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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을 이루는 물질
- 제 6 장 -
문명의 도래
서울 삼성역 인터컨티넨탈 호텔 30층 머큐리 룸 내부에서 한 사람의 육성이 마이크 없이 밖깥 홀까지 울려퍼졌다.
키는 185센티가량에 40십대 중반의 검은 정장의 미국인은 한국 굴지의 기업 회장들, 방송사, 신문사 등 정재계 인사들이 한 곳에 불러모아 놓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고요한 강연장에 그의 목소리만 크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세미나실 좌석에서 일제히 기립하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회의를 마친 사람들은 머큐리 룸의 출입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노란 턱수염에 광대뼈가 유난히 굵은 제임스 블레이드 CIA 국장은 고급스러운 보고서 결재서류를 옆구리에 끼고서 머큐리 룸의 옆 연회장인 플루토 룸으로 발을 옮겼다. 그는 노크 후 큰 문을 열어 제끼자 텅 빈 홀이 길게 펼쳐졌다.
서울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 통유리 앞 이태리풍의 고급스러운 서재와 책상 사이에 오십대의 한복 차림의 오양조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음미하며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임스 블레이드가 발걸음을 멈추자 오양조는 고개를 창밖에 둔 채 제임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의 생각을 읊기 시작했다.
"이 영묘한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한한 축복이 아닐 수가 없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나약함을 드러낸 채 같은 일만 반복하고 있지, 신(神)이 주신 거대한 능력을 십분도 채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오양조를 한심한 듯 쳐다보던 제임스 블레이드는 오양조의 너스레에 신경쓰지 않고 회의결과를 보고했다.
"이번에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예정입니다. 어르신의 동의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블레이드는 한국말을 하면서 또박또박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단지 약간 혀가 말려 영어발음이 섞인 목소리가 나올 뿐이었다.
오양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쓰고 있던 안경을 살짝 코에 걸친 채 블레이드를 향해 눈을 날카롭게 치켜 떴다.
"그걸 만들어서 뭐에 쓰려고 하나? 또 하늘에 바이러스 구름기둥이 전국으로 살포해서 제약회사 흑자좀 내려고 하는 것인가? 자네 지분이 있는 에이스 제약회사가 돈을 벌면 자네 자본이 커질 테니 말일세. "
제임스가 약간 어이없는 듯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신형바이러스 백신 독점사 에이스 제약회사의 지분이 마치 제게만 있는 듯 말씀하시는 군요?"
"그렇지 나만 빼고 아담이나 데이빗이 거의 38%씩 가지고 있지, 자네는 고작 8%밖에 없지만 말일세 그런데 말이야 변형바이러스 배양에 성공해서 공중에 계속 뿌려댄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음모론을 만들어 우리가 하는 일들을 인터넷으로 유포하고 있네. 하늘에 자꾸 그런게 눈에 띄면 사람들이 알아보려 하지 않겠냔 말일세."
"대체로 무엇을 뿌리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죠. 일부사람들은 그것이 오존층 파괴로 인해 자외선 차단 물질을 뿌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음모론자들에 의해 그것이 바이러스 살포장면으로 여겨지는 것은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허나 그들이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정부에서 그대로 오존층 보존물질이라고 전면발표하면 그들은 그대로 믿을 것입니다."
"이보게,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떡하겠는가? 내 말은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부분에 수십년 동안 변함없이 같은 방식을 반복하고 있으니 한심해서 그런 것이네. 증거만 없을 뿐이지 지식이 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심중으로 바이러스 살포 장면으로 인식하고 있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계속해서 미디어를 통해 역정보를 흘려 지식인들의 혼란을 가중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음모이론 역시 우리가 만들어낸 고육책에 지나지 않지 않습니까?"
오양조는 혀를끌끌 차며 가소로운 듯 블레이드를 향해 조소의 시선을 보냈다.
"자네는 그걸 몰라."
"무엇을 모른 단 말씀입니까?"
"의식의 변이(變移) 말일 세."
오양조의 말에 제임스는 더 이상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변형바이러스를 찾는데 어르신께서도 도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르신의 동의가 있어야 한국에서 이 일을 우리가 거행할 수 있습니다."
"좋아, 모두가 그렇게 결정했으니 당연히 진행해야지. 내 말은 다만 조금 더 신중을 기하자는 이야기니 너무 심려 말게."
