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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통 심양 (Shen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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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자유 게시판 스크랩 한국인의 무지와, 영리한 캄보디아공항관리
정보바다 추천 0 조회 281 07.03.31 08:25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인의 무지와, 영리한 캄보디아공항관리


비자란?

査證이라고하는 비자는

국가상호간에, 국경을 통과할수있는 증명서로

엄격하게 발급하는나라와, 형식상 발행하는 나라등등이 있는데.....

 

엄격한나라의 비자발급은,

타국방문자가 사전에,자국 대사관에 신고하면, 입국자격을 심사하여,비자를발급하는데

 

처음 캄보디아를 방문하면서

캄보디아여행을 주선한 여행사가

캄보디아에 도착하여 비자를 발급받으라고.....하며..

Tip :

       1.  사진1매 (정상)

       2.  비자값은 20불에,(정상)

       3.  팁 5불을 주면, 만사해결(비정상)

       ※  솔직히, 5불이라는, 이말의 뜻을 잘모른 상태에서 출발함

비자없이 출발할때에, 형식상 발급하는 나라로 인식하고 출발하였는데.....

 

이런경우, 국제여행을 다녀본 분들은 잘아시겠지만...

1. 뱅기가 공항에 도착하고, 입국수속장으로 가면

2. 입국수속장 옆에, 비자발급처가있음

3. 비자발급처에서 비자발급받고 ( 형식적으로 비자발급함)

4. 준비된 입국서류양식에, 비자번호를 적고

5. 입국수속을 마친뒤

6. 개인화물을 챃은후,......각자 목적지로......

 

허!허! 통재라!

입국수속장에 비자발급처가없는 나라여.......

아!  캄보디아여..........

웬, 브러커가와서......여권과, 돈 (20불+5불=25불)을 달라고 손내미는 나라여......

그유구한 역사속에서.......

그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캄보디아여........

세계의 불가사의 유산을 보유한 캄보디아여.......어쩌다가...이꼴이되었는고?

 

죄송합니다

캄보디아여..............

지금부터 저의 윗글을 수정하겠읍니다

입국수속장옆에 비자발급처가 없는것이 아니라.....분명히 있읍니다

뿐만아니라, 여행객들의 편리를위해, 7명이 대기하고 있읍니다

 

헌데, 비자발급처라는 팻말이 없읍니다

왜 없을까요?

너무적게 써서, 제가 못본것일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없읍니다

그런데, 왜 없을까요?

그것은, 한국인의 무지를 이용한, 캄보디아공항관리들의 영리함입니다

 

한국인이라는

맛좋은  먹이가있는데, 영리한 관리가 머리를 안쓰면, 그것이 이상하지 않을까요?

 

동남아 여행을 다녀보면(태국,말레지아,중국,베트남,캄보디아등등)

여기가 한국땅인지? 외국땅인지? 구분이 안갈정도로....

한국사람들이 넘쳐납니다

 

동남아 대부분 나라들은 우리보다 못삽니다

돈많은 한국분들이 여행다니는 작태들을 분석하면......

 

첫째로, 상대국을 멸시합니다

화장실이 어떻고....집이어떻고.......음식이 어떻고....의복이 어떻고......

생활수준이 어떻고.........

 

모든것을 자신이 가진거와, 비교검토하면서...흉봅니다

 

자! 그럼, 우리의 모든것이, 풍요하여진것이 언제인가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풍요는, 역사가 짧은 풍요입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는, 그들과 똑 같았읍니다

 

그렇게 풍요하다고 자부하는, 우리 여행객님들이요......

입국 / 출국 신고서를 작성할줄압니까?

비자가 무었인지 아십니까?

여권번호 / 비자번호를 분별할줄 아십니까?

여행객이 그런것도 모르면서.....그럼 아는것이 무었입니까?

 

그런것은,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구요.....

돈이면, 빨리빨리 해결할수있다구요........

 

여러분들이 우습게아는 나라의 사람들이......

빨리빨리를 한국말로 외치면서....당신을 비웃는것을 아는지요......

 

한국인의 빨리빨리근성을 알고, 졸부의 티를내는..........한국인들을 상대로.....

비자처간판을 감추고, 5불을 더받아내는 캄보디아인들은........캄보디아인들의 그영악함은........

오래지않아....한국을 능가하는 경제대국이 될것입니다

 

그런데, 캄보디아공항관리인들이여.........

