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를 만나러 간다
화로 앞에 쪼그려 앉아
커다란 솥을 돌보는 순이
불이 꺼지지 않게 장작을 먹이고 부지깽이로 불을 긁고 뒤적이고 그 속에 뭐가 있는 것처럼 불구덩이 들여다본다
솥 안에 든 것이 푹푹 삶아지는 동안
솥 밖에서 내가 군침 삼킨다
솥뚜껑을 열어젖히면
내내 갇혀 있던 무서운 이야기가 무럭무럭 풀려나고 그건 언젠가 순이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끔찍해서 자꾸 틀어막게 되지만 듣는 걸 멈출 수 없는 이야기다 더는 없는 순이를 내가 자꾸 만나러 오는 것처럼 그러니까
옛날 옛적에
집집마다 순이가 많았어요
순하디순하게 살라고 붙여준 이름
한 솥에서 난 것처럼 비슷해 보이지만
정을 주면 모두 달랐어요
나의 순이
마을 어귀까지 뛰어갔다가 뛰어서 돌아왔어요 영영 돌아오지 않는 순이를 기다리다 쇠사슬에 묶인 개에게 순이의 이름을 나눠줬어요 눈 내리면 눈 맞고 비 내리면 비 맞던 순이 내리는 운명 허겁지겁 받아먹던 순이 새끼들 쏟아내고 여기저기 핥아주던 순이 이건 모두 살아남은 순이의 얘기고요
어른들이 순이는 자꾸 배가 불러서
못 쓴다 그래요
나의 순이
멀어지는 순이를 맨발로 쫓았어요 동네 떠돌이 수캐에게 돌을 던졌어요 달을 향해 컹컹 짖었어요 세상이 순이를 자꾸 사납게 만들어서 길을 들이겠다고 솥에 기름을 발라 오래오래 굽던 여자들이 있었고 몽둥이 들고 쫓아오던 산마루와 뚜껑을 잘 덮어주던 남자들도 있었어요
솥 옆에 앉아 있으면
자꾸만 허기가 지던 순이
무엇을 주든 맛있게 먹었어요 눈알 굴리면서 먹었어요 얼굴을 버리고 먹었어요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먹었어요 솥에 들어갈 기세로 먹다가 솥에 빠진 순이도 먹었어요 맛있어서
눈물이 났어요
그러니까
더 주세요
그릇을 내밀면 순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살을 그릇 가득 쌓아준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살을 나는 맛있게 먹고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져서 뼈에 붙은 살점까지 남김없이 뜯는다
그 많은 것들을 잡아먹고도
악몽 한번 꾸지 않고
잘 먹어야 사람 구실 한다는 순이의 말을 꼭꼭 씹으며 힘줄처럼 질기고 지겹게 살아남아 남의 살을 썰고 으깨고 다지고 삶고 굽고 무친다
살아남은 것은
도무지 먹을 수가 없으니까
먹는다
무시무시하게
- 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4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