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읽기 墓誌銘⑺: 어느 시대에나 칭송받는 이야기
휘는 문손(文孫), 자는 광윤(光胤)인 사람의 묘지명이다. 그는 어느 시대에나 칭송받는 효자의 삶을 살았다. “나면서부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70세가 되어도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쇠하지 않았고, 죽었어도 이름이 민멸되지 않았다. 그래서 향중 사람이 그 터를 가리켜 모효동이라 하고, 그 집을 모효재라 하였으니, 이것이 모효공이 된 까닭이다(生而性至孝, 七十而慕不衰, 歿而名不泯, 鄕人指其墟曰慕孝之洞, 名其室曰慕孝之齋, 斯其所以爲慕孝公也).” 그는 “6~7세에 이미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부모를 잘 섬겼고, 새로운 과일이 있으면 자기가 먹지 않고 품에 넣어 와서 부모에게 드렸다(生六七歲, 卽已承溫凊, 遇新果懷之).”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축출당하게 되는데, “금강가에 집을 짓고 축출된 사람 11인과 소요하고 읊조리고 노래하며 그의 초상을 그려 전하였다. 그리고 서로 더불어 탁마하는 바는 ‘양심을 보존하고 천성을 기르며, 의리를 강명한다.’는 여덟 자일 뿐이었다. 기고봉의 <사마재연회시서>는 모두 7백여 자인데 공의 덕을 매우 자세히 기술하였고, 그 좋아하고 사모하는 정을 표한 것이 매우 진실하였다(結廬錦江之上, 與在逐者十一人, 消搖咏歌, 繪其像以傳之. 所相與琢磨者, 唯‘存心養性ㆍ講義明理’八字而已. 奇高峯〈司馬齋宴會詩序〉共七百餘言, 述公悳甚悉, 而所以致悅慕者甚眞. 『여유당전서3』, 문집Ⅱ, 314쪽).” 기고봉은 고봉 기대승을 지칭한다.
그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칭송받는 인생사가 효심 있는 삶이다. 효는 사적인 개인사인데도 왜 그럴까. 효가 관계와 태도의 시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의 최초의 약속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다소 구태의연한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는 밤이다. 효가 양심을 보존하고 천성을 기르며, 의리를 강명하게 한 삶의 길을 밝혔으리라. 묘명은 다음과 같다.
태학생정공의 묘지명(太學生鄭公墓誌銘)
“뉘라서 늙어도 부모 사모하랴, 애훼하며 늙음 말하지 않네(孰艾能慕, 毁不言耈)
어느 것 굽히고 펴라, 엄지손가락 잘랐도다(孰詘舍信, 乃割其拇)
훌륭한 정문이요, 연면한 후손이네(有綽其楔, 有緜其後)
용행과 이절을 대략 써서, 공이 복 받기를 빌도다(略疏與异, 以蘄公受. 『여유당전서3』, 문집Ⅱ, 3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