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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17) ‘천주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 신앙의 대상 아니라 따라야 할 모범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님!''하고 마리아를 찾다 보면, 참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위치에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성모님을 성인 중의 으뜸이며 특히 교회의 ‘가장 완벽하고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공경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지, 성모 마리아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님이 공경받는 이유는 천주의 어머니이신 위치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긴밀히 일치되어 있습니다. 또 마리아만큼 예수님 말씀의 발자취를 따른 사람이 없습니다.
중세 교회 때 과도하고 그릇된 성모 신심의 분위기는 한때 성모님을 하느님 위치까지 올려놓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성모님 공경에서 과장과 남용이 있었음은 사실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성 요한 23세 교황은 과도한 성모 공경 행위나 신심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셨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구세주 어머니」를 발표하면서 ‘성모님께서는 결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임을 명시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님께 ‘상경지례'(고결하고 특별한 공경)의 예를 표합니다. 하느님께는 ‘흠숭지례'(흠모하고 숭배)의 예를, 천사나 성인들에게는 ‘공경지례'(마음에서 드리는 공경)의 예를 표현합니다. 상경지례는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지례보다는 낮지만, 천사와 성인들께 드리는 공경지례보다는 높은 단계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성모님 위치의 각별함과 탁월함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구원 역사 안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셨고, 은총을 통해 최상의 거룩한 품성과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신심
가톨릭교회 신자는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표현할 때 먼저 마리아가 어떤 분인지, 어떤 특혜를 받고 어떤 생애를 사셨는지 정확히 배우고 이해해야 합니다. 즉 마리아를 알고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르는 분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께 대한 사랑과 공경의 표현으로 △성모상 앞에서 경건한 자세로 인사하기·묵주 기도 하기 △성모 성월과 묵주 기도 성월 행사 참여하기 △성모님 관련 성가·시·글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녀다운 사랑과 공경을 표현하기 등이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마리아의 전구와 보호와 도움의 힘을 확신합니다.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뢰심을 가지며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마리아께 부탁합니다. 전구(轉求)는 성모 마리아나 천사 또는 성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은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인 마리아께 자신과 자신의 전부를 특별히 봉헌해 매일매일 그 봉헌을 새롭게 합니다. 이것은 마리아께 대한 특별한 신심 행위가 될 것입니다.
또 가톨릭 신자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마리아의 올바른 모습과 위치를 설명하고 마리아께 대한 사랑과 공경을 심어줍니다. 마리아의 성덕을 본받아 마리아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리아 신심의 중심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신심의 핵심은 ‘마리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23)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강생(육화)
전능하신 천주 성부께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우리는 하느님의 외아들이며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 고백들 가운데 먼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신, ‘강생’에 대하여 살펴보려 합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언급 이후 곧바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는 간략한 고백이 이어지지만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다음과 같은 표현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성령으로 인한 잉태가 이어집니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임을 다시 한번 강조함과 동시에 그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신 이 사건, 요한 복음 사가의 표현에 의하면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을 우리는 ‘강생’이라고 부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1항). 라틴어로 이 말은 incarnatio라고 하는데, 이를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보면 ‘육신이 되다’라는 의미이기에 ‘육화’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교회 용어 가운데 하나의 단어를 우리말로는 서로 다른 두 단어 이상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강생과 육화가 바로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우리와 함께 사신 것을 강조하느냐, 인간의 영혼만이 아닌 육신까지 취하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두 용어 모두 사용합니다만 결론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 말로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강생’을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들을 전해 줍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도 분명하게 언급한 대로 첫 번째 중요한 의미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되셨다는 점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을 용서하고 하느님과 다시 화해하여 구원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성부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할 속죄 제물로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57항). 하느님이신 분께서 다른 모든 인간을 대신해 그 죄를 짊어지는 제물이 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또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아드님마저도 인간을 위해 기꺼이 보내주시는 사랑, 인간을 위해 기꺼이 하느님으로서의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신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이 놀라운 사건은 또한 우리에게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모범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성부의 뜻에 따라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인간이 되셨으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명하신 예수님의 삶을 교회는 ‘자기비움’의 삶으로 바라봅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 했던 아담과 달리 온전히 자신을 비우며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던 이 모습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참된 행복의 모범이시며 참된 사랑의 모범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사랑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59항).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 놀라운 신비를 통해 우리 모든 인간은 마침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0항).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제 우리들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격을 뛰어넘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사랑의 일치 안에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내용은 다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다루며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생활교리] 고해성사 ② 고해성사는 왜, 필요한가요?
