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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랑했던 스포츠는 야구였습니다.
....음. 아니, 말이 어폐가 있네요.
저는 야구가 있어서 스포츠를 사랑했었습니다.
스포츠라곤 월드컵과 올림픽 할때만 가끔 본 저한테, 야구는 이후 여러 스포츠들을 즐길 수 있게 해줬죠.
물론 그 시절에도 야구를 보는 것보다는 야구의 역사, 선수들 이야기를 더 좋아했지만 말입니다. 재미는 배구와 농구가 더 낫죠.
그래서 지금은 스포츠를 별로 좋아합니다.
왜? 꼴데 팬이었기 때문입니다. 10년 넘게 점점 뜸하게 보면서 내가 왜 보나 정체성에 혼란이 오더라고요. 개꼴데 색1히들아!!! 너네가 내 즐거움을 앗아갔어!(..)
하지만 그래도, 야구에 심혈을 기울인 사람들의 얘기를 좋아했고, 범죄를 야구로 속죄하겠다는 야구에 범죄 묻히는 사람들을 싫어했으며, 좋아했던 일화의 사람들이 세월이 묻어 보이는 모습에 안타까워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야구를 하는 사람들이 전부 야구 자체에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죠. 아니지, 어찌보면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구의 룰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수없이 바뀌었고, 가끔은, 사실 자주, 보는 재미를 앗아간다고 빼기도 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랬다고, 오늘은 야구의 규칙과 사람들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추억의 다이아몬드라는, 제가 가장 즐겨 읽었고 지금도 아끼며 좋아하는 야구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책의 번역가이자 名기자라는 표현이 당연했던 이종남 기자님의 명복을 빕니다.
1. 그때는 정당했었지 - 스탠리 코벨레스키
스탠리 코벨레스키는 1889년 태어난 폴란드계 미국인입니다. 폴란드계,에서 짐작되시는 분도 계실테지만, 그가 살던 그 시절은 지금보다 폴란드의 처지가 더 안좋을 때입니다. 아예 나라가 없어져고, 먹을 거리를 찾아 (아마)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민 왔을 그들에게, 미국은 무연탄을 안겨줬습니다.
펜실베이니아주 샤모킨에서 태어났던 그는, 열두살 때 부터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하루 12시간동안 6일, 즉 1주일에 72시간을 일하고 그가 받은 돈은 3달러 75센트였습니다. 당시엔 그게 당연한 임금이었다고 하네요.
12살이면 1901년이니 아마 인플레이션이 더 높았겠지만, 그래도 200달러가 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최저임금도 못받고 광부 노릇하던게 그나마 돈을 '정당하게' 버는 노릇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 집안은 탁월한 재능이 있었는데, 공을 특출나게 잘 던졌습니다. 우선 명예의 전당에 오른 스탠리 코벨레스키야 두말할 것 없고, 본인 생각에 자신이 스카웃된 이유는 (물론 돌팔매를 정말 잘하기도 했지만(?)), 넷째이자 프로에 먼저 들어가서 '뉴욕 자이언츠' 를 1주일 사이에 세번이나 이긴 해리 코벨레스키만큼은 해줄 거라 생각했으리라 생각하고 있기도 했죠.
그 위요? 첫째는 아마에서 잘 던지다 스페인 전쟁에서 전사, 둘째는 동네급에서 날릴뻔 하다 류마티스, 셋째는 프로에 스카웃 되었다가 에디 콜린스에게 밀리고 마이너(당시 마이너는 지금과 좀 다른 느낌으로, 빅 리그와 계약한 별개의 독립리그 비슷한 느낌입니다)를 전전했습니다. 참고로 에디 콜린스는 명전 갔습니다.
결국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해리와 스탠리 뿐이었고, 그중 해리는 부상으로 몇년 허송세월 하다 나중에 부활했으니, 코벨레스키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사람은 스탠리였습니다. 그는 성공하고 싶었고, 빅리그에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난 퍼시픽 코스트 리그(Pacific Coast League)에 소속된 스포케인(Spokane)에서 2년, 포틀랜드(Portland)에서 1년을 보냈는데 포틀랜드에 있던 1915년이 내게 큰 전기가 됐어. 당시 내 나이 스물다섯, 벌써 마이너리그에서 7년째 생활하는 셈인데 과연 내가 빅리그에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하더군. 컨트롤도 괜찮겠다, 커브도 좋겠다, 직구도 좋겠다, 슬로볼도 좋겠다, 그러나 그걸로는 뭔가 미진했단 말이야.
