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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스크랩 신화, 전설 다윗과 솔로몬, 실존인가 허구인가?
Jitter 추천 0 조회 2,467 13.08.08 07:44 댓글 13
게시글 본문내용

물론 이 글을 퍼가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당연하다는 것처럼 막 가져가는 양식없는 사람들 보라고 쓴 것도 아니고 어차피 누가 스크랩해 가는지 다 표시되는데 기본적인 덧글이나 딴데 올릴 때 출처 표기 정도는 남기고 가는 게 어떠신지?

 

아주 옛날에 위대하고 현명한 왕인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그의 왕국의 부와 힘에 필적하는 것은 없다. 그는 Megiddo, Hazor와 Gezer과 같이 전략적 도시에 거대한 요새를 세웠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거대한 금으로 도금한 성전을 지었다. 솔로몬은 파라오의 딸을 포함하여 적어도 700명의 부인과 300명의 첩을 두었으며, Sheba의 여왕과 짧은 만남도 가졌다. 그의 전설적인 지혜로 "지상의 모든 왕들"이 신이 그에게 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솔로몬을 찾았다.

 

그러나 성경이 아닌 역사 속에서, 과연 이 왕은 실존했던 인물인가? 솔직히 말해, 솔로몬 왕의 실존을 확증해주는 증거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존재를 증명해줄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몇년 전 성경 속 솔로몬의 존재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놓고 이스라엘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종교정당이 많고 이들이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교육부 장관이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허구이며 골란 고원은 시리아의 영토"라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는 종교정당들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결국 사임하고 말았다. 1998년에는 이스라엘의 한 유대인 신학자의 논문 발표를 놓고 파장이 일었던 사건이 있었다. 솔로몬의 통치 지역이 성경 내용과 달리 현 이스라엘 영토에도 훨씬 못미치는 한 부족국가 정도의 범위밖에 안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탈출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여호수아는 여리고(제리코)의 성벽을 무너뜨리지 않았고(여리고 성은 성서 내용과는 달리, 여호수아가 침입하기 전에 이미 무너져있는 상태였다고...) 솔로몬 왕국은 작은 부족국가였다고 이스라엘의 한 고고학자가 성서의 내용을 반박, 파문이 일고 있는데,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인 제예브 헤르조그는 하아레츠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 탄생과정을 언급한 성서의 내용은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 상치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제는 많은 고고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증거를 들어 성경에서 이집트탈출을 기록한 시기에 이집트에서 대 탈출은 없었으며 여리고 성도 여호수아의 한차례 공격으로 붕괴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친 전쟁 끝에 함락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논쟁적인 주제인 이스라엘 국가의 기원에 대해서는 기원전 9세기 구릉지대에 정착한 유목민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이라는 두 개의 경쟁국가를 만들면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그는 이보다 한세기 전인 다윗왕과 솔로몬 왕 시대의 도시들을 발굴한 결과 이들 도시는 이곳 저곳에 흩어진 건물들로 구성돼 있었고 왕국의 규모도 소규모인데다 중동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는 지역 왕조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중동지역 대부분에 걸친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다윗왕이 건설했다는 예루살렘은 기껏해야 작은 왕국에 불과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헤르조그의 경쟁자이며 비판자인 히브리대학의 고고학자 암논 벤-토르는 성서에 영광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의 과장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고대 히브리가 비록 거대한 규모는 아닐지라도 다윗, 솔로몬의 왕국을 가졌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고 반박했다.

