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가을 영희 누나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깜작 놀라 춘천으로 달려갔다 당뇨와 고혈압에 치매까지 걸린 영희 누나는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 탁번이 왔니? 허지만 금세 말을 바꿨다 - 누구신가? 나는 눈물을 훔치고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그 옛날 곱던 얼굴 간데없고 내 까까머리 쓰다듬어주던 어여쁜 손은 쪼글쪼글 마른 수세미와 같았다
다음 해 봄 영희 누나가 정말 위독하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또 춘천으로 달려갔다 간병사가 매일 오고 며느리들이 번갈아 보살피고 있었지만 링거 주사 주렁주렁 달린 영희 누나는 그냥 숨만 붙어 있을 뿐 사람 하나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누나 빨리 데려가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춘천에서 전화는 좀체 오지 않다가 지난 봄 어느 날 춘천에서 급한 소식이 왔다 나는 단숨에 달려갔다 하느님은 낮잠을 주무시는지 영희 누나는 눈도 못 뜬 채 나비숨을 쉬면서 가녀린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미줄보다 더 가는 생명의 끈이 왜 이리 지지한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가을이 왔다 영희 누나가 세상 떠났다는 메시지가 마침내 왔다 부리나케 달려간 성심병원 영안실 천연색 영정 속에서 그 옛날의 영희 누나가 나를 불렀다 - 탁번이 왔니? 시간이 딱 멈춘 텅빈 공간 향내음이 민들레홀씨처럼 날아올랐다 입관할 때 누나의 조그만 발을 쓰다듬으며 열 살 아이처럼 나는 울었다 아아 영희 누나
- 『알요강』(현대시학, 2019)
* 2023년 2월 14일 오탁번 선생님께서 영원히 잠드신 날입니다. 영희 누나처럼 말입니다.
영희 누나의 조그만 발을 쓰다듬으며 열 살 아이처럼 울던 선생께서 훌쩍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2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생전에 술을 자시면 '영희 누나'에 얽힌 이야기를 참 많이 들려주셨더랬는데 이제는 선생께서 남긴 시로만 기억해야 하네요.
사람이며 짐승이며 울음의 곡절을 우스갯소리로 들려주시던 사람이며 짐승이며 죽음의 곡절을 더 우스갯소리로 들려주시던 그 이야기들을 이제는 선생께서 남겨놓은 시로밖에 들을 수 없네요.
첫댓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모든게, 작아 집니다.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