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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묵상글 들 ( 연중 제2주간 토요일. - 미움의 관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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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미움의 관심
마침내 사울이 죽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단식을 하며 애도를 합니다.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이렇게 다윗은 사울에 대해 끝까지 예와 사랑을 다했지만
다윗에게 사울은 끝까지 경쟁과 애증의 관계였으며
그래서 사울은 다윗으로 인해 일생 불행했고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이 불행하고 불쌍한 진짜 이유는 전쟁에 패하고 죽은 것 때문이 아니라
사랑으로 생을 끝내지 못하고 죽은 것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과 함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었고,
다윗과 경쟁하지 않고 하느님의 백성을 같이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먼저 다스리고 그에 이어서 다윗이 다스렸다면 좋았을 겁니다.
그러나 사울은 시기가 그의 마음에 들어참으로 인해
사랑을 잃었고 그래서 하느님과 다윗을 다 잃었습니다.
선의의 경쟁이란 말이 있지만 그러나
사울을 통해서 볼 때 선의를 가지고 혹 경쟁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경쟁을 하면서 선의를 가지기는 쉽지 않고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먼저
내 안에 자리잡고 있으면 선의의 경쟁을 혹 할 수 있지만
경쟁심이 먼저 자리잡고 있으면 선의의 경쟁이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경쟁심이란 사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경쟁 상대에게 미움의 관심이 온통 쏠리게 함으로 하느님도 놓치게 하고
하느님 사랑을 놓고 경쟁을 할 경우에도 서로 사랑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미움의 관심.
아! 그렇습니다. 미움의 관심,
그것이 일생 사울을 고통스럽게 했고,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관심과 미움의 관심 중 어떤 것이 내게는 많은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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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 3,21)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절로 되어 있는 짧은 본문입니다.
<첫 번째 절>(20절)에서는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마르 3,14 참조).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마르 3,20)
이처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복음으로 ‘물들어가고 섞여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배추벌레가 배추를 먹으면서 배추색깔로 변해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절>(21절)에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여기에서, “붙잡다”(krateo)라는 말은 ‘손에 쥐다, 제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러 나섰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 손에 쥐고 조정하고 흔들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수난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잡고 반박하였”(마르 8,32)던 것도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신 일을 제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자기 손에 붙잡고 조정하며 흔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르 8,33)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려고 붙잡는 이는 그가 비록 제자라 하더라도, 혹은 친척이라 하더라도, 결국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신 것이지, ‘나를 붙잡으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뿐 붙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자기의 뜻으로 예수님을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요한 20,17)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붙들린 사람’,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앙드레 루프) 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제지하시도록 승복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그 제지는 우리의 굴복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원하는 바를 얻으려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께 붙들려 사로잡혀 따라가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붙드셨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매달려 있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붙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에 붙들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붙잡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느님이 아니라, 한갓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치신 분’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사로잡히신, ‘아버지께 미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내가 배신하고 무관심할 때마저도, 언제나 나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진정,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 3,21)
주님!
당신께 사로잡힌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잡힌 자로 살게 하소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에 붙들려 살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조정에 승복하게 하소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사로잡혀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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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흔들림 없는 삶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나 죄인이나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니 근심 걱정만 가득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 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 -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받으시고 모함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래도 그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하십시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의 속은 어떤 이가 흔들 때 드러납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 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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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친척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께로 군중이 모여드는 인기와 명성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 놀라마지 않았습니다. 평소 그들이 알고 있던 모습에 비추어서는 도대체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그들은 급기야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는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사태가 번졌는지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상황 설명이 필요합니다.
나자렛 시절에 예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순종하며 자라셨습니다. 이 시절에 그분도 여느 유다인 어린이 · 청소년들이 그렇듯이 모든 것을 부모에게서 배웠을 것입니다. 기도와 율법과 성경, 그리고 목수 일은 물론 집안 살림살이와 세상 돌아가는 사정까지. 그러다가 열두 살이 될 무렵 커다란 변화가 생겨납니다. 인성으로서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며 배우던 시절에서 신성으로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변화를 잘 나타내준 사건이 성전에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사건(루카 2,41-52)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내면에 나타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던 요셉과 마리아는 놀라고 당황스러웠겠지만,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의 자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소년 예수님으로서는 그러는 요셉과 마리아의 반응이 또한 생뚱맞았던지, 태연자약하게 이렇게 대꾸했었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그 이후에 요셉은 먼저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청년으로 장성해 가는 예수님과 홀몸이 된 마리아는 모자 간에 대화할 시간이 많았을 것이고 하느님의 개입하심에 대한 자신들의 기억과 기도를 많이 대화로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른 살이 되신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어머니를 떠나 복음선포 활동에 나서게 되었을 때 어머니 마리아가 반대했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 것이지요.