첫째, 하느님과의 만남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함이다. 신앙 여정은 하느님과 만남의 연속이며, 그 최종 목적 역시 지복직관(visio beatifica), 곧 ‘하느님을 직접 만나 뵙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성경과 성사-기도 생활, 그리고 사랑실천 등을 통해 하느님과의 복된 만남을 이어나가고 있다. 다만 하느님과의 ‘만남’은 죄로 인해 ‘단절’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교회는 부디 모든 이가 ‘화해’의 만남인 고해성사 안에서 죄의 용서를 통해 하느님과의 여정을 다시 이어가기를 초대한다. 사실 하느님께서 항상 제자리에 계신 분이고, 더욱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분이라면, 고해성사는 하느님과의 끊어진 만남을 다시 엮어주고 이어주는 영적 끈으로써, 우리가 그분께로 멀어진 만큼 다시 되돌아가고, 그분께로 더욱더 친숙하고 가까워지도록 해주는 영적인 도구이자 방법이다.
둘째, 정화의 시간은 지금, 여기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죽음 이후의 연옥은 하느님과의 최종적 만남을 위한 ‘마지막’ 정화이다. 다만,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준비, 곧 정화의 시간은 죽음 이후 마지막 때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신약학자 G.로핑크의 말처럼 고해성사는 “우리가 죽을 때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앞당기며, “우리가 죽을 때 받게 될 하느님의 심판 아래 이미 서” 있도록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일 년에 두 차례 이루어지고 있는 판공(判功, 공로를 헤아려 판단) 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스스로 일종의 ‘영적 결산’을 해보면 좋겠다. 이를테면 내가 받은 은총에 따른 기쁘고 감사한 일은 무엇인지, 반대로 복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잘못과 허물은 무엇인지 스스로 따져봄으로써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채워야 할 것은 채워보자! 분명 고해성사는 하느님과의 최종적인 셈을 앞둔 우리를 하느님과의 화해-정화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셋째, 신앙생활의 참 변화와 기쁨을 누리기 위함이다. 사람을 강압으로 인한 단기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이고 전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감동일 뿐이다. 성경의 백미로 꼽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둘째 아들의 변화는 아버지로부터 전해진 감동이었다고 본다. 곧 인륜을 거스르고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르며 떠난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지 않고 늘 기다리며, 다시금 아들이 돌아오자 조건 없이 품에 안는다.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과 용서는 아들을 벅찬 감동 속에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고해성사의 기쁨은 단지 나의 허물을 밖으로 끄집어냈다는 홀가분함에서 그칠 수 없고, 오히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를 사랑스런 자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시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 체험에 있다. 실제로 고해성사를 통해 얼마나 수많은 이가 하느님 사랑에 압도되어 뜨거운 눈물 속에 참 변화와 충만한 기쁨의 길로 나아가는 ‘기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분명 이 놀라운 기
적은 고해성사의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오늘 9월 8일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본래 9월 8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이지만, 전례일의 등급에서 주님의 날인 ‘주일’이 축일보다 앞서기에, 올해는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지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유와 의미를 알아볼 필요는 있겠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누군가를 기념할 때 그가 죽은 날, 곧 천국에서 태어난 날(天上誕日)을 축일로 경축합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예수님, 세례자 요한 그리고 성모님의 경우엔 태어나신 날도 경축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전하는 데 반해,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외경인 「야고보의 원복음서」에서만 마리아의 생애를 전하는데, 이 책은 전반적으로 정통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음에도 성모님에 대한 신심과 이콘에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하는 건 5세기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녀 안나 성당과 관련이 있습니다. 연못가에 세워진 이 성당은 요아킴과 안나의 집이 있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훗날 십자군은 폐허가 된 성당을 다시 복원해 성모님께 봉헌하였고, 이후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9월 8일은 성녀 안나 성당이 봉헌된 날이라 추정되지만, 동방 교회의 전례력이 시작되는 9월 초 구원의 여명인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했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한편, 9월 8일은 나중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모든 성모님의 축일이 그렇듯이, 마리아의 탄생 축일도 예수님과의 연관성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닙니다. 성모님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낳으신 분이기에, 그분 탄생은 ‘생명을 출산하기 위해 태어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탄생은 모든 피조물의 결정적 전환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날 미사의 입당송은 그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을 기뻐하며 경축하세.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그분이 낳으셨네.” 또한 본기도는 마리아의 모성(母性)과 그 탄생을 통해 주어지는 은총에 대해 언급합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성자를 낳으시어 저희 구원이 시작되었으니, 동정녀 탄생 축일을 지내는 주님의 종인 저희에게 천상 은총의 선물을 내려주시어 길이 참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올해 의정부교구 달력 9월의 성화는 마리아의 탄생을 그린 Giotto의 작품입니다. 성자의 강생을 준비하고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언제나 더 큰 일을 하시는 주님께 찬미를 드립시다.
