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學古人-옛사람을 안 배우면 法無一可-볼 만한 게 하나도 없고 竟似古人-옛사람과 똑같으면 何處著我-어디에도 내가 없다 字字古有-옛날에도 있던 글자 言言古無-하는 말은 다 새롭네 吐古吸新-옛것을 토해 새것을 마심은 其庶幾乎-그리해야 않겠는가? 孟學孔子-맹자는 공자를 배우고 孔學周公-공자는 주공을 배웠어도 三人文章-세 사람의 문장은 頗不相同-서로 같지 않았다네. 亦學舊物-옛것도 배우고 亦造新物-새것도 만들어야지 청(淸) 원매(袁枚) 속시품(續詩品)
남의 것을 따라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인가 !?
위의 글쓸 제목을 써 놓고 필자 스스로가 -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주체성 없게 남을 따라하다니- -남의 좋은 점을 따라 하는 것은 역시 탁월(卓越)한 생각이야 많은 학자들이 창작(創作)은 없다고 했잖아- 이글도 남의 것 읽고 쓰는 것이잖아 혼자 묻고 대답하고 혼자 웃었다.
고대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법치주의자(法治主義者) 한비자(韓非子)의 책 외저설(外儲說)의 좌상편(左上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정인매리(鄭人買履)”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정인매리 (鄭人買履)-성격이 매우 곧고 융통성이 없음을 이르는 말.
▶鄭縣人卜子使其妻爲褲 정현(鄭縣)이라는 마을에 사는 복자(卜子)라는 사람이 아내에게 바지를 새로 만들어 달라하였다
其妻問曰 今褲何如? 그 아내가 남편에게 “이 번 바지는 어떻게 만들까요?”하고 물었다.
夫曰 象吾故褲」 남편(男便)이 말하기를 “내가 입고 있는 헌 바지 모양(模樣)으로 만들어 주오” 하였다.
妻子因毁新 令如故褲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새 옷감을 일부러 때를 묻히고 구멍 내고 돌에 문질러 헐게 만들어 낡은 바지로 만들어 주었다. 전에 입고 있던 바지와 같이 만든 것이다.
▶酒者 先由長者而後年少者相隨而飲爲禮也 술은 어른이 먼저 마신 후 젊은이가 따라마시는 것이 예의다 노(魯)나라 젊은이가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셨다. 어른이 술을 마시다가 속이 불편했는지 토했다. 예의 바른 젊은이가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따라 토했다.
또 다른 젊은이도 배우기를 즐거워했다. 어른들이 술잔을 남김없이 비우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주량(酒量)도 생각하지 않고 어른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가 쭉 뻗어 버렸다. 배우려는 열의는 가상했지만 배워야될 것 배워서는 안될 것을 구분못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중 하나인 “서경(書經)”에 쓰여 있는 글중에 紳之束之(신지속지)라는 글이 있다. 묶고 또 묶는 뜻이다 무슨 일을 할 때에 단단히 실수 없이 하라는 강조의 말이다. 송(宋)나라 사람이 허리띠를 묶은 위에 하나를 더 덧대어 이중으로 매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여보 그게 웬 꼴인가?- -자네는 서경(書經)”에 쓰여 있는 글중에 紳之束之(신지속지)라는 글도 모르는가 묶고 또 묶으라는고 한말도 모르는가?-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에 “정인매리(鄭人買履)”라는 고사(故事)가 있다 고대 중국 정(鄭)나라 사람이 신발을 사러 장에 갔다. 발에 잘 맞는 신발을 사기 위해 집에서 먼저 발 치수를 쟀다. 막상 장에 갈 때는 치수 적어둔 종이를 깜빡 잊고 집에 둔 채 나왔다. 그가 신발 장수에게 말했다. "여보게! 내가 발 치수 적어둔 종이를 깜빡 두고 왔네. 내 얼른 집에 가서 가져옴세."
그가 바삐 집으로 돌아가 종이를 가지고 시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발 장수는 이미 가게 문을 닫은 뒤였다. 곁에서 보던 사람이 물었다. "어째서 직접 신어보고 사는 것이 더 정확하질 않소?" "자로 잰 치수는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정인매리(鄭人買履), 즉 정나라 사람이 신발 사는 이야기다.
곧이곧대로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제대로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직접 신어 볼 생각은 없고 맨날 치수 적은 종이만 찾다 보면 백날 가도 신은 못 산다. 지금 TV나 신문에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들이 나랏일 하는 꼴이 맨날 이 모양이다. 정치인들 믿었다가는 맨발로 이 추운 겨울 속에 신발없이 살 것이다.
▶중국 명(明)나라 때 양명학(陽明學) 사상가인 이탁오(李卓吾)가 한말이다. 수폐전견(隨吠前犬)-앞서 짖는 개를 뒤에 있는 개가 따라 짖는다 앞사람이 무얼 하는지 모른 채 무작정 따라하는 버릇을 말한다 이재명을 따라가는 민주당과 개딸들 같다.