출가하신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인근의 카파르나움에 집을 얻으신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살던 그 마을에서 예수님은 가장 많은 이들을 만나셨는데, 하도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키니까 그 마을의 이름은 ‘예수의 마을’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는 ‘집’은 바로 이 집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께서는 당시 대가족제도의 관습에 따라서 이미 연세가 많아지셨으므로 친척 형제들의 봉양을 받게 되셨습니다. 이들은 마리아의 아들들이 아니었고 따라서 예수님의 동생들도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가 있는데,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숨지실 때에 어머니 마리아를 이들에게가 아니라 제자 요한에게 맡겨 드렸던 사실입니다. 그들이 친동기간이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친어머니도 아닌 집안 어른을 순전히 대가족 관습에 따라서 아들 예수 대신 부양하게 된 처지에서 이런 의무는 그리 달가운 노릇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소년 예수님께서 열두 살 무렵 이후부터 내면에 자라난 신성적인 자의식을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그들로서는 장성하신 그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들까지 쫓아내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터입니다. 그러니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들로서는 그분이 미쳤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바리사이들이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더러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행한다는 악소문까지 퍼뜨려놓았으니, 귀가 얇고 믿음도 없던 그들로서야 더더욱 그분을 붙잡아서라도 집안 망신을 그만 두게 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친척 형제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이었던 알패오의 두 아들은 그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분하여 작은 야고보라고 부르는 형과 시몬 베드로와 동명이인으로서 시몬이라고 부르는 동생이 그들입니다. 이 시몬은 혁명당에도 가담했을 정도이니까, 세례자 요한의 노선에도 동조하고도 남았을 인물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보낸 제자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실은 사제로서나 수도자 성소를 받은 이들 가운데, 또는 간혹 평신도로서 신앙의 눈을 뜨게 된 이들 가운데, 오늘 복음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겪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소라는 자의식 역시 신성의 영역에 속하는 의식이므로, 인간적인 겉모습만 보아오던 가족이나 지인들로서는 “미쳤다!”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교우 여러분!
미쳤다는 것이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는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앞의 미침은 미칠 광(狂)자를 쓰고, 뒤의 미침은 이를 급(扱)자를 써서, 한자로는 불광불급(不狂不扱)이라고 씁니다. 어떤 일이든지 미칠 정도로 몰두를 해야 일정한 성취를 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쳤다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무엇에 미치느냐, 또는 어디에 미쳤느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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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외모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이발하러 가면 늘 사람 없는 미장원에 들어갑니다. 짧게 커트만 할 것이라 굳이 잘하는 곳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이 없으면 빨리 이발할 수 있으니 더 좋습니다.
지난번에 이발하러 읍내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미용실마다 다 한두 명씩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발소를 발견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가지 않은 곳입니다. 오랜만이라 낯설었고 혹시 이상한 곳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들어갈까 망설였습니다. 마침 주인아저씨가 나오면서 이발소 안을 볼 수 있었고, 이상한 곳이 아닌 것 같아서 들어갔습니다.
오랜만에 이발소에서 이발한 것입니다.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발소 주인아저씨와 참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들어갈 때는 너무나 어색했습니다.
성당에 처음 오신 분들이 종종 “너무 어색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합니다. 기도를 처음 해 보는 분들도 “너무 어색하고 힘들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시 당연합니다. 처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에는 익숙했던 이발소가 그렇게 낯설게 느껴진 것은 오랜만에 찾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어색하다면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따라서 주님과의 관계가 익숙해질 때까지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전교 여행을 보면, 정말로 열심히 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에 정열을 쏟고 계셨던 것입니다. 밥도 먹지 않으면서 몰두하는 모습, 단 한 명이라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그 노력을 보고서 사람들은 어떤 평을 했을까요?
그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나 봅니다. 여기에 예수님을 반대하던 율법 학자들은 마귀 들렸다고 군중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마귀 들렸다는 소문이 결코 좋은 소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소문을 친척들이 듣게 되었고, 예수님을 붙들어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나 봅니다. 왜냐하면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높은 지위를 얻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데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바라보면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에 더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면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과 함께하는 그 모든 시간이 낯선가요? 아니면 기쁨과 행복의 시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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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지나다니는 길은 잊어 버릴 수 없어. 우리가 잊어버릴 수 없는 이유는 마음속에서 서로 자주 지나다녔기 때문이야(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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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마음가짐.
계속된 병 치료를 위해 오랜 시간을 병원에 있었던 한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퇴원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마지막 검사를 해 보니 신장병과 고혈압 진단을 새롭게 받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의사가 이제 수술과 약이 소용없다면서 1년 정도 남은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방에 틀어박혀 누구와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가 방문을 열고는 말합니다.
“나는 정말 바보 같아. 앞으로 1년은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살아있는 시간을 즐겁게 보낼 생각을 못 했지?”