[가톨릭 신학] 악감정으로부터의 탈출 : 사랑의 덕
세상에는 가난과 병마, 불합리한 상황, 전쟁의 고통 등 여러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연민’의 감정이 생깁니다. 그리하여 후원을 하거나 사회적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가까운 이웃들에게는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 회사, 본당 공동체 안에서 겪게 되는 갈등 안에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하며 미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어렵게 느껴집니다. 하느님을 섬기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내 마음속에 자리한 원수, 미움의 대상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까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동반해야 하며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요한 1서 4,20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아아,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인간적 갈등 앞에서 저는, “그래도 무조건 원수를 용서하고 화해하십시오.”라는 실천 불가능한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적인 사랑의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상대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화해하는 것이 가장 최종적인 것이 되어야 하겠지만 용서와 사랑에는 일종의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점은 원수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용서와 화해를 동의어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화해가 아닌, ‘악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화해와 사랑은 그 이후의 결실입니다.
한편, 용서의 반대말은 ‘악감정’이며 그 열매는 증오와 미움입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왜 그토록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셨는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앙심과 분노가 가득해져 오히려 불행해집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험담, 증오, 원망, 혐오. 이 얼마나 우리 스스로에게 상처 주는 것들입니까?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원수와 나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그를 잘 돌보아 주세요. 제가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해주세요. 서로 악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러한 기도를 올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보듬어주실 것이며 끝내 이웃과 화해할 기회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
하는 구체적인 시작입니다.
[구역반장 월례연수] 교회 시대의 희년 (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해방과 땅의 회복에 관련된 구약 성경의 희년을 사랑과 나눔, 그리고 섬김의 실천으로 더욱 확장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교회는 어떻게 해 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의 희년과 교회의 희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희년을 선포하고 거행한 기록은 서기 1300년에야 나타납니다. 물론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사랑과 나눔과 섬김의 실천을 그 시작부터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해를 희년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해방이 이루어졌다고 하셨기에, 희년은 어떤 특정한 해에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늘 희년의 정신이 살아있는 날들이어야 합니다.
성경 전통에서의 희년은 해방과 땅(재산)의 회복을 강조했습니다. 구약의 파스카가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약속된 땅을 주신 것을 기념한다면, 신약의 파스카는 하느님께서 죄악의 종살이에서 인류를 해방시키시고 하느님 나라를 열어 주신 것을 기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희년은 영적인 의미로 발전합니다. 세례성사로 구원받았으나 다시 죄를 짓고 죄의 종살이를 하던 신자들이 다시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께로 돌아와 하느님 자녀의 품위를 되찾게 하려는 것이지요.
고해성사와 대사
여기서 필요한 것이 고해성사와 대사(Indulgence)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고, 인류를 통해 전해지는 원죄와 자신이 지은 죄인 본죄를 모두 용서받고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유혹에 빠지고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죄는 흔적을 남깁니다. 죄로 인한 외적인 피해도 갚아야 하겠지만, 우리 영혼에도 피해가 생깁니다. 상처입고 얼룩진 영혼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공로(기도, 선행 등)와 보속으로 정화하고, 또한 부족한 부분은 이 세상에서 죽은 뒤 연옥에서 정화하고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교회는 벌을 정화하는 데에 당사자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도와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입니다. 교회의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쌓은 공로의 보화를 어머니인 교회는 그 자녀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제도화한 것이 바로 ‘대사’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희년을 거행하게 되기까지 고해성사와 대사에 관한 교리가 정리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대사는 9세기경부터 나타나는데, 본격적으로 베풀어진 것은 십자군 원정 때의 일입니다. 1095년 우르바노 2세 교황은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을 선포하며 종군하는 사람에게 잠벌을 모두 면해주는 전대사를 부여하였습니다. 이후 12세기에는 대사 교리에 관한 신학적 성찰이 이루어지고 교회 안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하여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첫 번째 희년을 선포합니다. 교황은 희년 칙서를 통해 신자들이 통회하며 고해성사를 받고, 로마에 있는 베드로 대성전과 바오로 대성전을 순례한다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희년 선포는 신자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고 약 20만 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로마를 찾아 희년 전대사를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5년 희년을 선포하는 칙서에서 “모든 희년 행사의 근본 요소는 순례입니다.”(「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5항)라고 강조한 것처럼 교회의 희년에는 로마로의 순례가 중요요소가 됩니다.
25년마다 거행하는 정기 희년
처음 희년을 선포하면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희년을 100년마다 거행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클레멘스 6세 교황이 다음 희년을 1350년에 거행하도록 선포하면서 50년마다 희년을 거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50년이라는 간격도 희년을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라 우르바노 6세 교황은 예수님께서 33년간 지상에서 사셨던 것에 근거하여 33년마다 희년을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희년은 1390년에 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1400년은 15세기를 시작하는 첫해라 당연하게도 희년으로 선포됩니다.
