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남편의 도움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김일엽은 허영숙, 이광수 등과 교류하면서 잡지 ‘여자계(女子界)’의 주간으로 일하던 신여성 나혜석과 만납니다. 그 영향 탓인지 김일엽은 귀국 후 조선에서 여성잡지를 발간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부터 김일엽은 숱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요. 이노익과 이혼한 뒤 유학생 시절 만난 시인 임장화와 훗날 동거하는데 이를 두고 김동인(金東仁)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나혜석 때도 언급했지만 김일엽도 이광수와 관계가 있지요. ‘일엽’이라는 호는 이광수가 일본의 유명 작가 히구치 이치요 (樋口一葉·1872~1896)처럼 한국의 이치요가 되라고 김일엽에게 붙여준 필명이었습니다. 김일엽은 훗날 작가로 활동할 때도, 승려로 출가한 후에도 일엽이라는 법명을 사용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일엽이라는 이름은 달마대사와 연관이 있음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달마대사는 나뭇잎으로 만든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화가 있는데 이것에서 유래한 것 이름이 바로 ‘일엽’이라는 뜻으로 훗날 그의 출가와 연관이 됩니다. 김일엽은 일본유학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국내로 돌아와 만세 운동에 참가하다가 헌병대에 끌려갑니다. 그때 그는 만세 운동의 실패와 강대국에 좌우되는 국제 정세에 실망하면서 그 대안으로 여성 계몽운동과 언론활동을 시작합니다.
옹산 전 수덕사 주지스님이 지은 선 미술관은 아담하지만 예술미가 넘친다. 이곳에는 일엽스님의 아들 일당스님의 그림도 두점 전시돼있다.
1920년 3월, 최초의 여성주의 잡지 ‘신여자’를 창간했으며 이 지면을 통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공개적인 글을 주고받으며 주목받습니다. 당시 ‘신여자’의 필진은 나혜석-박인덕-김활란-김명순-차미리사 등으로 쟁쟁했지만 4호로 폐간됩니다. ‘신여자’가 폐간된 뒤 김일엽은 다시 일본으로, 남편 이노익은 미국으로 떠나면서 이혼합니다. 그는 일본에서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법대생 오오타 세이죠와 사귀며 결혼하려 했으나 남자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지요. 오오타 집안에서는 그녀가 조선인 출신에,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의 딸이었으며 장애인 남편을 버렸다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둘의 만남은 동경 히비야공원에서 이뤄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둘은 여관에 들어가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이때 가진 아이가 훗날 어머니처럼 출가한 일당스님(1922~2014)이지요. 오오타는 도쿄은행장의 아들인데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정한 일본군 장수였다고 합니다. 김일엽은 아들을 낳은 후 오오타의 만류에도 귀국하고 말지요. 귀국 후 김일엽은 일본에서 만났던 임노월과 재회한 뒤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임노월 역시 일찍 결혼해 본처가 있었던 것을 김일엽은 뒤늦게 압니다. 이에 실망한 김일엽은 1923년 9월 수덕사에 갔다가 우연히 만공스님의 법문을 듣습니다. 김일엽은 자신의 복잡한 연애가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나는 피해를 준 적이 없는데 왜 타자(他者)들이 나의 연애 문제에 개입하려 드느냐”며 항변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유부남과의 연애나 애정관계를 옹호하는 입장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의 발언에 민감했습니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견성암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건물의 대문이름이 불이문이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이 문을 통과해야만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상징이다.
이후 김일엽은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이자 불교학자 백성욱과 동거합니다. 그의 자서전 ‘청춘을 불사르고’를 보면 백성욱이 불교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할 무렵 만나 친하게 되었으며 연인으로 발전해 7~8개월 사랑을 나눴다고 고백하지요. 하지만 백성욱은 “우리 둘 사이는 인연이 다했다”는 편지를 남기고 잠적한 뒤 1930년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됩니다. 갑자기 백성욱이 떠난 뒤 받은 충격과 백성욱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실화 소설 ‘희생’에 잘 나타나있지만 방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김일엽은 이노익-오오타-임장화-백성욱 외에 친구 유덕의 애인인 방인근(方仁根)과 삼각관계로 스캔들을 일으켰고 동아일보 기자 국기열(鞠錡烈)와 동거하는가하면 춘원 이광수와도 사랑에 빠졌으니 요즘 시각으로 봐도 뜨거운 뉴스메이커였습니다. 결국 김일엽은 1928년 4월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신림암(神林庵)에서 3개월간 수행한 뒤 경성 선학원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지만 다시 대처승 하윤과 1929년 8월 대구에서 공식적으론 두 번째 재혼을 하게 됩니다. 원래 불교에 관심이 많았지만 하윤실스님과 재혼 후 그는 여러 스님과 교유합니다. 그리곤 마침내 1931년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지요. 김일엽은 당시 심정을 나혜석에게 털어놓는데 나혜석은 “현실 도피로 종교를 선택해선 안 된다”고 면박을 주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함께 승려가 되자’는 김일엽의 청을 거절했던 나혜석이 1935년 마음이 바뀌어 승려가 되려고 했을 때는 김일엽이 거절했다는 사실입니다. 여하간 김일엽은 1933년 공식적으로 이혼하고 남자들과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맙니다. 여기서 김일엽과 나혜석의 후일담을 살펴보겠습니다. 나혜석은 이혼한 뒤 수덕사 바로 앞 수덕여관에서 김일엽과 재회합니다.
