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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바쁘신 분을 위해 맨 밑에 한줄 요약 넣었습니다.
크으 소수 성씨이자 전주 이씨, 경주 김씨 같은 한국 최고의 명가라고 할 수 있는 가문도 아닌 도강 김씨 글을 200명이나 보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다니 감사합니다....도강 김씨 얘기는 없었지만...뭐 아무튼
저는 뇌절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거 며칠 정도 더 재야사학에 매진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게임해도 재미없고 운동하긴 싫고 해서 하는거임(..)
저는 사실, 문중이 들으면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방계 오브 방계라서 4촌 이상의 김씨 일족은 거의 못봤습니다. 아예 못본 건 아니지만, 장례식 때나 모이시면 보는 수준이라 거의 연관이 없어요. 그래서 막 쓰는겁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전공도 아니었고, 제대로 된 논문도 안써본 사람이라서 그냥 씁니다. 재미로만 봐주세요 ㅜㅜ
1.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시작되는 시조는 누구인가?
지난 번 글(https://cafe.daum.net/Europa/3L0P/7919)에서 저는 도강 김씨의 시조인, 문하시중 출신의 도성대원군 김희조씨가 검증 결과 시대와 흔적에 모순이 보이는 가상인물에 가깝다고 했죠.
그런데 가상인물이라고 하려면 실존인물이 존재해야 합니다. 물론 실존 김희조가 존재하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 모순점을 알 수도 있지만,
사실 실질적으로 도강김씨를 이룬 시조가 따로 있고, 그 사람과 비교하였을 때 김희조가 어느정도 덧붙여진 인물이란 걸 알 수 있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태인파 3세손 김회련(金懷鍊)입니다.
도강 김씨는 4명의 중시조를 모십니다만, 굳이 비교적 명문인 가문을 꼽자면 태인동정공파를 꼽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래봐야 전 다른 파라서 상관 없습니다만, 아무튼 그렇다는 거죠.
김회련으로 도강 김씨가 이름을 알렸고, 이름이 알려진 김에 당시 김회련부터 아직 인연이 남아있는 위의 2대까지 해서 도강 김씨 문중이 재편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제 생각입니다. 당연히 근거는 없으니 그냥 무시하셔도 됩니다.(...)
그러면 왜 김회련이 왜 실질적인 시조일까요?
조선의 개국원종공신이기 때문입니다.
무려 보물로 남아있는 김회련 개국원종공신녹권 ㄷㄷ 물론 개국공신 이후로 추가된 공신이 개국원종공신이니 살짝 급이 떨어지는 느낌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도강 김씨 내에선 큰 충격이었을테죠. 도강에 인재가 나타났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212010_005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도 존재합니다.
과전을 받아놓고 서울에 살지 않는다고 과전 몰수 당한걸로요(..) 대신 고종 대에 이르면 충민공으로 시호를 받죠.
승정원일기가 불타지 않았거나 조선초의 지방 관련 문서가 더 있었다면 재밌을것 같은데...그래도 기록이 남아있단 것에 만족해야죠.
이렇게 개국원종공신이자 '태인파 3세손' 김회련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도강 김씨를 알렸습니다.
참고로 이미 개국원종공신이었으면서, 1412년에 과전이 몰수 되었으니, 지난 글 1350년대 활약한 김희조와의 차이에 대해서도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스무살에 조선에서 종사했다고 해도 1372년생, 1353년에 군부판서였던 김희조를 50~60대로 봐도 차이는 좋게봐야 증조부,고조부도 아슬아슬한데, 그렇다면 중시조 사이의 계대한 사람을 모를 이유가 없죠.
- 결론 : 김회련부터 모든 것이 시작됐다
2. 그러면 김회련의 아버지도 다 실존했는가?
김회련의 기록도 꽤 많은 줄을 차지합니다만, 한자사전을 뒤적여야 하는 저로선 번역하기 어렵더라고요. 주말에나 날잡고 해야되고 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우선 김회련의 아버지부터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D%9A%8C%EB%A0%A8
무려 위키에도 존재하는 김회련좌... 아버지는 문하평리판이조사 김주(金柱)라고 하는군요.