한국인은 비자처 팻말이 있어도 소용없읍니다

왜냐구요?

돈은 조금있고, 머리에든것은없구요.....빨리빨리하고는 싶구요.....

그러니,....비자처 팻말이 필요가 없읍니다

5불이 아니라,10불이라도,.......돈주고 나갑니다

한국에서, 비자만들어도......10불이상의 경비가 소요됩니다

그러니......많이많이 받으세요

 

단지,저같이,돈없고,빨리빨리 나갈 필요가없는 사람을위하여.....

비자처 간판을 달으세요

당신들 돈벌이하고는 무관합니다

안달고,욕먹을 이유가 어디에 있읍니까?

현명한 당신들을위하여 한마디하였읍니다

 

캄보디아여.....

그 수많은 외란/내란의 고초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캄보다아여.......

그 옛날의 영화를 다시한번 꽃피우기를 기원합니다

 

 캄보디아 입출국 신고서

 

 

입출국 서류. 입출국서류.
 

 

랑거와 요니

다산을 의미하는 랑거와 요니.
 

찬란한 문화를 삼키며,기생하는나무들

찬란한 유적과, 기생하는 나무.
 
수상촌생활속에서도, 강아지를 키우는 여유가....
선상에서 키우는 강아지.
 
문화관광지에서도 키우는 여유로움, 날씬한 닭과,병아리들
날신한 닭.
 
먹음직스러운 음식문화
현지 요리.
 
국민들의 순박함과,
여유스러모습은
영원히 기억될것입니다
캄보디아여 영원하라!
 
좋은소리 : 韓 時 光 拜上
.....................................................................................................
 
캄보디아 여행객을위한  기본정보
 
위성지도로 본 캄보디아
캄보디아 위성지도.
 
 
캄보디아 국기
 
 
3색기며,
 3개의 탑이 있는 앙코르와트의 절을 표현
 
 
 

위치  :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남서부
수도  :  프놈펜 (Phnom Penh)
언어  :  크메르어
기후  :  열대 몬순기후
종교  :  불교 90%
면적  :  18만 1040㎢
정치  :  입헌군주국
인구  :  1980년대말까지만 해도 약 700만명에 불과하였으나
            3% 정도의 높은 자연증가와 외국에서의 유입으로, 1998년 기준통계로 1130만명

          2005년 7월 추정 : 13,607,069명

 

역사 선사시대

        캄보디아 북서부의 “롱 스팬” 지방에서
          BC 4천년 전부터 살았던 흔적을 발견 했다고 한다. 

        

       ADI-8세기
         캄보디아의 조상인 크메르(Khmer)인들은, AD 3세기에 외부에는 “후난”으로 알려진 국가를 형성하였다.
         1AD 초기에서 5세기까지의 기간 중에는 인도문화가 후난에 많은 영향을 주어 힌두교가 전례 되었고
        산스크리트(Sanskrit)어를 사용하다가 지금의 크메르어가 되었다.
        당시에는 왕정제도, 법률,천문학, 문학 등을 모두 인도문화에 따랐다고 한다.

    후난의 건국신화
    6세기경 내분으로 후난은 내륙지방으로 도읍을 옮기고
    첸라국(AD 627-820)이 탄생되어 200년간 통치영토를 넓혔다.
    8세기경에 “첸라”국이 위 첸라와 아랫 첸라로 분열되었다가
    아랫 첸라는 멸망하고 윗 첸라 가 번성하게 된다.
     
    앙코르 시대(9-15세기)

    앙코르는 802-1432년 사이에 번성했던 제국이다.

    앙코르 제국의 멸망
    전성기의 Angkor 제국은 동남아시아의 대부분,
    특히 인도차이나 남부지역과 말레이반도, 카오 프레야(Chao Phray)평원까지 국가를 확대하였고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고고학적 유물로 유명한 앙코르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무리한 건설공사, 운하의 빈번한 사용 및 수리 부족, 전쟁 또는 전염병으로 인한
    급격한 노동력 감소 등으로 앙코르 제국은 15세기에 멸망하였다 예측하고 있다.

    15세기 중반인 1431년 태국의 야유타야족에 의해 앙코르는 점령되었다.
     
    스페인이 캄보디아에 2점령한 1596년에는
    1599년 스페인 주둔군을 몰아내었다.
    1600년부터 1863년 프랑스가 캄보디아에 상륙할 때까지
    263년 간을 크메르왕국은

    태국과 베트남의 패권 싸움에 침략 당하는 종주국으로 전락한다.