수덕여관의 모습이다. 오른쪽에 돌에 여관이름이 새겨져있다.
수덕여관은 미술가 이응로가 머물며 작품활동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큰 바위에 이응로가 조각을 해놓았다.
수덕여관 뒷편이 환희대다. 이 경계로 속세와 불국토가 갈린다.
승려가 되겠다는 나혜석의 청에 못 이겨 만공스님을 만나게 하지만 만공스님은 나혜석에게 “당신은 색기(色氣)가 지나쳐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요. 그 후로도 나혜석은 6년 동안이나 수덕여관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수덕여관은 작지만 정갈하다. 지금은 비어있다.
수덕여관 간판 앞에 백일홍이 피어있다.
일엽스님의 책을 읽고 출가한 옹산 전 수덕사 주지가 지은 선 미술관 앞에는 예술은 인간의 영혼이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김일엽은 1933년 9월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공스님 상좌가 됩니다.
수덕사 견성암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하다. 만공스님과 비구니들이 기념촬영한 모습이다.
수덕사 견성암의 현판이다.
견성암은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됐다.
견성암 앞 나무 밑 기왓장에 새겨놓은 글귀다.
그는 ‘글도 망상(妄想)의 근원’이라는 만공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절필하는데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년)과 ‘청춘을 불사르고’(1962년)가 나온 것은 30여년 뒤의 일입니다. 1934년 김일엽은 만공스님에게 하엽당 백련도엽 비구니(荷葉堂 白蓮道葉 比丘尼)라는 당호(堂號)와 도호(道號)가 담긴 전법게(傳法偈)를 받습니다. 이것은 ‘일엽이 연꽃처럼 되고 성품도 백련과 같으니 도를 이루는 비구니가 되었도다’라는 뜻입니다. 승려생활 초기만 해도 언론은 그를 잊지 않고 ‘김일엽 여사의 동냥승’(삼천리 1935년 1월호) ‘법당에서 참선으로 청춘을 잊는 김일엽 여사(가인 독수공방기)’(삼천리, 같은 해 8월호)같은 기사를 내놓지만 그는 세상에서 서서히 잊히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인연은 질긴 법, 어느 날 일엽스님에게 열네살 된 소년이 찾아왔으니 그가 일본인 오오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태신(훗날 일당스님)이었습니다. 아들에게 일엽스님은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거절하지요. 아들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사랑했던 남자 오오타가 찾아오지만 일엽은 그를 만나지 않습니다. 오오타는 이후 외교관이 됐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970년 독일에서 세상을 떠났지요. 1962년 일엽 스님의 책 ‘청춘을 불사르고’는 세상에 파란을 일으킵니다. 영화배우 김지미가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는가 하면 수덕사 전 주지 옹산(翁山)은 “스님의 책을 읽은 뒤 경북 김천의 집을 떠나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며 수덕사로 왔다”고 했습니다.
옹산 수덕사 전 주지스님은 일엽스님의 책을 읽고 출가했다.
1960년부터 견성암에서 환희대로 거처를 옮길 무렵 유행가 한 곡이 발표됩니다.
갈림길에 서있는 표지판이다. 왼쪽은 환희대, 오른쪽은 대웅전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이 견성암에서 옮겨와 열반에 들때까지 일엽스님이 머물렀던 환희대다.
환희대의 이름은 지금 보광당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유명한 ‘수덕사의 여승’으로, 가수 송춘희가 부른 이 노래는 대히트를 쳤습니다. 일부 승려는 노래가 일엽스님을 연상킨다며 가사를 바꾸라고 항의하기도 했지요. Photo By 이서현
첫댓글 崎嶇한 운명의 여승 一葉스님!
모자간의 인연도 끊어버리고 속세의 불꽃을 잠재우며
達磨大師가 타고 간 설화속의 一葉, 출가 후 法名으로 살았으니
아들 또한 어머니를 이어 일당스님으로... 짠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