"알겠습니다. 그럼 어르신께서 동의하신 걸로 알고 위에 보고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순간이동프로젝트가 드디어 성공리에 마무리됐습니다. 이제 과학으로 마법을 부리는 시대가 찾아온 것입니다."
오양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임스 블레이드는 오양조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플루토 룸을 벗어났다. 그는 곧 옥상의 헬기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오양조는 주름진 날카로운 눈으로 통유리 밖의 서울을 내려다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성남 대학교 맞은 편 한옥 건물의 일주문 위로 제트기 한 대가 지나갔다. 제트기 엔진에서 뿜어나오는 흰 연기는 길쭉한 구름 기둥을 형성했다. 구름기둥은 하늘에 길게 뻗은 채 잠시 동안 하늘에 머물러 있다가 점차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 대의 제트기가 지나간 넓은 공간의 하늘에는 여러 개의 흰 구름기둥들이 정신없이 늘어져 있었다.
해가 막 서산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였다. 학교의 인파는 밝은 오후 때보다 더 뜸했다. 거의 모든 버스들이 떠난 정류장에 한 대의 버스가 남아 있었다.
멀리서 파란 색 자켓을 걸친 박도진은 애타게 손을 흔들며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잠깐만요."
그러나 버스 기사는 후방 거울에 애타게 쫓아오는 남자가 비쳤음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기사는 곧 클런치를 깊게 밟으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막대기 같은 길쭉한 기어를 1단으로 옮겼다. 그는 동시에 왼 발을 클런치에서 떼며 브레이크 위에 있던 오른 발을 엑셀에 놓고 꾸욱 밟았다.
푸쉭
버스에서 가스새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지며 엔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차 바퀴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부르르릉
기사 뒤 쪽 두 번째 좌석에서 빨간색 얇은 패딩조끼를 입은 한 여인이 못마한 시선으로 버스기사를 노려보며 외쳤다.
"좀 세워주시죠? 막차인데..."
버스기사는 양심에 찔렸는지 슬며시 오른 발을 브레이크로 가져갔다. 갑작스러운 급제동에 버스가 앞으로 쏠리며 버스 안의 사람들도 정면으로 몸이 함께 기울었다.
'허 참, 뒤에 사람이 있는 줄 몰랐네."
버스기사가 날카로운 여인의 시선을 의식하자 빨간 패딩의 여인은 대꾸없이 고개를 창쪽으로 돌렸다.
자동문이 열리자 박도진이 숨을 헐떡거리며 버스에 올라탔다. 그는 기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버스 기사는 약간 빈정상한 표정으로 남자의 인사를 무시하며 재빨리 문을 닫았다.
자리에 앉은 도진은 무심히 버스 앞 유리창 밖을 응시했다.
학교버스가 시가지 버스 정류장에서 멈추자 많은 학생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빨간 패딩조끼를 입은 여인도 뒷 줄에 서서 버스에서 내린 뒤 가로등 옆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 늦게 버스에서 하차한 청자켓의 남자도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그녀는 갑자기 청자켓의 남자에게 다가가더니 말을 걸었다.
"박도진 씨죠?"
그는 불현듯 말을 걸어오는 빨간 패딩의 여인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같은 신문방송학과인데, 제대로 인사 한번 없었네요."
그는 강의실에서 그녀를 몇번 지나치거나 교수가 출석을 부를 때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백 육십의 보통키에 단발머리의 그녀는 그렇게 짙지 않은 속쌍커풀의 동그란 눈과 둥근 얼굴 형이 단아하고 귀엽고 애띄어 보였다. 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 예. 제가 사실 좀 학과모임에 소원한 편이라... 임연주씨."
"헤헤, 서로 이름을 알고도 첫인사하네요. 이제 곧 졸업하고 헤어 질 때인데 말이죠."
"그러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좀, 진부하지만 서로 번호를 알고 지내는 게 어때요? 혹시 알아요? 차기 신문기자로서 서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지."
"뭐, 그러죠."
두 사람은 서로의 휴대폰 번호를 저장했다. 그때 8201번 버스가 도착했다. 연주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버스에 올라탔다. 창문 밖으로 도진을 내려다보았지만 그는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만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래전부터 도진에게 마음이 있었던 그녀였지만 그날만큼 큰 용기를 내본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앞으로 도진과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지는 장담못했지만 시작이 반이 듯 인연은 계속되리라 생각했다.
