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망기 / 조오현
내 나이 예순에는
일흔이라는 이를 만나면
이제 죽을 일만 남은 노인이라고
어른대접을 해주었는데
내 나이 여든이 된 요즈막
일흔이라는 이를 보면
아이 같아
벼르장머리 없는
아이 같아
*************************************************
무산 조오현 스님은 불교계의 큰 어른이다.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고 여섯 살에 '절간 소머슴'으로
입산하여 59년 조계종 승려가 되었다.
현재 백담사.신흥사.낙산사의 회주(會主)를 맡고 있다.
스님도 시조시인이다.
68년 등단해 '심우도' '산에 사는 날에' 등의 시조집을 발표했다.
백담사가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기리는 여러 불사를 벌이는
것도 시조시인인 큰 스님의 행적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스님의 공덕과 불사 얘기를 꺼내겠다는 건 아니다.
여기서는 스스로 "노망기가 좀 있다"고 말씀하시는 스님의
인간미와, 애틋한 시정의 시조를 말하고자 한다.
스님의 시를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다 미소를 짓게 된다.
무언가 가슴을 퉁 치고 갔는데 어딘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서정시가 흘러가는 마음을 잡아 말로 풀어낸 것이라면
'앵화'는 "울 엄마 날 낳아놓고 먹을 게 없"던 시절, 절간
소머슴 되기 전의 마음을 붙잡은 것이다.
'어린 날 내'가 '개똥밭의 개살구' 같이 제멋대로고 뭘 좀
몰랐던 건, 스님이나 속인이나 한가지인가 보다.
'벌 나비' 질탕한 꽃철에도 물색 모르고 지내던 나는 '담 넘어
순이'가 아주 떠나간 날에야 겨우 순이가 그냥 순이가
아니었음을 안다.
순이는 '피 붉은' 내 마음을 차지한 사람이었다.
'앵화'는 하마터면 잊을 뻔한 어린 날의 추억을 담은, 앵두나무
꽃 같은 시조다. 그런데 왜 하필 '개똥밭'이고 '개살구나무'일까.
'개'라는 접두사를 굳이 앞세운 건 어쩌면 세간의 잡다한
일들은 헛되고 부질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개똥밭의 개살구나무 같은 스님의 '앵화'가 안목 좁은 이의
가슴을 좀체 떠나지 않는다.
이렇게 작고 예쁜 시조가 있는가 하면 '사내라고 다 장부 아니여/
장부소리 들을라면//몸은 들지 못해도/마음 하나는 다 놓았다
다 들어올려야//그 물론 몰현금(沒弦琴) 한 줄은/그냥 탈 줄
알아야' 같은 엇시조도 있다.
문외한으로서 그 깊이와 무게를 알 수 없는 선시(禪詩) 풍의
'일색변(一色邊) 3'이란 작품이다.
'장부'라면 '마음 하나는 다 놓았다 다 들어올'릴 줄 알아야
하는데, 이 마음이란 게 만만치 않은 상대라!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를 생각하는 것도 잠시뿐, 우리 속인들은 돌아서면
제 마음 가누지 못해 헤매고 시달린다.
그러나 어쩌겠나, 장부여! 흐린 거울처럼 마음 닦으며 살되,
'몰현금 한 줄은 그냥 탈 줄' 아는 낭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산창 가에/휘영청이 뜨는 마음//살아갈 이 한 생애가/이리
밝아 적막('산승(山僧)'부분)하다고 홀로 되뇌는 스님도 낭만을
노래한다. 그 촉촉한 기운을 노래한다.
낭만은, 각박한 세상 적셔줄 마음의 습기다.
/ 홍성란 시인
첫댓글 자기 위주로 보게 되는 세상
하긴 자기 위주로 보질 않더라도 예전 80은 대단한 나이였는데
요즘에 80을 살았다고 장수했다는 말을 못 들으니
세상은 많이 바뀌었지
바뀐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내가 바뀐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