    17세기에는 베트남 구엔 왕조의 침략을 받아 메콩텔타지역을 빼앗겼다.
    이후 메콩 텔타에 베트남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베트남의 영토로 만들어버렸다.
    현재에도 이 지역의 소유권문제로 분쟁이 되고 있다.

     

    근세
    Norodom 국왕은 1863년 프랑스와 상호협정을 체결하여
    근접국으로 부터의 침략에 대비하려 하였으나
    프랑스의 식민통치는 캄보디아 근세정치발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크메르 국왕들이 원한 것은 정치적인 보호였으나
    프랑스는 하노이에 기반을 둔 거주민 총영사가 지배하는 인도차이나 연합에 캄보디아를 흡수시켰고
    불어를 하는 베트남인들로 주로 구성된 관리들에게 지역을 통치시켰다.
    또 세제수입은 캄보디아보다는 베트남남부 지역에 있는 코친치나(Cochincina)에 주로 투자 되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에서 그들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고무와 수수재배를 독려하였다.

    프랑스는 전략적으로 영국과 태국의 세력을 견제하는 완충지대로서 캄보디아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또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위해

    중앙 집권화, 형법 개정, 경찰제도의 근대화와 군대에 신식 훈련을 시켰다.

     

    1941년 프랑스는 2차 대전으로 독일에 패하였고 캄보디아에는 비시(Vichy)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동남아는 일본의 세력이 강세를 보이고 있을 때였다.
    일본의 압력으로 노르돔 시아누크는 왕권을 찾이 하였다.
    당시 캄보디아에는 민족주의세력, 왕정복고세력과 공산주의세력이 대두되고 있었고
    시아누크와 손 녹 탄이 그 리더였다.

    일본은 탄의 반 프랑스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반 시아누크 프랑스 폭동을 사주하였으나 탄은 패배하여 일본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1945년 3월 9일 일본은 프랑스 수비대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탄은 일본에서 돌아와 수상에 취임하고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천명하였고,
    시아누크는 프랑스와 연계하여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당시 프놈펜에서는 왕당파와 반왕당파 간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나 탄은 체포되어 프랑스로 압송되었다.

     

    1947년 헌법이 공포되었고,
    국회는 하원인 국민회의와 상원인 왕국회의인 4년 임기의 양원제가 시작 되었다.
    캄보디아가 프랑스 식민통치로부터
    1953년 완전히 독립할 때까지 시아누크왕은 절대권력을 유지하였다

     

    캄보디아의 독립
    캄보디아는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시아누크공(Norodom Sihanouk Prince)을 주축으로
    1955년 '인민사회주의연맹 (People's Socialist Community)'을 결성,
    왕정사회주의와 대외 중립을 유지하면서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였으나,
    1963년 무역 및 산업의 국유화 법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주의 건설을 기도하고 1963년에 월남과 단교하였다.

    1965년 초에는 베트공을 추격하던 미국전투기가 캄보디아 영공을 침입하자
    1965년에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당시 미국과 월남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월맹군에
    보급로 제공 등 측면으로 지원하면서부터 20여년에 걸친 장기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론롤정권
    베트남과의 전쟁 마지막 해인 1970년 3 월 22 일 소련을 방문 중이던 시아누크는
    미국의 사주를받은 그의 심복 론롤에게 구테타로 정권을 빼앗기게 된다.
    론놀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직업군인으로 미국의 도움 하에 구테타를 이르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시아누크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방랑객으로 전락하게 된다.
    미국의 비호 하에 론놀은 왕정제도를 폐지하고
    친왕파와 공산주의자들을 검거 처형함으로써 국민의 정서를 거스르게 된다.
    망명중인 시아누그는 크메르 루즈와 손을 잡고 론놀 정권에 대항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론놀 정부에 위협을 느끼고,
    보급로를 잃은 월맹은 월남과 캄보디아를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북동쪽 산악지역은 월맹군에 점령 되고,
    크메르 루즈군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부 지역과 남서부의 산악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미국정부는 미국의 동맹 세력인 론놀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캄보디아를 공격하고
    6개월 동안 농촌지역에 대해 폭탄 투하하기도 했다.

    1973년 미국은 베트남 철수 직전에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크메르루즈 거점과 월북의 거점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대규모 폭격을 가하였다.

