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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읍성(熊川邑城)‘ 1.> 3편 中.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연해 읍성지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15호이다. 1407년 일본과 무역을 하게 되면서 많아진 일본인의 불법거주를 막고 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1437년 웅천수군첨절제사영(熊川水軍僉節制使營)으로 축조하였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웅천지역은 웅지현(熊只懸)이 웅신현(熊神懸)으로 개칭되어 현치(懸治)가 실시되었고 조선 문종(1452)때 웅천현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또한 웅천지역은 임진왜란때 웅포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웅천읍성, 웅천왜성 등의 성터가 보존되어 있다. 조선 시대, 왜인에 대한 회유책으로 개항한 웅천(熊川)의 제포(薺浦)와는 불과 1km 남짓 떨어져 있으며,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울산의 염포(鹽浦) 등의 삼포(三浦) 중에 한 곳이었다. 중종 5년, 1510년에 왜구들이 부산포의 진장(鎭將)이 무휼(撫恤)하지 않는 것을 분히 여겨서 제포의 왜인들과 난동을 일으켜 웅천읍성을 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도륙(屠戮)과 소화(燒火)를 일삼아 위급하게 되니 조정에서 방어사(防禦使) 유담년(柳聃年)과 황형(黃衡)을 파견하여 나누어 토벌하여 평정하고 왜노들의 소굴을 태운 다음 다시는 거류(居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왜인들이 정성을 다해서 항복하고 조빙(朝聘)하기를 청하므로 다시 왜관(倭館)을 설치하였다.
1) 웅천 진동루 차운[次鎭東樓(熊川)] / 황준량(黃俊良 1517∼1563) 1551년 경상도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史). 진동루는 객관의 동쪽에 있으며 현감 양찬(梁瓚)이 세웠다.
登樓把酒倚華筵 누각에 올라 술잔을 쥐고 풍성한 술자리를 즐기다가
落日熊津恨杳然 웅진 나루터에 해가 기우니 묘연하게도 한(恨)스럽네.
軹道降王曾獻地 지도(軹道)에서 왕이 항복하고 일찍이 땅을 바쳤는데
海邦夷醜謾欺天 섬나라 추악한 오랑캐는 하늘을 속이는구나.
乾坤百戰山河裏 천지를 두고 온갖 싸움이 산하에서 있었으니
桑(倜)柘千村雨露邊 농사짓던 수많은 시골의 비와 이슬 가(邊)였다.
將士眠春關不鎖 장수와 병사가 봄잠에 취하여 관문을 열어놓고
閒抛兵艦作漁船 한가하게 전함을 버려두고 어선을 만들었다네.
모든 군사 시설과 장비가 아주 성기었던 까닭이라고 전한다.(兵備甚疏故云)
[주] 지도(軹道) : 지금의 중국 협서성(陝西省) 함향현(咸陽縣)에 있는 정자. 진나라 말기에 유방(한고조)이 함양에 들어갈 때에 진나라 왕 자영(子嬰)이 여기에서 항복하였다.
2) 웅천 진명루 차운[次熊川鎭溟樓韻] / 홍성민(洪聖民) 경상도관찰사 1581년.
微茫滄海拍孤城 아스라한 창해에 외딴 성(城)이 마주하는데
畫鷁飛來一道明 화익(畫鷁)새가 날아오르니 한 길이 환해지네.
滿谷春陰兼瘴霧 흐린 봄날에 안개가 여기저기 가득하니
蠻村風日未全晴 남녘 어촌 마을에 날씨가 금방 개이질 않네.
[주] 화익(畫鷁) : 배 앞에 그려 붙인 수조(水鳥)의 상(像). 익은 잘 나는 물새인데 수신(水神)을 제압한다고 한다. 화익선(畫鷁船)에 익(鷁)이라는 물새의 형상을 선수(船首)에 새긴 배. 이 새는 풍파를 잘 견디므로 이 새로 장식했다.
3) 웅천을 건너며[渡熊川] / 임연재선생(臨淵齋先生) 배삼익(裵三益 1534∼1588)
滄海無波戌不驚 잔잔한 푸른 바다가 아름다워도 놀라지 않고
棠陰隨處作閒行 가는 곳마다 쉬어가며 천천히 지나간다.