실제로 이름이 주(柱) 군요. '광정대부문하평리판공조사겸판전농시사자회련(견하)'
'광정대부이며 문하평리판공조사겸판전농시사 이고 아들은 회련이다.(아래 봐라)'
음? 아까 김회련 란에는 판이조사라고 되어있었는데? 사실 조사의 조도 성씨 조로 적혔습니다....
그런데 이런건 족보마다 너무 오래돼서 오타의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소한건 넘어가지요.
그럼 하나하나 보지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82558&cid=41826&categoryId=41826
광정대부. 고려시대 문관 종2품의 벼슬입니다. 정2품일때도 종2품일때도 사라질 때도 있었는데 대체로 종2품입니다. 상당히 높으시네요.
문하평리판공조사...로는 안나오고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0861&cid=41826&categoryId=41826
문하평리. 종2품 관직입니다. 겁나 높네요;
https://hanja.dict.naver.com/word?q=%E5%88%A4%E5%B7%A5%E6%9B%B9%E4%BA%8B&cp_code=1&sound_id=1
판공조사도 존재합니다. 벼슬이름.음?(..) 뒤에 보면 고려시대, 공조(工曹)의 으뜸 벼슬. 재신(宰臣)이 겸하였다. 判事. 라고 나와있으니, 문하평리 판공조사가 이상한 말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첨의참리 판공조사, 식의 임명도 있으니, 문하평리 판공조사는 이상할 것이 없죠.
첨의참리가 뭐냐고요? 문하평리요. 이름만 바뀐거임(..)
판전농시사도 존재합니다. 품계는 정3품이군요. 조금 급이 낮아졌지만 겸직이란걸 감안하면 엄청납니다.
그러면 종2품 광정대부를 맡으며, 문하평리 판공조사와 판전농시사를 겸하고, 김회련의 아버지인 김주는 고려사에 어떤 영향을 가졌을까요?
....?
여기 김주는 위의 문하평리와는 상관 없어 보이는군요. 참고로 이분은 김준의 아들로, 김준은 무신정권 당시 최씨정권을 참살하고 제1의 권신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아니, 그러면 판공조사로 찾으면 있을까요?
판공조사로 치면 위에 올려둔 첨의참리 판공조사만 나옵니다.
이건 고려사의 공백이라서 어떻게 할 수 없네요..음...알 수가 없군.
그럼 광정대부로는?
ㅋㅋ
이런 사소한 것으로는 못찾나보네요.
판전농시사로도..어떤 내용이 없습니다...
- 결론 : 어디에서도 흔적을 못찾는다.
3. 그러면 역시 김주도 존재하지 않았던거 아닌가?
그래도 종2품에 문하평리 판공조사 겸 판전농시사까지 했는데 아무 얘기가 없다? 이러면 역시 김주도 존재하지 않은거 아닌가요? 문하평리 김주는 존재하지 않았던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건 아닙니다.
문하평리 김주는 존재했습니다...그것도 조선역사에 족적을 남기면서!
대신 김주(金柱)가 아니라 김주(金湊)였을 뿐이죠.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532
이 분도 격동의 시대를 살았는데요. 1360년 문과 급제 후 공양왕(1389~1392) 초에 문하평리 겸 대제학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면 문하평리가 되어서 무엇을 했느냐.
성곽 보수입니다.
이건 공의 영역인데....
이후에 한번 탄핵을 당하고 관직을 박탈당하기도 합니다만, 곧 다시 복귀, 서북면 도찰리사로 병마도 조련해보고, 계룡산 근처로 도읍 예정지도 가보고, 궁궐도 만들고, 조선 초기 어수선할때 상당히 일을 많이 하다가 벼슬 빼앗기고 전민도 국가 귀속하고 귀양살이 합니다.(?) 어째 조선 초기 신하들은 죄다 박탈당하는거 같네요.
그래도 참찬문하부사(정이품)를 맡기도 하는등 조선초기 굵직한 역할은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근데 도강 김씨 김주는 아님.
- 결론 : 문하평리 김주도 존재했다. 다른 사람이.
