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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종사촌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34살인 사촌여동생은 세살쯤 되었을 어린 아이일 때 힐끗 보고 삼십 년만에 겨우 다시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6살 연하남인 영국인 톰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톰은 에딘버러 출신으로 스코틀랜드 전통민속의상을 입고 등장했다. 톰의 부모와 세 명의 동생들도 같은 차림새였다. 그들은 경건한 결혼식을 꿈꾸었는지 모르겠으나 요즘 한국의 결혼식이 어디 그런가... 나이트클럽처럼 휘황한 불빛 아래서 최대한 호화롭게, 최대한 멋지게, 마치 이벤트처럼 치러지는 예식을 그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의문이 들기는 한다. 경조사 때 아니면 안부전화조차 나누지 않는 친척들과의 관계도 앞으로 나아질 기미는 없어보였다. 모르겠다, 마음을 내려놓은 내가 먼저 그들에게 전화질을 해야하겠지? 진심으로 안부를 물으려면 기도 좀 많이 한 후에야 가능하겠지만.
일년에 한번 얼굴보기도 힘든 이모 가족들과도 만났다. 너무 돈이 많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는 이모 둘과, 바람을 피워 이혼당하고 아들 딸은 남편에게 뺏기고, 컨테이너 박스에서 산다는 막내이모도 만났다. 우리에게는 엄정화로 통하는 막내이모다. 쉰 여섯의 나이에 스물 두 살 소녀의 옷차림으로 등장한 막내이모는 열 두살 정도의 식견으로, 일곱 살 정도의 언어를 구사했는데 어머어머, 와, 세상에, 로 대화의 첫마디를 푸는 습관은 여전했다. 졸부 이모들은 막내이모가 악착같이 데리고 온 불륜남 때문에 오만 인상을 다 쓰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은 꽤 흥미있었다. 졸부 이모들은 시댁에 남편에게 너무너무 창피스럽다, 였고, 막내이모는 쫓아오고 싶어하기에 그냥 데리고 왔는데 왜 저렇게 차가운 반응이냐는, 해독하기 매우 어려운 표정이었다. 여기에 세 군상이 있었다. 자신의 얼굴에 흠집내는 동생이 싫고 부끄러운 언니들, 자신의 행동이 윤리도덕에 어긋나는지 환갑이 다 되도록 계산하지 못하는 엄정화, 멀쩡하니 가정이 있는데 애인인지 첩인지의 가족 애경사에 얼굴을 들이밀고 싶어하는 뻔뻔 유부남. 아, 다, 싫다...
몇 마디 나누지 않은 와중에도 졸부이모들에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은 계속 <창피하다>였다. 백 얼마짜리 한복을 입고 벗고 하는 과정에 들려온 <창피하다>의 한 가지 내용. "글쎄 엊그제 환갑하려고 누구(이모쪽 친척)네서 한복을 7백(만원 단위는 꼭 빼고 이야기하는 그 습성^^) 넘게 했잖냐. 근데 세상에나... 누구가 글쎄 환갑 때 봉투를 달랑 십만원했다는 거 아니냐. 세상에, 세상에, 고마워서라도 한 50은 해야하는 거 아니냐? 내가 시어머니, 남편, 애들(아들 며느리)보기에 어찌나 창피하던지!" 그리고보니 이모를 만날 때마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창피해서, 창피해서... 다른 이모가 나에게 귀뜸해 준 이야기가 있다. 글쎄 저 언니는 자기 집에 올 때는 꼭 명품 가방 챙기고 명품 옷으로 차려입고 오래. 남들 보기에 창피하다고. 그러니까... 100억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이모는 맨날 창피해 죽겠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 그 이모야말로 그토록 아끼고 이뻐했던 자신의 막내동생을 컨테이너에 계속 살게 만드는 그것을 죽도록 창피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만난 지 십년 되었다는 이모의 남자는 꽤 점잖아보였다. 나는 계산이 복잡해졌다. 이혼당한지 7년 되었다고 하고 이혼사유가 된 남자는 그 남자가 아니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대체 이모는 동시에 몇 사람이나 만났던 거지? 대체 뭐야~~하면서 물었더니 엄정화는 거품을 물었다. 야, 니 이모부가 얼마나 바람을 많이 피웠는지 아냐! 아이고...내가 아는 이모부는 정말 이모에게 끔찍했다. 그처럼 잘해주고 인정해주고 배려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도 참 드물겠다고 그 이모부를 만날 때마다 생각했었는데... 그러니까 쌍방과실인데 덤태기는 엄정화 혼자 뒤집어썼다는 항변. 이 나이에 식당에서 설거지 할 수 없으니 남자가 대주는 생활비로 그냥저냥 산다고, 돈 한 푼 없이 쫓겨났으니 굶을 수도 없고, 가게 하나 열 형편도 안되니 어떡하겠느냐고, 엄정화는 별로 걱정스럽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아, 자신의 죄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한, 저, 백치같은 표정이라니... 피로연에서 소맥 다섯 잔을 거푸 마셔버렸다. 이모들과의 정겨운 기억은 열 몇살까지였다... 그래 그 기억이나 우려내면서 살아야겠다...
엄정화의 남자는 고맙게도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차속에는 인간만 탄 것이 아니었다. 삼개월 되었다는 하얀 풍산개와 역시 삼개월 되었다는 앙징맞은 표정의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 그. 런. 데. 주차 정산을 하는데 개같은 일이 벌어졌다. 12000원은 예식장 티켓으로 해결되었는데 초과요금이 4500원이 나왔다. 아주 점잖아보이던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 시골에서 와서 돈 없어. 무슨 주차비가 그렇게 비싸! 이거나 받던지! 쩔렁 동전 몇 개가 떨어지는 소리. 이러시면 안됩니다. 제 월급에서 다.. 이 자식, 말이 많네! 남자는 쌩~하니 그대로 주차장을 나왔다. 뒷좌석에서 고양이와 함께 앉아있던 나는 눈과 귀를 의심해야했다. 운전석 옆자리에서 풍산개를 끌어안고 있던 엄정화가 발을 동동 굴렀다. 다른데는 돈을 팍팍 쓰면서 오늘따라 왜 이래! 조카도 뒤에 앉았는데 창피하게! (아, 잊고 있었다. 이모들의 공통어 <창피하다>는 말을...^^;;) 저런 거 안내도 괜찮아. 자기네 빌딩 결혼식에 왔는데 절을 하지는 못할망정! 나는 주차요금 내지 않는 사람 난생 처음 보았다. 아마도 전무후무한 일이겠지... 차는 자알 달렸다. 수락산 꼭대기 어디에서 떠왔다는 얼음물도 얻어마시면서, 나는 얼음이 되었다. 너무도 태연한 남자는 가끔씩 뒷자리의 나를 넘겨다보며 안가본데 없는 해외여행 스토리를 줄줄, 스펙 빵빵한 가족들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나는 그저... 차 안에 있는 동물들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이 풍산개와 고양이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결혼 30주년 결혼기념일을 어떻게 해야 뜻깊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남편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이른바 감사의 편지다. 하지만 늘 가지고 있는 생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에게 불합리하다는 것. 행복했다고, 행복하다고 믿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굳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쉰 한 살, 그리고 마흔 여섯의 남동생에게는 이렇게 충고한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연애나 많이 하거라. 가족이 있든지 없든지 어차피 다 혼자이고, 죽을 때는 다 쓸쓸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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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뜻없이 지낸 결혼 기념일이 훨씬 많은 세월입니다..별미를 꿈꾸어본 날도 있었지만서도...결혼기념일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