도진이 탄 버스는 경기도를 벗어나 서울로 진입하고 있었다. 중간에 차량을 검문하는 헌병 초소 앞에서 차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헌병들의 뒤를 따라 초소 옆에 설치된 가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헌병이 버스에 올라타 한 손에 어떤 탐지기 같은 것을 들어 보이자 안테나가 있는 무전기 같은 탐지기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여인을 지나치며 삑삑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헌병은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듯 경례를 붙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아가씨 몸에서 신형바이러스가 검출됐습니다. 지금 방역당국에서 전세계적으로 돌고 있는 신형바이러스 때문에 확산을 막기 위해 검문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임시 방역센터에 들러 백신을 접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몸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됐다는 말에 불안한 눈빛을 보이던 여인은 당장에 몸을 일으켜 헌병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나가자 주위에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며 행여나 바이러스가 옮을까봐 눈치를 살폈다.
신형바이러스는 한국에서 발생하여 벌써 한 달이 넘게 세계를 누비는 독종바이러스였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어떻게 발생하여 어떤 경로로 세계로 퍼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미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은 사람만해도 전세계에 백만이 넘었다. 결국 국가에서는 검역단계를 최고 수위까지 격상시켜 헌병대를 동원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제 방역당국이 충분히 손을 쓸 만큼 썼으며 더 이상의 확산은 없었다.
여자가 헌병을 따라 내리자 버스는 곧 문을 닫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도진은 하루 종일 피곤했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한데다 눈꺼풀이 몹시도 무거웠다.
흐릿한 그의 시선 앞에서 한 여인이 백신을 접종하려고 팔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도진을 향해 두렵고 불안한 눈빛을 보내며 속삭였다.
"전 아니에요. 아무 이상이 없단 말이에요."
옆에 있던 의사가 여자의 소매를 걷었다. 흰 의사가운의 왼쪽 가슴에는 실장 김병연이라고 새겨진 명찰이 달려 있었다.
"이성희씨 걱정 말아요, 아프지 않으니까..."
순간 박도진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여전히 버스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박도진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좋은 성적으로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하여 2년동안 착실하게 학과생활을 해왔다.
그는 군재대를 한 1996년 어느 날 복학 후 쓸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인터넷에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가 우연히 접하게 된 정보는 음모론에 대한 것이었다. 이종사촌 누나인 유수인이 음모론자라고 한심한 시선을 보내던 그였는데 그녀보다 음모론에 더 심각하게 빠진 것이었다. 결국 성균관 대학교를 자퇴한 그는 북한산에서 외삼촌의 절친한 친구인 한의사 이산인으로부터 침술을 배우고, 정조시대 궁중무술계승자인 외삼춘 유세진으로부터 고된 무술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 뒤 이산인의 권유로 그는 성남대학교에 재 입학하게 됐고, 그 뒤 4년 째되는 해 그는 졸업을 앞두고 한창 졸업논문에 매진하고 있었다.
박도진이 살고 있는 송파구에 있는 그의 숙소는 버스로 성남대학교에서 다섯 정거장 정도 되는 서울의 외곽에 위치했다.
몇번만 뛰면 금새 성남시 수정구였기에 아침운동을 위해 희망대공원까지 유세진 외삼춘으로부터 배운 복식호흡법으로 조깅을 하고 있었다. 다년간 훈련을 받은 그는 복식호흡을 하면서 뛸때면 전혀 숨이 가쁘질 않았다.
그가 골목 골목 사이를 달리던 중이었다. 문득 검정색 승합용 특장차 한 대가 일반 주택의 집 앞에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승합차보다 조금 더 큰 특수목적으로 제작된 특장차였다. 임시 넘버가 붙어 있는 차는 일반 승합차보다 조금더 큰 규모였다. 차량의 컨테이너는 다량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크기였다.
보통 은행의 현금을 운송하거나 정부에서 첩보수행을 위해 비밀스럽게 쓰이는 종류의 차량이 일반 주택가에 서있다는 것이 도진에게는 여간 이상한게 아니었다.