乘舟又喜春雲捲 배를 타니 또한 즐거운데 봄 구름이 걷히어
回首東天化日明 돌아본 동쪽 하늘의 태양이 온 천하를 밝히네.
[주] 당음(棠陰) : 周나라 소공적이 감당(甘棠)나무 그늘에서 쉬어 간데서 나온 말.
4) 웅천성(熊川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또 듣고[又聞熊川城陷] / 이행(李荇) 1510년(庚午年) 삼포왜란 발발 時.
聞道全城沒 듣자 하니 온 성이 함락되어
終無一室遺 한 집도 남지 않았다고 하니
圍非懸布勁 적의 포위는 현포경이 아니요
守異折骸炊 우리 지킴은 절해취와 달랐지
小豎惟身計 소인배는 오직 일신만 생각하니
常刑不汝私 국법이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誰知天下士 뉘 알리요 천하의 선비가
獨泣問王師 울면서 왕사가 어디 있는지 묻는 줄.
[주1] 현포경(懸布勁) : 성을 포위한 적이 몹시 용맹스러움을 뜻한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가 복양(偪陽)을 칠적에 복양성(偪陽城) 사람이 적의 용맹을 시험해 보려고 베로 만든 띠를 성 아래로 드리우고 적에게 성 위로 올라와 보라고 하자, 근보(堇父)라는 용사가 띠를 잡고 성 위로 올라갔다. 이에 성 위의 사람이 근보가 거의 성을 올라왔을 즈음 띠를 끊었고, 근보는 성 아래로 떨어졌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나 거듭한 끝에 성 위의 사람들이 근보의 용맹에 굴복하였다. [주2] 절해취(折骸炊) : 사람의 뼈를 부수어 불을 때어 밥을 짓는 것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매우 곤궁한 형편에 놓인 상황을 뜻한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송(宋)나라 성을 포위하였을 때 초나라 사마자반(司馬子反)이 송나라쪽의 상황을 묻자, 화원(華元)이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고, 뼈를 부수어 불을 때어 밥을 짓는다.” 하였다.
5) 권시 웅천학자[勸示熊川學者] / 김안국(金安國 1478∼1543) 1517년 경상도관찰사.
魯齋當日語諄諄 원(元)의 학자 허형(許衡)이 당일 말씀이 안타까우니
信似神明敬似親 신의는 신명(神明)같이 하고 공경은 어버이처럼 해라.
小學一書天下範 소학 하나의 책이 천하의 규범이기도하니
願言修進日加新 언제나 갈고 닦아 나날이 더하여 새로워져라.
6) 웅천에 차운하여[次熊川] / 김안국(金安國 1478∼1543) 1517년 경상도관찰사.
海月凄涼照酒筵 바다에 뜬 달이 처량하게 술자리를 비추는데
眼窮南徼思悠然 끝없는 남쪽 변방에 생각이 그지없어라.
靈槎有客能通漢 신령스런 뗏목 탄 나그네 능히 은하수를 오고가니
長劍何人更倚天 장검을 찬 이는 누구더냐 다시 하늘에 의지하네.
萬里風煙關嶺外 만 리 안개바람이 관문 고개 너머로 흐르고
三更刀斗戍城邊 삼경의 도두 소리는 변방 성(城) 가에서 울린다.
平生未學安民略 평생 배우지 못했으니 어찌 백성을 다스리랴.
醉後聊乘浦口船 술 취한 후에나 포구의 선박에 탑승하네.
[주] 영사(靈槎) : 한(漢)나라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使臣)으로 가면서 뗏목(槎)을 타고 갔다가 물을 따라 올라가서 은하수(銀河水)에 이르러, 직녀성을 만나고 왔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신령스런 뗏목’이라 하였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읍성(熊川邑城)의 축조 2.> 3편 中.
