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曰 居上不寬 爲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觀之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윗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못하고, 예를 행하면서 공경할 줄 모르며, 상사를 치를 적에 슬퍼할 줄 모른다면, 내가 무엇으로써 그 사람의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보고 알겠는가.”라고 하셨다.
居上主於愛人, 故以寬爲本. 爲禮以敬爲本, 臨喪以哀爲本. 旣無其本, 則以何者而觀其所行之得失哉? 윗자리에 있으면,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기에, 그러므로 너그러움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예를 행함에 있어서는, 공경함을 근본으로 삼고, 상례에 임해서는 슬퍼함으로 근본을 삼는다. 이미 그 근본이 없다면, 어떤 것으로써 그가 행하는 바의 득실을 살펴본단 말인가?
朱子曰 居上而不寬 爲禮而不敬 臨喪而不哀 更無可據依以爲觀矣 寬敬哀本也 其本旣亡 雖有條敎法令之施 威儀進退之節 哭泣擗踊之數 皆無足觀者 若能寬敬哀了 却就寬敬哀中 考量他所行之是否 若不寬不敬不哀 則雖有其他是處 皆在不論量之限矣 주자가 말하길, “윗자리에 있으면서 관대하지 않고, 예를 행하면서 공경하지 않으며, 喪에 임해서 슬퍼하지 않으면, 더이상 살펴보기 위해 의거할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관대하고 공경하며 슬퍼하는 것은 근본이니, 그 근본이 이미 없다면, 비록 가르침과 법령의 시행이 있고, 위엄스런 의태와 나아가고 물러남의 예절이 있고, 곡을 하고 가슴을 치며 발을 구름의 數가 있을지라도, 모두 살펴보기에 충분함이 없는 것이다. 만약 능히 관대하고 공경하며 슬퍼할 줄 안다면, 도리어 관대함과 공경함 그리고 슬퍼함의 가운데로 나아가, 그가 행한 바의 옳고 그름을 고찰하고 헤아리는 것이다. 만약 관대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으며 슬퍼하지 않는다면, 비록 기타 옳은 부분이 있을지라도, 모두 논하거나 헤아리지 않는 한계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如寬便有過不及 哀便有淺深 敬便有至不至 須是有其本 方可就本上看他得失厚薄 만약 관대함이라면 지나침과 못 미침이 있고, 애통함에는 얕고 깊음이 있으며, 공경함에는 지극함과 지극하지 못함이 있으니, 반드시 그 근본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근본 위로 나아가 그의 得失과 厚薄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寬有政敎法度而行之以寬耳 非廢弛之謂也 如敬敷五敎在寬 蓋寬行於五敎之中也 관대함이란 政敎와 法度가 있으면 그것을 관대함으로 행할 따름이라는 것이지, 폐지하거나 늦추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공경하여 五敎를 관대함에서 펼친다는 것은, 대체로 관대함이 五敎의 안에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吾何以觀之 不是不去觀他 又不是不足觀 只爲他根源都不是了 便把甚麽去觀他 重在以字上 내가 무엇을 가지고 그를 살펴본단 말인가? 이 말은 가서 그를 살펴보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또한 살펴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가 근원이 모두 틀렸기 때문에 무엇을 가지고 가서 그를 살펴보겠는가? 라는 말이다. 중점은 바로 以자 위에 있다. |
2 | 南軒張氏曰 居上不寬 則失所以爲長人之本 其他雖有所爲 尙何觀乎 爲禮而不敬 臨喪而不哀 則繁文末節雖多 亦何以觀也 然寬非縱弛之謂 緫其大綱使人得以自效也 남헌장씨가 말하길, “윗자리에 있으면서 관대하지 않다면, 어른이 되는 근본을 잃는 것이니, 기타 다른 것은 비록 행하는 바가 있을지라도, 오히려 어떻게 살펴본단 말인가? 예를 행하면서 공경하지 못하고 초상에 임해서 슬퍼하지 않는다면, 번다한 문식과 말단의 예절이 비록 많다고 할지라도, 이 역시 무엇을 가지고 살펴본단 말인가? 그러나 관대함이란 방종하고 느슨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큰 벼리를 총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본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以字訓用 謂用寬敬哀三者觀之也 蓋有此三者 則其大體已得 方可就此觀其小節 若無此三者 則全體都不是 便把甚底去看他 쌍봉요씨가 말하길, “以자는 用으로 뜻을 새기므로, 관대함과 공경함, 그리고 슬퍼함 이 세 가지를 이용하여 살펴본다고 말한 것이다. 대체로 이 세 가지가 있다면, 그 大體는 이미 터득한 것이니, 비로소 이것들에 나아가 그 小節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세 가지가 없다면, 전체가 모두 잘못된 것이니, 어떤 것을 가지고 가서 그를 살펴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