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門下) - 황형철
손바닥만 한 마당에 남새밭이 생겼다 연필만 잡아본 손으로 언감생심 고랑이나 멀뚱히 바라보다가 농부는 농사를 짓고 나는 시를 지으니 꼭 다르기만 한 업종은 아니어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은근히 붙기도 했다 샛노란 배춧잎의 은은한 단맛을 알아 벌써부터 헛침이 돌고 이파리가 자라며 잔잔히 허공을 밀면 마당은 나만의 작은 파도로 출렁이니까 멀리 바다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정작 기대하는 게 따로 있는데 무슨 셈이 있어서보다는 약 같은 거 칠 생각도 없이 생각나면 한 번씩 들여다보면서 민달팽이 배추흰나비 내게는 해로울 게 없는 벌레들이 놀라운 식성을 발휘하여 만든 구멍이 신기하고 궁금한 것이다 진짜 농부가 본다면 끌끌 혀를 차겠지만 어머니라면 두둑에 콩이라도 키워 놀리는 땅 하나 없겠지만 벌레들 문하에 들어서라도 송송 구멍을 내는 기술도 좀 익히고 그것들 한데 모아 싯줄로 엮고 싶은 거야 내 오랜 공부도 실은 세상을 둥글게 만들어 숨을 틔워주려는 일이니까 벌레도 나도 하등 다를 게 없으니까
ㅡ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2023, 11월호) ********************************************************************************************* 그제 오후에 텃밭에 나가서 석달 햇살경을 읊은 배추 반접을 뽑아왔습니다 올해 배추 농사는 예년과 달리 튼실한 겉모습과 달리 속이 덜찬 게 많더군요 아무래도 네 가구 겨울나기에는 모자랄 것 같아 어제 오일장에서 반의반접을 더 샀습니다 소금물에 절이고, 김칫속 만들 재료 구하느라 장터를 몇 바퀴 더 돌았습니다 생애에 한번도 김장을 담궈본 적이 없는 아흔다섯 장모님은 자꾸만 들락날락하는 큰딸이 안쓰러운지 날씨가 춥다는 것만 안타까워 하십니다 사람은 자연의 문하에서 삶을 배우고 깨우칩니다 민달팽이가 붙은 배춧잎을 떼어내면서 아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스스로 하수구에 던져버립니다 어제부터 모시고 다니면서 김장준비를 도운 나는 사랑방에서 창문 너머로 힐끔거릴 뿐입니다 결혼하고 48년을 아내 문하에서 보고듣고 깨달은 공부가 가족들 숨통 틔우기였나 봅니다 문학에 골몰한다고 자부했지만 고작 일곱권 시집으로 세상에 숨통을 틔울 순 없었고 열두 가족들도 그닥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늙바탕 일흔줄 넘긴 나는 '아이고'만 중얼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