은밀한 정보부의 검정색 승합용 특장차에 대한 박도진의 기억은 3년 전의 또 다른 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유세진의 딸이자 도진의 이종사촌 누나인 유수인은 전도유망한 경찰대학교 무술교관이었지만 부조리한 세상을 접하게 되면서 일을 그만두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반정부를 외치며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곤 했다. 그녀가 도진에게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진실을 폭로하자 그는 대학까지 그만두고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그녀가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도진은 외삼춘에게 무술을 배운 뒤 헤어지며 돌아가던 골목에서 은밀해 보이는 컨테이너가 있는 승합차 안으로 유수인 누나가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다행히 몇가지 조사만 받고 풀려나온 유수인은 그들에게 아버지가 활동하는 '도인협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고 말했다. 사실 그녀가 도협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비밀스러운 신분이 탄로나지 않게 하기 위해 정보부 요원들에게 거짓으로 둘러댔던 것이다.
도인협회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반정부 시위를 하는 곳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요원들은 그녀를 풀어준 것이었다.
검정 특장차의 뒷쪽 컨테이너 문이 덜컹하며 열렸다. 검은 모자에 검정 유니폼 슈트를 착용한 남자들이 들것에 한 남자를 실어 내리고 있었다. 그는 호기심에 골목 뒤로 몰래 숨은 뒤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는 시력이 좋아서 들것에 실린 남자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들것 위의 남자는 그에게 결코 낯선 인물이 아니었다.
도진의 뇌리에서 문득 학교 버스의 기사의 옆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 학교버스기사가 특장차의 들것에 실려나오던 남자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희망대공원에 다다른 그는 천천히 공원을 거닐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때 모자를 푹 눌러쓴 한 남자가 점퍼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은 채 빠른 속도로 도진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남자가 주머니 밖으로 15센티 길이의 짧은 칼을 꺼내 들었다.
순간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단검의 칼끝이 도진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재빠르게 상체를 옆으로 틀었다. 빠르게 도진의 가슴으로 꽂혀오는 칼날이 허공을 찔렀다.
도진은 상대의 칼을 든 손목을 양손으로 감아 오른 쪽 방향으로 거세게 비틀었다.
부웅
공격을 시도한 남자의 팔이 꺽이는 순간 몸이 허공으로 180도 회전했다. 꺽인 팔이 풀리며 재빠르게 착지를 한 남자는 왼쪽 허리춤에서 권총을 끄집어 냈다.
도진은 순간적으로 남자의 총을 잡았다. 남자가 방아쇠를 당기려하자 갑자기 권총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권총이 손아귀에서 사라지자 남자의 두 눈이 휘둥그런 상태로 경직됐다. 박도진 역시 상대의 권총이 사라지자 스스로도 역시 놀라 있었다. 그는 자신이 환상을 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의 표정을 보았을 때 권총은 분명 자취를 감춘 것이 틀림없었다.
당황한 남자는 오른 손에 쥐고 있던 칼로 박도진을 향해 정신없이 휘둘렀다. 처음에는 전문 청부살인자의 솜씨 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총이 사라자자 이내 방향을 잃은 듯 남자는 일정한 공격 패턴 없이 위축된 심리로 마구 덤벼들었다. 상대의 단도가 공격범위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순간 도진은 그자의 팔을 감아 비튼 뒤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남자가 몸을 틀며 다른 팔로 몸을 빼내려하자 도진이 무릎으로 강하게 내리치며 바닥에 납작하게 눌러버렸다. 도진은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는 남자의 뒷덜미의 급소를 엄지손가락으로 꽉 누렀다. 남자는 마치 온몸이 마비가 된듯 움직이질 못했다.
"누군데 날 해치려는 거야?"
박도진이 소리치며 물었지만 상대방은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방금전 내가 본 것 때문인가?"
도진은 남자의 눈빛에서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읽어냈다.
그때 뒤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예민해진 도진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역시 정체모를 장정들이 자신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도진은 여차 하면 도망칠 기회를 놓칠까 싶어 빨리 몸을 일으켰다.
탕
뒤에서 총알이 땅바닥에 튕기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도진은 놀란 듯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거구의 장신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아섰다. 그는 도진의 팔과 가슴부위의 옷깃을 잡아 당기며 땅바닥으로 내다 꽂았다.
철퍽
온몸이 딱딱한 바닥으로 떨어지자 도진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거구의 남자는 다시 그를 들어올리더니 공중으로 거세게 던져올렸다.
