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헌 정태수의 서예이야기 8
예서의 성인 채옹의 희평석경
“서예라는 것은 풀어놓은 것이다[書者散也].” 동한의 서예가 채옹(蔡邕, 133~192)이 서예를 정의한 말이다. 여기서 산(散)은 회포를 풀어낸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서예는 글씨를 쓰는 사람이 마음속 회포를 거리낌 없이 풀어놓은 것으로 정의했다. 채옹은 전서가 예서로 변하는 예변(隸變)의 시기에 서예를 집대성하여 후대에 예성(隸聖)으로 불렸다. 당나라 장회관은 ‘서단(書斷)’에서 채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채옹의 자는 백개(伯喈)이고 진나라 유어 사람이다. 관직은 중랑장(中郞將)에 올랐으며 고양후(高陽侯)에 봉해졌다. 거동과 용모가 남달랐으며 성실하게 가르치는 교육자이자 널리 공부한 학자였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음악에도 통했고 천문, 술수, 수학, 재난과 변고의 조짐에도 밝아서 갑자기 물어도 대답하지 못하는 바가 없었다. 서예도 잘 하였는데 전서와 예서가 세상에 빼어났으며 특히 팔분서예의 정미함을 얻었다. 서체의 법이 백번 변화하고 영혼을 다한 글씨는 오묘하기 그지없어서 고금의 서예가 중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여기에서 팔분의 정미함을 얻었다는 말은 그의 대표작인 ‘희평석경(熹平石經)’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희평4년(175) 유교의 여러 경전에 문자가 달라서 표준적인 문자로 이를 정정하고, 그것을 예서체 비로 새겨서 낙양 태학의 문 앞에 희평석경을 세웠으며, 비백체를 창시했다. 따라서 채옹은 이사가 ‘태산각석’으로 문자와 서예의 두 방면에서 전서의 대표가 되었듯이 ‘희평석경’으로 예서의 문자형태를 표준화하고 유교문헌을 예서로 서사함으로써 후대 예서를 공부하려는 사람의 모범이 됐다.
전서는 결구와 용필에서 필획이 중봉과 원형이 중심이었다면, 예서는 필획의 시작은 누에의 머리와 같은 잠두(蠶頭)로 하고 필획의 끝은 제비꼬리와 같이 연미(燕尾)로 마무리함으로써 필법이 전서보다 두세 가지 늘어났다. 따라서 서예는 상형을 묘사하는 선(線)의 시대에서 추상적인 점획의 시대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채옹은 ‘필론(筆論)’과 ‘구세(九勢)’라는 두 편의 서론을 저술하여 서론 연구의 서막을 열었다. ‘필론’은 150자의 짧은 서론이지만 서예를 대하는 감정과 정신에 대한 그의 미학사상이 담겨있다. 그는 창작할 때 감정과 정신의 적절한 조화가 핵심이라고 설파했다.
필론의 내용은 “서예라는 것은 풀어놓은 것이다. 글씨를 쓰려면 먼저 마음을 풀어놓고 감정에 맡기고 본성에 따른 연후에 써야 한다. 일이 촉박한 상태에서 글씨를 쓰면 비록 천하의 유명한 중산의 토끼털 붓으로 써도 좋은 글씨를 쓸 수 없다.”
이와 같이 창작자는 먼저 마음을 풀어놓고, 감정에 맡기고 본성에 따라 회포와 정성을 표현하며, 형상이 살아나게 운필하여 의상(意象)을 구현하는 것이 서예라고 말한다. 이러한 채옹의 필론은 후대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또 다른 서론인 ‘구세’는 중국서예사상 가장 중요한 필법론 중의 하나이다. 구세의 핵심은 두 가지인데 먼저 주역을 이용한 음양의 이치에 맞는 운필과 필력의 운용을 논했고, 다음은 붓이 부드러워야 기괴함이 나온다면서 필봉과 필세의 운용을 통해 점획을 제어하는 9종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 뒤에 “구세를 터득하면 비록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지 않더라도 또한 옛사람의 뜻과 오묘하게 부합되는 이론이다. 반드시 서예에 들인 공이 많아야 서예의 오묘한 경지가 열릴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육조시대 유협이 ‘문심조룡’에서 “1,000곡을 연습하고 나서 음악을 알게 됐고, 1,000자루의 검을 관찰하고 나서 검을 식별할 수 있었다.”는 말과 같이 서예에 들인 공이 많으면 오묘한 경지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서라벌신문 2023년 11월 30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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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자료로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새달도 건안히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길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