어느날 가만히 보니까 포틀랜드의 투수 중의 하나가 스핏볼을 던지지 않겠어? 옳지, 바로 저거구나. 나도 저걸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지.
난 스핏볼을 연습했어. 머지않아 그걸 익힐 수 있었어. 그 전까지는 단 한번도 그걸 던져본 적이 없지만 그 시즌이 끝나기 전에 그게 내 주무기가 돼버렸어. 그리고 마침내 다음해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올라갈 수 있었던 거야. 난 스핏볼에 재미를 붙여 13년간 200승 이상 따냈지.
아무리 빅리그에 올라가고 싶다고 해도, 그가 반칙을 익히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옳지 않다는게 아닙니다. 반칙이 아니었거든요.
지금은 투수가 송진을 잔뜩 묻혀서 공을 던지기만 해도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난다' '반칙이다'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당시 야구는 그런 반칙공에 대한 규칙이 없었습니다. 공도 별로 없어서 던진걸 다시 던지고, 찌그러지고 지저분해서 못쓰는 마구가 되어야 바꿔주던 시절에 반칙공에 대한 개념이 있었을 리가요.
당시엔 면도날로 공을 깎는다든지, 사포로 공을 문지른다든지, 이번처럼 침을 묻히는 등의 공은 일련의 기술이었고, 마스터 하지 못하면 이상하게 날아가는, 하지만 마스터하면 그만한 마구가 또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스탠리는 스핏볼이 잘 맞았으며, 어쩔 땐 스핏볼을 쓸 것처럼 하면서 안던지는 심리전으로 승리를 차지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0년 12월, 반칙볼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스핏볼을 잘 쓰기로 유명한, 즉 이미 상징이 되어버린 17명을 제외하고는 못쓰도록 규칙이 바뀌어버리죠.
스탠리 코벨레스키는 그 17명에 들었고, 이후 8년 더 잘 써먹습니다.
스탠리 코벨레스키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자신이 쓰던 볼이 반칙이 되었을 때, 그리고 그 반칙을 계속 쓸 때 야구를 훼손한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거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스핏볼이 금지 되었을 때에도 '타자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한 결정'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고,
야구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는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던진 것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야구란 그런 거야. 난 게임에 나가는 걸 아주 좋아했어. 그렇지만 여간 어려운 직업이 아니지. 벤치에 들어앉아 있으면 몸이 근질거리고. 남이 나보다 더 잘한다면 난 어떻게 되겠어? 가장 거지같은 직업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잖아? 탄광으로 말이야.
부담감은 끝이 없었어. 어제 어떻게 했느냐는 아무 소용이 없어. 그건 그저 옛날얘기일 뿐이야. 중요한 건 내일이야. 그러니 항상 걱정하고 있어야 해. 걱정은 끊일 새가 없단 말이야. 야구는 그저 걱정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는 스핏볼이란 반칙으로 야구에서 승수를 쌓은 투수로 보일 법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 있어 야구는 삶의 수단이었고, 그는 스핏볼이란 마구와 함께 최선을 다하여 삶에 임한 걸 수도 있죠.
어쩌면 코벨레스키의 말이 옳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후 스핏볼과 샤인볼 등 투수에게 유리한 구종이 사라지면서 1년전부터 조짐을 보인 야구는 대격변을 맞이합니다.
1920년, 고금제일타자 베이브 루스가 54개의 홈런을 치며 라이브볼 시대를 열면서 사람들을 불러모은 뒤에 그 구종들이 사라졌으니까요.
타자들의 홈런이 터지는 라이브볼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야구에 더욱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2. 나 덕분에 이긴거야 - 델 베이커
반면에 정말로 이기기 위해서 룰 안에서 할걸 다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이 방면으로 성격도 성적도 특출난 인간이 타이 콥인데, 타이 콥 얘기는 성질머리 드러운 거밖에 없어서(..) 고르자면,
위대한 1루수 중 한명인 행크 그린버그가 맞이한 감독, 델 베이커도 있겠네요.