도진은 순간 공중에서 정신없이 돌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돌고 있는 도진의 시선으로 땅과 하늘 그리고 꺼꾸러진 도시의 전경이 쉴새없이 지나갔다.
한없이 허공을 뱅글뱅글 돌던 중 그의 고개가 급격한 속도로 양 허벅지 사이로 떨어졌다. 정신이 번쩍 든 도진은 고개를 바짝 쳐들며 주변을 살폈다.
그는 버스의 좌석에 앉아서 한참 졸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부터 졸다니 운동을 무리했나 싶었다. 도진은 졸면서 꾼 꿈이 마치 생시와 같아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방과후 숙소로 돌아온 도진은 농 안에서 꺼낸 이불을 바닥에 깐 뒤 바로 누워 이불을 덮었다. 그는 머릿맡에 둔 휴대폰을 펼쳐보며 그날 날짜를 확인해보았다. 이불속에서 휴대폰 액정의 불빛이 쏟아져 나오며 도진의 얼굴을 비췄다. 그가 임연주와 첫인사를 한 날은 3월 10일 어제였다.
그는 언제부터 버스에서 꿈을 꾼 것인지 분간이 안 갔다. 오늘 3월 11일에 버스기사가 특장차로부터 들것에 실려나온 장면이 사실이라면 그 이후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수상한 자들에게 쫓긴 것은 꿈이란 말이 된다.
그런데 약간 이상한점이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했던 수상한 자들에게 추격당하는 꿈을 꾼 이후 자신이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도저히 그가 버스에 올라탄 기억을 떠올릴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점은 그날 그가 학교 수업을 들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그저 하루종일 꿈만 꾼 것 같았다.
상념에 빠져 있던 도진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도진의 숙소 식구인 이재진이 피로에 찌든 몰골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TV를 켰다.
코를 골며 자는 박도진에게 신경이 쓰이는 이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진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불을 덮고 있는 도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푹
순간 마치 터져버린 풍선처럼 도진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이불이 훅 꺼져버렸다.
놀란 이재진은 이불을 까뒤집었다. 역시나 도진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재진은 한참 멍한 시선으로 도진이 있던 자리를 응시하다가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헛것을 본것인가? 애초에 도진은 없었던 거지?'
그는 지나친 과로로 인한 일시적인 정신착란일 것이라 스스로 판단을 내렸다.
다음 날 아침 이재진은 옆에서 누워서 자고 있는 박도진을 의아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방을 나섰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6시경
저녁 6시경 하교길
해가 서산 언덕 너머로 기울자 서서히 회색 어둠이 밀려왔다. 임연주는 성남대학교 버스주차장에 주차된 여러 대의 버스들 가운데에서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난시 때문인지 사물이 흐릿한 그녀의 눈에 좀처럼 버스가 찾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여러 대의 버스의 번호판을 가까이에서 일일이 확인 한 그녀는 간신히 그녀가 타고갈 버스를 찾았다. 그녀는 버스의 맨 뒷 좌석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이마로 식은 땀이 흘렀다. 약간의 감기기운이 있는지 오한이 느껴졌다.
현재 유행하는 신형바이러스는 그 증상이 감기기운과 비슷했다. 정확히 식은땀이 흐르고 오열이 나며 온몸에 한기가 찾아 온다고 했다.
그녀는 저녁식사 후 바로 감기약을 복용했기에 별걱정을 하지 않았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여인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녀는 인터넷을 서핑하며 시간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사이트에 가장 강조되는 소식은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동북부 대진진에 관한 것이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의 동북부 지역에서 4천키로미터 떨어진 해수면 아래로 강도 8.0 이상의지진이 일어났다. 일본 동해를 강타한 지진에 거대한 쓰나미가 후쿠시마를 덮치며 도시를 휩쓸었다. 10미터 키를 훌쩍 넘은 해일은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를 연상케 했다. 어마어마한 쓰나미는 원전 1,2,3호까지 타격했다. 원전에 금이가고 결로가 생겨 방사성물질이 노출되어 일본전지역을 공포에 떨게했다. 하루종일 뉴스에서는 일본 쓰나미에 대해서 긴급보도를 하고 있었다.
또 다른 기사는 신형바이러스가 완전히 초토화 되고 국제기구 WHO에서 대유행의 단계에서 해제가 됐다는 소식이었다.