 

또 국회의원 토미 라피드는 헤르조그가 국가의 이념적, 교육적 기반을 훼손하고 있다고 공격하면서 성경이 많은 신화를 포함하고는 있으나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 모세 코차비는 성서를 뒷받침하는 유물찾기 관행에서 벗어난 고고학자들이 지난 수 십년간 이룩한 성과물들이 아직 일반 국민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국민적 신화를 포기할 준비가 돼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국민들은 정기적으로 고고학적 유물을 돌아보면서 성서의 내용이 들어 맞았다는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있으며 정부는 성서 내용을 입증하는 발굴작업에만 자금 등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편 최근 현대 이스라엘 역사의 신화를 교과서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킨 요시 사리드 교육장관은 헤르조그의 작업내용이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다시 한번 말하면 같은 동시대의 이집트인들은 솔로몬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고고학적으로도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솔로몬이 성경에서와 같이 그렇게 위대한 왕이라면 그들이 몰랐을 리 없고, 또 알았다면 솔로몬이란 왕을 어떤 방법에서든 언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없으며, 또한 오랜 기간 동안의 유적 탐사에도 그와 관련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유적도 비교기록도 없는 솔로몬을 역사적 사실인물이라고 말하긴 힘든 것이다."

 

[ Science.7 Jan 2000 Vol.287 No.5450] [예루살렘 AP=연합]>

 

그렇다.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왕국을 이어받고 엄청난 부와 영화를 누렸다고 전해지는 솔로몬 왕. 그러나 그의 존재는 역사상의 인물인지 전설상의 인물인지를 놓고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변국의 우러름을 받았다는 그의 존재와 영화를 증명해줄 어떤 기록도 유적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솔로몬의 시대를 BC10세기 정도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방대한 기록을 남긴 같은 시대의 이집트인들의 문헌 가운데 솔로몬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현대에서 역사를 정직하게 기록한 민족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집트 인들은 그들의 근처에 이같이 강력한 국가가 있었다는 기록을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당대의 기록이란 것에는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의 기록이 포함된다. 그들은 자신들 뿐 아니라 주변국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팔레스타인은 죽 이집트 아래 있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최초로 등장한 것도 이집트의 기록인 람세스 2세의 아들 메넵프타가 팔레스타인을 폐허로 만들고 이스라엘을 박살냈다고 적고 있는 메넵프타의 승전비를 통해서인데, 그 후 이스라엘은 동시대 주변국의 역사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솔로몬 뿐 아니라 그 아버지인 다윗 왕에 대한 기록 역시 전무하다. 성서에 의하면 다윗은 아람의 상당 부분과 모압, 암몬 등을 포괄하는 거대한 왕국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그렇게 강력한 존재였다면 인접한 이집트나 페르시아에는 당연히 그들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을 리 없다.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강력한 왕국의 지배자에 대한 "동시대의 기록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납득하기가 힘든 것이다. 다윗왕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이 강한 힘을 발휘한다면 주변국들과 당연히 충돌이 있었을 텐데 전쟁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바빌로니아 쪽이야 그렇다 쳐도 이집트에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솔로몬 왕의 유적 발굴은 기독교인 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큰 관심사로 1920년 이후부터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사관 학자들이 성경적인 기록에 매달려 발굴을 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발표와 철회만을 거듭하고 있을 뿐으로 거기다 그나마 발굴된 지역도 기존 고고학계와 비기독사관 학자들과의 충돌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 하고 있다.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독사변 학자들의 로케이터 선정 방식인데 늘상 성경에 매달리며 어긋나네 마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문제는 거의 성경적인 기록에 의거해 발굴한 덕에 기록이 남은 단편증거는 발견이 되었으나 문제는 발굴된 유적마다 '기록만 남아있는 다른 유적'이라는데 있다고 한다 -_-;;; 그들이 파놓은 어떤 유적에도 솔로몬 시대를 증명해줄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돌조각 하나 나오지 않는데 이들이 한 곳을 파다가 '여기가 아닌가벼'하고 다른 데 파보고는 '아까 거기가 맞는가벼 '하는 행위를 보통 '삽질'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계속된 삽질 끝에 1993년 7월 21일 이스라엘 북단 경계 지점에 위치한 텔 단이라는 지역에서 발견된 하나의 석비가 발견된 사건이 전 기독교계를 흥분시켰다.