그는 매일 아침 “웃자, 웃어!”를 외쳤고, 그러면서 점점 기분이 나아지고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여전히 건강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한 마음가짐이 아니라, 지금을 잘 살기 위한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미래도 저절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마음가짐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가짐은 지금을 잘 살게끔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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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의 원로 사목자께서 미국에 오셨다가 선종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신부님들이 오기가 수월치 않아서 미국에 있는 사제들이 신부님을 위한 장례미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선종하면 교구장님이 미사를 집전합니다. 전임 본당의 교우들이 연도를 하고, 미사에도 함께 합니다. 미국에서 선종하였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보내준 신부님의 영정사진을 들고 뉴욕에서 샌디애고로 갔습니다. 멀고, 낯선 미국에서의 선종이지만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장례미사에 함께 하면서 박해시대를 생각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아무도 신부님을 위해서 울어 줄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의 시신은 이민식 빈첸시오가 모시고 미리내에 안장하였습니다. 이민식 빈첸시오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모친 고 우술라의 시신도 김대건 신부님 옆에 모셨습니다. 92세에 선종한 이민식 빈첸시오도 김대건 신부님 옆에 묻혔습니다.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도 복음을 전하다가 길 위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죽음의 장소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다면 죽음의 장소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심을 믿습니다.
카인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었던 동생 아벨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아벨은 하느님께 정성껏 예물을 드렸습니다. 부자의 집 앞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던 라자로도 아브라함의 품에서 편안한 안식을 얻었습니다. 화려한 궁궐에 살았던 헤로데는 많은 사람들의 추모를 받으며 죽었지만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평생 부자로 잘 먹고 잘 살던 부자는 큰 무덤에 묻혔지만 어둠의 세계로 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호소를 했지만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고, 교만과 욕심에 가득한 죽음이었다면 선종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했던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평생 함께 했던 친구 요나탄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비록 안타까운 죽음이었지만 다윗의 애도와 기도가 함께 했기에 사울과 요나탄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원로 사목자께서도 사제의 길을 충실하게 가셨기에 비록 먼 타국에서 선종하였지만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미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는데 십리를 가주기 때문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 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세와 성공 그리고 부와 명예를 쫓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영적인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수준에서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나비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여 주셨고,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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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불광불급(不狂不及)
-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
오늘 복음이 참 짧습니다. 단 두절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찾았는지 봅니다. 참으로 생명의 진리를 찾는 인간의 갈망을 반영한다 싶습니다. 마지막 구절, 미쳤다는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3,21)
참으로 미치기 쉬운, 때로 위태하게 생각되는 사람들입니다. 미칠 광狂자가 들어가는 많은 말마디가 이를 입증합니다. 광기, 광태, 광증, 광신, 광인, 광폭 등 찾으면 또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말마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을 강론할 때 마다 인용했던 불광불급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자신 만의 일가를 이루기 위해, 참나의 실현을 위해 미칠 정도의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함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천재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불광불급의 부단한 투지로 노력한 것이 천재들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괴물이나 폐인이다.’라는 말마디입니다.
참으로 험하고 힘든 생존경쟁 치열한 인생 광야 삶의 전쟁터에서 세가지 인간 유형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저는 강조합니다. 바로 성인과 폐인과 괴물입니다. 참으로 치열하게 제대로 미쳐 정진할 때 성인이지만 이런 저런 죄악의 유혹에 빠져 시간과 정력을 탕진하고 세상 보이는 것들에 중독될 때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사람되기가 얼마나 힘든 평생 과정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평생 삶의 목표로 할 바는 참 사람이, 참 내가, 내 고유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백상담중 착한 신자분들에게 자주 권하는 말씀이 성인이, 성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20세기의 대 영성가 토마스 머튼에 대한 평가도 생각납니다.
“그는 가톨릭이기 보다는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교인이기 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 보다는 사람이었다.”
영성의 절정에 사람을 놓습니다.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참내가 되는 것, 성인이 되는 것이요 이 또한 평생과제입니다. 흔히 우리가 수도원에 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닌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 합니다. 과연 날로 내적으로 성장 성숙함으로 주님을 닮아 주님의 사람이, 참내가 되어가고 있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괴물처럼, 폐인처럼 인생 마감된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이래서 치열한 영적전투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합니다. 미쳐야 미칩니다. 참으로 제대로 미쳐 항구히 인내의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참나의 실현이요 성인입니다. 갈수록 내적으로 치열해 지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영적전쟁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아가는 영적 전의가 절실합니다. 얼마전 읽은 말마디에 공감했습니다.
“힘든 일이 있었다면
이제는 일어날 차례.
쓰러져도 괜찮아.
무너지지만 말아.”
하느님 희망의 끈을 놓치면 곧장 무너지는 삶입니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Dum vita est, spes est). 이와 더불어 생각나는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의 자포자기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이래야 영적 탄력 좋은 삶이요 무너지지 않습니다. 영적 삶이란 결국 무너지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텨내고 견뎌내는 수행이요, 이의 구체적 수행이 일과표의 준수에 따른 반복의 삶, 질서의 삶입니다. 삶이 무질서할 때 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일과표의 일상화, 습관화에 의한 규칙적인 삶이 우리를 무너지지 않게 합니다.
