아지 20여 마리를 입식해 다시 시작했지요. 그런데 억만 씨 저에게 실망하셨지요?”
“실망이라니요?”
“억만 씨를 뿌리치고 떠나갈 때 시골 농촌에서 살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게 죄가 되었나 봐요. 절대로 억만 씨에게 촌 아낙네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지요. 지나고 보니 꿈 많던 그 때가 좋았나 봐요.”
그녀의 그런 말에 그는 잠시 생각했다. 8.15 광복절 기념 축구대회가 끝나고 만났을 때, 그날 좀 더 적극적으로 매달려 청혼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나미 씨,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그게 다 운명이죠.”
“그래요. 얄궂은 운명이지요. 이렇게 해후할 줄 몰랐어요. 처음 동창회를 한다는 소식을 받고 참석을 할까 말까를 두고 무척 망설였지요. 만약 참석해 억만 씨를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두려움이 앞섰지요. 그래도 만나서 내가 억만 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실은 우리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남매였대요?”
“그게 무슨 얼토당토 않는 뚱딴지같은 소린가요? 아니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요?”
“글쎄요.”
“나와 나미 씨가 남매라니요?”
“억만 씨가 하루 이틀이 멀다하고 편지를 서울로 보낼 때였지요. 한 남자를 결혼으로 구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쉬는 날이었는데 양장점에 같이 일하던 언니와 남산에 놀러갔지요. 남산타워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다가 남대문 부근이라고 여겨지는 어느 골목에 언니를 따라 들어가게 되었지요. 태극기와 빨간 깃발을 매단 대나무를 꽂아놓은 집들이 서너 집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집을 골라 들어가게 되었지요. 점집이지요. 언니가 그때에 복채를 두둑히 내놓고 점을 치는 거예요. 결혼할 남자와 자기의 이름과 생년월일 등을 점쟁이에게 알려주면서 점을 쳤지요. 그 점쟁이가 언니에게 내린 말은 ‘천생연분 찰떡궁합’이니 잘 사게 된다고 했지요. 그리고 오려고 하는데 점쟁이가 나를 보고 언니가 복채를 두둑히 냈으니 더움으로 운수를 보아준다고 했지요. 거기에 그만 혹해서 점을 쳤지요. 그래서 억만 씨와 내가 결혼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점을 보게 되었지요. 그런데 ... ... ...?“
“그, ‘그런데’라니요?”
“아, 글쎄 전생에 억만 씨와 나는 한 부모에서 태어난 남매인데 다시 태어날 땐 각자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대요. 그러니 만약 결혼하게 되면 둘 중에 하나는 과부가 되거나 홀애비가 될 운명이라고 그러면서 교제를 끊으라고 그랬지요. 그렇지만 점쟁이 말을 믿으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쉽지 않더군요. 그 영향력이 억만 씨와 내가 함께 할 수 없는 많은 요인으로 작용했지요.”
“나미 씨! 전생에 우리가 남매라면 후생에 만났다면 더 잘 살아야 맞는 점괘일 텐데 그 점쟁이는 엉터리지. 그렇지 않아요?”
“그랬어요. 그 점쟁이는 엉터리였어요. 점을 본 그 언니 찰떡궁합 그 남자와 결혼 후 성격차이로 이혼했어요. 지나간 얘기를 해보았자 아무 쓸데없는 얘기로 무의미하지만 그런 지나칠 수 없는 과오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서 무얼 하겠습니까. 다 추억이라고 잊어버립시다.”
“그래도 억만 씨와의 추억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지요.”
차가운 달이 그와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걷던 해변 길을 되돌아 동창회 모임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그는 농민도 사장 소리 듣는 그런 세상 오기를 꿈꿀 것이다. 그녀는 구제역으로 텅 빈 축사서 다시 입식한 송아지를 열심히 돌볼 것이다. 전생에 남매였지만 현세에서는 다른 아낙의 지아비요 다른 남정네의 아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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