    이때에 행한 무자비한 폭격으로, 애매한 캄보디아 양민만 희생을 당하였는데
    통계상으로는 15만명으로 나와있으나,
    실제로는 50만명 이상의 캄보디아 양민이 이 폭격으로 인해 희생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사실일경우
    폴 포트의 양민 학살에 버금가는 국제범죄 행위로
    미국이 언젠가는 캄보디아에 갚아야 큰 빛으로 남게 된다.

    폭격 등으로 인해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극도에 달한 캄보디아인들은
    크메르루스 쪽으로 가담하게 되고,
    미국의 엄청난 군사 및 자금지원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론놀정권은 패망을 맞게 되어,

    월남군 패망 13일 전인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은 크메르 루즈군에게 함락 된다.

    폴 포트는 국호를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로 바꾸고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대를 열어간다.
    폴 포트 정권은 기존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인 틀을 뿌리 채 개조하고자 하였다.
    1976년 공표된 새 헌법은 캄보디아를 노동자-농민의 혁명국가로 선언하였다.
    그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극단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통해 강조되었다.
    그는 미국과의 외교단절 그리고 강력한 국가 통치 경제체재를 통해서
    모든 산업의 국유화 및 집단주의 그리고 화폐경제의 철폐를 시도하였다.
    폴 포트(Pol Pot) 정권은 자급자족,
    농업 현대화 및 산업에 있어서의 기술개발을 기치로 내걸고
    국민들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 대규모 농업협동조합이나 산업체에 종사하도록 강요 하였다.
    외부원조나 천연 자원 없이 식량잉여나 제조상품을 생산하려는 캄보디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

    수 천명이 영양부족과 과로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수 천명이 정당의 정책을 비난하고 불복종한다는 미명하에 숙청되었다.
    폴 포트는 세계최대규모의 국민 소개계획을 집행하여
    프놈펜의 모든 거주자를 지방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그 이후 폴 포트 통치 4년간 전국민의 1/3가량 되는 200만 명이 처형, 고문, 기아 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
    1.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학생,

    2. 안경을 쓴 사람,
    3. 손에 못이 안 박힌 사람,
    4. 외국서적이 있는 사람,
    5. 양담배를 피웠던 사람 등은 부르주아로 분류되어 처형되었으며,
    6. 국내에 있던 외국인들과 월남인들도 간첩의 협의로 모두 처형되었다.

    폴포트가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r)' 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캄보디아는 공산화 되었으며 베트남과의 국경분쟁이 격화되었다.
    19세기에 빼앗긴 메콩 텔타를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에 대하여 무모한 산발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에 격노한 베트남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공산 베트남의 침공과 괴뢰정권 수립
    1978년 12월 건기가 시작되고 땅이 마르기가 무섭게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하였으며
    1달만인 1979년 1월 프놈펜은 함락되고
    민주캄푸치아 정부와 군대는 베트남에 패해 밀림으로 도망가고
    새로운 캄보디아 공산정부가 1979년 1월 베트남에 의해 프놈펜에서 수립되었다.
    베트남의 공격 때에는 과거 포로였던 캄보디아출신이 많은 베트남 남부군을 대량 투입하였다.
    그 중에는 폴 포트의 학살 행위에 반대하여 베트남으로 탈출하였던
    “행 산림”과 “훈센”(지금의 수상)이 있었다.

    중국과 베트남의 전쟁이 이때 발생 하였다.
    폴포트 정권이 베트남의 침공으로 밀림으로 도주하자
    당시 크메르루즈의 일개분파였던 헹삼린파가 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괴뢰정권 "캄푸치아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 : PRK)" 을 수립하고
    베트남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 베트남군의 주둔을 합법화하였다.
    괴뢰정권의 “행 삼린”이 총비서로서 통치하게 된다.

    외곽 지역으로 밀려난 크메르 루즈군은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망명정부가 중국의 도움으로 UN의 의석을 고수하며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았다.
    미국 등 서방세력도 망명정부를 지원했다.