또 자주 사용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주님의 전사戰士는 싸우다 죽어야 전사戰死해야, 사고사나 객사, 교통사, 병사가 아니라 싸우다 전사해야 비로소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다, 일하다, 공부하다, 죽을 때 비로소 영적 전사라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양손을 들고 기도하다 성전에서 또렷한 정신으로 임종했으니 거룩한 영적 전사戰死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사울과 요나탄의 전사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참으로 치열하게 하느님의 전사로 살다가 전쟁중에 전사한 이들을 애도哀悼하여 바치는 오늘 제1독서의 다윗의 애가哀歌가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戰士로 치열하게 살다가 장렬하게 전사戰死한 사울과 요나탄 일화가 우리에겐 강렬한 영적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살다가 전사다운 전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 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힘이 세었지.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다윗의 애가가 감동적이라 심금을 울립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전사戰士로 살다가 치열한 전투중 전사戰死한 사울과 요나탄에 대한 애도입니다. 사울과 요나탄의 기억은 주님의 전사인 다윗에게 끊임없는 분발과 용기, 영감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쳐야 미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고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비롯한 제1독서의 다윗, 그리고 무수한 성인들이 그 좋은 모범이자 증거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에 제대로 미쳐 참나의 성인이 된 주님의 전사들인 성인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제대로 미친 성인이, 주님의 전사가 되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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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에서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집으로” 가십니다.
그 집은 아마도 카파르나움에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마르 1,29)일 것입니다.
‘집’이라는 낱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분을 붙잡으러 나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분께서 미치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더 활동하시지 못하도록 붙잡으러 나섰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예수님의 친척들이 보인 태도는
그분의 고향 사람들이 보인 태도와(마르 6,1-6 참조)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앙을 드러냅니다.
예언자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네 형제들과 네 아버지 집안조차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는구나”(예레 12,6).
마르코 복음서에서, 오늘의 짧은 복음은 당신을 비방하는
율법 학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마르 3,22-30 참조)과
참가족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마르 3,31-35 참조)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집에 도착하였을 때
당신 곁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사도들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파견되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참된 가족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 안에서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예수님의 가족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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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 친척들의 몰이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알고, 또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가족들이다. 그것 때문에 어떤 때는 아무런 부담 없이 농담하고, 또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가족들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나를 잘 알고 있으므로 이해해 주리라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많이 체험한다. 예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업적을 통하여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고, 이것을 본 군중들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 행적들을 비하하며 악령의 힘으로 기적을 행한다는 등 비방을 하였다(22절).
여기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21절). 아마도 예수께서 고향, 친척, 직업을 모두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으셨을 것이다. 사실 그 형제들과(요한 7,5) 고향 사람들은(마르 6,1-6)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이 친척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친척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알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 경탄하기보다는 악의에 찬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없는가? 한 사람이 완전하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인간은 서로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채워가며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가 나름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완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이러한 중상이나 비방은 훨씬 줄어들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그것은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에게서 무엇인가 좋은 점, 장점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면 좀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가족이다. 이 가족 안에서는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받을 일이 없는 가족이다. 하느님 안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제2의 그리스도인 우리는 이웃의 명예훼손이나 중상모략보다는 어렵고 곤란한 이들에게는 위로와 도움을,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진정으로 축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조금 힘들더라도 옳고 그른 진실과 허위를 가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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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 21)
우리의 집은
어떠한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다시금
반성하게 된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마음이 없는
우리가 있다.
성급하고
어리석은
우리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우리의 방식을
내려놓는 것이
주님을 진정
도와드리는
참된 방식이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 던지는
오해와 무지를
온 몸으로
느끼시는
예수님의 처절한
고독이다.
그 누구도
한 사람을
우리 방식대로
정상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다.
대화와 소통이
필요한 믿음의
관계이다.
늘 유,불리를
따지는
이기적인
우리들
모습이다.
자신들에게
미칠
파급효과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진리의 삶은
이렇듯
아프고 서럽다.
위험한 인물
예수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나누고 살아가는
진리의
예수님이시다.
붙잡을 수 없는
믿음의 여정이다.
집으로
데려다 놓는
것은 그 수준의
똑같은
욕심일 뿐이다.
이해관계에
묶여있는
시각이 아닌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응원과 지지가
필요한 여정이다.
친척들의
몰이해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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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풍문에 휘둘리지 않는 신앙♣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하였다.”(마르 3,21)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고, 갖가지 질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리는 등 여러 방법으로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 놀라워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여겨지는(1,29; 2,1) 집에 가셨을 때,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섭니다(3,21). 혈연관계에 있는데다가 같은 지방에서 그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왔기에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의 반응이 매우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의 태도에 비추어 우리 삶을 돌아봤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분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려고 했던 동기는 바로 ‘소문’이었습니다. 소문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이 아니고 그 진위를 알 수도 없는 그야말로 ‘세상에 떠도는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친척들처럼 귀로 들은 풍문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믿거나 그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사소한 일, 미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영적인 지혜와 감각으로 헤아리는 속 깊은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지요.
