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해외 순방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미국 워싱턴 방문에서는 지난 2022년 말과 완전히 다른 현지 상황및 분위기와 맞닥뜨렸고, 그의 거침없는 언사가 동맹국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는 언론(미 월스트리트저널) 평가도 나왔다.
그를 가장 난감하게 만든 것은, 캐나다 하원에서 주먹인사를 나눈 나치 부역 우크라이나 노병과의 만남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22일 캐나다 하원에서 연설했다. 그 자리에는 98세의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야로슬라브 훈카 노인이 참석했는데, 그가 소개되자 캐나다 의원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앤서니 로타 하원의장은 그를 러시아에 맞서 우크라이나 제1사단에서 모국 독립을 위해 싸운 '우크라이나와 캐나다의 영웅'이라고 소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그에게 손을 흔들고 주먹을 치켜세워 인사했다.
캐나다 하원의장에 의해 소개된 훈카 노인(위)와 그와 주먹 인사를 나누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영상 캡처, The Canadian Press
문제는 그 이후.
로타 의장이 소개한 우크라이나 제1사단은 나치의 히틀러 친위대(Waffen-SS친위대) '갈리시아(현재의 우크라이나 서부 르보프 일대/편집자) 분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유대인 단체들은 훈카 노인의 정체를 알고 분노했고, 서방 외신들도 이를 규탄하면서 '국제적인 나치 스캔들'로 번졌다.
캐나다 정부는 26일 로타 의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을 요구했으며, 그는 이튿날(27일) 전격 사임을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6일 "젤렌스키 대통령의 캐나다 방문은 국제적인 스캔들로 기록됐다"며 "우크라이나에서 나치의 준동을 막기 위해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푸틴 대통령의 공격 명분에 딱 맞는 결과"라고 우려했다. 러시아의 '전쟁 프로파간다'(선전 선동)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가 캐나다 방문에 앞서 미국에서 만난 유력 인사들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사람은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안드레이 예르마크 대통령실 실장과 함께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만났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만나는 젤렌스키 대통령(오른쪽)과 예르마크 실장/사진출처:텔레그램 @ermaka2022
키신저 전 장관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영향력 있는 미국 기업가들과의 만남에도 참석했지만, 대통령실은 22일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예르마크 실장이 이틀 뒤인 24일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키신저 전 장관과의 '별도 회동'을 알린 것이다. 그는 "키신저 전 장관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매우 기뻤다"며 "그는 나토(NATO)의 우크라이나 로비스트 중 한 명"이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의 호평이 주목을 받은 것은 우크라이나 측과 키신저 전 장관과의 언쟁(?) 때문이다. 키신저 전 장관은 지난해 5월 다보스 포럼에서 우크라이나의 중립화와 두 달내 평화협상 개시 등을 주장해 우크라이나 측의 반발을 불렀고, 지난 5월에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우크라이나 측에 크림반도 양보를 촉구한 바 있다.
그의 평화 구상은 본질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전제로 현 전선을 따라 휴전하는 '한국전 시나리오'와 일맥상통해 우크라이나 측의 신경을 계속 건드렸다.
그런 키신저 전 장관을 젤렌스키 대통령 팀이 굳이 별도로 만난 것은 역시, 달라지고 있는 미국내 분위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안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0일 미 ABC TV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당국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탱고를 출 때 두 사람이 필요하듯, 협상에도 두 사람이 필요하다"며 "지금까지 푸틴 대통령 측에서 외교(평화 협상)에 관심을 보인다는 징후는 없지만, 그가 관심을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도 협상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트라나.ua는 "많은 전문가들은 이를 협상에 대한 미국의 입장 변화로 받아들였다"며 "(발언이) 블링컨 장관의 키예프(키이우) 방문 이후에 나왔다는 점도 흥미롭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영향력 있는 TV 방송 진행자인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chariah, 현재 서울경제 칼럼리스트)도 워싱턴포스트(WP) 기고를 통해 최근 키예프를 방문한 뒤 받은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일부 인사들은 안보 보장의 대가로 휴전을 상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한 우크라이나 정치인은 '협상을 거부하기는 쉽지만,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과 귀환한 병사들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동방경제포럼에서 기조 연설하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이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지난 12일 동방경제포럼에서 "미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협상에 관심이 있다면, 키예프가 소위 '젤렌스키의 법안'을 취소하도록 설득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법안'은 우크라이나 의회(최고라다)가 푸틴 대통령의 재임 중 러시아와 협상을 금지한 법안이다. 러-우크라 평화 협상은 2022년 5월에 중단됐는데, 같은 해 10월 젤렌스키 대통령은 '젤렌스키 법안'에 서명했다.
그는 이번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러시아군이 1991년 국경에서 모두 철수하는 것은 물론, 흑해와 아조프해의 해상 통제권 반환을 '우크라이나 평화 구상'의 핵심 조건으로 제시했다. 협상이 시작될래야 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 구상에 타격을 가한 사람은 이나시오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다 시우바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이틀 후인 22일 "우크라이나 분쟁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은 없다"며 "이 상황을 벗어나는 이상적인 방법은 휴전과 평화 협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브라질이 유엔 총회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브릭스 국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20일 뉴욕에서 열린 우크라-브라질 정상회담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은 "솔직하고 건설적인 대화였다"며 "우리는 외교팀에 양국 관계의 다음 단계와 평화 회복 노력을 지시했으며, 계속 (우크라이나) '평화 공식'에 관한 회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이틀 뒤 다 시우바 대통령이 그 발표의 맥락을 뒤집은 것이다. 그는 "세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쳤다"며 평화 협상을 촉구한 지난 여름 이후, 또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만남 이후에도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 셈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애초부터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고 다 시우바 대통령과 만난 이유는 분명하다. 유엔총회 개막을 앞두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휴전협상을 촉구하는 개발도상국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미국의 지원 의지도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미 워싱턴 포스트 18일 보도).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평화 공식' 의제로 이번 유엔 총회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남반구 개발도상국/편집자) 국가들(특히 브라질)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