델 베이커는 당시에도 '사인 훔치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 유명했었습니다. 물론 예전 ㅅㅋ나 얼마전 메이저에서 폭풍을 일으키며 논란에 휩싸인 ㅎㅅㅌ 같은 첨단 기술은 아니지만, 역시 전문적인 사인 숨기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 시절인만큼, 본인이 영민하고 좀 치사하면 잘 훔칠 수 있었나 봅니다.
... 그해(주: 1940년) 우리팀 감독은 델 베이커Del Baker였어요. 코크레인은 1938년에 그만두었지요. 베이커는 1932년에 내가 텍사스리그의 뷰먼트에 있을 때 내가 감독으로 모시고 있던 분입니다. 베이커 감독은 다른 팀의 사인을 훔치는데 도통한 사람이라고 자타가 공인했죠. 그 분은 3루코치박스에 나가 상대방 포수의 사인이나 투수의 버릇을 보고 다음에 무슨 볼이 들어오니까 어떻게 하라고 미리 알려주곤 했습니다.
나는 그걸 잘 이용했어요. 다음에 무슨 볼이 들어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는 한 그보다 더 잘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베이커 감독은 3루쪽 코치박스에 나가서 쉴새없이 주절댔는데 "그래 그렇게 하는거야"하면 직구가 들어온다는 사인이고 "자, 가자"고 하면 커브라는 사인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그래, 행크, 그렇게 하면 돼"하면 직구라는 뜻이고 "행크, 칠 수 있어. 가자!"고 하면 커브라는 뜻이었죠.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사인이네요.(..) 요즘 상식으로는 감독이 3루코치박스로 나가서 사인을 본다는 것도, 그걸 직구 커브 알려주는 방식이 저렇게 큰소리로 말하는 수준이라는 것도 이해가 안되지만, 이게 바로 이 시절 낭만(?)일테죠.
이와 같은 델 베이커의 전폭적인 내조에 행크 그린버그 자체의 재능까지 합쳐져서, 그 해 그는 타율 0.340 41홈런 150타점을 이루고 MVP까지 획득, 그린버그의 전성기가 여전하다는 것을 널리 알렸죠.
물론 그 시절 모든 선수들이 사인 훔치기의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양심이라기보단 그들에게 야구란 즐거운 공놀이에 가까워서였을테죠.
개중에는 사전에 사인을 받는 걸 싫어하는 선수도 있었어요. 자기 스스로 구질을 판단하는 걸 즐기기 때문이었죠. 게링어나 고슬린은 절대로 그런 사인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루디 요크나 나는 그런 사인에 크게 덕을 봤습니다. 우리가 1940년에 그렇게 상대방을 박살낼 수 있었던 건 그 사인 덕분이었어요.
물론 1인칭으로 그린버그가 게링어나 고슬린의 마음을 알았을지는 모르지만, 사실 제가 보기에도 게링어나 고슬린이 당시 사인 훔치기가 나쁘다, 라기보다는 야구를 즐겼을 것 같습니다. 저기의 구스 고슬린은 쑥스러울지도 모를 타율 1위의 일화를 스스로의 입으로 얘기도 한 해본 명예의 전당 인물로 본인 자체도 소박한 느낌이거든요. 추억의 다이아몬드에 실린 고슬린의 이야기도 참 인간미 넘치는데... 올리기 너무 기네...
그린버그를 보더라도 당시 프로 감독, 프로 선수들은 이기는데 열중했고, 그들이 야구를 좋아하고 말고와는 상관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처럼 세간의 비난을 받는 큰 반칙도 아니었으니까요. 아니 반칙 자체가 아니었을지도요. 반칙이 아니라면 이기기 위해 할 수 있었던 거죠. 그가 정말 이미지를 생각했다면, 게링어와 고슬린처럼 자신도 사인을 안봤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오히려 솔직하기에 이런 걸 전부 말한 걸겁니다.
그린버그는 1940년 MVP 성적과 디트로이트 황금 클린업을 데리고 월시까지 노렸습니다만, 아쉽게도 신시내티에게 져서 우승을 놓치고 맙니다. 위대한 포수 어니 롬바르디가 다쳐서 후보 포수가 나왔으니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게 야구죠.