우리도 매일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살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나를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맡기고 단순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사고의 틀에 그분을 가두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좀 더 속 깊은 영성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말을 통해 소통하는 우리이지만 ‘떠도는 풍문’이 아니라 주님께 중심을 두고 그분의 눈으로 헤아리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해 못할 행동이나 사건들을 접할 때,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성생활은 호기심을 발동시켜 들리는 소리를 좇는 삶이 아니라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헤아리는 ‘말씀이신 분의 마음’을 키워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좀 겪어봤다며 그 사람에 대해 잘 아는 듯이 얘기합니다. 그러나 수십 년을 같이 살아도 모르는 부분이 훨씬 많은 게 인간입니다.
진위도 확인하지 않고, 관련 당사자인 양쪽의 얘기도 듣지 않고 판단하고 입에 올려 전하는 것이야말로 경솔함이며 일종의 폭력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아가 제한된 경험과 추측에 따라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어내고 전하며, 험담과 중상모략을 즐기는 참으로 유치한 ‘죽음의 언어’를 발설하는 것을 멈춰야겠습니다.
오늘도 순수하고 단순하게 예수님을 받아들여 풍문에 휘둘리지 않고, 그분과 확고한 일치를 이루어 영의 눈길로 만사만인을 바라보고 소중하게 대하는 속 깊은 하루가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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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
한 분야의 달인이 된다든지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것저것 다 섭렵한다든지,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야에만 오로지 선택하고 그 분야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야를 선택하고 거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입니다.
손님이 끊이지 않는 잘 나가는 식당들의 메뉴를 살펴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의 비결은 선택과 집중입니다. 이런 요리 저런 요리, 수많은 요리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관건은 가급적 메뉴를 단순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화된 메뉴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저도 요즘 나름대로 모듬 해물탕과 부대찌개, 김치찜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틈만 나면 이 요리들을 해대니 자연스레 고객들의 만족도를 살펴보게 됩니다. 평점이 낮을 때는 왜 그런지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봅니다. 이런저런 시도를 되풀이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어느 날 저도 모르게 이 분야의 달인이 되어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한 분야의 달인, 최고봉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유혹꺼리들을 과감히 뿌리치고 그 분야에만 오로지 목숨 걸고 투자한 결과가 달인입니다. 왜 안될까 고민하면서 날밤을 꼬박 새운 결과가 달인입니다. 한마디로 한 분야에 미친 결과가 달인인 것입니다.
복음전도 여행을 출발한 예수님께서도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음식조차 드실 시간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환자들과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몰려왔던 것입니다.
목자 없이 갈팡질팡하는 양떼들, 이런저런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 악령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자녀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은 전혀 돌보지 않으시고 식음까지 전폐하며 그들의 치유와 구원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한 가지만 선택하시고 집중하셨는데...그것은 바로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30년간 나자렛에서 숨은 생활을 하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과연 어떻게 사셨을까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즉시 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충만하고 효과적인 공생활을 위해 30년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영혼 구원의 달인이 되기 위한 강도 높은 연마와 훈련의 기간이 나자렛에서의 30년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과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어디에 우리 삶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미쳐 있습니까? 오늘 우리 내면에도 복음 선포와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한 그런 미친 열정, 그런 미친 에너지, 그런 미친 헌신이 다시금 살아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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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친 세상에서 정상인 게 정상인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자 그분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섭니다.
예수님의 삶이 분명히 자신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기 때문이지 예수님이 걱정되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인정받는 게 좋은 일일까요,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게 좋은 일일까요?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하느님께는 역겨운 일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신 분입니다. 세상과 싸우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주적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유럽의 600만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색출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보내는데 나름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패전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됩니다.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과정을 정리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아이히만은 재판 때 15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지만, 그는 단 하나의 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급 공무원으로서 출세를 위해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공무원으로서 나라에서 시키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수행한 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악한 시스템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죄’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사람은 항상 어떤 시스템 안에 속해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악한 시스템인지 선한 시스템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좋은 것인 양 열심히 적응하며 살았다면 사형이 선고될 수 있습니다.
어떤 선원이 어떤 배에서 평생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엔 경찰에 잡혀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 배가 해적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해적선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자아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 해적선에 탄 사람이고, 그 자아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도 커다란 해적선입니다.
우리가 해적 선단에서 잘 적응했다고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세상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나가야 합니다.
나치 시대 때도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100명의 유대인을 구한 ‘오스카 쉰들러’가 그런 사람이었고, 669명의 어린이를 구한 ‘니콜라스 윈턴경’이 그러한 분입니다.
2007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폴란드 여성 ‘이레나 센들러’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센들러는 1942년 전쟁 때 유대인 구조대인 제고타(Zegota)의 일원이 되어 약 2,500여 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구했습니다.
1943년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발이 부러질 정도의 고문을 당하면서도 센들러는 함께 일한 동료들의 이름과 그녀가 구한 아이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야누스 코르착’은 자신이 키우던 유대인 고아 192명과 함께 기차를 타고 당당히 걸어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가스실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세상에서는 정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정상인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나치 시대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냥 그때는 조금 더 지나쳤을 뿐이지만 실상 그들이 추구하던 것이나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같습니다.
