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옛사람을 만난다 스크린도 무대도 없이
옛사람은 옛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악어가 물속에만 살지 않듯이
" 잘 지냈어? "
잘 지내긴, 제길
당신을 잊으려
바르셀로나로 로마로
스톡홀름으로 헤매 다녔어요
로드무비 주인공처럼 오토바이에 기대어
건들거리고 싶었지만,
파리의 11월
추적추적 비 오는 일요일
신호등 여럿인 교차로에서
맞은편 블록에 있던 중년의 파리지엔은
" 아탕시옹(attention)! "이라고
크게 외쳐주었다
머리를 구름 속에 처박은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로트바일러나 알래스칸맬러뮤트가
지른 듯한
초대박 변을 지르밟고 말았다
엄마보다 친절하시네요
나의 불운이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한 파란 눈의 여인이여,
그대를 따라가
그레이트피레네나 세인트버나드처럼
발밑에 넙죽 엎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인
나의 실패를
터무니없이 멍한 표정을
불신과 비난의 증거로 써먹으며
고통스러웠을 여인이여,
11월, 나는 개똥 밟는 여인으로 불린다
파리서도 피할 수 없던 운명
서울이라고 다를 게 있나
뭐
젖은 우산대를 고쳐 쥐며
밟고 미끄러지지 않은 게 어디야.
짓이겨진 개똥에서도 위로를 찾는 법
당신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실패는 나쁘고
삶에 흠결 없는 아름다움만 영원하리라,
누가 이런 개똥 같은 생각을 처음 만들어냈을까? 그댄
위로를 알지 못했고
건네는 법은 더더욱 몰랐고)
삶이란
누군가 한 번은 밟아야 하는
개똥의 다른 이름
젖은 교차로에서
냄새나는 생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나의 바닥을
세상 모서리에 비벼 닦는다
스크린도 무대도 없이
아름다운 나의
개똥,
당신들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문학동네, 2024.
카페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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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어서 아름다움 / 진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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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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