이후 그는 1941년 시즌 도중 메이저리그 선수 중 2번째로 제2차 세계대전에 입단하여 전성기 4년반을 날려버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위대한 1루수였다는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테죠.
3. 참 많은 사람들, 다시 오지 않을 나날들
사실 룰이란게 앞의 것들처럼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할 용도로, 혹은 정정당당한 승부를 만들 수 있도록 바꾸기도 하지만, 경기를 단순화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런 규칙은 사람들이 생각할 상황을 줄여주기에 그 상황의 수와 앞으로의 예측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하지만, 반면 예상치도 못한 상황을 가지치기에 그런 데서 오는 재미를 없애기도 하죠. 이를테면 데이비 존스가 회상한 저머니 셰퍼의 1루 스틸 같은 것 말이죠.
...저머니 셰퍼가 1루스틸을 하는 걸 본 게 그 무렵이었으니까 아마 1908년쯤이었을 거외다. 그래요, 1루를 스틸했다니깐. 남들은 말도안되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난 그가 1루스틸을 하는 걸 똑똑히 봤어. 사실 나는 그때 3루주자로 나가 있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눈이 튀어나올 것 같더군.
클리블랜드와 게임을 할 때였는데 게임 후반에 들어가 스코어는 동점이었소. 난 3루에, 셰퍼는 1루에 나가 있고 타자는 크로포드 였고. 피처가 와인드업을 하기 전에 셰퍼는 더블스틸을 하자고 내게 신호를 보냅디다. 즉 다음 투구에 자기가 2루로 뛸테니 포수가 볼을 2루로 던지면 난 홈으로 뛰라는 거였지. 자, 투수가 와인드업에 들어가 볼을 던지는 순간 셰퍼는 여지없이 2루 스틸을 합디다. 그러나 난 그냥 3루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어. 클리블랜드 포수 닉 클라크Nig Clarke가 볼을 던지지 않았거든. 내가 홈으로 더블스틸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자, 그러니 우리는 주자가 2, 3루가 됐지. 다음 투구가 시잘될 때 셰퍼는 "다시 하자"고 소릴 지릅디다. 그러더니 습격하는 인디언처럼 괴성을 지르면서 1루로 냅다 달려들어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이빙해 들어가는 게 아니겠어? 그는 자기가 그렇게 하면 포수가 1루로 송구를 할 거고 그 틈을 타 내가 홈스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셰퍼가 무슨 짓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모두들 입을 쩍 벌린 채 구경만 했거든.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 만약 포수가 1루로 송구했다 하더라도 난 하도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던 거요. 어쨌든 포수도 던지질 못했지. 그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지. 하긴 클리블랜드 1루수 조지 스토벌George Stovall도 셰퍼가 역주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베이스를 커버하러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 스토벌은 이 미친 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영문을 몰라 어찌 할 줄을 모르고 있었거든.
심판들도 그 무슨 해괴한 짓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었소. 그 당시에도 역주를 금지하는 룰이 없었기 때문에 선수가 그렇게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말릴 방법이 없었지.
그래서 처음과 마찬가지로 나는 3루에, 셰퍼는 1루에 머물게 됐소. 그런데 투수가 3구째를 던질 때 셰퍼는 다시 2루로 냅다 달렸어요.....
후...언제 봐도 유쾌한 일화입니다. 저머니 셰퍼의 유쾌하고 엉뚱한 면모가 아니라면 일어나기 힘든 일이지요. 그런데 이후 역주 금지 룰이 나와서 이런 재밌는 일화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참으로 통탄스럽지만, 그만큼 선수들은 자신들의 롤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고, 관객들도 그 룰에 따라 즐겁게 볼 수 있었을테죠.
하지만 룰의 본질은 이런 유쾌한 일들을 막는게 아니라, 승패와 연관되어 일어나는 야바위들을 잡아내는 것이 목적이고, 그래서 시합은 늘 심판과 선수들 간의 야바위 싸움이 치열합니다.
카메라가 없던 시절엔 심판이 이정도의 주변머리도 있어야 했죠. 20세기 초반의 강타자 샘 크로포드의 일화입니다.