 

검은 석비의 뒷면에는 히브리어와 모양이 비슷한 고대 아람어 기록이 새겨져 있고 길이 32cm 폭 22cm 크기의 석비 조각에는 고대 아람어로 모두 13줄이 기록돼 있었는데 부숴진 조각이기 때문에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아람의 한 왕이 이스라엘의 왕을 죽이고 이스라엘 지역을 정복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것이 아람 왕 하사엘이 세운 승전비인 텔 단 석비(Tel Dan Stela)이다.

 

 

 
 <1.(...) 잘랐다(...)
2. 나의 아버지는 (그에 대항해 올라갔으며)
3. 나의 아버지는 누웠으며 그의 (조상들)에게 갔다.
4. 내 아버지의 딸에 전에 들어왔다. 하다드(모압 신)는 나를 왕으로 삼았고
5. 하다드는 내 앞에 나섰고 나는 내 왕국의 일곱 (도시)에서 (전쟁하기 위해) 떠났다.
6.그리고 나는 수천 병거와 수천의 말들에 마구를 채운 (칠)십명의 왕들을 죽였다.
7.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을 죽였으며
8. 다윗 가문의 왕 (예호람)의 아들 (아하시)야를 죽였다.
9. 나는 (그들의 도읍을 폐허로) 만들었으며
10. 그들의 땅을 (황폐히 만들었다)
11. 다른 ([...] 예후가)
12.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나는)
13.(...)를 포위했고..> 

 

석비 명문에는 하사엘 부왕의 업적과 하사엘 통치 초기에 일어난 사건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총 70명의 왕을 축였으며 그 가운데는 이스라엘 왕 예호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부서진 이름 재구성)의 이름이 들어있다. (이 사건은 역대 하 22장 얘기와 부합하지만 두 연맹 왕들이 예후에 살해당했다는 열왕기 하 9장 이야기완 상충된다) 돌의 표면을 잘 다져 그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이 석비 원문은 현재 13줄행만 남아있는데 본문은 아람어로 되어 있고 단어는 점으로 띄어쓰기를 했다. 이미 부서졌고 조각들은 여러 군데 흩어져 발견되었으며 일상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발견 장소로 보아 원래 석비는 기원전 8세기 이미 부서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 아람과 전쟁으로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을 세번이나 이긴 예후의 손자 여호아쉬(왕ㅎ 13:24,25)에 의해 부서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이 전승비를 세우는 것은 통례적은 아니었는데 이 석비는 1성전 시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기념문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사람들을 흥분시킨 것은 석비의 아홉번째 줄에 새겨진 ‘베잇트 다비드’라는 구절이었다. 이를 'house of david' 다윗 가문, 다윗 왕조라고 해석하자 구약성서 외의 기록에서 다윗이 처음으로 나타났다며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오랜 숙원이 풀리는 것 같아보였다.

 

이 비문이 발견됨에 따라서 (그 비문의 역사적 사실성은 둘째치고) 솔로몬이 통치하였다고 알려진 기원전 1000년(기원전 1025~ 기원전 931) 전후에 이스라엘 지방에 다윗으로 대표되는 왕조가문이 있었음"은" 증명되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다윗에 대한 기록은 "다윗 가문"으로 기록한 이 석비 하나 뿐, 그 외의 기록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다윗 사후 200여년 후에나 기록된 승전비이다. 단 하나의 간접적 증거인 이것만을 가지고는 다윗 제국을 증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함에도 이 돌기둥 조각 하나는 다윗 왕에 대한 성서의 기록들이 온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 학자들은 다윗 가문이란 단어 하나로 다윗이 실존 인물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지만 텔 단 비문 외에 다른 증거나 기록은 전혀 없으며 그 텔 단 비문도 유대의 왕조를 다윗 가문이라 칭한 것에 불과한 것을 그것 하나만으로 성경의 모든 기술이 사실이라고 비약시키는 꼴인 것이다. 그 비문 하나가 성경의 다윗과 정말 역사 속의 다윗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다윗이 성경에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게 실제 사건인지 실증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왕조가 과연 성경의 진술대로 은이 돌보다 흔했을 정도로 번영했던 왕조였는가?에 대해서도 말이다.

