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법조인 제 39기 홍강오 사법연수생
사법시험 1차와 2차 모두 합격해야 갈 수 있는 곳, 사법연수원은 오랜 수험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곳이다. 실제로 신림동에서 일산 장항동 사법연수원까지 지하철로만 1시간 30분가량은 걸린다.
이곳에서 만난 제 39기 사법연수생 홍강오(37)씨 역시 이곳으로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7전 8기, 아무리 실패를 거듭해도 결코 포기하거나 굴하지 않고 계속 분투한 결과 그는 어렸을 때부터 키워온 법조인을 향한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 위에 똑바로 설 수 있었다.
그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스미어 평온한 미소를 짓는 얼굴에서는 시간이 다소 오래 걸렸지만 결국 힘든 사법시험을 합격한 비결을 엿볼 수 있었다.
바쁘지만 겉으로 조급해 하지 않는 여유와 유머감각까지 갖춘 그를 앞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법조인, 친구 같은 법조인으로 태어나길 기대해 본다.
국민위에 군림하는 사법부가 아닌 국민을 위한 사법부,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을 도와주려는 사법부
어려서부터 그의 부모님은 판사의 꿈을 일깨우셨다. 그가 중학생 때 잠시 과학微?되고 싶어 과학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인문계고등학교로 진학했고 자연스레 법대에 들어갔다.
요즘 그는 앞으로 어떤 법조인이 돼야할까 생각해보지만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처음 사법시험을 시작할 때 앞으로 되고자 하는 법조인상에 대해서 친구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많은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수험생활이 10여년 되다보니 지금은 그 때했던 얘기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털어놨지만 “얼마 전 법정방청에서 국민위에 군림하는 사법부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사법부,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을 도와주려는 사법부를 실현하는 재판장님과 단독판사님을 보고 만약 판사가 된다면 저런 판사가 되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어서 그는 “연수원을 무사히 수료한 후 판사 임용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로펌에 들어가 스포츠 에이전시 쪽의 전문변호사가 될 것”이라며 “박지성, 이영표 선수 같은 프리미어리그선수나 세계적인 스포츠스타의 대리인이 돼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 영어, 중국어 등 외국어를 공부를 하고 있지만 연수원 일정에 쫓겨 제대로 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그의 말에 솔직함이 엿보였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없는 시간 틈틈이 공부하기란...
힘들게 합격한 만큼 처음 사법연수원에 들어와서 마냥 행복했던 것도 잠시,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수업 쫓아가기가 힘에 겹다고 털어놨다.
식사 후 몰려드는 잠은 누구나 공감 하듯이 점심 먹은 후 오후 첫 수업은 그에게 잠과의 전쟁이다. 그는 수업을 마치고 약속이 없으면 저녁을 먹고 공부를 하다가 약 40분가량 운동을 한 후 맑아진 정신으로 좀 더 공부를 하다가 1시 30분쯤 잠이 든다. 하지만 수업 후에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회식, 과제 등으로 넉넉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남들보다 잠을 덜 자면서 공부를 하거나 틈틈이 공부하는 것만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비법이라면 비법일 것이다.
사법연수원 1년차 1학기 최대의 행사인 춘계체육대회 때까지는 조별, 반별 모임을 많이 가져 조원들, 반원들과 친하게는 되지만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과제를 해야 한다.
더구나 그는 제39기 자치회 사무국 지원 팀장으로서 3월 달에는 태안봉사활동 준비와 1년차 1학기 사법연수원 최대의 행사인 춘계체육대회를 준비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바쁜 생활을 했다.
그는 “3월 중순경 700여명의 연수생들과 함께 태안봉사활동을 가기위해 차량섭외부터 각종 필요한 물건과 도시락들을 준비하고 나르고 했던 것이 힘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팀장 잘못 만나 고생한 우리 지원팀 총무들에게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겸손해 했다.
한편 사법연수원은 이론위주로 공부하던 수험생활과 달리 이론을 안다는 전제하에 실제로 적용하는 것을 배운다.
요즘 그는 기록 작성이라고 해서 민사재판실무나 민사변호사실무, 형사재판실무, 형사변호사실무, 검찰실무과목의 경우 실제 사건을 연수목적에 맞게 약간 각색한 기록을 보고서 판결문이나 소장, 공소장, 불기소장 등을 작성하고 있다. 그는 춘계체육대회가 4월 11일로 끝이 난 이후에야 공부에 정신을 돌릴 수가 있었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도 적응해 웬만한 판결문은 쓸 수 있게 됐다.