...그러니 심판 혼자서 전체를 본다는 건 불가능 했소. 심판은 주자가 없을 때는 포수 뒤에서 보다가 일단 주자가 나가면 투수 뒤로 가서 스트라이크다, 볼이다를 외치게 되지. 가령 주자가 2루에 있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심판이 투수 뒤에 있을 때 타자가 우익수 쪽으로 안타를 쳤다 칩시다. 자, 그럼 심판은 눈으로 타구를 쫓아가며 2루로 달리는 타자주자를 지켜봐야 할 게 아니오? 그동안 2루주자는 3루를 채 밟지도 않고 슬쩍 중간을 가로질러 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3루는 아예 근처에도 안가는 거지. 우리들은 뛰면서 한 눈으로는 타구를 보고 다른 눈으로는 심판의 눈치를 살피는 거였지!
팀 허스트Tim Hurst라는 양반 잘 아시겠지. 당시 굉장히 유명한 심판이었지. 그분은 이런 야바위를 잡아내는 데 귀신이었어. 예를 들어봅시다. 1899년이었던가, 1900년이었던가 확실치 않은데 우리팀(신시내티)의 1루를 맡던 제이크 베클리Jake Beckley라는 선수가 있었지. 어느날 게임에서 먼지를 풀풀 일으키며 보기좋게 홈으로 슬라이딩해 들어갔소. 그런데 볼은 아예 그쪽으로 오지도 않았어. 사람들은 물론 팀 허스트 심판도 모두 2루에서 일어나는 플레이에만 시선이 쏠려 있었지. 그런데 허스트 심판은 느닷없이 "넌 아웃이야!" 하고 제이크에게 소리치는 거야.
제이크가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아웃이라니? 내가 왜 아웃이요? 태그도 뭣도 없었는데 내가 왜 아웃이란 말이예요?"
"이 우라질 자식아. 어디서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해? 네깐 놈의 느린 발로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홈까지 들어간단 말이야?"
그래요. 허스트는 우리들이 어떻게 사기를 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거야....
심판도 한명인 시절, 야구 심판을 하려면 이정도 머리와 깡은 있어야 했습니다. 요즘 심판들이 아직도 고집 세게 하는 이유는 이런 프라이드가 이어진 걸...지도 아닐지도요.
책의 다음 줄을 그냥 인용하자면, 심판생활은 고독합니다. 아무도 고마움을 알아주지 않는 직업이죠. 심판 덕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게임을 룰대로 깔끔하게 적용하려면 심판의 도움이 절실한데 말이죠. 참고로 지금 야구 심판은 4명+ 예비 1명입니다. 네 명인데도 이 플레이가 반칙인가 아닌가 볼인가 스트라이크인가 지들끼리 합의 짓는 것도 모자라서 비디오 판독도 합니다. 심판 겁나 어렵습니다..
4. 다시 오지 않을, 그리고 다시 오지 않았으면 하는
좋게 말하면 낭만이 가득했던 그 시절 야구. 읽고 있노라면 사람들의 사람냄새 나는 일화들과 당시 블루칼라였던 야구선수들의 기행, 개성 가득했던 감독들과 그들이 응원하는 팬들이 어울려서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너무 재밌습니다.
하지만 야구를 다시 그 시절로 되돌리는게 좋겠다, 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 할 것 같네요. 이 시절 야구는 분명 정제되지 않은 매력이 있지만,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통계에서 오는 파고들 건덕지이고,
이런 일화들만큼 좋아하는 일화가 지금 주어진 룰에서 스포츠 정신에 입각해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땀방울이거든요. 뭐..그때도 반칙은 아니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테두리란건 늘 있기 마련이니까요. 하....롯데의 경기는 삼성으로 기울고 일화로 꼴데 팬이 된건데 꼴데 개액끼들아!!! ㅜㅜ
요즘 카페가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로 여러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왠지 보고 있으니 예전에 읽은 책이 생각나서 조회수도 얻을 겸 몇몇 부분을 발췌해왔습니다. 읽는데 재미있으셨으면 하네요. 참고로 이 책 절판이라서 헌책방 아니면 못삼 ㅎㅎ
첫댓글 카페에 축구글에 이어 야구글도 올라오네요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ㅋㅋ, 야구는 뭐 먹으면서 보기에도 좋은거 같고 경기 시간이 길어서 나름 데이트용으로도 괜찮은거 같아 좋네요(다만 데이트 할 사람이 없다는게....)
야구 경기 현장은 치어리더 앞이 국룰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