돈과 쾌락과 힘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처럼 이 세상에서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조금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습니까? 그런 미침이 세상을 따듯하게 합니다.
서울대학교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올라온 어떤 한 학생의 사연입니다.
“저는 정말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어요.
식당일을 하시는 엄마와 둘이서 6평 정도 되는 반지하 방에서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엄마는 하루 열 시간 넘게 일을 하시면서 생활비를 버셨어요.
수시를 지원할 때가 저는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비싼 원서비에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두 곳의 대학만 지원했어요.
당장 집에 원서비를 낼 돈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집 사정을 대충 아시는 담임 선생님이 주신 10만 원으로 두 곳의 대학을 지원할 수 있었어요.
운이 좋게도 저는 서울대학교에서 면접을 볼 기회가 생겼어요.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좋아하셨고, 차비로 5만 원을 마련해주셨어요.
엄마는 안타깝게도 바쁜 식당일 때문에 따라올 수 없었어요.
저는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버스표를 왕복으로 끊고, 남은 돈 만 오천 원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어요.
아침 면접이었기 때문에, 전날 오후에 올라가서 지하철을 타고 서울대 입구로 가서, 찜질방에서 자고
학교로 가기로 했어요.
그렇게 난생처음 서울에 도착했는데, 돈이 없어졌어요.
가방을 뒤져보고 주머니를 한 시간씩 털어봐도 돈이 안 보였어요.
저는 대합실에 앉아서 울다가, 정신을 차리고 걷기 시작했어요.
터미널에서 서울대로 걸어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냐고 물어보니깐 다들 어이없어했지만, 대충 알려주신 방향으로 걸어갔어요. 한 2~3시간쯤 걸었을까, 너무 춥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힘들었어요.
저는 갑자기 너무 무섭고 서러운 마음에, 길에 앉아 펑펑 울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면접을 보러 못 갈 것만 같았어요.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어딘지도 모를 아파트 앞 벤치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데, 경비아저씨가 다가왔어요.
아저씨는 제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주었고, 저는 제 사정을 겨우겨우 말했어요.
아저씨는 놀라시면서, 저를 숙직실로 데려다주셨어요. 라면을 끓여주시면서, 자기는 하루 정도 좀 못 자도 괜찮으니까,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퇴근하시면서 저를 태워주겠다고 하셨어요.
아저씨는 차에서 셔츠를 벗어 주시면서 옷이 너무 촌스럽다고 이거를 입고 가라고 했고, 저는 죄송해서 못 받는다고 하니깐 전화번호를 적어주시면서 나중에 대학에 붙고 옷을 갖다 주러 오라고 하셨고, 터미널까지 갈 때 차비로 하라고 만 원을 주셨어요.
저는 그 아저씨 덕에 면접을 볼 수 있었고, 서울대에 합격했어요.
합격자발표가 나고, 제일 먼저 엄마 식당에 전화했고, 그다음엔 그 아저씨한테 전화를 드렸어요.
아저씨는 자기 일처럼 너무 행복해하시고, 나중에 올라와서 밥 한 끼 먹자고 하셨어요.
서울 생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고, 과외랑 아르바이트도 한계가 있었어요.
악착같이 50만 원을 모은 저는, 첫 학기가 끝난 날 눈여겨보았던 양복을 샀어요.
7개월 만에 아저씨를 만나서 멋진 양복을 전해드렸어요. 셔츠는 돌려드렸지만, 그 셔츠에 맞는 멋진 양복도 꼭 드리고 싶었어요.
다행히도 아저씨는 계속해서 거절하셨지만, 결국엔 정말 좋아해 주셨어요.
태어나서 가장 큰돈을 쓴 날이지만, 그날만큼은 정말 행복했어요.”
[출처: ‘가난한 서울대생이 경비아저씨에게 양복을 선물한 이유’, 유튜브, ‘오늘의 영상툰’]
이런 삶이 이 세상에서 미친 삶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거스르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침몰해가는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배에 적응하고 정상이라고 인정받으려 하면 안 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주적입니다.
세상은 자아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가야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친척들에게까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음을 기억합시다.
