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밝게 더 기쁘게
오늘 독서는 요한2서의 말씀입니다. 어떤 부인에게 쓴 것으로도 보여지지만 문맥상 특정 여인에게 썼다기 보다는 상징적으로 어떤 특정 교회를 두고 한 호칭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입니다.
당시 그리스어를 썼던 문화권에서는 도시나 지방을 의인화하여 한 여인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을 처녀나 시온의 딸로 묘사하거나 결혼한 여자로 표현하는 예가 있고 교회를 어머니로 표현하는 갈라디아서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 입각해서, 부인으로 해석되는 “퀴리아”라는 단어는 어떤 특정한 지역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그 교회에 속한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독서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그대의 자녀들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뻤습니다.” 진리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총 109번 쓰여지는데 요한 문헌에서만 무려 45회나 사용됩니다. 그만큼 요한은 진리에 대해 많이 강조합니다.
여기서는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이라는 단어가 더 의미 있습니다. 현재 분사 복수형으로 쓰여졌는데, 이 말은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진리 안에서 그 교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회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에 쓰여지는 단어가 아니란 것이지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일관되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계속성을 강조합니다. “부인, 이제 내가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이 어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계명이라는 것이지요.
그저 인사치레로, 생략해도 의미 전달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이런 문장을 굳이 써서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이고 가장 힘써 추구해야 할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하라”는 단어는 현재시제로 쓰여진 명령문입니다. 과거 일회적인 사랑의 실천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계속되어야 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떤 특별한 경우에 취해야 할 태도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늘상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며 실천해야 할 최고의 계명임을 보여줍니다.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계명을 이렇게 언어적으로 해석하고, 일시적이네 지속적이네 분석하고, 어떤 의미이고 어떤 취지, 얼마만큼의 강조라고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사랑은 개념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다니는 것과 같이, 매우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걷는 것처럼 사랑하고, 매일 먹는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큰 사랑을 어떤 시점에 해야되는 게 아니라, 늘상 해야 하는 명령, 사명, 계명입니다. 저는 오늘도 지겹게 사랑을 얘기합니다. 저부터도 말로만 가르치고 설명하는 사랑이 되지 않도록, 여러분들을 계속해서 한결같이, 처음처럼, 지속적으로 사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여러분들과 주고 받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기 전에 쓰여진 요한 복음 13장 1절의 말씀,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그 사랑의 모습처럼, 이 천안 봉명동 성당이라는 부인에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사랑을 끝까지 드리고자 합니다. 말은 서툴지만 표현과 실천은 익숙하도록, 늘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합시다. 봉명동 성당 교우 여러분, 사랑합니다. 아멘.
첫댓글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라.
주님. 미운마음없애시고 사랑하는마음을 더 많이 채워주소서.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