因前犬吠形(인전견폐형)-앞에 있는 개가 뭔가를 보고 왈왈 짖으면 亦隨而吠之(역수이폐지)-나도 따라서 왈왈 짖었다
요즘 한국 정치와 국민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좌파(左派)쪽으로 좌르르 우파(右派)쪽으로 우르르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남의 것을 열심히 ㄸ라하고 모방(模倣)하여 살아왔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을 모방했다 일제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을 모방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미국을 모방했다 우리나라 산업은 전반적으로 “따라하기”에서 발전되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후 이 나라는 산불난후의 산 같은 황폐 그 자체였다 선풍기 라디오 하나 만들지 못해서 일본에 굽실굽실 구걸을 하여 도면(圖面)을 사다가 만들었다 필자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그나마 “따라하기”를 잘해서 지금 세계 10위 경제 국가가 되었다
따라하다가 “쪽팔림”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던지 도면대로 샘풀을 만들지 못한다고 비양거리는 일본 기술자를 두들겨 패서 회사로부터 1개월간 출근도 못하고 월급도 안 오르는 벌을 받은 적도 있었다. 너무 따라 하다가는 결국에는 스스로도 “쪽팔림”을 모르게 둔해져 버린다. 이것은 불치의 병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트럼프딸 이방카가 왕년의 세계스타 오드리 헵번이 입은 드레스와 꼭 같이 입고나와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있다 필자 보기에는 예쁘게 보이던데 사람 눈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농월
아래 신문기사와 사진을 올린다. ▶오드리 헵번 드레스 입은 이방카…"100% 모욕" 싸늘한 반응, 왜 중앙일보 2025.01.24 영화 ‘사브리나’의 오드리 헵번(왼쪽)과 지난 20일(현지시간) 대통령 취임 무도회에 참석하고 있는 이방카 트럼프. 사진 유튜브 캡처,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트럼프가 20일(현지시간) 열린 대통령 취임 무도회에서 선보인 드레스에 대해 싸늘한 현지 반응이 나왔다.
이방카는 이날 배우 오드리 헵번(1929~1993)의 영화 의상을 재현한 드레스를 입고 취임 무도회에 등장했다. 영화 ‘사브리나’(1954)에서 헵번이 착용했던 지방시의 드레스를 그대로 차용한 의상이었다. 상의는 몸에 딱 붙고 스커트는 넓게 퍼지게 해 빈티지한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드레스다. 검은색 꽃 자수로 여성미를 더했다.
이방카 트럼프(오른쪽)와 남편 재러드 쿠슈너가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두 번째 대통령 임기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방카는 헵번과 마찬가지로 올림머리를 하고 팔꿈치 길이의 검은색 장갑, 스틸레토 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착용했다.
이 드레스는 명품 브랜드 지방시에서 이방카를 위해 맞춤 제작한 것이다. 영화 ‘사브리나’ 속 헵번 의상은 지방시가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방카가 헵번의 드레스를 차용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왔다. 미국 패션 매체 글래머에 따르면 ‘사브리나’에서 헵번의 드레스는 노동자 계층의 딸이 상류 사회의 중심인물로 변신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성을 ‘금수저’ 이방카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비판이다.
매체는 “이방카는 1950~60년대 여성미를 강조하면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미학에 호소하는 듯했다”며 “다른 참석자들이 착용한 노골적인 의상과는 대조를 이루긴 했지만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라고 평가했다.
또 야망으로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 신화에 기반한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메시지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방카가 노동자 계층의 딸을 연기한다는 건 지나친 설정이라고 매체는 지적했다. “부유한 배경의 그녀가 헵번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옷을 선택한 것은 시대와 메시지의 불일치를 드러낸다”며 헵번이 영화에서 표현한 신데렐라 스토리와 이방카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헵번의 생애를 알고 있는 팬들은 더욱 분노했다. 헵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군에 저항하는 네덜란드 저항군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인류애와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다. 은퇴 이후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인권운동과 자선 활동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코망되르를 받았고 1992년에는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 ‘20세기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로서만이 아니라 유니세프 활동가, 박애주의자였던 그는 스위스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1993년 1월 20일(향년 64세) 사망했다.
트럼프 행정부와 관련된 논란 속에서 헵번의 유산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치게 부적절한 선택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논란이 일자 헵번의 장남 숀 헵번 페러(64)는 영국 데일리메일에 “돌아가신 어머니에게서 영감을 얻어 우아함과 품격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어머니의 정치 성향은 트럼프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유니세프 대사였던 어머니는 태어난 이념적 환경과 관계없이 전 세계의 권리를 박탈당한 어린이들을 대신해 싸웠다”고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는 “이건 헵번에 대한 100% 모욕이다” “헵번은 배우가 되기 전 이방카의 아버지가 추구하는 정치 운동에 반대하는 인사였다” “헵번은 이방카의 인생과 완전히 다르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것” 등의 글이 올라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