그게 정상적인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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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2 주간 토요일-묵상과 기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습니다.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사무엘기는 사울이 필리스티아인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은 요나탄과 아미나답과 말키수아도 죽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집안의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 하고, 울며 단식하며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의 친척들은 그분께서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며 설교하고 제자들과 함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듣고는 그분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잡으로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다윗은 아말렉을 쳐부수고 돌아와 치클락에서 이틀을 묵었다. 사흘째 되는 날, 어떤 사람이 옷은 찢어지고 머리에는 흙이 묻은 채 사울의 진영에서 찾아왔다. 그가 다윗에게 나아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자,
다윗이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물었다. 그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다윗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말해 보아라.” 하자, 그가 대답하였다. “싸움터에서 군사들이 달아났습니다. 또 많은 군사가 쓰러져 죽었는데, 사울 임금님과 요나탄 왕자님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그리고 주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하고 울며, 저녁때까지 단식하였다. 다윗이 애가를 지어 불렀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힘이 세었지.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그는 너희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 주고 너희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 주었다.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27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2사무 1,1-4.11-12.19.23-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 3,20-21
실천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갈릴래아로 오셔서 카파르나움에 자리를 잡으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그러고 나서 어부들을 그 나라의 일꾼으로 삼고, 질병걸린 이들과 병자들 더러운 영에 들리 사람들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율법을 전달하는 것과 같이 그분도 말씀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가 가는 곳이면 유다와 예루살렘, 온 갈릴래아, 시돈과 티로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고향 사람들. 특히 친척들은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소식으로 듣고 그가 미쳤다?라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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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2. 연중 제2주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사무 1,1-4.11-12.19.23-27)
사무엘 상권 31장과 사무엘 하권 1장에 기록된 사울의 죽음은 두 부분이 조금 다르다.
사무엘 상권 31장에는 사울이 필리스티아인 궁수의 활을 맞고 큰 부상을 입자, 자기 무기병에게 자신을 칼로 찔러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무기병은 너무 두려워 찌르지 못한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져 자결한다. (1사무 31,3-5참조)
그런데 오늘 사무엘 하권 1장에서는 길보이산의 전투에서 사울이 창을 맞아 겨우 목숨이 붙어 있었는데, 아말렉 사람이 사울의 간절한 부탁으로 자신이 죽이고, 머리에 쓴 왕관과 팔에 낀 팔찌를 벗겨 다윗에게 가져왔다고 전한다. (2사무 1,1-10참조)
학자들은 아말렉인이 사울의 죽음을 다윗이 기뻐할 것이고, 자신이 죽인 것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울고 단식한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을 죽였다는 아말렉인을 자기 부하를 시켜 죽인다.
"네가 어쩌자고 겁도 없이 손을 뻗어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를 살해하였느냐?" (14)
"가까이 가서 그를 쳐라." (15)
"네 피가 네 머리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네 입이 너를 거슬러 '제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를 죽였습니다.' 하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16)
다윗의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 대한 충성에는 변함이 없다.
사울이 살았으나 죽었으나 임금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사울의 죽음이 다윗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었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 대한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다.
다윗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노래를 짓고 애도를 한다.
영웅의 업적을 기록하는 '야사르의 책'에 사울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하여
벤야민 지파 사울에 대해 자신의 유다 지파에게도 가르칠 것을 명한다. (2사무 1,17-27)
다윗이 그동안 사울의 집요한 추적에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사울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세상이 된 그 순간에도, 다윗은 하느님께 어디로 가야할 지를 여쭙고,
헤브론에 가서 7년 반이나 기다렸다. (2사무 2,1-11)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에 대해서 다윗은 수만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비방하고 헐뜯고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수십년을 아무 이유없이 대적해 온 사울에 대해, 다윗은 놀랍게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다.
자신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원칙적으로 하느님 앞에 이스라엘 임금으로서의 사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진심으로 애도했다.
사울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적인 이방인들에게는 기쁜 일이고,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손실이요 해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런 안목으로 자신의 모든 감정들 위에 바로 하느님이 세우신 나라인 이스라엘의 손실에 대해 가장 크게 애도하고, 사울에 대해 애도하고 있다.
다윗의 개인적인 감정은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1사무 1.26)
요나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애통해 하는 마음을 슬프디 슬프게 토로하고 있다.
다윗은 감정의 사람이 아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사람이다.
다윗은 성령의 사람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편에서 보고 판단하고, 원칙을 잡는 신본주의자이다.
우리 자신은 무엇이 원칙인가?
우리는 매사에 하느님보다는, 진실이라는 사실 보다는, 감정으로 사람과 사건을 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큰 안목과 가슴으로 보도록 노력하고, 개인적 감정은 개인적 감정일 뿐이며 매사에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훈련이 참으로 필요한 것 같다.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예수님이 미쳤다. (마르3,20-21)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우리의 죄로 대신 죽으러 오셨으니 우리의 주님께서 미치신 것 맞다. 미치도록 사랑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음을(특히 자녀를 위한 사랑) 아무도 말리지 못함을 벌레만도 못한 우리도 경험하지 않는가~
(마르3,20) 20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 앞 9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군중이 당신을 밀쳐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는데, 예수님께서 타실 그 배는 당신이 담고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그 말씀이 주인인 교회를 준비하라고 하신 것으로 묵상 했었다.