웅천읍성(熊川邑城)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경상도(慶州道) 웅천조(熊川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웅천읍성은 조선 전기인 세종 16년(1434년)에 초축(初築)하여 단종1년(1453년)에 증축(增築)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초축 시기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소 다른 내용이 등재되어 있는데, 먼저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세종 16년에 김해읍성(金海邑城)과 웅천읍성(熊川邑城)을 같이 축조하기로 결정하여 축성을 시작하였는데, 이듬해에도 웅천읍성이 완공되지 않자 각 포진(浦鎭)의 수군을 동원하여 완공시키라 조처했다. 이로써 보면 웅천읍성의 초축 연대는 『경상도속찬지리지』와 『세종실록』에서 본 바와 같이 1434년에 착공하여 1435년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단종실록』에는 정분(鄭苯)에 의해 축성이 계청(啓請)된 기사에 웅천읍성은 세종 19년인 1437년에 초축하여, 단종 원년 1452년에 증축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 이후 세조 3년(1457) 1월 29일에는 웅천읍성이 협착(狹窄)하므로 서쪽으로 옮겨 증축하자는 치계(馳啓)가 있었다. 이 장계를 접한 세조가 병조(兵曹)에 명하여 의논케 하니 병조에서 아뢰기를 “웅천 등은 방어가 긴급하니 즉시 가까운 고을 사람을 부역시켜 축조케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다시 세조 6년(1460)에도 웅천읍성의 증축 논의가 있었다. 병조에서 경상도도체찰사의 단자(單子)에 의거하여 “도체찰사가 웅천성은 둘레가 3천 5백 14척인데, 협소하여서 넓혀 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노약자들을 수용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니 어찌 백성들을 노역(勞役)시켜 넓혀 쌓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넓혀 쌓게 되면 더욱 지키기 어렵습니다. 시내와 골짜기가 가까워 적이 무찔러 깨트릴 형세이고, 서쪽으로 확장하게 되면 서산(西山)이 가까워 적이 반드시 여기에 임하여 공격할 것이니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합니다”고 고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후 중종 5년(庚午年, 1510년)의 삼포왜변시에 읍성이 일시 함락되어 인명이 살상되고 시설물이 파괴되었으나 이 위기를 극복한 공이 인정되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현으로 환원되었다. 선조 25년(1592)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웅천의 웅포와 안골포가 왜의 침입경로가 됨에 따라 웅천읍성을 비롯한 주변 일대가 일본수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에 이듬해에는 조선수군과 의병의 연합군이 웅천을 탈환하기 위해 웅포에서 수차에 걸쳐 격전을 치렀다. 이즈음에 읍성(邑城) 남측의 남산과 안골포, 명동에 왜성이 축조되었다. 이렇듯 웅천읍성은 조선 전기와 중기를 거치면서 왜구에 의한 삼포왜변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수차례 점령당하면서 시설물의 훼손과 복구가 거듭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한편, 조선후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웅천읍성은 19세기 말까지도 건재하였으며 읍성의 기능은 고종 32년(1895)의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상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아울러 수군진영이 혁파되고 보평역(報平驛)이 폐역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 고종 35년(1898)에 웅천 임시우체사(臨時郵遞司)를 개설하였다. 고종 44년(1906)에는 주기효(朱基孝)에 의해 웅천사립개통학교가 개설되고, 이듬해인 순종 1년에는 사립 숙명의숙(淑明義塾)을 열었다. 순종 3년(1909)에는 현재의 성내동우체국의 전신인 마천우편소를 개설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성내의 공해(公廨)는 하나씩 훼철되었고, 북성벽은 일제강점기에 신작로를 건설하면서 헐려 나갔다. 이후에도 읍성의 보존을 위한 체계적인 안이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도시화가 진전되어 성의 외벽 일부만이 남았을 뿐 대부분의 지상구조물은 훼손되었다. 