쿵
버스가 주차장 입구를 지나가다가 가로등을 받았다. 순간 임연주와 다른 탑승객들의 몸이 앞쪽으로 격하게 쏠렸다. 그녀의 머리가 앞 좌석 손잡이에 부딪히며 그녀는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버스기사는 버스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사의 얼굴에서는 전혀 당황한 표정이 읽혀지지 않았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고는 버스기사의 부주의로 도로 옆 가로등을 받으며 일어난 것이었다. 버스기사는 오른쪽 라이트가 깨진 것과 가로등이 약간 찌그러진 것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사는 차에 올라타며 놀란 학생들을 안심시켰다.
"많이 놀랬죠? 별일 아니니 걱정말아요."
휴대폰 액정에 작은 흡집이 생기자 그녀는 버스기사를 흘겨 보았다.
다저녁의 어두워진 도로에 가로등 불들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새로 옮겨진 임시검역소의 초소에서 안대철 중사는 검은 차 한대가 다가오자 지시봉으로 막아섰다. 검은 차가 멈추자 곧바로 운전석의 창문이 열렸다. 안중사는 그들에게 바이러스 검침을 실시 한 뒤 이상없음을 확인하고 그대로 보냈다. 검은 차가 떠나는 동시에 그의 휴대폰에서 메시지 한통이 날아왔다.
'특별지시사항?'
그는 묘한 표정으로 메시지의 상세한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차단된 바리케이트 앞에서 헌병이 붉은 조명이 번쩍이는 지시봉을 뱅글뱅글 돌리며 버스 앞을 막아섰다.
성남대학교 버스 기사는 속도를 줄이며 비상등을 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학교버스 노선 내에 없던 임시 검역소였다. 그 임시검역소가 그곳에 옮겨진 것을 보고 버스기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차를 세웠다. 그는 뒷앞문 앞에서 기다리는 헌병을 의식하며 자동문 손잡이를 아래로 제꼈다.
푸쉭
가스새는 소리와 함께 앞문이 열렸다.
헌병대 안중사는 찰찰거리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차에 올라타더니 경례를 붙혔다.
"잠시, 신형바이러스 검문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걸어오는 안중사는 오른 손에 쥐어진 탐지기를 들어 보였다.
차에는 버스기사와 임연주 외에 학생들이 셋이 더 있었다. 늦은 시각에 금요일이다 보니 수업 듣는 학생들이 적은 편이었다.
버스기사를 지나가는 탐지기에서 삑삑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버스기사는 약간 귀찮은 표정으로 투덜댔다.
"오늘 신문에 바이러스가 다 소멸됐다고 하던데 이게 무슨 봉변이람. 언제 또 검역소가 저기에 생겼다냐?"
헌병대 안대철 중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중을 훑어보더니 임연주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한 걸음을 딛일 때마다 들리는 군화 뒷굽의 요란한 소음이 여인의 달팽이관을 자극했다.
삑삑삑
요란한 탐지기 신호음이 여인 앞에서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탐지기 신호음에 맞춘 듯 그녀의 심장이 함께 쿵쾅거렸다.
안중사가 경례를 붙히며 굵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신형바이러스가 검출되셨습니다. 잠시 검역소에 들르셔서 백신을 접종하셔야겠습니다."
천장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전율처럼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자신이 신형바이러스에 걸릴 줄은 꿈에서도 꿔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조차 입밖으로 안 나왔다. 여인은 맥없이 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헌병이 몸을 돌려 버스에서 내리자 그녀도 약간 비틀거리듯 앞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버스기사가 그녀의 등을 툭 치며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했다.
"아가씨, 너무 겁먹지 말어. 별거 아니니까."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녀가 버스기사를 쳐다보았다.
"백신을 접종하면 되요. 자자, 어서 내려서 접종하고 와요. 다른 학생들도 집에 가야 하잖아."
여인이 차에서 내리자 버스기사는 안중사의 지시대로 버스를 차선 한 쪽에 정차시켰다.
"학생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갔다 올 테니..."
몇몇 안 되는 학생들은 기다릴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기사는 학생들이 내리자 차문을 닫고 열쇠로 버스 앞문을 잠궜다.
버스기사는 임연주가 임시 검역 센타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괜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저 탐지기를 믿을 수 있을까?'