곧 그 말씀이 예수님이며(요한1,14) 그 말씀이 일하시는 것이고(1테살2,13) 그 말씀이 죄인을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에(에페5,26-27), 그래서 그 말씀을 생명, 구원의 진리로 깨닫게 되면 선악의 계명, 그 무력한 신앙에서 벗어나 죄의식에 묶이지 않을 것이며 온갖 환난, 질병 속에서도 하늘의 평화, 안식을 땅에서부터 살 게 될 것이라 묵상했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붙들고 매달려 기도하면서 용서, 치유, 구원자, 그 예수님과 하나 되는 길을 찾아야(깨달아야)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그 말씀을 깨달을(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보이는 ‘육의 치유자’를 다시 찾아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하신 것이다. 다시 온 그들 때문에 올바른 양식, 곧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의 양식을 먹을 수도, 먹일 수도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 역시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아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님과 한 몸, 하나가 되기 위한 기도가 아닌- 우리의 소원, 내 뜻을 위해 열심한 종교행위로 빈말 기도로 바쁜 신앙을 살며 그것이 참 신앙 인냥 만족해하며 안심하고 산다. 그러나 불법이라 하신다.
(마태7,22-23)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 구원의 말씀과 한 몸, 하나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이시다.
(히브9,14) 14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르3,21)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그동안 묵상한 말씀을 기억해 보자. - 친척들은 무슨 소문을 들었기에 미쳤다고 생각했을까?
우선 앞절로 가보자.
(마르2,16-17)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만나러 왔다’고 하시며 그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는 소문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을 거저 의롭게 하시러 오셨다(로마3,24) 그리고 바라사이들이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마르2,19-20)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음식을 끊는, 굶는 그 율법의 단식, 그 사람들의 수고, 희생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 율법을 끊고, 단식하고 죄의 대속 그 진리의 복음을 먹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참 단식 - 이사58,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마르2,27-28) 2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 당시 사람들은 깨달음으로 얻는 안식이 아닌, 안식일을 지키는 그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법, 교리로 지키는 그 안식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을 깨닫는, 곧 예수님의 대속, 그분의 십자가를 구원의 진리로 깨달아 그 십자가로 받는 용서, 자유, 쉼, 그 안식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려하자 ~
(마르3,2)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그들의 속셈을 아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해야 할 좋은 일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 하시며 그 사람을 말씀으로 고쳐 주셨기 때문이다, 곧 그 말씀은 법으로 지키는 안식일, 그 행위로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헛된 것이라 하신 것이다. 그래서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모든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 그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미쳤다’는 말은 ‘어느 경지에 다달았다.’의 그 미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친척(신자)들은 나쁜 의미로 정신이상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핍박이고 박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요한15,18.20)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미쳤다고)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20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의 미움과 박해, 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이상한(미친) 사람이라 말을 듣지 못한다면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혜로 보면 - 어리석음, 곧 미친 것이기 때문이다.
(1코린1,21)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미친짓)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코린2,14)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미친짓)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어리석음(미친짓)이 구원의 힘입니다. 미치신 예수님을 알아본 우리 또한 미친자(어리석은자)들인 것입니다.
(1코린1,18)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미친짓)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멘.
☨ 천주의 성령님! 늘 당신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제대로(올바로) 미치게 하소서~아멘 --*^ㅇ^*--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3,20~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1)
'예수님의 친척들'에 해당하는 '호이 파르 아우투'(hoi par autou; his family)는 '그에게 속한 자들' 또는 '그와 함께 한 자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구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마르코 복음 3장 31절 이하의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데리러 오는 문맥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이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붙잡으러'에 해당하는 '크라테사이'(kratesai; to take charge of; to lay hold on)의 원형 '크라테오'(krateo)는 '체포하다'라는 뜻이라서 (마르6,17; 12,12참조), 예수님께 대한 그의 가족들의 태도가 얼마나 무지하고 살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에 대해 영적인 의미에서 가족이 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신 반응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친척들이 보인 이런 부정적인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영적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지에 대한 척도가 된다.
이제 예수님께 대한 평가의 하나인 '그가 미쳤다'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예수님께서 미쳤다'에 해당하는 '엑세스테'(ekseste; he is beside himself; he is out of his mind)의 원형 '엑시스테미'(eksistemi)는 '~의 밖으로' 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어떤 상황이나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이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현재의 상황이나 현상들에 대하여 정상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대한 이런 단정적인 소문은 예수님의 가족들로 하여금 그를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미쳤다'는 말은 곧 '마귀가 들렸다'는 뜻이었다(마르1,23).
이 구절 이후에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대해 베엘제불이 들렸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마르3,22).
특히 마르코 복음 3장 30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 6장 1절 이하를 보면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고, 요한 복음 7장 5절에는 예수님의 형제들 역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르코 복음 3장 21절과 3장 31~35절의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판단하고 그를 붙들러 온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 3장 22~30절에서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하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과 예수님의 논쟁을 앞뒤에서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마귀를 내쫓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의 소유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마귀들려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멀리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 뿐만 아니라(마르3,22), 그의 일을 지켜본 갈릴래아의 사람들이나(마르3,21 후반절) 심지어 자신의 친척들과 가족들까지(마르3,21 전반절)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귀에 들려서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예수님께 대한 비난에 가까운 배척과 오해, 영적 무지와 불신이 더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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