4. 새로운 가능성
지금까지 봤을 때, 김주의 기록도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좀 있어보입니다. 물론 고려사의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훨씬 비어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을 순 없지만, 그래도 종2품~정2품까지 올라간 사람의 족적이 고려사에 남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가능성이 좀 낮죠.
혹시나해서 말씀드리지만, 문하평리 정도면 그래도 꽤 고려사에 많이 나오는 관직 중 하나입니다. 한번쯤은 이름이 나올법했다 싶네요....아닐 수도 있지만.
하지만 사실 제가 흥미롭게 느낀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지난번 김희조에 대해 얘기드렸던 점이
1199년 김희조 : 도강백으로 봉해져서 도강으로 내려와 삶
1350년 김희조 : 일등공신 반열에 들만했으나, 모종의 일로 순천으로 유배 감
로 순천이 한번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활약한 김주(金湊)의 본관은 어디냐면 낙안 김씨입니다.
낙안이 어디냐면, 순천지역의 옛 이름입니다.
그렇게 가깝다고는 하기 힘든 두 성씨의 기원지. 그런데 도강김씨의 초창기 시조들의 모습에서 묘하게 순천이 연관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 낙안김씨와 도강 김씨의 집성촌은 어디일까요
도강 김씨 집성촌 출처 꺼무위키(https://namu.wiki/w/%EB%8F%84%EA%B0%95%20%EA%B9%80%EC%94%A8)
전라북도 정읍시 감곡면 통석리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백암리·시산리와우리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송덕리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전라남도 강진군 신전면 용화리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연동리
평안남도 순천군 사인면 송령리
낙안 김씨 집성촌 출처 성씨정보(http://www.surname.info/gim/nak_an.html)
전북 진안군 안전면 백화리
전북 고창군 성내면 부덕리
전남 보성군 문덕면 동교리
충북 중원군 상도면 온천리
경기도 고양군 중면 백석리
....전혀 상관없죠?(...)
그런데? 낙안 김씨와는 다르지만 비슷한 구역을 본관으로 하는 김씨, 순천 김씨의 집성촌을 보면
순천 김씨 집성촌 출처 성씨정보(http://www.surname.info/gim/suncheon.htm)
평남 순천군 신창면 신이리
경북 안동군 풍천면 구담동
경북 문경군 가은읍 작천리
전남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
전남 해남군 해남읍 평동리
순천 김씨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도강 김씨와 함께 한반도 남서부에 같이 흩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평안남도 순천시에도 서로 집성촌을 하고 있습니다 ㄷㄷ근데 나무위키의 도강 김씨 집성촌은 다른 곳에서 못봐서 아닐 수 있어요
대체 도강 김씨와 순천 본관들의 관계는 어디서 어떻게 얽힌 걸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들은 평남 순천시까지 가서 집성촌을 일군 걸까요?
도강 김씨 재야사학은 다음번에도 계속 될지..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1줄 요약 : 도강 김씨의 실질적 시조 김회련의 아버지의 공적도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있다.
첫댓글 ㄷㄷ
후...까면 깔수록 뭔가 신비로워지는 족보입니다...마치 근세의 신화를 보는 기분이예요....문중이 좋아하지 않을 글이란건 확실하네요.
ㅎㅎ 남의 집안 이야기지만, 역사스페셜 한편 보는 느낌의 실감나는 글이네요.
저도 언제 족보 한번 파보고 싶은데, 한자 실력이 달려서 엄두가 안 나네요. ^^;;
족보가 맞아도 재밌고 당시 사료와 달라도 왜 다를지 고민할 수 있는게 정말 재밌는 것 같습니다. 크킹2 가계도 보는 기분이네요 ㄷㄷ
제목의 재야사학이라는 단어만 보면 흠칫..
분명 저희 집도 족보가 있었는데 처분해버려서 구경도 못했습니다. 진짜였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고, 문중에서도 수십 년 동안 딱 한번만 연락이 와서..
사실 도강 김씨의 무대는 완도부터 강진까지 청해진을 필두로 동아시아를 주름잡는 해양 민족이었는데...(?) 조상 자랑할거 아니면 달리 쓰이기 쉽진 않죠 ㅎㅎ 족보 신간(?)에는 제 이름도 적혀있을텐데, 설에 가져와서 1933년판과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