임연주는 흰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착용한 한 남자 의사 앞에 섰다. 김영찬은 두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매우 이상했다. 마치 아는 사람을 쳐다보듯 했다. 김실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탄 그는 두 사람의 피를 체취에 재검사를 했다.
잠시 후 김병연 실장이 나타나 임연주에게 눈웃음을 치며 경계를 풀라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탐지기의 신형바이러스검출은 흔한 일이에요. 간단히 백신만 맞으면 되니까 잠시 동안만 시간을 내주시면 되요. 바이러스가 몸에 100퍼센트 침투해서 검열에 드러난 것이 아니고 단지 의복에서 검출만 되어도 탐지기가 작동합니다. 그래도 확실하게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예방 및 치료하는 것이에요."
김병연 실장은 옆에 서서 큰 신형 주사기를 들고 있는 김영찬 연구원에게 말했다.
"백신은 장착했는가?"
"네, 실장님"
"그럼 이리 주게."
실장은 주사기를 받아 들며 노란 액체가 가득한 주사기의 침을 여인의 왼팔에 깊숙이 꽂았다.
주사기를 뽑은 뒤 다시 김병연 실장은 빈 주사기를 김연구원에게 건넸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빈 주사기를 가져갔다.
버스기사와 여인은 왼쪽 팔을 문지르며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그녀는 흥분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인터넷이나 뉴스에 보면 백신을 맞고 미치거나 발작하는 사람, 자살충동으로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있다던데, 혹 잘못되는 건 아니겠죠?"
버스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던 기사는 그녀가 지나치게 걱정스러워하자 안심하라는 듯 대답해 주었다.
"그거야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이나 그렇지, 우리가 설사 감염이 안 돼서 백신을 맞았다 해도 별문제 없을 거야. 어차피 항 바이러스도 바이러스의 일종인데,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그것을 이기게끔 되어 있으니까. 흙 밭에 깔린 게 병균덩어리인데, 논밭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겠어? 의사들 말대로라면 그들은 벌써 병에 걸려 죽었어야 해. 오히려 그런 것에 노출 되어 있는 사람들이 병에 덜 걸린다니까. 바이러스다 뭐다 퍼지는 속도가 광범위해서 국가에서 저리 난리지, 알고 보면 별것 아니라니까."
버스기사는 어두운 도로를 불빛만 응시하며 버스를 몰았다. 그날 따라 눈이 침침하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여간 짜증스럽지 않았다.
"왜 이리 어지럽고 눈이 침침하지? 약 기운이 벌써 오나?"
빠앙
거대한 덤프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중앙선을 넘어 정면으로 달려오자 버스기사는 황급히 핸들을 꺾었다.
콰쾅쾅쾅
여러 대의 차량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버스좌석에 앉아 있던 연주는 급커브에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버스기사는 당황하지 않고 가까스로 갓길에 차를 세운 뒤 버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운전석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8차선 대로에 두 대의 차량이 부딪힌 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그는 버스 바닥에 넘어져 있는 임연주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예.”
“밖에 대형 사고가 벌어진 것 같아요.”
버스기사는 연주를 부축해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그때 버스기사의 눈앞에서 세개의 써치라이트가 번쩍였다. 버스기사는 눈이 부셔서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빛을 가렸다.
갑자기 대형덤프트럭이 돌진하며 커다란 범퍼로 버스기사의 몸을 밀고 나갔다. 덤프트럭 범퍼에 정면으로 부딪힌 그의 몸이 허공으로 튕겨올라 도로 밖으로 떨어졌다.
쾅
거대한 굉음 소리와 함께 덤프트럭은 버스에 곤두박질 치며 차체의 허리부분을 완전히 두동강 냈다.
연주는 그 놀라운 광경에 사지가 바르르 떨더니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순간 거대한 크기의 노란 불빛이 강렬하게 타오르며 주변을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다.
불빛이 지나간 자리에 사고차량들과 사람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언제 사고가 일어난 듯 휑한 도로에는 오직 가로등 불빛이 야간의 어둠을 밝힐 뿐이었다.