 

흔히 거대한 제국을 연상시키는 다윗과 솔로몬 왕국은 지금까지 전문적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출토되고 확인된 고고학적 흔적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다윗의 왕국 규모가 그 정도였던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기록과 실존 증거가 전무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집트 사가들이 짜고 집단 파업을 했던가. 다윗과 솔로몬 왕국은 신경써서 기록할 가치도 없는 약소국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성서에 기록된 것과 달리 작은 땅에 자기들끼리 옹기종기 붙어살던 별볼일 없는 족속이었다면 당대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의 작가인 휘틀럼은 이 석비가 B.C. 9세기나 8세기에 유다 왕국이 존재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일지라도 유다 왕국의 범위 구성이나 다윗 치하의 왕정이 최고 수준의 ‘제국’을 표상한다는 믿음 중 어느 것도 확증해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경은 야훼를 충심으로 섬긴 다윗과 솔로몬 부자의 시대 유대는 통일 왕국이었고 근동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국가였으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대에 반역으로 인해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으로 유다로 분단되었고 북왕국을 야훼를 섬기지 않는 저주받은 왕조로, 북왕국 왕들을 악한 폭군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를 진실로 믿은 고고학계가 수십년간 예루살렘을 파엎은 결과 내린 결론은 유대에 "통일 왕국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두 나라는 처음부터 서로 다른 두 국가로 일어났으며 북왕국 쪽이 그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남유다보다 훨씬 발달된 문물과 체계, 인구 밀도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솔로몬이 다스렸다는 BC 10세기의, 은이 돌멩이처럼 흔했다는 솔로몬의 대제국은 사실은 초기 농촌 국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당시 4만 5천명 정도로 추산되는 이스라엘의 인구 중 그나마 90% 이상이 북왕국에 거주했고 남부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약 5천여명 정도만이 20여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심지어 솔로몬이 행했다는 대건축물의 잔재조차 하나 발견된 일이 없다. 혹자는 므깃도, 하솔, 게셀의 마굿간과 육방성문 유적이 솔로몬 시대의 유적이라고 추측하지만 게셀과 하솔, 므깃도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북왕국의 영역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대 왕국에서는 솔로몬 시대의 유적이라고 추정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그에 비해 기원전 7세기 이후의 유적은 풍부하게 발굴되고 있는데 이 유적지들은 솔로몬시대의 것이라기보다는 북왕국의 것이라는 견해가 더 합리적이다. 솔로몬 시대와 북왕국의 오므리 왕조 사이에는 반 세기 정도의 시차 밖에 없기 때문에 탄소 연대 측정만으로 결론 내리기는 곤란하지만 건축 양식이 이웃 아람왕조에서도 발견되는 것이고 그것이 솔로몬 시대보다 다소 늦기 때문에 솔로몬 이후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기원전 8세기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 때는 이미 북왕국과 남유다로 분리되어 있었으니 도저히 솔로몬의 유적이 될 수는 없다. 이런 나라가 유프라테스까지 이르는 대제국에 은이 돌멩이처럼 흔하게 굴러다니고 각국 왕들을 능가하는 부와 힘을 가지며 파라오의 딸을 비롯해 천 명이 넘는 후궁을 거느리고 왕들이 조공과 함께 찾아오게 만들었던 솔로몬의 왕국의 실체인 것이다. 

 