마르티노 5세 교황은 1390년 희년으로부터 33년이 지난 1423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 희년 때부터 라테라노 대성전의 성문(門)을 여는 예식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마르티노 5세 교황은 희년을 다시 50년마다 지내도록 정했습니다. 1450년 여섯 번째 희년이 거행되었고 이때 희년 기념 주화가 처음으로 주조되었다고 합니다. 1470년, 바오로 2세 교황은 1475년에 희년을 거행하는 칙서를 통해 ‘성년’(聖年, Annus Sanctus)이라는 용어를 제안하며 25년마다 성년을 지내도록 했습니다(오늘날 ‘성년’과 ‘희년’은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25년마다 정기 희년을 거행하는 전통이 이루어져 오늘날에 이릅니다.
특별 희년
구세주 강생으로부터 25년마다 거행하는 정기 희년이 있지만 이후 교황들은 다양한 동기로 특별 희년을 거행하였습니다. 교회가 위험한 상황에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나, 흑사병 창궐과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또는 교회의 다양한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 희년을 선포하고 거행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가까운 특별 희년인 2016년 자비의 희년(2015년 12월 8일~2016년 11월 20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기념하여 거행되었습니다. 세계 젊은이의 날의 기원이 된 1983년 구원의 성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인류 구원을 이루신지 1950주년을 기념하여 거행한 특별 희년이었습니다.
전세계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희년 거행도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지난 2021년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으로 지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한국 교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희년 거행과 희년 전대사를 허락하셨습니다.
희망의 순례자들
희년의 핵심 상징은 순례이므로 희년 대사 수여 교령을 살펴보면 대사를 받는 요건으로 특정 성당이나 성지로 순례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봉쇄 수도승이나 노인들, 병자들, 수감자들, 병자를 돌보는 이들 같이 희년 순례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직접 참여하는 신자들과 영적으로 결합하여 정해진 기도를 바치면 희년 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2025년 희년을 앞두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희년 주제를 제시하시며 우리 신자들이 주님께 받은 희망을 지니고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순례자가 되자고 강조하십니다. 다음 시간에는 교황님의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를 중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2025년 정기 회년을 살아갈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16)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회래요
마리아 공경은 인간에게 바치는 최고의 공경
“어떤 학생이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회라던데 맞나요?’라고 질문하더라고요. 명확하게 알려주고 싶은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교리교사 회합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성모 마리아에 관해 물어볼 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는 이야기가 가끔 나옵니다. 실은 저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숙제를 풀어보겠다고 신부님들에게 여러 번 질문하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또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은 몇 번이나 책을 읽으며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마침내 ‘믿을 교리’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이번에는 가톨릭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공경하는 이유와 그 의미를 하나하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속의 마리아
가톨릭 신앙은 구원의 중심 사건인 강생(신이 인간으로 태어남)의 신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 역사 안에 들어오셨음을 기본 진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였습니다.”(갈라 4,4)
가톨릭교회 밖에서는 마리아 교리와 신심·공경을 미신적 행위 또는 우상숭배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인류구원 사건인 하느님 아들 강생의 신비에서 마리아가 전인적(지성·감정 의지를 균형 있게 갖춰 원만한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참여해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특별히 공경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의 요청으로 물을 술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신 사건(요한 2,1-8)은 마리아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예수께 인간의 문제점을 대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바로 어머니의 부탁으로 첫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집니다.
이러한 성경 속 사실에서 우리는 마리아를 통한 기도의 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셨지만, 하느님은 아닙니다. 따라서 마리아 공경은 ‘인간에게 바치는 최고의 공경’입니다.
마리아 공경의 배경
인류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성자의 강생을 위해, 즉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기 위해서는 한 분의 어머니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라는 여인이 등장했고, 인류 구원에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인 인간의 죄를 씻겨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구원 현장에 나타나셨습니다. 구원 사업을 통해 아담의 ‘원죄 나무’ 대신 그리스도의 ‘십자 나무’가 심어졌고, 하와의 ‘불순명‘의 매듭은 마리아의 ‘순명’으로 풀어졌습니다. 곧 마리아는 인류구원 사업에 꼭 필요했던 협력자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모진 고난에서 벗어난(이집트 탈출) 이스라엘 백성은 날이 갈수록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을 잊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예언자를 파견해 그 민족들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당신 축복의 약속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예언자 중 이사야가 기원전 700년경 최초로 동정 마리아에 대해 예언했습니다.(이사 7,14) 그리고 예언대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처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