대형사고 목격자들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차 한 대가 성남의 태평동 사거리 주변 사고현장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린 세 명의 경관들이 주변을 돌며 실종된 차량들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한참 주변을 돌며 차량의 흔적을 찾던 경관들은 점차 지친 내색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실종사건의 단서가 될만한 단 한가지의 증거물 조차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관들은 아무런 단서나, 물증, 흔적도 없는 곳에서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박도진은 학과 수업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버스 매표소와 함께 설치된 대학교 버스기사 대기실을 들렀다. 마침 대기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며칠전에 그가 보았던 그 의문의 버스기사가 혹시 대기실에 있지는 않을까 싶었다. 대기실 벽에 붙은 달력은 그날이 3월 12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듯했다.
달력 옆에 버스기사 사진과 명단이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9911번 버스기사의 이름과 사진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름은 김덕수, 그의 사진을 보니 분명 며칠전 버스에서 본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김덕수의 사진이 골목길에서 보았던 들 것위의 남자와 일치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사밖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돌아온 듯 쾌쾌한 냄새를 풍기는 매표소 직원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여기는 어쩐일이시죠? 학생이 여기 들어오시면 어떻합니까?"
도진은 미안한듯 고개를 서너번 숙이며 그의 사정을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김덕수 버스기사님께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분의 버스에 제 지갑을 놓고 내려서 그 지갑을 받기로 했거든요."
나름대로 잘 둘러댄 변명이었다.
김덕수라는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버스 매표소 직원은 이맛살에 주름이 잡이며 탄식하는 소리로 말했다.
"그 기사는 어제 학교 버스를 끌고 퇴근해서 회사에 나오지도 않았어요. 알아봤는데,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더 군요. 일단 경찰에 신고는 해놨지만 경찰에서는 실종사고로 여기고 있답니다. 안타깝게도 지갑을 찾기가 어렵겠네요. 버스가 없으니 말이에요."
'그가 사라졌다. 실종 됐다는 말인가?'
도진은 며칠 전 수상한 차량에서 들것에 실려나오던 김덕수를 떠올리며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 그가 왜 비밀스러운 업무에 쓰이는 정보부의 차량으로 끌려들어간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왜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냔 말이다. 나를 공격한 사람들 정말 꿈이었을까? 어디까지가 꿈이고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간다.'
숙소로 돌아가는길에 근방에서 누군가가 자꾸 자신을 미행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계속에서 다른 길로 돌기 시작했다. 한참 그렇게 돌던 중 낯선 이의 미행을 따돌린 도진은 숙소로 들어갔다.
초저녁에 특별이 한것도 없이 피곤한 도진은 한 참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헤매다 잠에서 깼다. 도진은 옆에서 이재진이 그를 둥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 자신도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봐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그래?"
이재진은 말을 더듬으며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는 양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어디 갔다 온거야?"
"어디를 갔다 오다니...?"
박도진은 눈을 깜박이며 자신이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난 그저 꿈을 꾸었을 뿐인데..."
"무슨 소리야. 넌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재진이 다시 재촉하듯 물었다.
"그럼 도대체 무슨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꿈이 아닐지도 모르지. 분명 넌 완전 사라졌었으니까."
"내가 사라졌다고?"
"그래. 믿겨지지 않으면 다시 한번 해보든가."
박도진은 다시 한번 시도하라는 이재진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니 그의 의도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꿈속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희미한 기억의 잔영 속에 버스와 검역소가 어렴풋이 보일 듯 말듯 했다. 그의 꿈속에서 그는 검역소에서 어떤 일을 거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사라졌다. 이재진은 큰 두 눈으로 그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박도진은 어두운 공간에서 홀로 서있었다. 창밖으로 간혹 노란 차량 불빛이 실내의 광경을 비추고 지나갔다. 불이 꺼진 검역소의 내부에는 병원 기구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통로 사이에 서 있는 그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재진은 두 눈으로 박도진이 사라지는 것을 똑똑이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그와 같은 현실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잠시 후 사라졌던 박도진이 나타났다. 그것도 이재진이 눈을 깜박한 사이에 이불속으로 박도진의 몸뚱아리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박도진은 다시 이불을 걷어 내며 상체를 일으켜 이재진을 쳐다보았다. 이재진은 도진의 눈빛을 보고 순간 기겁하여 눈물이 핑돌았다.
"너, 넌 도대체 뭐냐?"
"내, 내가 뭐긴..."
다음 날 아침 이재진은 눈을 뜨며 전날 밤 박도진이 행했던 도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은 채 숙소 밖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