결국 다윗과 솔로몬은 그 실존 여부조차도 확인할 수 없고, 있었다 하더라도 유대의 일부를 지배한 족장 수준이었지 성서에 기록된 것과 같은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거나 대공사를 벌일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은 아니었다는 것이 타당한 결론인 것이다. 다윗의 영향력에 대한 이집트나 다른 기록이 전무한 것은 다윗의 영향력이 신경쓰지 않아도 될만큼 작았던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기록은 왜 이렇게 부풀려진 것인가? 이는 성경이 씌어진 시기를 생각해보면 추측할 수 있다. 성경은 BC4세기 경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갔던 바빌론 유수 때 저작과 편집이 완료된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노예로 끌려온 유대민족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의도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화와 영토를 부풀렸던 것이다. 그리고 유수 이전 히스기야와 요시야 등 야훼를 섬긴 왕들의 비호를 업고 종교적 승자가 된 야훼 숭배파의 손에 쓰인 이 내용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가 '야훼를 충심으로 섬겼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타 종교를 섬긴 북왕국 왕들과 므낫세같은 유다 왕들을 '야훼를 버린' 악한 왕이었기에 몰락한 것처럼 왜곡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정작 그 사악한 왕들이 다스린 북 이스라엘과 이교를 권장한 므낫세 왕의 시대의 유다는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영화를 누린 시대였고 야훼를 섬긴 히스기야나 요아스 왕의 시대는 나라를 말아먹고 결국 멸망시키는 원인을 제공했는데 말이다.

 

기존 고고학계도 이 왕국의 실재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기독사관 학자들의 로케이션에 늘 딴지 거는 이유도 위에서 말한 이스라엘 왕국의 규모, 즉 당시 거의 부락 수준이었던 예루살렘에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강대한 왕국이 존재했을 가능성 전무를 들어 기독교 사학자들이 잡아놓은 로케이션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리에 어긋난다는 점을 들어 부인하고 있는 기독교사변 관점의 학자들의 로케이터 선정에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바이블"이니 이들의 문서해석 수준을 짐작케 한다. 그들이 파놓은 어떤 유적에도 솔로몬 시대의 것이라는 확실한 근거인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돌멩이 하나 나오지 않고 이 유적 삽질은 기독사관 학자들의 위신을 완전히 바닥에 추락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삽질은 오늘도 부단히 계속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솔로몬이 요새를 세웠다는 므깃도와 하솔, 게솔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북 왕국의 영역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그 외 남유대 유적지에서는 솔로몬 시대 유적이라고 추정되는 것조차 하나도 없다. 그에 비해 기원전 7세기 이후의 유적은 제법 발굴되고 있는데 이 유적지들이 솔로몬 시대의 것보다는 북왕국 시대의 것이라는 견해가 더 합리적이다. -키스 W. 휘틀럼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고대 이스라엘 역사는 학문적 허구다” - 정병진 (여수, 솔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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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08.08 07:46

    첫댓글 글 자체는 네이버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는 글입니다. 글쓴 분이 반 기독 입장이신듯 하여 문체가 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석판에 대한 사실만 보시면 되겠습니다.

  • 13.08.08 10:54

    "석판에 대한 사실만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비문이 발견됨에 따라서 (그 비문의 역사적 사실성은 둘째치고) 솔로몬이 통치하였다고 알려진 기원전 1000년(기원전 1025~ 기원전 931) 전후에 이스라엘 지방에 다윗으로 대표되는 왕조가문이 있었음"은" 증명되었다.>>

  • 작성자 13.08.08 07:47

    다윗과 솔로몬이 실증되었다고 하시는 분이 있어서 종교논쟁같은거 하고 싶진 않은데 여기 올렸습니다.

  • 13.08.08 10:10

    본문 내용은 다윗과 쉴로모의 왕국 자체가 실재했을 가능성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며, 오히려 그것까지 부정하는 최소주의를 비판하는데 이 글 만진 반기독 빠돌이는 소위 말하는 최대주의를 비판한 것을 들어 침소봉대하고 있네요. 국내 반기독 빠돌이들은 어떻게 된게 최소주의를 비판하는 내용까지 죄다 우왕 역시 성경은 죄다 뻥이었어요 로 알아듣기 바쁜데, 참, 최대주의자 개독교도들하고 당최 뭐가 다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과연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 13.08.08 13:01

    있긴 있는데(...)

    그게 과연 나라라고 불러주기 민망한 쪼그만 부족국가냐, 주변나라들이 조공을 바치고 길가는 강아지도 금덩어리를 물고다니는 황금시대냐... 뭐 그게 문제지요.