    크메르 루즈군의 은신처인
    태국국경 근처인 파아린 지역은 보석, 원목의 원산지로 많은 군사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시아누크, 폴포트, 손산(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 결성)은
    개별적으로 반”헹 삼린”활동을 벌이다가
    1982 년 '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반정부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1987년에는 태국국경에 수십개의 난민촌에 25만명의 난민이 모여 들었다.
    국제적인 압력에 힘입어 캄보디아 내전이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보게 된 것은
    1987년 9월 헹 삼린 정부의 '국가화해정책'의 선언에서부터였다.
    동 발표가 있은 직후 시아누크와 헹삼린 정부의 훈센 총리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캄보디아 평화정착을 위한 회담'을 가졌으며
    1989년 4월 수상 훈센은 캄보디아 자치단체 (SOC: State of Cambodia)를 결성하고,
    1년 후에는
    지금의 제1여당인 CPP (Cambodia People’s Party) 로 이름을 바꾸고 정당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9년 9월 베트남군 10만명은 10년 8개월 만에 캄보디아에서 완전 철수 하였다.

    1990년 9월 자카르타 비공식회의에서
    캄보디아 정부 및 분쟁 3개파의 과도정부로서
    국가 최고평의회 (SNC-의장 시아누크)의 구성을 합의하였다.

    UN의 개입으로 선거가 93년 5월 실시되었으며
    이에 따라
    FUNCINPEC (120석 중 58석 획득), CPP (51석), Buddhist Liberal Democratic Party(10석)가
    연합한 임시정부(National Provisional Government)가 발족되었다.
    크메르 루즈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대신 게 릴라 활동을 지속하였다.

     

    캄보디아왕국의 탄생
    93년 9월 21일 국회는 캄보디아 왕국의 새로운 출범을 승인하였으며
    최고국민회의와 UNTAC하의 과도기간이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혼란과분쟁속에서, 1997년 7월 4일의 내전이 발발하는등....
    “우리는더 이상 크메르 루즈가 아니다.
    베트남의 꼭두각시인 훈센과 CPP을 상대로 싸우고 정권을 회복하겠다”
    “손센”이(폴 포트정권시절의 문교부장관)
    프놈펜 정권과 내통한다는혐의로 파일린에서 전가족이 몰살당하였고,
    폴 포트가죽자 크메르루즈군의 세력이 약화되기시작할무렵

    파아린의 앵사리는
    키우 삼판과 그외 크메르 루즈 가두들을 훈센정부에 투항시켰고,
    훈센정부는 이 노장들을 파일린에서 편히 살수 있게 배려하였다.
    한편 크메르 루즈 군대와 FUNCINPEC당의 군대는 정부군에 편입 및 해산 시켰다.

    이리하여
    캄보디아는 모든 내전을 종식하고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되었다.
    크메르 루즈 학살 주동자들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을 요구하는 UN가입국과 미국에 대해

    훈센은 국내문제라고 캄보디아내에서 재판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크메르 루즈의 실질적인 지원자였던 중국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방해하고 있다.
    이 재판에는 중국정부 및 여러 고위 관계자가 불편하게 연계되어 있어
    재판이 공정하게 열릴 경우 20세기에 역사의 장을 가름하는 재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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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3.31 08:57

    첫댓글 본인이나 잘하세요

  • 07.03.31 09:49

    참 재밌게 댓글 다시네요...

  • 작성자 07.03.31 11:40

    예.....잘알았읍니다.....시정하겠읍니다....혼자 열심히 잘하겠읍니다...충고,감사합니다

  • 07.03.31 09:53

    좋은 글입니다.자주 외국에 나가는 사람들이야 그런것들을 알겠지만 첨나가는 사람들...특히 아줌마부대,단체 관광객들...영어로 자기이름도 못쓰는것은 어쩔수 없다지만...눈치라도 있어야 되는데 미련 떨어서 손해볼 필요는 없지요...

  • 작성자 07.03.31 11:51

    우스겟소리 한마디 : 입국신고서에, 한국주소란이있는데.....영문으로 표기하라나?....옆분이 어떻게 쓰면되냐하시기에?....주소 먼저적고....개발/닭발을 영문으로쓰고....seoul적고,...korea를 쓰세요하니.....한국말로 개발/닭발을 쓰나요?하면서...반문하는데.....님들은 저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나요....굼굼

  • 07.03.31 20:34

    정보바다님께서 정확한 표현을 하셨네요....한국인들한테는 앞에서는 절절 매는것처럼만 행동을 하기만 해도 절반은 상대방을 속이는데 성공했다고 볼수 있지요...물론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요....하여튼 깊이 새겨둘만한 내용입니다.

  • 07.04.01 09:14

    오해살 수 있는 비빔밥님의 무례한 댓글에 정보바다님의 절제된 댓글 ~ 캬~ 역쉬 정보바다님의 아주 크게 이긴 한판승이었습니다,, 정보바다님 보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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