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 박성현
태어난 후 내가 움켜쥔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아무 일 없던 일생이 아무 일 없는 채 저 길 너머로
사라졌다 한밤에 집을 나서고 도시와 마을과 호수를 지나 아직 꽃 피지 않은 상수리나무 언덕에 앉아서
나는, 철로가 놓인 평원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일정한 속도로 분할되는 공간의 미세한 잔상들, 대낮에도 웅크려 있는
투명한 회색을 건져내면서 나는, 내 이름들과 이야기를 모조리 지웠다 포스트잇처럼 쉽게 떨어지고 삭제되는 옛날
그러나 궤도는 이미 무한으로 향했으니 상수리나무 언덕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는 소년이 있다면 그대로 두어야 하리 태어나면서 움켜쥔 그의 모든 것들이 사라질 때까지
ㅡ웹진 《같이 가는 기분》(2023, 가을호) ******************************************************************************************** 한갑자 전에 같은 교실에서 학업을 쌓았던 오랜 지인이 동영상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세상사 부질없다는 유명인사의 말씀이 이어졌는데 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렸던 이도 죽음 이후는 똑같다며 공덕비를 읽으러 저승에서 돌아온 이를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인생 마무리에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게 최종목표인듯 합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진풍경은 사라지려는 영광을 향한 몸부림 같습니다 이지 사라진지 오래 된 이들은 현생 인류의 기억 속에서, 아니 무덤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오래된 포스트잇처럼 살랑바람에도 쉽게 떨어짐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보름 만에 장모님이 아들 손을 잡고 돌아가셨습니다 김장한다고 북적거렸던 집안이 텅 빈 것같고, 장모님이 수없이 전신을 비춰보던 거울도 외롭습니다 어제 오후 텃밭에 나가서 속이 덜찬 배추들까지 모조리 거두었습니다 이웃집에 몇 포기씩 나누어주기도 하고, 비닐 봉지에 담아 창고에 보관했지만 사라진 늦여름과 가으내의 땀방울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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