    진실은 그 중간쯤 어디라고 보지만요. 사실 히브리인들이 다윗이래 유다왕가에 의해 통합된이후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규모 치곤 의외로 그 일대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 13.08.08 10:09

    물론 다윗과 쉴로모의 왕국이 실제보단 별 것 없었음은 밑에 내가 언급한 시바 여왕 연구한 고고학자의 책에서도 언급되는 바라 별반 신기한 내용은 없지만, 적어도 이를 볼 때 다윗과 솔로몬 자체를 완전 허구 인물로 단정짓는 주장은 폐기에 가깝다는 것 또한 사실이 되겠습니다.

    중간에 반기독 빠돌이들의 흔한 거짓말 프레임, 즉 "기독교계에선 어차피 입증도 안 되는 걸 가지고 헛질하고 있으며 성경 기록 일부를 입증하는 발견은 죄다 기독교계의 억지일 뿐이다" 도 있는데 그닥 문맥하곤 잘 어울리지도 않네요.

  • 13.08.08 15:59

    쯧쯧쯧...또 반기독 빠돌이들의 거짓말. 헤제키야하고 요아스 왕 시대가 나라 말아먹고 결국 멸망시키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앗시리아를 격퇴한 건 다름아닌 헤제키야 왕이고, 헤제키야의 능수능란한 외교 덕택에 이스라엘은 앗시리아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온존할 수 있엇습니다. 그리고 요시야 시대에 유다는 북쪽으로의 상당한 국토 회복까지 달성하죠. 요아스는 또한 동맹 파트너로 이집트보다는 신바빌로니아가 낫겠다는 옳은 판단을 해서, 이집트한테 먼저 전쟁까지 걸었었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터넷 자료 중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얼기설기.....참담합니다. 역시나입니다.

  • 13.08.08 12:52

    뭐 객관적으로 놓고 봣을때 히스기야왕은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조선 모냥으로 잘 쳐줘야 본전이긴한데(....)

    하긴 그 무섭다는 나라분쇄기 아시리아의 공격을 버텨내긴 했으니까 조금 더 플러스가 가능할듯도

  • 13.08.08 13:23

    아뇨. 단순한 본전은 아닙니다. 세나케에르바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끝내 유대 왕국을 완전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고, 조공 받아 먹는 수준에서 그칠 수 밖에는 없었죠. 아예 속주가 되어버린 이집트하고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헤제키야를 굴복시키는 데 실패한 나머지 다른 팔레스타인 지역에도 앗시리아는 직접 지배 방식을 관철할 수가 없었습니다. 메나셰 왕 때도 이스라엘은 상당한 수준의 독립을 누렸습니다.

  • 13.08.08 15:59

    착각했네요. 하지만 요아스는 오히려 처음엔 잘 믿었다가 나중에는 야훼 신앙에서 엇나가 결국 참살되었다고 묘사되기에,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요아스는 아마 요시야가 유력해보입니다.

  • 13.08.08 10:56

    사실 이렇게 몇 가지 FACT를 가지고 멋대로 자기가 모르는 내용까지 지어서 말하는 건, 자기 전공 분야가 아닌 분야까지 함부로 떠들어대는 이덕일, 바트 어만 류의 이상한 학자들 전매특허긴 합니다만 이글 쓴 친구 같은 경운 반기독 빠돌이적 믿음으로 아예 사실까지 곡해하고 있네요.

    아울러 지금 말하는 내용에 대한 출처, 제시합니다. 역사로서의 성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 유대인의 역사, 아이작 아시모프의 구약.

    ps. 무신론자 끝판 대왕인 아이작 아시모프도 그래 "보수 기독교계의 인사"입니까? 아이작 아시모프 선생이 자다가 벌떡 일어나겠네요.

  • 13.08.08 12:37

    최소주의하고 최대주의가 뭔지는 아십니까?

  • 13.08.08 16:54

    다윗 이전의 이스라엘은 아직도 청동기시대에 돌입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만큼 어느정도 수준의 왕국만 세워져도 이스라엘역사상 커다란 발전을 의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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