웅천읍성의 규모와 시설물에 대해 조선시대의 각종 지지(地誌)에는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후기에 이르면서 시설물이 증가되고 명칭이 바뀌기도 하였다. 최초의 기록인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성의 규모는 둘레가 3,514자이고, 높이는 15자이다. 우물 2개소와 군창(軍倉)이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앞의 내용과 비슷하게 등재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공해(公廨)인 객사(客舍), 동헌(東軒), 향사청(鄕射堂), 군관청(軍官廳), 인리청(人吏廳)이 있다고 전한다. 한편 『대동지지(大東地志)』 10권 경상도 웅천조에는 읍성내의 시설물로 우물 외에 못이 한 곳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는 웅천읍성內의 주요 건물들인 진동루(鎭東樓), 식파루(息波樓)를 소개하고 있다. 진동루는 객관의 동쪽에 있으며 현감 양찬(梁瓚)이 세웠다. 식파루는 성(城)의 남문루(南門樓)이다. 이로보아 남문인 식파루는 남쪽의 해안(海岸)과 관련된 지명으로 여겨지며, 그 뜻은 대양의 파도를 재운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당시의 지형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남문 밖 1리 지점에 있었던 평석교(平石橋)에 조수가 넘나들었다는 기록과 결부해 보면 당시의 해안은 지금보다 다소 내륙으로 접근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웅천지(熊川誌)』 성지조(城池條)에는 현성(縣城)에 해자(垓子)와 내부 시설로서 우물 6개소와 창고인 읍창(邑倉), 관수고(官需庫), 공고(工庫), 육군병기고(陸軍兵器庫)가 있다고 전한다. 1868년(고종 5년)에 증보된 『웅천지』 성지조에도 위와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궁실조(宮室條)에는 객사(客舍), 동헌(東軒), 장적고(帳籍庫), 향사당(鄕射堂), 인리청(人吏廳),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훈도청(訓導廳), 지인방(知印房), 사령방(使令房), 관노방(官奴房)이 모두 성안에 있음 기록하고 있다. 이는『여지도서』에 기록된 건물에서 장적고, 장관청, 훈도청, 지인방, 사령방, 관노방이 추가된 것이다. 동문은 견룡문(見龍門)인데 지금은 헐렸다. 서문은 수호문(睡虎門)인데 역시 지금은 헐렸다. 북문은 공신문(拱宸門), 남문 진남루(息波樓→鎭南樓→靖海樓)이다. 이로 보아 19세기 말까지도 남문과 북문은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읍성(邑城)이 세종16년, 1434년에 석축(石築)하였으며, 단종1년, 1453년에 증축하였다. 성 둘레는 3,514자 9치이며 높이는 15자이다. 두 곳에 우물이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않으며 군청(軍倉)이 있다.”라 기록하고 있다.
7) 웅천 동헌[題熊川東軒] / 임억령(林億齡 1496∼1568) 五言四韻
絶域連山外 죽 이어진 산 너머에 있는 먼 변방,
孤城漲海邊 외딴 성은 물결 넘치는 바닷가에 있구나.
窮陰凝晝夜 겨울 끝자락에 밤낮으로 얼어붙으니
殺氣傍旌旃 사나운 기운이 깃발 곁에 뭉쳤네.
破浪思宗殼 파도를 헤치니 종각(宗殼)이 생각나고
登樓憶仲宣 누각에 오르니 중선(仲宣)이 기억난다.
羈懷不能寐 나그네 회포에 잠 못 이루는데
霜月向人圓 서리 내린 달이 사람 향해 둥실 떴네.
[주1] 종각(宗殼) : 중국의 남조(南朝) 시대 사람이다. 어린 시절 그의 숙부가 장차의 꿈을 묻자 ‘거센 바람을 몰아 만 리나 되는 파도를 마음대로 휘젓겠다.’고 했다한다.
[주2] 왕찬(王粲,仲宣) :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시인(177~217). 자는 중선(仲宣). 건안 칠자의 한 사람으로, 조조를 섬겼다. 위나라 시중. 산양 고평인이다. 前에 형주의 유표에 의지했으나 유표가 알아주지 않았다. 유표가 죽자 조조에게 의탁했다.
8) 조제건 웅천 사군(使君)에게[贈趙濟健熊川使君] / 이학규(李學逵)
陣雁初回旗出邊 기러기 대열이 처음으로 기출변(旗出邊)에 돌아와
使君歌笑正英年 사군(使君)이 정조 년간에 웃으며 노래했다지.
靑魚欲上黃橙熟 청어를 올리고자 등황색으로 익혀 바치니
須趁熊神小雪天 모름지기 웅신(熊神)의 도움 받는 소설(小雪)의 하늘일세.
[주1] 사군(使君) :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나라 밖으로나 지방에 온 사신(使臣)의 경칭.
[주2] 기출변(旗出邊) : 허황옥이 진홍빛 깃발을 달고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즉, 허황옥이 가락국을 향해서 항해하여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이라고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