연수원은 때론 쉴 수 없는 일정에 지친 연수생들을 위해 법조계뿐만 아니라 손석희, 한비야 등 사회에 여러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들을 초빙해 특강을 연다.
그는 “연수원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외부 인사들의 특강은 피로회복제와 같다”며 “사법연수원에 처음 들어올 때의 넘치던 의욕은 조금 꺾인 듯 하지만 여전히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 2일에 법률영어 시험에서 시험 준비로 고생했지만 생각보다는 쉬웠다는 평을 밝혔다. 그리고 오는 16일부터 본격적인 시험에 들어가는데, 특히 그는 민사재판실무, 형사재판실무, 검찰실무, 변호사실무 형사, 변호사실무 민사 평가가 빅5에 해당하는 만큼 학점에 신경 쓸 것이라고 다짐했다.
목 놓아 펑펑 울었던 합격의 그 날
그는 1992년 처음 법대에 들어와서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자유스러운 대학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이런저런 고민으로 1년을 허송세월하고 2학년 때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사법시험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못하고 막연히 민법(곽윤직 저)과 헌법(권영성 저), 형법(이재상 저) 기본서를 읽었다”고 밝혔다.
그는 1995년 과 후배였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그해 가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올해 3월에 결혼을 했는데 “아내를 만나고 나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잘 되지는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에게 수험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너무 슬픈 일이다.
그는 “1999년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2005년에는 장인어른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다”며 “아마 두 분이 살아계셨다면 저의 합격과 결혼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셨을 것인데 두 분을 생각할 때마다 왜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빨리 합격하지 못했는가하는 자책을 하곤 하지만 두 분은 하늘나라에서 엄청 기뻐하셨을 거라 믿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수험생활동안 주로 아침 8시께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이른바 고시촌으로 불리는 신림동에는 학원 강의를 들거나 책을 사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만 갔다. 오전에 한 2시간쯤 공부하다가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2시간쯤 공부하다가 오후 4시 30분께 주로 학교 고시반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이렇게 일찍 저녁을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올라와 약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공부를 했다. 물론 짬짬이 동료들과 잡담을 하고 가끔씩 농구나 족구, 축구도 했다.
10여년의 수험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족과 지금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꾸준히 축구를 한 덕도 있다.
그는 축구를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법대 축구팀인 태풍에서 꾸준히 축구를 해왔다.
그리고 여전히 축구를 즐기는 그는 연수원의 축구팀인 ‘FC39’ 스트라이커로 맹활약 중이다.
그는 “쉴 때는 최대한 마음 편히 쉬려고 했고 공부할 때 최대한 집중해서 했다”며 “수험생들은 어떤 운동이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골라서 꾸준히 하는 것이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다소 수험생활을 즐겼던(?)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히 이해하려다 보니 기본서를 이해하는데 몇 년, 시험테크닉을 깨치는데 몇 년이 걸렸다”며 “공부를 하다보면 욕심이 생겨 모르는 것에 대해 악착같이 알고 넘어가려는 집요함이 때론 필요하지만 시험을 위해서는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아야 된다”고 충고했다.
그는 기본서 위주에 참고서를 참고하는 식으로 공부를 했다. 이런 공부 방법은 2차 시험에 불합격하더라도 다시 다음해에 1차 합격을 남들보다는 쉽게 할 수 있었다.
여러 번 시험에 떨어진 후 포기하는 듯 그는 모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포기할 수 없었기에 퇴근 후 2~3시간 정도 공부해 1차 시험에 90점이 넘는 점수로 합격했다.
다시 희망을 얻은 그는 다시 2차에 도전하지만 2번 모두 떨어지고 “사시신이 날 버리나”라는 장난 반 근심 반, 무거운 마음으로 친구와 신림동의 모 점집을 방문했는데 다행히 점쟁이는 “내년부터 풀릴 것”이라고 좋은 말을 건넸던 것. 이후 그는 뉴토익 커트라인을 한 번에 넘고 1, 2차 모두 한 번에 합격했다.
그 점쟁이가 용한 것보다는 오랜 세월 축적된 그의 실력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드디어 발하게 된 것일 것이다.
한편 합격자 발표가 있던 오후 2시 그의 방. 웬일로 컴퓨터는 고장이 났었고 초조히 전화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얼마 후 그는 전화벨 소리에 고동치는 심장을 안고 당시 여자 친구였던 아내의 ‘합격’이라는 말에 긴 세월을 수험생활로 보냈던 탓일까 목을 놓아 펑펑 울었다.
연수원으로 오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은 그는 수험생들에게 “합격하고자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때는 온다”며 “조급하게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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